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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19:05:59

미즈노 슌페이

미즈노 순페이에서 넘어옴
1. 개요2. 일생3. 활동 내역4. 극우 잡지에 쓴 글이 들통나다5. 이한 이후
5.1. XTM의 취재 요구 거절5.2. 이한 이후 한국 관련 활동5.3. 과연 지난 혐한 활동을 반성하고 있는가?
6. 과연 억울한 오해의 피해자인가?
6.1. 왜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나6.2. 왜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기고했는가6.3. 기고한 매체의 문제6.4. 글의 어조나 논지 면에서
7. 평가
7.1. 친한, 지한, 혐한
8. 근황9. 여담10. 관련 문서


파일:미즈노 슌페이 (水野俊平) 북해상과대학 교수.jpg[1]
水野 俊平 (Mizuno Shunpei)
1968년 1월 5일 ~ ([age(1968-01-05)]세)

1. 개요


일본의 한국학자. 전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2]다. 前 전남대학교 일문학과 교수. 現 홋카이 상과대학(北海商科大学) 한국학 교수. 노히라 슌스이(野平 俊水)[3]라는 필명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는 친근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 매우 유명해졌으나, 2005년 이후에는 후술할 사건에 의해 자국으로 귀향했다.

2. 일생

1968년, 일본 홋카이도 이부리 지청(현 이부리 종합진흥국) 무로란시 출생이다. 이후 나라현에 있는 덴리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였으며, 1990년 대한민국전남대학교유학을 왔다. 2001년 박사 학위 취득 후 전남대학교 일문학과 교수로 채용되었고, 더불어서 이 무렵에 한국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만 셋을 두었다.

박사 과정 재학 당시부터 신문 기고와 방송 출연을 하기 시작했고, 교수로 지내던 시절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나오기 시작했으며, 유창한 사투리 구사와 위트 있는 이야기로 인기를 끌어 TV 광고도 찍는 등 전성기를 보냈다. 특히 KBS1 <좋은나라 운동본부>와 <아침마당>에 패널 등으로 나왔다.

하지만 2005년부터 한국에서 후술할 장모씨에 의해 극우파 의혹이 점점 번져갔고, 이후 별다른 해명도 하지 않은 채 2006년, 한국을 떠나 홋카이 상과대학의 한국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후술할 여러 논란들과는 별개로 그에 대한 옹호론도 있지만, 혐한 극우매체에 투고했다는 여러 증거들과 필명 사용, 미즈노 본인의 해명 불응으로 인해 세월이 많이 흐르고 한국에서 이 양반이 잊혀진 지금도 도통 논란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참고로 네이버 등지에서는 미즈노 '순'페이로도 불리는데, 이는 완성형에 '슌'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 주간현대에 기고한 글

미즈노 슌페이 관련 논쟁들에 대해서는 1. 미즈노 슌페이가 친한인가? 2. 미즈노 슌페이의 사상이 혐한인가? 3. 미즈노 슌페이가 부당하게 인격권과 학문의 자유 등을 침해받고 '추방' 되었는가? 이 세가지 이슈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슌페이가, 혹은 슌페이의 사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과 사건에 대한 평가는 별개일 수 있다.

3. 활동 내역

일단 그가 한국에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94년 조선일보에서 연재하던 '노래하는 역사'의 거의 매회 연재마다 반박 기고를 꼬박꼬박 하면서부터이다. 이 연재물은 작가였던 이영희[4]가 기고한 것이었는데 만요슈를 "호남 사투리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고전 일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해석되어야 한다"며, 자의적 해석으로 일관했다.

이영희의 해석은 원문 한자를 일본어와 한국어 음으로 제멋대로 읽어 문장을 끼워 맞춰 만드는 언어유희 수준이었다. 이렇게 만들어낸 해석으로부터 유추한 여러 유사역사학 주장들, 예를 들어 연개소문이나 문무왕이 일본에 가서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매회 연재를 채웠다. 이를 미즈노는 거의 매 연재마다 독자 기고를 통해 반박하면서 서서히 한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영희는 그 이전 전두환 정권에서 공연윤리위원장으로 한국 영화에 대한 가위질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기 때문에 문화계 전반에서 평판이 극히 안 좋은 인물이었다. 1986년에 김수용 감독은 중광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허튼소리"에 대한 그녀의 가위질에 항의해서 감독을 은퇴했을 정도다. 이런 사람이 이젠 조선일보라는 거대 신문 지면을 빌어서 환빠짓거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이영희를 꼬박꼬박 조목조목 반박하는 미즈노는 한일 양쪽 문학에 해박한 똑똑한 학자라는 좋은 인상을 주었다.

