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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30 21:37:51

사천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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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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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 : 멸실   ‡ : 멸실 위기   ¶ : 왜성으로 구전 / 개축 기록 불확실   § : 일본 측 자료에만 수록 / 상세 확인 불가}}}
파일:정부상징.svg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4호
사천왜성
[ruby(泗, ruby=サ)][ruby(川, ruby=チョン)][ruby(倭城, ruby=わじょう)] | Sacheon Japanese Fortress
파일:search.pstatic21345321.jpg
<colbgcolor=#01454F> 국가유산
명칭
사천선진리성(泗川船津里城)
이칭 석만자심안도대채(石曼子沈安道大寨)
중로석만자대채(中路石曼子大寨)
삼천진왜증성(三千津倭甑城)
사천적영(泗川賊營)
사천제채(泗川諸寨)
신채(新寨)[추정]
형태 제곽식 평지성[동측]
연곽식 평지성[서측]
건설 1597년 (선조 30년)
모리 요시나리 등 2인
폐성 1598년 (선조 31년)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일원
지정연도 1998년 11월 13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소재지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770
1. 개요2. 역사3. 위치 및 구조
3.1. 통양창성3.2. 데지로(出城)
3.2.1. 망진산왜채3.2.2. 영춘왜채3.2.3. 곤양왜채
4. 과거 모습 및 현황5. 교통6. 여담7. 외부 링크8.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4호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정유재란 당시 경상우도 사천의 통양포(通陽浦)에 일본군이 쌓고 주둔한 제곽식 평지성.

2. 역사

[ 조선왕조실록 보기 · 닫기 ]
> 일후에 마땅히 수군으로 해로를 차단하고 육군 한 부대로는 사천 · 곤양 사이의 적을 곧바로 격파하고 한 부대로는 언양 · 양산의 왜적을 시살하고 한 부대로는 도산의 왜적을 공격한다면 일이 제대로 될 것인데 군량의 수송이 아주 긴급하다.
그러나 이들은 실제로 적장 심안도(沈安道)가 4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혼자 사천에 주둔하고 있어 형세가 매우 고립되었으므로 아군의 엄습(掩襲)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병(遊兵)들을 내보내 세력을 과장해 보이려고 하는 것이니 큰 걱정은 없을 듯합니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7월 30일
동 제독(董提督) 접반사인 이충원(李忠元)이 치계하였다. "사천으로 진격하니 적의 무리 4백여 명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신채(新寨)로 들어갔습니다.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가 벤 적의 머리는 80여 급이었고 노 유격(盧遊擊)은 탄환을 맞아 죽었습니다. 적의 시체 중에 비단옷을 입은 자가 있었는데, 항복한 왜인이 알아보고 '이자는 사천 진영의 부장(副將)이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10월 4일
군문도감(軍門都監)이 아뢰기를, "동 제독의 차관이 와서 말하기를 '동 제독이 이미 진주를 공격하고 여세를 몰아 진격하자 사천과 동양(東陽)[1]의 왜적들이 싸우지도 않고 흩어져 달아났다. 마침내 신채를 진격하여 대포로 성문을 부수고 대군이 쳐들어 가려고 할 무렵 모 유격(茅遊擊)의 진영에서 실수로 화약에 불이 일어나 진중이 소란하자 왜적이 바라보고 문을 열고서 좌우로 나와 공격하고 사방에서 복병이 덮치니 대군이 허둥지둥 무너져 사망한 숫자가 거의 7천 ~ 8천 명이나 되었고 제독은 진주로 후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10월 8일
동 제독의 게첩(揭帖)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국왕의 위세를 빌어 망진산과 사천의 여러 진채(陣寨)를 격파하고 이어 심안도를 공격하려고 했는데, 뜻밖에 각 진채의 남은 왜적들이 모두 합치고 수군과 육군의 왜적 구원병이 모두 이르렀습니다. 비록 사방에서 모였지만 우리 군대가 힘써 공격하여 성과를 거두어 결말을 지으려 했었는데, 뜻하지 않게 하늘이 사람의 계획에 따라주지 않아 우리 군대의 화약에 불이 나서 불을 피하느라 분주하던 순간에 왜적들이 즉시 연기 속으로 갑자기 돌격해와 한동안 혼전하여 피차간에 모두 손상이 있었습니다. 잠시 후퇴하여 군대를 휴식시키고 다시 공격을 도모하려 합니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10월 16일
이달 14일 항왜 첨지(僉知) 김귀순(金歸順)이 팽 유격(彭遊擊)의 군사 1명을 거느리고 요시라(要時羅)가 심안도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사천의 왜적 진영으로 갔습니다. 근일 중국인들이 끊임없이 왕래하고 있는데, 10일 머리를 깎지 않은 중국인 1명이 심안도가 모 유격에게 보내는 편지 1통을 가지고 나왔고 7일 모 유격의 주 통사(周通事)라고 칭하는 자와 중국인이 화친에 관한 서찰을 가지고 왜적의 진영으로 갔으며, 14일 모 유격이 또 사 상공(史相公) 맹 통사(孟通事) 및 중국인 2명과 우리 나라 통사 1명을 보내어 왜적의 진영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10일 왜적의 진영에서 도망해온 삭발한 중국인에게 상세히 왜적의 실정을 물어보았더니 '생포된 중국 군사가 3백 ~ 4백 명인데 모 유격의 군사는 삭발시키지 않고 그밖에는 모두 삭발시켜 일본으로 보내려고 한다. 중국군의 총통(銃筒) · 궁자(弓子) · 통개(筒介) · 말 · 노새 · 나귀 · 의복 등 물건을 서로 매매하고 중국 환도(環刀)와 창(槍)을 부수어 탄환을 만든다. 접전할 때에 참획(斬獲)한 중국군은 코를 잘라서 동문 밖에 쌓아 두었는데, 숫자가 4천 ~ 5천에 밑돌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근일 왜인들이 모두 중국군의 복장을 입고 중국 말을 타고 맘대로 다니며 염탐하여 중국인인지 왜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우니 매우 망측합니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10월 23일
동 제독의 접반사 이충원(李忠元)이 치계하였다. "동양창(東洋倉)의 왜적이 금월 17일부터 철수하여 18일 오시에 70여 척이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모 유격의 선봉장과 병사(兵使) 정기룡(鄭起龍)이 그 성에 들어가 머물러 있는 왜적 2급만을 베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1598년 11월 26일

