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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23:28:10

니카라과 혁명

산디니스타 혁명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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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혁명
Revolución Nicaragüense
Nicaraguan Revolution
1961년 7월 9일 ~ 1990년 4월 25일[1]
장소
니카라과 전역
원인
소모사 정권의 족벌 독재
1972년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위기
교전 국가 및 세력

[[니카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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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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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모사 정권(1961~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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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트라 반군(1979~1990)


[[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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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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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1979)
지원 국가 및 세력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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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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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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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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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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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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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1987)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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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1990)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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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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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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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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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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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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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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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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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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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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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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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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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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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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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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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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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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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1973)
(1978~1979)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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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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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1990)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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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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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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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리케 베르무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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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돌포 칼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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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티데스 산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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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폰소 로벨로 (1982~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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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가르 차모로 (1979~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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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에덴 파스토라 (1982~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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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페르난도 차모로(1981~1987)

카를로스 폰세카 아마도르
움베르토 오르테가
호아킨 콰드라
토마스 보르헤
에덴 파스토라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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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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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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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우고 스파다포라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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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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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헌병대[2]
11,000명(최대)
10,000명(1979)
5,000명(1979)
피해 규모
1978~1979년 1만명 피살[3]
1981~1989년 1만~4만 3천명 피살[4]
결과
1979년 FSLN의 군사적 승리
콘트라 전쟁 발발
1984년 선거에서 FSLN 승리
1990년 선거에서 야권 승리
파일:external/img.hani.co.kr/02101900012008062653_1.jpg
1979년, 화염병을 소모사 정부군에게 던지는 산디니스타 반군 병사. 화염병이 펩시인 것이 여러 모로 시선을 끈다.

1. 개요2. 배경3. 역사
3.1. 반(反) 소모사 혁명(1961~1979)
3.1.1. 1979년 최후 공세와 소모사 정권 붕괴
3.2. 콘트라 전쟁(1979~1990)
3.2.1. 종전(1987~1990)
4. 참고 자료5. 같이 보기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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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카라과에서 일어난 사회주의(산디노주의) 혁명. 영어권에서는 대부분 니카라과 혁명(Nicaraguan Revolution)이라고 칭하는 편이지만 스페인어권에서는 산디니스타 혁명(Revolución Sandinista)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서는 니카라과 혁명이라는 명칭을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2. 배경

파일:attachment/somoza_garcia.jpg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1936년 니카라과 헌병대(Guardia Nacional de Nicaragua) 사령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가 후안 바우티스타 사카사 대통령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카를로스 알베르토 브레네스를 괴뢰 대통령으로 앉혔다. 그해 12월 8일 대선에서 소모사는 99.8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42년에 걸친 소모사 가문 족벌독재는 이렇게 시작부터 부정으로 얼룩졌다.[5] 소모사는 친미적, 보수적인 독재자로, 니카라과의 유일한 무력행사 기관인 헌병대를 친위대처럼 부려 나라를 가혹하게 통치했다. 그러나 이렇게 친미적이고 독재정치로 내정이 안정적이었으므로 미국으로부터 지지와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니카라과의 동서해안을 잇는 길이 257km의 라마 도로 건설을 원조했다. 니카라과 경제도 거액의 투자를 받아 꾸준히 성장했고 산업도 농업 중심에서 점차적으로 제조업 및 서비스업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1964년 니카라과의 농업 종사자는 58%에 달했지만 1975년 50%로 줄었다. 제조업 종사자는 1960년 10% 미만에서 1965년 11.6%로 증가했으며, 3차산업은 1960년대 중반 26%에서 1973년 32.4%로 증가했다. 경제구조가 변화하면서 중산층도 1960년 11%에서 1975년 15%로 증가했다.