참고로 이영희의 이 연재물은 간 크게도 일본에서도 출간되었는데 일본 학계로부터 "조악한 방법론"과 "자의적 해석"으로 비판받았다. 이미 만엽집에 대한 연구는 일본에서 에도시대부터 철저히 이뤄져왔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라는 에도시대 학자가 만요슈와 고사기에 쓰인 만요가나를 이후 거의 이설이 없을 정도로 철저히 연구해서 그 해독법을 만들어냈다. 그의 방법론은 후대에 신라의 향가 해석법에도 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영희식의 해석법은 유사역사학의 범주에도 못드는 엉터리였다. 더 큰 모순은 이 연재물이 친일적인 일선동조론과 맥이 닿는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한국기원설을 내세우며 환빠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친일파의 논리였다.[5]

미즈노는 이렇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전남대 박사 졸업 후에도 바로 모교의 일문과 교수로 임용될 수 있었고, 여러 책을 펴내며 한국 중심 역사관과 한국식의 일본사 해석을 비판했다. 이런 책으로 "한국인을 바보로 만드는 엉터리 책 비판(오키타 쇼리와 공저)"과 "속터지는 일본인", "다테마에를 넘어 일본인 속으로" 등이 있다.

한국에서 한때 유행한 일본을 공격한다식의 밀리터리 소설에 대해서 제대로 깐 적이 있다. 대표적으로 김경진데프콘 2부 한일전쟁 편. 읽어보면 미즈노 교수가 책을 굉장히 자세하게 읽고 글을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데프콘 류의 고증 오류나 무리한 설정들을 크게 비판하기는 했지만, 이건 장르의 문제지 한국의 밀리터리 소설만 꼭 집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일본만 봐도 이런 류의 소설이나 만화는 한국보다 한술 더 뜬다.

현재도 학자로서 한국에 대하여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스사노오를 한국에서 소머리라고 주장하는 것을 일제강점기 때 내선일체로 인한 역사왜곡에 비롯되었다는 설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렇듯이 그는 저서에서 객관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인 중심의 역사관이나 한국 중심의 민족주의를 비판했으며, 한국어를 잘한다는 인식이 강해서 일본어 교재도 여러 권 냈는데 방송의 인지도 때문에 미즈노가 쓴 일본어 교재는 외국어 서적 중에서 한 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4. 극우 잡지에 쓴 글이 들통나다

미즈노가 극우잡지에 기고한 글들이 밝혀졌다.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신동아에 자세히 실렸다. #

5. 이한 이후

이후 한국 언론에는 전혀 비치지 않았으며, 극우파 의혹에 대한 해명도 일절 하지 않았다.

5.1. XTM의 취재 요구 거절

(인터뷰를 거절하며) 이제 나는 더 이상 한국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논란이 된 XTM 《도와주십Show》 영상.

2007년 8월 17일, XTM 8.15 특집 <도와주십Show>에선 제작진이 그가 근무하는 대학교와 자택을 찾아갔다가 거절당했다. 이 사건 때문에 나쁜 놈이라는 인식이 한국 내에 널리 퍼졌는데, 사실 일본의 방송은 계약을 철저히 중요시해서 사전에 연락이나 상의를 안 하면 그 누구든지 일단 털린다. 한국의 경우라도 출연료에 대한 논의나 촬영에 대한 허락도 전혀 한 적이 없는데 갑작스레 장비 들고 불쑥 찾아와 다짜고짜 우리와의 정을 생각해서 인터뷰에 응하라고 한다면 어느 연예인이 이를 허락해줄까? YTN스타에서 이에 대해 우려 섞인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었다.

5.2. 이한 이후 한국 관련 활동

이한 이후에도 일본 언론에는 가끔 출연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의 문화나 한일 관계 등에 있어서는 비중 있는 논객으로 다뤄지는 편이며 2008년에는 홋카이도 TV의 인터뷰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최근 인터넷 상의 한일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2009년에 '백제와 백제 한자음 백제어'라는 책을 한국에 발간했으며, 그가 집필에 참여한 일본어 교재는 사건 이후에도 출간되거나 개정이 이뤄지고 있다. 또한 같은 해 한국 서원대학교에서 열린 한국지명학회가 주관한 학술 대회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과의 왕래를 아주 끊은 건 아니다.