임진왜란 때 잠시 화친 기류가 흘러 차츰 철수하던 일본군은, 1597년 협상이 결렬되자 다시 조선에 진출에 주둔하면서 새로이 전선을 구축했다. 이것이 정유재란으로,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하여 견내량이 뚫려버리자 최전선을 대폭 전진시켜 남해안의 제해권을 가져가기 직전에 이른다. 이때 쵸소카베 모토치카모리 요시나리가 사천에 있던 고려의 옛 통양창성을 개축해 왜성으로 만들어 주둔한 것이 사천왜성이다. 이후 시마즈 요시히로시마즈 타다츠네가 주둔하면서 이 성은 시마즈의 진영으로 알려졌으며,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한 울산왜성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한 순천왜성과 더불어 삼굴(三窟)이라고 불렸다.

성의 규모에 비해 기록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 편이나, 이곳에서 사천성 전투가 발발했기 때문에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사천왜성은 사로병진책의 4로 중 중로(中路)의 핵심 요새로 꼽힐 정도로 요지에 있었으며, 동로(東路)의 울산성 전투, 서로(西路)의 왜교성 전투와 대응한다. 조명연합군이 여러 전진기지들을 파괴하면서 밀어붙였지만 결국 왜란이 끝날 때까지 함락시키지 못한 성이다. 왜란 이후에는 삼천포진이 잠시 옮겨와 있다가 통영으로 다시 이전하면서 버려지게 되었다.