그러나 경제발전에 공로가 있다고 해도[6] 소모사 가문의 세습독재에 따른 족벌통치와 부정부패, 경제적 양극화 문제는 국민들은 물론 다른 정치세력의 불만을 샀다. 1956년 아버지 아나스타시오가 암살당한 후 집권한 형 루이스는 억압을 어느정도 완화했지만, 1967년 집권한 동생 아나스타시오는 오히려 강화했다. 동생 아나스타시오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관료들을 갈아치우고 그 자리를 무능한 정치적 동맹자들에 나눠주었으며, 반정부 세력을 형보다 더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경제발전도 급증하는 인구와 이농현상, 그에 따른 노동력의 과잉공급 문제를 해결할 순 없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니카라과의 실업률은 점진적으로 상승하여 1977년 13%에 달했다. 실업률 증가는 당시 노동자가 부양해야 했던 가족 수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문제로 다가왔다. 수도 마나과 근교는 일자리를 찾아 이주한 농민들로 거대한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육체노동자의 실질임금도 1969~1970년을 기점으로 감소했다. 설상가상으로 1972년 대지진으로 아직 발걸음 수준이던 제조업도 거진 초기화된데다 정부가 재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동생 아나스타시오 임기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연이어 발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인간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키는데 능한 인물이었으므로 딱히 동정할만한 작자는 아니다. 소모사 족벌정치에 불만을 가진 세력은 한둘이 아니었고 이들이 연합하여 투쟁에 나서자 소모사 정권은 위협받게 된다.

3. 역사

3.1. 반(反) 소모사 혁명(1961~1979)

파일:1362px-Nicaragua_Topography.png 파일:ni-01.jpg
니카라과의 지형도 니카라과의 도시와 주요 지명
반(反) 소모사 좌익세력은 1960년대 초부터 무장투쟁을 벌였다. 1961년 카를로스 폰세카, 실비오 마요르가, 토마스 보르헤 3인이 모여 민족해방전선(FLN)을 창설했고 2년 후 존경받는 민족영웅 산디노의 이름을 따 '산디니스타'를 조직명에 붙여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으로 개칭했다. FSLN은 쿠바코스타리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농촌과 해방구, 그리고 도시에 비밀리에 조직을 확대하면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원래 FSLN의 전략은 쿠바 혁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포코 이론이었으나 헌병대에 연패하고 다수의 병력을 손실하는 등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67년 니카라과 중부 마타갈파 인근 판카산 지역에서 또다시 패배를 겪은 FSLN은 이후 포코 이론을 포기하고 장기 인민투쟁(Guerra Popular Prolongada; GPP)을 새로운 전략으로 채택했다.[7] GPP는 비밀리에 군대를 모으는 전략으로 도시 조직이 대학생을 끌어들이고 은행 강도를 통해 돈을 모으는 동안, FSLN의 간부진은 북중부 산악지대에 은거하여 농촌 배후지를 지원기지로 만들어 장래의 게릴라전에 대비한다는 전략이었다.

반군을 비롯한 반정부 세력의 활동은 1972년 12월 23일 수도 마나과를 직격한 대지진을 계기로 탄력을 받았다. 당시 대지진으로 1~2만 명이 사망하고 30만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마나과의 인프라도 지진으로 거의 무너져내렸다. 비록 니카라과가 미증유의 재난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소모사 정권의 대처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수준이었다. 소모사는 지진 발발 후 도착한 외국의 원조금을 이재민들에게 배분하지 않고 빼돌렸다. 헌병은 난민들에게 돌아가야할 식량 대부분을 빼돌리고, 임시 숙소로 사용하라고 기부된 텐트를 판매했다. 심지어 헌병대는 재난 현장에서 약탈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 결과 반 소모사적 분위기가 이념과 계급을 초월하여 증가했고 이는 훗날 FSLN이 정부를 무너뜨리는 자양분이 된다.[8] 빈민과 좌익은 물론이고 경제 엘리트마저 소모사의 파렴치한 행동에 학을 떼고 FSLN에게 자금을 댔다. 결국 무능한 재해 대처가 계층을 막론한 전국민적인 저항을 일으켰고 이것이 혁명으로 이어지니, 소모사 정권은 사실상 지진으로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74년 12월 27일 FSLN은 마나과 교외의 로스로블레스의 전직 관료의 집에 침입하여 소모사의 친척 다수를 포함한 관료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FSLN은 몸값으로 미화 100만 달러를 받았고, 공식 성명문을 라디오에 낭독하고 신문 라프렌사(La Prensa)에 싣는 성과를 얻었다. 이듬해에는 추가로 FSLN 포로 14명을 감옥에서 구출하여 쿠바로 보냈다.[9] FSLN의 행동에 1975년 소모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든 반정부 세력에게 구금과 고문 등으로 위협하는 등 탄압을 극도로 강화했다. 헌병대는 FSLN 협력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FSLN의 게릴라들도 다수 전사했고 그 중에는 1976년 11월 8일 동부 셀라야 주에서 헌병군에 처형된 카를로스 폰세카도 있었다.[10] 미국은 니카라과 정부에 물자를 지원하고 미주 사관학교(School of the Americas)에서 니카라과 장교들을 교육하였다.