2011년에는 자신이 교수로 재임하고 있는 홋카이 상과대학의 학생들과 함께 한국철도시설공단을 방문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식사를 하면서 "홋카이 상과대학에서 한국 전문가로서 스카웃을 받아 간 것이지, 몰래 떠난 건 아니다. 솔직히 가고 싶지도 않았다. 한국인 작가의 일본 관련 서적에 비평을 했을 뿐인데 이것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라고 해명하면서 일본의 잘못된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한국의 우수성을 찬양했다고 한다.

2016년에는 일본 학술진흥회의 지원으로 일제강점기 고지도에 나온 순우리말 지명을 분석해 일제강점기 이후 순우리말 지명이 상당수 한자화되었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연구의 특징은 일본인들이 가타카나로 음사한 우리말 지명을 분석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가타가나 음사에 대한 연구가 적어서 주목을 받는 듯. 단 한국의 고지도가 아닌 일본의 고지도만을 이용했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 외에 2010년 페이스북을 꾸렸고, 2017년부터 2022년 서비스 종료 시까지 5년 동안 다음 블로그(당시 주소는 'blog.daum.net/spmizuno2015')를 운영하였다. 블로그를 개설한 이유는 모 신문사의 기자가 직접 연락해 여러 가지 의혹들에 대한 해명을 요청하자, 한동안 한국과 연락을 끊던 미즈노 교수가 해당 기자와 이메일을 통해 지속적으로 인터뷰한 내용들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위 내용들은 기사화되지는 못했고, 해당 기자를 포함한 한국 내 지인들이 일반에 공개하길 원해 블로그 형식으로 공개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5.3. 과연 지난 혐한 활동을 반성하고 있는가?

일본에 돌아간 이후로 노골적인 혐한 활동은 하지 않고 있으며, 위에서 보듯 한국을 재방문했을 때는 우호적인 언플도 간간히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미즈노의 전공은 한국학이고, 한국에 혐한이나 반한 인사로 찍히는 것은 한국학 전공자로서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미즈노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립서비스를 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아니다.

대체로 어느 나라이든지 한국학 교수들은 한국에 우호적인 편이며 한국을 높이 평가한다. 이건 당연한 게, 한국에 관심이나 애정이 없으면 굳이 전공할 이유가 없다. 만일 한국학 전공 교수가 완전히 한국과 척을 지게 되면 당장 밥줄이 끊어지는 건 둘째치고 한국 정부 주관의 학회 참석같은 것도 어려워지기 때문에 어쨌든 한국과 사이가 좋을 필요가 있다.[6] 그러니 미즈노가 한국 관계자들 앞에서 한국 칭찬 몇마디 했다고 그의 성향이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미즈노는 한국에서 활동할 때부터 일관되게 한국을 저평가했다는 사실은 주지할 필요가 있다. 즉, 미즈노가 마녀사냥 당했다고 옹호하는 사람들조차도 확실히 인정하는 것은 미즈노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한국을 예찬하는 지식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7] 미즈노가 출연한 TV프로나 언론 기고문을 봐도 한국에 대한 친근감이나 익숙함을 표시한 적은 있지만, 한국이나 한국인 자체를 높이 평가한 적은 전혀 없다. 이는 미즈노와 비슷한 성향의 구로다 가쓰히로에도 보이는 성향으로 우익적인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한국관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2013년에 한국생활에 대해 발표한 글을 보면 그의 성향을 바로 알 수 있다. 해당 글에 의하면 미즈노 스스로는 자신이 아무 잘못이 없으며 그저 한국 정권교체의 희생양으로만 여기는 듯하다. 자신이 쓴 극우 의혹 글들에 대한 해명은 하나도 없고 '왜 몇 년이나 지난 후에 이게 터졌나' 란 반응만 서술하고 있다.