3. 위치 및 구조

파일:그림5324.png
사천왜성 위치관계도
파일:임진왜란 당시 사천왜성.jpg
사천왜성 상상조감도
파일:그림61324567.png
당시 추정 해안선과 통양창성의 대략적인 외곽선
파일:스크린샷 2025-01-25 151849.png
사천왜성 항공사진 (1972)
사천왜성이 위치한 통양포(通陽浦)는 순천에서 고성까지 이어지는 남해안선에서 가장 깊숙하게 내륙으로 들어와 있는 포구로, 예로부터 수운(水運)이 발달한 큰 포구였다. 통양창성을 활용해 쌓은 사천왜성은 복잡한 해안선 안에 쑥 들어와 있는 포구와 그 뒤에 솟은 해발 약 30m의 구릉지를 이용한 천연 요새이다. 육지에서 진입할 수 있는 방향은 동측 하나밖에 없는 데에 반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해상 진출이 용이할 뿐더러, 고성왜성, 남해왜성순천왜성과의 연계도 꾀할 수 있는 입지에 있었다.

북서측 모퉁이에 가로 5m, 세로 6m 크기의 부곽이 딸린 동서 약 10m, 남북 약 15m, 잔존 높이 4m 규모의 천수 기단을 세우고, 동서 약 18m, 남북 약 20m, 잔존 높이 2 ∼ 3m의 제1곽을 두었다. 60 ∼ 120cm×50 ∼ 70㎝ 정도의 비교적 큰 자연석을 이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한 뒤 그 사이의 틈새는 10 ∼ 30㎝의 깬돌과 점토를 혼합하여 메웠다. 석축의 잔존 높이는 남쪽이 250㎝, 북쪽은 430㎝이며, 성벽의 경사는 53도다.

벽면에 굴절부를 여러 곳 두어 사각이 없게 했고, 출입구는 남동측에 냈는데 서측을 바라보면서 T자 형태의 통로를 앞에 둔 마스가타 고구치(桝形虎口)로 그 형태가 복잡하다. 출입구 바로 앞에는 동서 약 18m, 남북 약 40m, 잔존 높이 1.5 ∼ 2m 규모의 넓은 방형 축대가 있어 망루 기단(櫓台)으로 추정하고 그 동남측으로 제2곽이 이어진다. 석축으로 된 부분은 이곳 외부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 중심부를 기준으로 동측과 남측을 크게 빙 둘러 돌아가는 기존의 통양창성 토축을 그대로 왜성의 외곽부 토루로 삼았다. 현재 북측과 동측 체성이 남아있으며, 남측과 서측은 선진마을이 들어서는 바람에 훼손이 심할 뿐더러 아직 제대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측으로 도로가 빠져나가는 개구부에 출입구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그 바깥으로는 고려시대에 팠을 것으로 추정하는 해자를 그대로 사용했다. 남측은 바닷물에 바로 접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바다 쪽에 면한 남북 방향으로 이어지는 골짜기들을 지형의 기복을 이용하여 성내에 편입시켜 최외곽의 방어 공간으로 삼았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을 통해 볼 때 성곽의 범위는 동서 최대 550m · 남북 최대 600m 이상이다.

대체로 토성이 지나가는 북쪽 및 서쪽은 고려시대 통양창 토성의 기단석을 기저부로 하여 판축부를 적심(積心)으로 사용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남쪽과 동쪽은 생토면 기저부로 하여 성벽을 쌓은 뒤 작은 깬돌로 적심을 채웠다. 석축이 꺾인 모서리의 경우 제1곽의 남측과 천수 기단 북서측, 북동측 모서리에서는 산가지 쌓기(算木積み) 기법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고 천수 기단 주위의 석축을 보면 짧은 모서리 돌을 사용하고 있는데, 길고 짧은 석재의 배열 순서가 명료하지 않다. 이러한 종류의 모서리 석축은 기장왜성이나 서생포왜성, 히젠 나고야성, 구마모토 성 등 근세 초두의 일본식 성곽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적 기술이다. 성벽의 기단부는 석재끼리 붙여 쌓지 않고 작은 돌들을 가득 채워 크게 벌어진 간격을 메우면서 성벽을 쌓았다. 이것은 전쟁 중 단기간에 축성하여야 하는 제약된 조건 때문에 부족할 수밖에 없는 조달 석재를 절약하기 위하여 석재를 분산하여 배치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주곽부 부분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원으로 정비되었고 시마즈 요시히로의 후손들이 천수 기단 위에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나, 현재는 철거하고 충령비(忠靈碑)가 대신 서 있다. '선진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깔끔하게 정비 및 복원되어 있으며 외곽부의 통양창성 토축 역시 정비되어 있는 상태다.