1975년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은 FSLN이 고수하던 기존의 GPP 전략에 심각한 회의를 일으켰다. 이러한 노선차로 인해 1977년에 이르러 FSLN은 사실상 3개 파벌로 분열되었다. 하나는 GPP를 고수하며 주로 북부에서 농민들과 연대하는 파벌(마오주의), 다른 하나는 주로 공장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파벌(마르크스-레닌주의), 마지막 하나는 모든 반정부 세력들과 연대하는 파벌(사민주의, 좌익민족주의), 소위 "제3의 길(Terceritas)" 파벌이었다. 이 파벌이 바로 다니엘 오르테가와 그의 동생 움베르토 오르테가가 이끈 세력으로, 이들은 헌병에 대한 직접공격을 벌이는 한편 반 소모사 정치세력이라면 우익과 연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르테가 세력의 전략은 1978년 1월 10월 발생한 라프렌사 편집장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암살사건을 계기로 결실을 맺었다. 유서깊은 크리오요 가문 차모로 출신인 그는 1974년 자유민주연합(UDEL)을 창설하여 반 소모사 우익 세력을 규합했었다. 소모사의 아들과 헌병이 암살을 모의한 증거가 포착되자 여러 도시들에서 소모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소모사 정권은 시위대를 탄압하는 한편 1981년까지 대통령 임기를 채울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소모사에 실망한 미국 정부는 모든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인도주의적 경제원조만 유지시켰다.

오르테가 세력은 2월 초 도시들을 공격하고 8월에는 마나과의 국회의사당에서 2천명에 달하는 인질을 붙잡는 초유의 인질극을 벌였다.[11] 소모사는 몸값 50만 달러를 지불하고 정치범 59명을 석방하며 전국민적 봉기를 선동하는 FSLN의 선언문을 방송하고 파나마로 이어지는 안전통로를 보장하는 등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며칠 뒤인 9월 마테갈파, 마나과, 마사야, 레온, 치난데가, 에스텔리에서 반 소모사 봉기가 발생했다. 오르테가 세력은 마테갈파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의 헌병군 초소를 공격했고, 경무장한 다수의 민간인들이 봉기에 참여하여 마테갈파와 마나과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의 헌병대 요새를 포위했다. 9월 봉기는 수천명의 사망자를 내고 처참히 진압되었지만 이 봉기를 계기로 FSLN의 각 파벌은 다시 하나로 뭉쳤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9년 초 소모사 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지만, 그도 니카라과에 좌익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고싶진 않았다. 카터 대통령은 소모사를 대신할 적임자로 1978년 5월 창설된 중도성향의 범야권전선(FAO)을 골랐다. FAO는 소모사와 협상을 통해 성과를 얻고자 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그러자 무장봉기를 통한 정권타도를 추구하는 FSLN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FSLN은 인민연합운동(MPU)과 공동으로 민족저항전선(FPN)을 결성했고 젊은이 수만명을 FSLN에 받아들여 반 소모사 투쟁을 벌였다.