일본에 돌아간 이후에는 노골적인 혐한 성향의 글을 쓰지는 않고 있으나, 위 링크의 산케이 기고문을 보면 노골적인 표현만 없을 뿐이지 한국에 대한 혐오감이 알게 모르게 담겨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미즈노 역시 정권이 바뀐 후 모든 한국 언론들이 바뀐 한국 정부의 지침에 따라 일괄적으로 자신을 이지메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당장 이 페이지를 봐도 당시 그를 우호적으로 서술한 YTN스타의 뉴스 등이 있었고, 불순한 의도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의 해명을 들으러 직접 찾아가기까지 한 XTM 등도 있었다.[8]

그의 혐한 매체 기고 사실이 드러난 후 우파 언론들이 그를 때릴 때 많은 좌파 언론들이나 일본 관련 단체들이 침묵하거나 오히려 동조한 것은 결코 이들이 정부의 앞잡이여서가 아니라 이쪽이 봤을 때도 어떻게 쉴드 쳐줄 건덕지가 없어서였을 뿐이다. 애초에 정권의 성향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이나 북한 고위군인 같은 존재도 아닌데, 고작 바뀐 성향 하나 때문에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유명세 있던 친근한 일본인 예능인을 공격할 수는 없고 굳이 위험을 자초해 공격할 필요도 없다.

6. 과연 억울한 오해의 피해자인가?

미즈노가 장씨의 언플 때문에 과도하게 비난받은 것은 사실이고, 그가 일본으로 간 이후 케이블 방송국에서 무작정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분명히 방송사가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과연 피해자이기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6.1. 왜 언론을 통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나

일단 미즈노가 장씨의 의도적인 디스에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한국을 떠나버린 것은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기에는 정말로 부적절한 행위였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거의 한국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장씨의 비방 및 중상이 더 확산된 경향도 있다.

물론 한국에서 오래 산 만큼 오히려 이러한 사안에 대하여는 적극적인 반론을 펼친다고 해서 해결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반론이 있으나, 그는 확실한 언론계 인맥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려고 했다면 분명히 할 수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 가장 센 힘을 가진 두 언론인 조선일보, KBS에 고정적으로 출연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반론권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면 그런 디스에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시도조차 안 한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법정에서도 피고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면 유죄를 시인하는 것으로 보는데, 반론 보도나 법적 공방을 제쳐두고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결국은 스스로의 "혐의"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뭐 성격상 진실공방 같은 진흙탕 싸움이 될 게 뻔하니 염증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만 말이다.

혹자는 2005년에 조영남이 친일 선언을 했다가 집중포화를 맞은 것을 들어 미즈노도 비슷하게 마녀사냥을 당했지만 한국언론의 냄비 근성에 방어를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조영남은 정말로 욕 먹을 작정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기 때문에 오해 드립의 미즈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2005년 8월경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방송과 언론 모두 자기 이야기를 듣지 않아 해명할 수가 없었다.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해명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그 후에도 적극적인 해명을 시도한 적은 없었다가 2017년 블로그를 개설하여 해명을 시도하고 있다.

6.2. 왜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기고했는가

[일본어 저서 '한국인의 일본위사'의 작가 프로필]
파일:attachment/images_27.jpg

미즈노 자신의 저서에서는 필명(筆名)인 노히라 슌스이와 함께 사진과 프로필이 자세히 나오며, 경력도 적혀 있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필명 노히라에는 친절히 후리가나까지 붙여준 반면, 자신의 본명이 미즈노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밝히지 않았다. 유명 작가나 연예인이 본명이 아닌 필명이나 예명을 쓰는 경우는 흔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인지도가 높아져야 유리한 학자가 왜 극우 잡지에 가명으로 글을 기고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논문이나 출판물이 많으면 교수 채용에 유리하지만, 일본의 대학들도 아세아 대학이나 다쿠쇼쿠 대학과 같은 극보수 성향의 대학을 제외하면 극우 잡지에 혐한 글을 쓰는 필자를 채용하지는 않는다. 고로 이렇게 가명을 쓴 것은 첫째로 한국인의 눈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명 노히라 슌스이(野平俊水)는 본래 이름인 미즈노 슌페이(水野俊平)의 한자 순서를 뒤바꾼 이름이며, 이미 1997년 한국에서 출판한 '일본인이 쓴 반일이야기'에서도 노히라 순수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2002년 출판된 한국인의 일본위사라는 저서에서도 같은 필명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정체를 숨기려고 가명을 사용한 작가가 한국에서의 자신의 경력과 얼굴 사진까지 정확하게 포함하여 프로필에 기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체를 숨기려고 가명을 사용한 작가가 어째서 자신의 출신지와 출신학교, 그리고 한국 전남대학교 강사인 현 직업까지 완벽하게 자신의 프로필을 제공한다는 말인가. 심지어는 한국 KBS 출연 경력까지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가 본명을 놔두고 필명을 사용하는 일은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비교적 흔한 일이며, 작가의 프로필 상에서 작가의 정체를 알 수 있는 거의 모든 정보가 제공된 만큼 굳이 '정체를 숨기기 위하여' 가명을 사용했다는 추정은 무리한 가정이다.