3.1. 통양창성

{{{#!wiki style="margin:-12px -0px"<tablebordercolor=#4b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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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성
漕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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貢稅串倉城
여수석창성
麗水石倉城
통양창성
通陽倉城
}}}}}}}}}
읍성  산성  차단성・관문  왜성 }}}
<colbgcolor=#4b0082> 통양창성
通陽倉城 | Tongyangchang Fortress
파일:26332_36966_288.jpg
입지 평지성
기능 조창성
건설 미상[통일신라 말?]
폐성 1403년 (태종 3년)
1598년 (선조 31년)
면적 미상
소재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파일:44819_60453_5338.jpg
통양창성 정비계획안에 포함된 추정 구조도[2]
[clearfix]
통양창은 고려시대 전국 곳곳에 설치한 13곳의 조창(漕倉)[3] 중 하나로, 사주(泗州)의 중심 조창이었다. 성종 연간(981 ~ 997)에는 통양창이 위치했던 포구를 통조포(通潮浦)라고 불렀으며, 그 이전에는 말조포(末潮浦)라고 불렀다. 통양창의 수세(收稅) 구역은 경상도 서남부 지역이었는데, 고려시대 행정 단위로 보면 진주, 합주(陜州), 고성, 남해 등과 그 속군현(屬郡縣)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말선초에는 왜구가 창궐하면서 조운을 통한 세곡미 운송이 큰 타격을 입었는데, 특히 사천 지역은 왜구가 왕래하는 길목 한가운데에 위치하기 때문에 조창 운영과 조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조선 건국을 전후한 14세기 말 왜구의 침략이 약해지면서 경상도 남해안 지역에서의 조운도 재개되었고, 조선 초에도 통양창은 잠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제포, 거제도, 고성 등 남해안 지방에서 일본인으로 인한 마찰이 지속되자, 통양창은 경상도 동남부의 마산창(馬山倉), 불암창(佛巖倉) 등과 함께 1403년 폐지되었으며 이후 경상도 남부 지역의 세곡미는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와 한강을 거쳐 경창(京倉)까지 운반하도록 시스템이 바뀌었다. 1760년에 다시 남해안에 조창을 설치했지만, 그 위치가 사천만 안쪽으로 유사한 진주 가산창(駕山倉)에 두었기 때문에 통양창이 다시 쓰이는 일은 없었다. 이외에도 임진왜란 직후 근방에 있던 삼천포진(三千浦鎭) 군영을 잠시 이곳으로 옮겼다가 17세기에 다시 통영으로 이전했다.

이 통양창을 보호하기 위해 빙 둘러싼 성곽이 통양창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예전 조세를 거두던 곳인 통양창성(通洋倉城)이 사천현 읍치 남쪽 17리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통양포가 남쪽 20리 지점에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통양창성을 현재 사천왜성의 외곽부를 이루는 토성으로, 통양포는 그 남쪽의 현 통양리 지역으로 비정한다.

토성의 규모는 둘레가 920m 정도이며 동측 및 남동측 2개소에 성문 터가 확인되었다. 동문지는 육지와 통행이 가능한 곳으로 적대(敵臺)와 해자를 두어 방어에 중점을 두었으며, 남문지는 남쪽 측벽을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성 외부에서 문지가 직접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였다.
성 내부에서는 기와, 토기, 청자, 백자 등의 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대부분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들이다.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 9세기 전반에서 10세기 전반, 즉 신라 말 ~ 고려 초에 처음 쌓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해자가 나왔다는 점을 더해 이 성이 조창성으로 쓰이기 전 나말여초에 웅거하던 지역 호족의 거점 성곽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

성벽의 너비보다 넓게 땅을 판 뒤, 사질점토와 암갈색 사질점토를 10 ~ 20㎝ 정도 다져 기초부분을 조성한 뒤 판축했다. 처음 축조한 성벽이 무너진 후 외벽 쪽만 'ㄴ' 자형으로 다시 보강하여 그 위에 개축한 흔적도 남아있다. 외벽에는 부분적으로 하단의 기단 석렬을 보강하기 위해 점토를 단면 삼각형태로 보강했다. 내벽과 외벽에서 380cm ~ 400cm 간격으로 기둥 구멍이 확인되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성벽은 처음 쌓은 판축토루에 순차적으로 한 구간씩 성벽을 덧대면서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판축할 때 사용한 내 · 외벽의 나무 기둥은 원형이지만, 성벽 중앙의 보조목은 사각형의 목재를 사용했다.