3.1.1. 1979년 최후 공세와 소모사 정권 붕괴

1979년 1월, FAO와 소모사 정권 간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소모사는 국민투표를 거부하고 1981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겠다고 버텼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유혈혁명의 길이었다. 3월 7일, FSLN의 3개 파벌은 공식적으로 재규합했다. 이날 각 파벌을 대표하는 대표자 3명씩, 총 9명이 쿠바 아바나에서 FSLN의 단일지휘부인 합동전국지도부(Dirección Nacional Conjunta, DNC)를 구성했다. 1979년 4월 중순, 총 5개 게릴라 전선이 DNC의 밑에 있었다. FSLN의 전력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1978년 중순 500명도 안되었던 전투원은 1979년 5월 5,000명에 달했다. 헌병대는 13,000명에 달해 숫적으로 우위였지만 FSLN은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때 FSLN은 니카라과 북부를 사실상 통제했고, 프랑스와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FSLN은 코스타리카에도 기지를 두었고 쿠바, 베네수엘라, 파나마, 코스타리카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다. 5월 4일 FSLN은 마나과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을 공격하여 다수의 헌병대 부대에 퇴각을 강요했다. 마나과에서는 거의 1달에 걸친 전투 끝에 헌병이 승리했지만 소모사 정권은 이미 풍전등화였다. 미국은 소모사에 대한 지원을 끊고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으며 그러면서도 FSLN의 대체 세력을 부단히 찾아나서고 있었다.

5월 28일, FSLN은 "최후 공세"를 개시했다. FSLN은 레온, 에스텔리, 마타갈파, 푸에르토카베사스, 리바스, 마나과 등 니카라과 전역에서 공격했다. 헌병대는 남부에서 FSLN 남부전선 상대로 반격을 감행했지만 북부에서는 6월 5일 레온을 내주어 패색이 짙어졌다. 4일 FSLN은 총파업을 선동하고 마나과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11일 소모사는 마나과의 반정부 지역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간인 밀집지역에 대한 폭격으로 소모사 정권은 국제사회의 규탄을 받았다. 헌병대의 폭격 후 남부에서는 FSLN 남부전선이 다시 공세를 벌여 헌병대 1,000명의 퇴로를 차단했다. 북부에서는 레온을 수복하려는 시도가 격퇴되었고 18일 헌병대의 마지막 진지가 점령되었다. 7월 초, FSLN은 26개 도시를 통제하고 헌병의 반격을 격퇴했다. 이 시점에서 소모사 정권은 국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마나과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10일 미국은 FSLN에 지난 6월 16일 수립된 니카라과 임시정부[12]에 보다 중도적인 인사를 포함시키고, 정부와 휴전하며 선거를 실시하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12일 FSLN은 니카라과가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혼합경제 국가로 남을 것이라고 약속했으며 15일에는 중도인사로 구성된 내각을 선포했다. 소모사는 마침내 미국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FSLN에 권좌를 넘겨주었다. 17일 소모사는 미국 마이애미로 도망쳤고 헌병대는 해산되었다. FSLN은 19일 마나과에 입성했다. 최후 공세에서 헌병대원 7,500명이 포로로 잡혔고 4,500명은 해외로 도망쳤다. 이로써 43년간 3대 세습을 거쳐 해오던 소모사 철권통치는 막을 내렸다.
파일:GettyImages-514677824.jpg
1979년 마나과의 FSLN 병사와 환영인파

3.2. 콘트라 전쟁(1979~1990)