6.3. 기고한 매체의 문제

위의 문단들은 선의로 해석한다면 오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미즈노가 빼도박도 못하게 혐한으로 낙인찍힌 것은 그가 일본에서도 극우잡지라고 알려져 있는 쇼쿤이나 SAPIO, 겐다이 코리아 등에 한국에 비판적인 글을 기고했기 때문이다. 미즈노가 글을 썼던 SAPIO는 그 유명한 김완섭고 젠카가 고정적으로 기고하는 잡지이며, 나머지 잡지도 SAPIO와 대동소이한 논조다.

다시 말해 미즈노가 혐한 혐의를 받은 것은, 배달부나 그밖의 미즈노 옹호론자들의 주장처럼 한국에 고언이나 쓴소리를 했다가 마녀사냥을 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익 잡지에 혐한적인 글을 쓴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능 언어영역에서 자주 나오는 강조의 오류의 전형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미즈노 교수의 저서가 국내에서 출간되었을 때 한국 학계의 평가는 일부 비판을 제외하면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와 환빠들에 대해서 미즈노가 정당한 논리와 고증으로 비판한 것은 한국의 일반에서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고 그 당시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배달부와 미즈노 옹호자들은 포인트를 잘못 짚은 것이다.

미즈노는 그 잡지들의 편집진들이 어떤 의도로 그 글을 싣고 독자들이 어떠한 맥락으로 읽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당시 교육자와 방송인이라는 직업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적절한 처신이라 볼 수 없다. 때문에 그것이 이중적인 행동이라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기본적으로 공인의 매너 문제다. 하물며 한국인이 주는 봉급을 받던 그가 그런 식으로 이중적인 행동을 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게다가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시사 관련 잡지는 뚜렷한 사상 경향이 있다. 기고자의 성향은 철저히 잡지와 코드가 맞아야 한다. 월간조선이 일반적으로 조갑제의 글을 싣고 진중권이나 박노자의 글을 싣지 않는 것처럼 SAPIO나 쇼쿤류의 잡지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들 잡지는 미즈노가 단순히 한국 전문가라고 해서 글을 실어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교수까지 하고 있는 미즈노가 그 잡지의 성향을 모르고 기고했을 리도 없다. 단순한 사실을 이야기해도 싣는 매체에 따라 톤이 달라진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더구나 매 호마다 혐한 기사가 실리는 쇼쿤, SAPIO와 같은 잡지에 기고하는 것은 당연히 자신이 혐한 성향이라는 것을 못박은 셈이다.

일부에서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이 문서에서 미즈노 교수가 억울한 피해자인 양 서술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비판하거나 혹은 한국인의 자의적인 역사해석을 비판한 것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좋은 의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혐한 매체에 계속 기고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글이나 행동이 좋은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즉, 미즈노 교수가 학문적 양심에서 우러나온 정당한 비판을 한 게 아니라 혐한의 눈에 들만한 짓을 한 것이기 때문에 옹호하기 힘든 것이다.

6.4. 글의 어조나 논지 면에서

미즈노 옹호자들은 역사 고증에 대한 오류를 지적한 것을 "지나치게 강한 민족주의에 빠진 한국인들을 일깨우기 위해 반일을 하려면 제대로 알고 하라"는 충심으로 기고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가 지적한 몇몇 사실은 분명히 한국인이 검토해볼 가치가 있는 것들이며, 역사는 항상 여러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한국인의 사고의 지평을 넓혀줄 수도 있다.

하지만 미즈노가 실제 우익논조의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보면 혐한이나 우익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들이 다분하다. 미즈노 교수가 2001년 SAPIO에 처음으로 기고한 글이 2001년 9월 26일자 SAPIO, <'특집, 한국 반일 증후군의 정체' 라스트 신은 항상 '일본의 식민지화' '지진으로 침몰' '원폭투하' 다. 엄청 팔린다! 엉터리 반일소설의 "어째서, 이렇게 되는거야!" 特集【韓国「反日症候群」の正体】ラストシーンは決まって「日本を植民地化」「地震で沈没」「原爆投下」だ バカ売れ!トンデモ反日小説の「どうして、こうなるの!>이다.