북측 성벽에서 발견된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좌우가 전혀 다른 판축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확인되어, 한 구간의 축조 구분점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점에 따라서 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동일한 토층 양상을 보이는 곳도 있어서 2개의 기둥 간격인 800㎝ 전후가 하나의 구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성벽 중앙에서 발견한 보조목은 성벽 안과 밖의 판자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기둥을 이탈하지 않도록 잡아주기 위한 것으로, 판축할 때 기둥이 기존의 안과 밖의 벽뿐만 아니라 성벽 중앙에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조창성으로 희귀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조창성은 대개 군사적인 목적으로 쓰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주변으로 농경지가 조성되거나 읍락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허물어 버리는 경우가 많아 남아있는 것이 몇 없다. 거기다 왜성과 결합해 방어시설로 쓰인 특이한 구조와 역사가 그 가치를 더한다. 성곽의 바로 바깥에는 사천성 전투에서 전사한 전몰자들을 기리는 조명군총(朝明軍塚)이 자리하고 있어 함께 묶어 보기 좋다.

3.2. 데지로(出城)

사천왜성은 견내량 바깥에 위치한 3곳의 본진 왜성 중 한가운데에 있어, 주변과 연계하기 위해 사방으로 전진기지를 많이 두었다. 현재까지 그 존재가 확인된 것만 해도 3곳인데, 안타깝게도 이곳들은 모두 왜란 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정확한 형태는 물론이고 위치조차도 파악할 수 없는 상태다. 그나마 망진산왜채 1곳만 '망진산'이라는 지명이 아직까지 남아있어 그 위치를 비정할 수 있지만, 나머지 2곳은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가 지난 2019년 『조선일본도설』의 「사로왜채총도」가 공개된 후에야 존재가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어찌저찌 살아남은 죽도왜성의 전진기지인 농소리왜성이나 마사리왜성과는 경우가 다른 셈이다. 다만 「사로왜채총도」에는 분명 사천왜성과 일체화가 된 통양창성이 동양창(東陽倉)이라는 이름으로 사천왜성과 떨어진 곳에 따로 그려져 있는 등 현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이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

3.2.1. 망진산왜채

<colbgcolor=#01454F><colcolor=#fff> 망진산왜채
[ruby(望, ruby=マン)][ruby(晉, ruby=ジン)][ruby(山, ruby=サン)][ruby(倭寨, ruby=わさい)] | Mangjin Mountain Japanese Fortress
파일:b0d208fc39de2c16c5923c2fe85cfdf1.jpg.small.jpg
이칭 망진왜성(望晉倭城)
망진채(望晉寨)
형태 미상
면적 미상
건설 1597년
미상
폐성 미상, 최소 1598년 10월 사천성 전투 이후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주약동 산 1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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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왜채총도」에 묘사된 망진산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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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그림72324354.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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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진산과 진주성의 관계 망진산왜채 추정지 항공사진 (1970)
사천왜성의 북측 전진기지이다. 현재까지 소재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전진기지이며, 조명연합군이 진격해오는 방면으로 나가 있는 곳이라 사천성 전투 당시 가장 먼저 격파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름의 '망진산'은 望晉山 혹은 望津山으로 쓰므로, '진주가 바라다보이는 산'이라는 뜻으로 추정한다. 해발 178.8m로 남강의 남안에 솟아 있는 산이며, 북측 산줄기 너머로 진주성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정상부에서 북측으로 200m 지점에 망진산봉화대가 있어서 이곳이 임진왜란 전후에도 관방시설로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고려시대에 쌓은 테뫼식 산성을 일본군이 개축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재 정상부에는 KBS 송신소가 들어서는 바람에 지형이 삭평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현재까지 몇 단의 계단형 지형만이 보고된 상태이며, 왜성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유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록과 회화에 분명 망진산왜채가 여러 차례 등장하므로 이 산 어딘가에 왜성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은 분명하다. 일부 지점에서 일본식 축대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

사천성 전투 당시 테라야마 히사카네(寺山久兼)가 주둔했다고 한다.