파일:다니엘 오르테가 1981년.webp
1981년 당시 다니엘 오르테가
신정부는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토지개혁을 벌여 대략 7만 명의 농부들과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또한 신정부는 소모사 정권 시절 부족하고 불평등했던 의료복지를 늘리고자 의료시설을 설립했고, 무상의료 제도를 도입했다. 소모사 정권의 피해자들에겐 그들이 당한 고문과 학살을 확인하고 명예를 회복하며 상처를 치유하고자 했다. 1979년 7월 20일 니카라과 임시정부는 포고 3호를 발하여 소모사 일가, 헌병대의 고위 지휘관 및 정부 고위 관료들의 소유 재산을 몰수하였고, 동년 8월 8일에 개정 보완되어 공포된 포고 38호에 의하여 소모사 정권에 협력한 자의 기업이나 사유재산의 소유권 이전 또는 점유 등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1979년 11월 23일에는 1,500개의 플랜테이션에 속한 약 80만 헥타르의 농경지를 무상몰수했다.# 혁명정부는 단순히 이전 정권의 과오를 수정할 뿐만 아니라 일국의 정부로서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 중 하나는 FSLN의 게릴라부대를 전문적인 재래식 군대로 개편하는 것이었다. FSLN의 병력이 급격히 늘어나는 과정에서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 대거 들어와 대민범죄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1979년 8월 22일 니카라과의 정규군으로 산디니스타 인민군(Ejército Popular Sandinista; EPS)이 창설되었다. 당초 혁명정부의 목표는 EPS를 모병제에 기초하여 2만 5천명 규모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콘트라 반군과 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1983년 징병제로 전환하였다. 1990년 EPS의 현역 병력은 8만 명에 달했다.

1980년대 니카라과는 혁명정부와 반공주의 반군 콘트라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시달렸다. 콘트라는 구 소모사 정권에 봉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반 소모사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도 다수 참여했는데 이는 이념과 계층을 가리지 않았던 반 소모사 운동의 본질과 점점 선명해지는 FSLN의 좌익노선을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제 혁명정부는 구 정권의 패잔병뿐만 아니라 옛 동지들도 적으로 마주해야 했다. 1979년 당시 니카라과 임시정부는 명목상 3명의 좌익(다니엘 오르테가, 모이세스 하산, 세르히오 라미레스)과 2명의 우익(비올레타 차모로, 알폰소 로벨로)이 참여한 연립정권이었다. 문제는 연립정권이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단 3표면 충분했기에 우익 2명이 반대해도 법안은 그대로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좌익 3명은 전부 FSLN 출신이었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말이 연립정부지 실제로는 FSLN의 일당정부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1980년 4월 19일 비올레타 차모로가 혁명정부에서 사임했고 사흘 후 알폰소 로벨로도 사임했다. 5월 18일 아르투로 크루스와 라파엘 코르도바 히바스가 혁명정부에 참여했으나 크루스는 다시 주미대사로 떠나버렸다.