이 글에서 미즈노는 한국 내에서 출간된 일본을 공격한다 식의 소설의 특징을 4가지 항목으로 분류해 조목조목 비판했는데,
(1) 일본의 자위대가 한국을 침략한다.
(2) 일본 내에 국수주의적 집단이 있어 정재계를 좌지우지한다.
(3) 주인공에게 반한 일본인 여성이 꼭 등장한다.
(4) 결국 한국이 승리한다. 전반적인 내용 자체는 한국에서 출간한 저서인 '엉터리 책 비판' 과 별 차이가 없지만, 말미에 한국인은 옛날 일본에 자신들이 문명을 전수해주었다는 우월감과 현재 일본에 경제적으로 뒤쳐지는 자신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한국 반일의 원동력이다. 한국인이 일본을 이기고 싶다(정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한 한국 반일 (소설)은 잘 나갈 것 이라며 한국인에게 반일은 공통된 정서라고 주장했다. 원문 번역

이후 2003년에 재차 SAPIO에 노무현 정부 시기 한국을 친북반미국가로 주장하며 일본의 위기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또 일본인이 겨울연가만 보고 한국인의 반일감정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쇼쿤에서는 모 연예인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그는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한국인이니 겉모습에 속지 말고 한국 드라마가 천황 암살이나 일본에 핵을 투하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는 글을 기고했다.
사족으로 미즈노 교수가 언급한 '일본에 핵을 투하하는 내용'의 드라마는 김진명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말하는 것 같다.

1990년대 초중반부터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현세의 '남벌' 같은 맹목적인 반일/혐일 콘텐츠들이 대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던건 명백한 사실이다. 또 이런 분위기를 이어받아서 PC통신과 인터넷에서도 치욕의 역사를 다시 썼네 어쩌네 하면서 일본을 공격한다, 일본을 식민지로 만들고 한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 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3류 대체역사소설들이 인기를 끌던 시대도 분명히 있었다.[11] 하지만 이렇게 말초적으로 민족정서를 자극하는 혐일/반일 콘텐츠들은 가루가 되도록 비판을 받으면서 미즈노 교수가 국내에서 활동하던 2000년대가 되면 시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실제 년도별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흥행한 드라마의 목록을 살펴보아도 2000년대 이후로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류의 반일/혐일 창작물이 흥행한 예를 찾기 힘들다. 오히려 서점가에서는 반일은 커녕 일본소설들이 베스트셀러 순위를 나란히 차지하는 현상 때문에 한국문학 위기론이 진지하게 제기될 정도였다. 한국 시장에서 일본소설의 약진이 두드러진 것은 2000년대 이후인데 그 시기에 한국에서 활동한 미즈노 교수가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미즈노의 책이 한국에 출간되었으며, 기고문이 책의 내용과 다를 게 없다고 하나 미즈노 교수의 저서인 "한국인을 바보로 만드는 엉터리 책 비판"과 "속터지는 일본인", "다테마에를 넘어 일본인 속으로"는 국내에서 모두 2003년 이전에 출판된 것이다. 정작 기고문 자체는 책이 한국에 출판되고 난 2003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며 문제가 되는 극우지 기고문은 한국에서 펴낸 저서에서는 당연히 빠져 있다.

7. 평가

7.1. 친한, 지한, 혐한

일본인 중에는 한국을 잘 안다고 해서 지한파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미즈노의 행각은 소위 "지한파"라고 해서 절대 친한이 아니며 오히려 한국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반 혐한보다도 더욱 교묘하고 정교하게 혐한활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예로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무토 마사토시가 있는데, 한국어에 매우 유창하며, 동일본 대지진 당시 한국의 방송에 출연하여 모금활동에 한국어로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에 돌아가서는 혐한서적까지 펴내며 혐한활동을 하고 있다.

미즈노도 마찬가지인데, 무토보다도 더 한심한 것은 한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부터 구로다 가쓰히로류의 혐한 논객 짓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12] 하지만 구로다의 경우 한국논단이나 월간조선 같은 극보수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조선일보에 책도 여러 권 내긴 했지만 적어도 미즈노처럼 한국의 기관에 소속되어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구로다 가쓰히로도 서강대에서 시간 강사로서 강단에 선 적은 있다. 그러나 시간 강사와 교수의 위상은 천지차이이며, 일반적으로 시간 강사는 그 대학에 소속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것 외에도 구로다 가쓰히로와의 차이점이라면 구로다는 산케이 신문에 고용된 기자로서 일본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이며, 그가 쓰는 혐한 글은 익명이 아니라 실명으로 발표되는 것이지만, 미즈노는 방송에서는 친근한 이미지를 통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돈을 벌면서도 일본에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한국을 비하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점이다.