3.2.2. 영춘왜채

<colbgcolor=#01454F><colcolor=#fff> 영춘왜채
[ruby(永, ruby=ヨン)][ruby(春, ruby=チュン)][ruby(倭寨, ruby=わさい)] | Yeongchun Japanese Fortress
파일:스크린샷 2025-01-25 193249.png
이칭 영춘왜성(永春倭城)
영춘채(永春寨)
형태 미상
면적 미상
건설 미상, 최소 1597년 이후
미상
폐성 미상, 최소 1598년 10월 22일 사천성 전투 이후
위치 미상
파일:스크린샷 2025-01-25 192442.png
「사로왜채총도」에 묘사된 영춘왜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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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크린샷 2025-01-25 192749.png
진주와 고성 사이에 있는 탕근산성의 항공사진 (1970)
영춘왜채는 알려진 정보가 극히 적다. 사천성 전투 당시 곤양왜채와 함께 차례로 격파당했다는 기록이 전부고, 그나마 「사로왜채총도」에 위치가 묘사되어 있으나 애매할 뿐더러 현재까지 유적이 보고된 바가 없다. 일단 고성왜성진주성 사이 어딘가에 있었던, 사천왜성의 북동측을 연계하는 전진기지로 추정할 수 있으며 주변에 연화지(蓮花池)가 2곳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성군 개천면에 있는 연화산(蓮華山), 영오면에 있는 연당리(蓮塘里)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이 일대에서 보고된 성곽 유적은 영오면 영산리 산 56-1에 위치하는 탕근산성이 유일한데, 해발 170m의 탕근산 정상부를 두르는 둘레 800m의 테뫼식 산성이다. 이곳은 삼국시대에 영선현(永善縣)의 치소로 추정하는 곳 중 하나이다. 永春과 永善의 자형이 유사하고, 경상도 지방에는 영춘(永春)이라는 지명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관계가 있을 수 있어 보이지만 현재까지 탕근산성의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된 적이 없어 정확한 것을 알 수가 없다. 일단 현재 탕근산성의 평면구조상 서북측 능선을 향해 부자연스럽게 돌출된 축대가 확인되어 일반적인 산성과는 구조가 상이하다.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영춘왜채에는 사천성 전투 당시 카와카미 히사토모(川上久智)가 주둔했다고 하며, 1598년 음력 21일 함락당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3.2.3. 곤양왜채

<colbgcolor=#01454F><colcolor=#fff> 곤양왜채
[ruby(昆, ruby=コン)][ruby(陽, ruby=ヤン)][ruby(倭寨, ruby=わさい)] | Gonyang Japanese Fortress
파일:스크린샷 2025-01-25 205753.png
이칭 곤양왜성(昆陽倭城)
곤양채(昆陽寨)
형태 미상
면적 미상
건설 미상, 최소 1597년 이후
미상
폐성 미상, 최소 1598년 10월 23일 사천성 전투 이후
위치 미상

파일:스크린샷 2025-01-25 202114.png
「사로왜채총도」에 묘사된 곤양왜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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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성 전투 당시 일본군이 주둔한 '곤양'의 위치는 '사천'으로부터 서남측으로 40리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기준이 되는 이 '사천'이 사천읍성을 일컫는지, 사천왜성을 일컫는지가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측에서는 조선의 곤양읍성이 위치한 곳에 곤양왜성을 그려넣어 사천성 전투를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읍성을 개조했다는 근거가 없을 뿐더러, 곤양은 사천으로부터 너비가 넓은 사천만 건너편에 있으므로 내륙 지역인 곤양읍성 일대에 왜성을 배치하면 연계하기가 어렵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으므로 사천왜성과 마주보는 해안선 어딘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곤양왜채의 정확한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실마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영춘왜채가 함락당한 다음날인 1598년 10월 23일 '불탔다(燒)'는 기록이 있으며, 혼고 미츠히사(北郷三久)와 이주인 타다자네(伊集院忠真)가 주둔했다고 한다.