이렇게 우익인사들이 혁명정부를 떠나면서 자연스레 혁명정부는 더욱 좌경화되었고 곧 소련과 쿠바의 지원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13] 심지어 혁명정부는 1980~1981년 엘살바도르 내전에서 FMLN을 지원하였고[14] 이것은 라틴아메리카의 공산권 블록 확대를 경계하던 미국의 뚜껑을 열어버리기에 충분했다. 1981년 1월 20일 취임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전임 지미 카터에 비해 FSLN을 훨씬 가혹하게 대했다. 레이건은 엘살바도르를 사례로 들어 FSLN이 쿠바와 협조하며 라틴아메리카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을 지원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11월 17일 레이건은 반(反) 산디니스타 게릴라세력에 대한 비밀 지원을 승인했다. CIA가 니카라과와 북쪽에 접경한 온두라스에서 콘트라에 자금, 무장, 훈련을 지원하였다. 1981년 한해 레이건이 콘트라 지원용으로 CIA에 할당한 금액은 1,980만 달러에 달했다. 외교적으로도 미국은 온두라스코스타리카에 원조를 당근 삼아 콘트라 반군에 피난처를 제공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콘트라 반군은 크게 3개 부류로 나뉘는데 첫째는 구 소모사 정권에 봉사한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다. 이미 1979년 소모사 정권 붕괴 당시에 헌병대 패잔병 상당수가 투항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도주하거나 음지에 숨어 후일을 기약했다. 1981년 8월 11일 이들 헌병대 패잔병과 우익 망명객이 과테말라시티에서 니카라과 민주군(FDN)을 결성했다. 둘째는 구 소모사 정권에 반대하지만 FSLN의 노선에도 반대하는 단체다. 이들 중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한 사람들은 니카라과 민주연합(UDN)을 창설했고, 혁명정부에 환멸을 느낀 일부 FSLN 전사들은 북부 산악지대에 농민 민병대 MILPAS를 창설했다. 셋째는 혁명에 직접 연관된 적은 없지만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동해안의 모스키토 저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미스키토(Miskito) 원주민은 혁명따윈 관심이 없었고 자치권이나 요구했지만, 혁명정부는 이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미주인권위원회(IACHR, Inter-American Commission on Human Rights)에 따르면 1981년 12월 미스키토인 35~40명이 혁명정부군에 처형되었다. 헤리티지 재단[15]에 따르면 미스키토인 1만 5천명이 강제이주되었고 원주지는 파괴되었다. 그래서 미스키토 원주민도 적지 않게 콘트라에 참여했다. 즉 콘트라는 산디니스타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다양한 세력에 미국의 지원이 합쳐져서 생성된 반군 집단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혁명정부에 반대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냥 남남으로 따로 놀았다. 각 콘트라 조직은 1987년에 가서야 우산조직인 니카라과 레지스탕스(Resistencia Nicaragüense)로 연합했는데 물론 이것도 명목상으로 통합했을뿐 실제로는 남남이었다. 이외에도 혁명정부에 비판적이지만 무장행동에는 나서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예: 비올레타 차모로) 이들은 무장세력이 아니므로 콘트라에 포함하지 않는다.

3.2.1. 종전(1987~1990)

파일:Contra_commandas_1987.jpg
1987년 니카라과 남동부 콘트라 반군
이란-콘트라 사건 이후로도 레이건 행정부는 콘트라에 대한 지원을 지속했지만 군사적 성과는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1987년 8월 중앙아메리카의 만연한 분쟁을 종식하기 위한 중미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콘트라 반군은 협상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몇 차례 공세를 벌였으나 양측에 막대한 피해만 입혔을 뿐 힘의 균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듬해 1988년 3월 콘트라 반군과 니카라과 정부의 협상이 개시되었다. 예정된 협상 개시일로부터 며칠 전인 3월 10일 니카라과 정부는 대공세를 펼쳐 반군을 밀어냈지만 미국의 압력을 받아 다시 병력을 물렸다. 1988년 3월 23일 콘트라 반군과 니카라과 정부는 휴전협정에 조인했다. 정부의 군축, 반군의 무장해제, 선거 약속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듬해 1989년 2월 양측은 최종적인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레이건의 뒤를 이은 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전임 레이건의 콘트라 지원을 이어나갔다. 1990년 2월 국제선거감시단 관리 하의 열린 대선과 총선에서 비올레타 차모로가 이끄는 전국야권연합(Unión Nacional Oppositora, UNO)이 승리하여 좌익에서 자유주의 중도우익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몇달 후 콘트라 반군도 무장해제하여 비로소 내전이 종료되었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니카라과인 3만 명이 내전으로 사망했다. 학계에서는 1990년 선거로 산디니스타 혁명정부가 막을 내렸다고 본다. 2000년 총선에서 다니엘 오르테가가 이루는 FSLN이 승리했으나 반자본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성격은 전보다 훨씬 약화되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를 니카라과 혁명의 연장선상으로 보지는 않지만, 좌익에서 니카라과 혁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주장한다.