일본 우익 중에서 친한, 지한파를 자처하는 인물들의 한국관이 대체로 그렇지만, 이 사람이나 구로다 가쓰히로는 처음부터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국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일본보다 한참 떨어진 이류 국가지만 일본의 영향권에 있어야 하는 나라로 한국을 평가하고 있다. 이런 한국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한국에 우호적인 언플을 할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한국을 얕잡아보는 생각을 기저에 깔고 있다.[13] 이런 사람을 친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사람이 한국에 떳떳치 못한 일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쇼쿤'이나 'SAPIO', '주간문춘'과 같은 혐한매체에 한국을 비하하는 부적절한 글을 쓴 사실은 어떻게 해도 되돌리기 힘들다.

혹자는 그가 지한파였다 하더라도 한일 국민감정상 한국에 대해 좋은 말만 하기는 아무래도 어렵지 않았겠느냐는 식으로 미즈노를 변호하는 경우도 있는데, 미즈노의 만행이 폭로 당했던 2005년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옳지 못한 변론이다. 2000년대 중반은 일본 헤이세이 연호 이후 악화일로를 겪고 있는 한일관계에 그나마 지금까지는 마지막 숨통이 트이고 있던 시기였고, 미즈노 슌페이 사건은 당시 이례적으로 온화하던 한일관계를 정면으로 역행하여 한국일본인들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실추시킨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사건의 당사자인 미즈노 슌페이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현재 그가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그동안 자신이 당해온 일이나 본인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론들을 올린다. 글들을 보면 해명보다는 자신의 비판에 대한 반론이 주를 이루며 자신에게 향하는 비판들이 과거 일본 잡지사들에 기고한 글들에 대한 결과라는 확실한 인과관계가 있음에도 자신이 당한 피해만을 강조하고 집중해서 서술한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부터 읽어보고 얘기하라도 말하지만 애초에 미즈노 슌페이를 비판 하는 사람들은 그의 책이나 학자로써의 연구 결과에 비판하는것이 아니다. 그가 '친근감 넘치지만 학계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설민석씨'라고 말한 것처럼 그의 연구와 주장에 대해선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평가하면 되는것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이유는 그가 일본 잡지들에 필명으로 기고한 글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도 누구나 느낄수있는 한국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이 섞여있는 비판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학자로서의 비판 치고는 전문적인 비평이 아닌 마치 개인 일기장에나 나올법한 표현들과 조롱들이 난무하며 누구나 읽어도 그가 한국에 대해 많은 지식은 있지만 정말 한국을 아끼는 마음에서 쓰는 비판인지 아닌지 확연히 구분될 정도의 비난에 가까운 비판일색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것처럼 한국이 일본에 대한 수많은 폄훼와 오해가 있다는 점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그냥 일반 일본인라면 몰라도 명색이 자타공인 한국학자라면 한국의 그런 행동들의 이유를 알지 못할수 없고 과거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일본에게 수없이 침탈을 당한 한국의 입장과 감정도 충분히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마땅하다. 이건 비단 한국만의 상황이 아니다. 독일에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침략을 당했던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피해 국가들도 지금까지도 독일이 손이 발이 되도록 용서를 빌어도 상처를 잊지 않고 감정과 앙금이 남아있는 사실은 전세계가 다 아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런 사실을 아는 학자라면 문제 해결이나 화합을 위한 노력이나 최소한의 한국에 대한 변호까지는 않을지언정 학자로서의 중립을 유지하고 일본과 한국의 관계에 관한 글들을 신중히 기고해야 함에도 중립적인 스탠스는커녕 한국이 가진 일본에 대한 감정을 알면서도 무시한채 일본 국민들에게 한국 국민들의 감정의 설명과 이해는 없이 한국이 일본을 어떻게 표현하고 폄훼하는지만을 상습적으로 그가 말하는 소위 학자로써의 비판으로 신랄하게 표현하고 강조하고 소개하며 일본과 한국과의 관계를 이간질하는 결과를 만들었다는데 있다. 또한 그는 그가 하는 비판엔 사사로운 감정이 있을 수 없고 때로는 냉정하게 때로는 이성적으로 비판하기 때문에 잔인해 보일 수 있다 말하기도 한데 반해 그가 필명으로 투고한 일본 잡지 한국 관련 기고글들엔 냉정과 이성과는 거리가 먼 어조와 어체들을 사용했고 본인에게 향하는 비판과 평가엔 굉장히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본인을 비판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터무니없고 무지한 비방, 중상가로만 치부하는 이중잣대를 보이고 있다.