4. 과거 모습 및 현황

파일:pan031407.jpg
사천 선진리 왜성 원경[6]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유리건판 사진 동일)
파일:pan031408.jpg
사천 선진리 왜성 축대[7]
파일:pan003730.jpg
사천 선진리 왜성 천수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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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선진리 왜성 부근 전경[9]
파일:pan003732.jpg
사천 선진리 왜성 부근 전경[10]
파일:pan031411.jpg
사천 선진리 왜성 성벽 일부[11]
파일:pan031405.jpg
사천 선진리 왜성 부근 전경[12]
파일:pan031412.jpg
사천 선진리 왜성 성벽 일부
파일:22962048495_a44fc0ba11_o.jpg
제1곽의 남측 석축
파일:22339300734_8bb6253c2b_o.jpg
제1곽 서남측 출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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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곽 남측 석축을 동측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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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제1곽의 동남측 T자형 마스가타 고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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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목조 문 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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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도베이(土塀)의 총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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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곽의 남측 석축
파일:22339296524_fa131836dc_o.jpg
제2곽의 동측 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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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곽 망루 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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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 기단과 충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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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 기단으로 올라가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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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 기단에서 동측으로 제1곽의 북측 석축을 내려다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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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 기단에서 남측으로 제1곽의 서측 석축을 내려다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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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곽 서측 석축에서 천수 기단을 올려다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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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된 통양창성 토축의 전경

5. 교통

사천왜성은 일제강점기부터 일찍이 공원으로 정비되었기 때문에 접근이 용이하다. 바로 앞에 선진공원입구 버스 정류장이 있어 하차하여 도보로 3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주곽부가 나온다. 자차를 이용해 접근한다고 해도 바로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어 탐방이 쉽다. 공원 전역에 벚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 봄만 되면 벚꽃놀이를 하러 상춘객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한데 이때 사람들이 많이 몰리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

6. 여담

7. 외부 링크

8.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4호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진항의 북방에 있는 이 성은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동쪽만 육지에 닿아 있는 반도 지형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선진이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선진은 싸움터에서 앞장서는 군대를 뜻한다. 『읍지』와 『대동지지』의 기록을 보면 이 선진에는 전함이 1척, 병선이 1척, 하후선이 2척 있었다고 하여, 삼천진이라 불렸다. 선조 30년(1597)에 왜의 석만자가 이곳에서 지내면서 울산의 도산, 순천의 왜교와 더불어 3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지은 성으로, 규모나 구조면에서 볼 때 활동의 주요 근거지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순신 장군에 의해 격파 당하기도 하였다. 현재 흙으로 쌓은 성벽이 1㎞ 가량 남아 있으며, 돌로 만든 누(樓)는 무너졌으나 대체로 성의 규모대로 터가 남아 있다.

9. 관련 문서


[1] 통양포를 뜻한다.[2] 옅은 초록색으로 둘러싸인 부분은 왜성 부분이다.[3] 세금으로 쓰일 세곡미(稅穀米)를 수운으로 운반하기 전 보관해 놓는 창고를 일컫는 단어다.[4] 아래쪽에 고성왜성이 보인다.[5] 아래쪽에 남해왜성과 사천왜성이 보이고, 좌측에 섬진강구(蟾津江口)라는 문구가 있다.[6] 사천왜성 제1곽의 서남측에 형성된 선진마을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마을 뒤쪽의 솟은 구릉지에 왜성의 토축이 몇 단 보인다.[7] 천수 기단을 촬영한 모습.[8] 천수 기단을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모습.[9] 제1곽에서 통양창성 외곽부를 내다본 모습.[10] 제1곽에서 동측으로, 통양창성 북측 체성 바깥의 구릉지를 내다본 모습.[11] 통양창성의 토루 일부를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12] 천수 기단에서 동측의 제1곽과 통양창성까지 내다본 모습.[13] 왜성이 사적에서 일괄 해제된 것이 당시 기준 불과 10년 전인 1997년 김영삼 정부 때였다.[14] 천수 기단 주위의 일부가 그나마 원래의 석축을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