4. 참고 자료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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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SLN 봉기: 1961년 7월 9일~1979년 7월 17일. 콘트라 전쟁: 1979년 7월 17일~1990년 4월 25일[2] Guardia Nacional de Nicaragua. 중앙아메리카의 과르디아 나시오날은 스페인의 과르디아 시빌을 모방한 것이므로 헌병대에 해당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헌병대는 농촌의 경찰 업무를 담당하고 도시의 경찰과 정규군 조직은 따로 있지만, 니카라과에서 헌병대는 유일한 경찰이자 정규군이었다. 그러니까 이때 니카라과는 헌병대가 아예 정규군을 대체해버린 희한한 상태였다. 그래서 헌병대를 장악한다는 것은 니카라과의 유일한 무력행사기관을 장악한다는 뜻이었고 실제로 소모사 가문이 헌병대를 친위대로 삼아 국가를 좌우했다. 따라서 오늘날 니카라과군의 전신은 헌병대가 아니라 FSLN의 산디니스타 인민군이다.[3] 헌병군 1,000명, FSLN 2,000명 포함[4] 콘트라 반군 25,250명, FSLN 정부군 7,150명 포함[5] 1937년부터 1979년까지 42년 중 아나스타시오가 16년(1937~1947, 1950~1956), 장남 루이스가 7년(1956~1963), 차남 아나스타시오가 10년(1967~1972, 1974~1979), 이렇게 3부자가 33년을 대통령으로 지냈다. 그 중간에 다른 대통령들도 있었지만 브레네스처럼 소모사 가문의 괴뢰였을 뿐이다.[6] 소모사 가문이 비판을 많이 받긴 하지만 경제를 발전시킨 것 자체는 사실이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1960년 2억 2,385만 달러였던 명목 GDP는 내전으로 막장이 되기 전 1977년 22억 4,000만 달러로 10배 증가했고 같은 기간 실질 GDP도 2.85배 증가했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워낙 미쳐서 그렇지 중앙아메리카에서는 가장 높았다. 1인당 GDP를 따져봐도 니카라과는 빈부의 극단적인 양극화가 문제였지 극빈국은 아니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1977년 1인당 GDP가 737달러였는데 당시 중상위소득국가(UMIC)의 1인당 GDP가 697달러였으며, 1인당 GDP 세계 평균이 1738.7달러였다. 다만 1972년 대지진과 1973년 경제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성장률을 많이 깎아먹었다.[7] 판카산 전투 자체는 FSLN을 전국에 알리는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대가로 다수의 FSLN 대원들이 전사했다.[8] 이때 대지진으로 파괴된 마나과는 거의 20년이 지난 1990년대에 가서야 시작한다. 1970~80년대 니카라과는 혁명과 내전으로 복구를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9] 이때 구출된 포로 중 다니엘 오르테가가 있었다.[10] 폰세카의 죽음은 9년 전 볼리비아에서 죽은 혁명선배 체 게바라와 유사한 점이 있는데, 둘 다 정부군에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는 점, 신원확인을 위해 손이 잘렸다는 점, "일설에 의하면" 자기는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설득을 시도하다가 살해되었다는 점이다.[11] 이때 오르테가 세력 특공대를 이끈 에덴 파스토라는 아이러니하게도 콘트라 반군의 지휘관이 된다.[12] 임시정부 명칭은 국가재건정권(Junta de Gobierno de Reconstrucción Nacional; JGRN)이다. 당시 JGRN은 오르테가를 포함한 좌익인사 3명과 훗날 대통령이 되는 비올레타 차모로를 포함한 우익인사 2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익인사들은 아무런 실권도 없는 일종의 구색인사에 불과했고 그들은 1980년에 사임한다. 1984년 대선에서 승리한 다니엘 오르테가가 1985년 1월 10일 취임하여 JGRN은 해산되었다.[13] 콘트라 전쟁에서 쿠바 정부는 2천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FSLN을 원조했다.[14] FSLN의 물자 지원뿐만 아니라 FSLN의 1979년 "최후 공세" 성공이 FMLN의 1981년 "최후 공세"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15] 미국의 보수 성향 싱크탱크. 콘트라와 콘트라에 대한 미 정부의 지원을 지지하는 기관이므로 어느정도는 걸러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