8. 근황

전술한 페이스북 외에 다음 블로그까지 운영한 바 있다.(주소는 blog.daum.net/spmizuno2015) 한국학자인 만큼 한국의 최근 인터넷 용어까지 이해할 정도로 한국 웹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 온 듯하다. 그의 생각들과 사상들을 어느정도 알 수 있다.

9. 여담

10. 관련 문서



[1] 현재 한국학 교수로 재직중인 홋카이상과대학(北海商科大学)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프로필사진[2] 『<日本書紀> 의 고대 한국어 표기 연구 : 특히 고유명사 차자표기의 한자음을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대학원[3] 水野 俊平의 순서를 바꾼 것[4] 이 사람은 언론인 리영희(1929~2010)와는 다른 인물이다. 여성 수필가로서 일본에서 교육받았는데, 5공 시절 공연윤리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문화계 탄압을 자행하였다.[5] 환단고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쪽 계통의 유사역사학은 모두 친일파들이 만든 것이다.[6] 입장을 바꿔서, 만약 미국학 교수가 미국과 척을 지게 된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번 생각해보자.[7] 좋은 나라 운동본부에 출연했을 때, 한국의 문제점이 나오면 항상 "일본은 저런 일이 없습니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단 한번이라도 한국에 대한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8] 이러한 점에서 해명할 수 있는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반면, 상술된 바와 같이 미즈노에 대한 한국 언론의 취재 시도들이 협의가 결여된 무례한 방문 등이었다며 미즈노를 옹호하는 시각도 있다[9] 단, 기사의 제목은 잡지 편집부의 영역이라는 것을 감안할 것.[10] 실제로 1992년작 MBC 특별기획 드라마 <분노의 왕국>에서 이하연의 아키히토 천황 암살미수 장면이 나온다는 이유로 일본 외무성이 한국 외무부(현 외교부)와 MBC 도쿄지국에 클레임을 건 적이 있었다.[11] 어느 장르나 그렇지만 대체역사소설도 명작도 많지만, 불쏘시개도 진짜 많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쏟아지던 대체역사소설들은 정말 서너작품 빼면 전부 불쏘시개였다.[12]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쫓겨나듯이 일본에 돌아간 이후로는 자제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일본에서 교수로서 혐한적인 글을 쓰는 것은 좀 부적절한 일이기 때문에 삼가는 건지도 모른다. 일본에서 혐한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은 많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내뱉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품위 문제와 직결된다. 대표적인 극우파 정치인인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조차도 재특회 관계자들을 불러 재일 차별적인 "증오발언(hate speech)"를 하지 말라고 꾸짖는 연극을 할 정도로, 공인이 혐한 발언이나 혐한 기고를 한다는 것은 극우 성향의 일본인들에게조차 품위 없는 일로 간주된다.[13] 일본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위계질서 문화인데, 특히 우익 지식인들은 이것을 국제관계에도 그대로 투영해서 동아시아를 최종보스=미국, 행동대장= 일본, 꼬봉(고기방패...)=한국라는 서열관계로 이해한다. 그러니 한국이 대등한 관계와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을 "어떻게 꼬봉이 오야붕한테 대들지??"하면서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당연히 일본우익들은 점점 한일간의 격차가 줄어들고 있으며, 오히려 한국이 앞서나가는 부분도 많아지고 있다는 현실은 인정하지 못하고 "좀 귀여워 해줬더니 기어오르는 건방진 놈들"이라는 감정적인 반응만을 보이는 것이다. 아니면 그게 주사파 혹은 중국의 조종에 의한 것으로 뇌절하면서 중국만 없어지면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친일국가가 될 것이라고 망상을 늘어놓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추한 한국인의 저자 가세 히데아키.[14] 가세 히데아키는 2017년 8월 기준으로 80대임에도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다나카 아키라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다.[15] 당연한 게, 호사카 유지한국이 좋아서 정식으로 귀화까지 했던 진짜배기 친한이며, 동시에 일본우경화에 동조하지 않고 맹렬하게 비판한다. 미즈노 슌페이의 실체가 알려진 뒤로 바로 손절쳤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