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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08:03:43

미라클 작전/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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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전 과정
2.1. 작전 준비2.2. 병력 전개2.3. 1단계2.4. 2단계2.5. 3단계
3. 후속 과정
3.1. 인천국제공항 도착과 격리3.2. 생활시설 입소3.3. 추가 인원3.4. 특별기여자들의 국내 적응

1. 개요

본 문서는 2021년 8월 실시된 미라클 작전의 전개 과정에 대해 다룬다.

2. 작전 과정

한국 협력 아프간인 구출 작전 영상
KBS 1 다큐 인사이트에 나오는 미라클 작전
국방홍보원 국방 방송에 나오는 미라클 작전

대한민국 정부는 본격적인 작전 개시 2주 전인 카불이 함락되기 직전 시점부터 치밀하게 계획에 착수, 작전을 준비했다. 다른 서방 국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프간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였다. 최종문 외교부 2차관은 작전이 시작된 이후인 8월 25일 “정부는 우리와 함께 일한 동료들이 처한 심각한 상황에 대한 도의적 책임, 국제사회 일원으로서의 책임, 비슷한 입장에 처한 아프간인을 다른 나라들도 대거 국내 이송한다는 점 등을 감안해 8월 이들의 국내 수용 방침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카불 함락 하루 전에 작전을 수행할 수송기 3대가 이슬라마바드에 이미 도착해있었으며, 중간에 수송기가 영공을 통과하는 대만,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 파키스탄의 영공 통과 협조와 파키스탄의 공항 사용 협조, 태국의 급유지원 협조를 이미 받아놓은 상태였다.

이에 대해 대외비로서 기자와 언론에 엠바고를 철저하게 걸어놓은 상태에서 작전을 진행하였다. 실제로 미라클 작전을 총괄 지휘했던 국방부 국제정책차장 이경구 준장은 가족들에게는 그냥 잠깐 외국 출장을 간다고 하는 등 작전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작전 이후 엠바고가 풀린 뒤 이뤄진 YTN 인터뷰 영상을 통해서 가족들이 자신이 카불에 갔던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할 정도로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였다.#

만약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하지 않고 한국 입국 대상 아프간인이 카불 공항에 완전히 다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부 언론에서 떠드는 것처럼 뒤늦게 부랴부랴 이송작전을 수행하였다면 언론 보도를 통해 탈레반 측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고, 그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이렇게 신속하고 안정적인 구출작전 완수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며 오히려 탈레반 측이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이들의 출국을 방해하거나 이들을 위협할 가능성이나 구출병력과의 교전으로 커질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대한민국 정부에서 진행한 미라클 작전과 비교하자면 하루 차이 밖에 안나지만 이송 작전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를 벌이고, 이루마 기지 내에서 사열행사까지 진행하여 정부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된 영향으로 인해 탈레반 측이 자위대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하게 되었다. 여기에 현지 사정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고 피난 대상자들의 자력이동 지시 및 안내방송 전개라는 오판까지 겹쳐 탈레반 측이 아프가니스탄자위대 철수 및 일본인들의 대피 중단 요구를 내세우면서 결국 해당 작전에서 겨우 단 한 명의 일본인만 피난시키는 등 실패로 돌아오는 최악의 상황을 겪게 되었다. 이 점으로 보아 미라클 작전의 반례가 된 일본의 사례와 비교하면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라클 작전은 총 3단계로 계획 및 진행되어 1단계는 중간기착지를 확보하여 군 수송기를 기항시키는 것[1], 2단계는 군 수송기를 적시에 카불 공항으로 투입하여 대상자를 중간기항지로 이송하는 것, 3단계는 조력자들을 대한민국으로 이송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하 내용은 2021년 8월 26일국방부 보도자료를 참조하였다. #

2.1. 작전 준비

그는 이 작전에 임하면서 군번줄을 제일 먼저 챙겼다[4]라고 할 정도로 현지 상황은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YTN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상을 통해 가족들이 자신이 카불에 간 것을 알게 될 것이라며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였음을 시사했다.
국방부는 단지 수송만을 책임진 것이 아니었다. 평소 국방무관 등을 활용한 군사외교를 통해 다져놓은 인맥과 우호관계를 최대한 활용했다. 작전 도중 미군들은 한국군 장성에 대해 예의를 갖췄다. 또 현지 조력자들을 태운 버스가 탈레반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을 때도 자기 일도 많은 판에 미군 대대장이 직접 탈레반 측에 가서 한국 조력자들을 보내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공항 출입을 통제하는 다국적협력센터(MNCC)에서도 한국 조력자들이 들어오는 시각을 알려주면 그대로 승인을 해줬다. 국방부의 역할이 매우 지대했다. #

2.2. 병력 전개

2.3. 1단계

2.4. 2단계

미국카불 공항에 중대한 테러 위협이 있다며 공항에서 대피하라고 권고하고, 수만 명이 몰려 압사 사고가 일어나는 등 카불 공항으로 가는 길 자체가 '절망의 길'이라 불릴 정도이다. 현지 특임단도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최대한 많은 조력자를 찾아 카불 공항으로 이동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

2.5. 3단계

3. 후속 과정

3.1. 인천국제공항 도착과 격리

파일:인천공항 아프간.jpg

3.2. 생활시설 입소


3.3. 추가 인원

3.4. 특별기여자들의 국내 적응


미라클 작전 이후 수 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한국 사회에 동화된 특별기여자들의 소식이 하나 둘 알려지고 있다. 울산현대중공업 협력업체에서는 약 30명 가량의 특별기여자들이 일하고 있는데, 그중 아버지와 일하고 있는 무스타퍼(19)의 소식이 뉴스를 타 눈길을 끌기도 했다. 현재 선박용 대형 엔진 조립 회사에 근무중이며 이후 울산과학대학교[21]로 진학해 대학생이 되는 꿈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 C-130은 항속거리가 3,800km로 상당히 짧아 카불 - 인천/부산 무착륙 편도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카불이슬라마바드 간 운송을 주로 담당하였다.[2] 미라클 작전이 끝난 후 관련 기사에 의하면 자기 때문에 여러 명의 대사관 직원들이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미안한 마음에, 정부 협력 아프간인들을 철수시키기 위한 쉼터 겸 집결지를 제공했다고 한다.[3] 청해부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 당시 청해부대원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키는 오아시스 작전을 지휘한 바 있다.[4] 군필자들은 알겠지만, 이 말은 평소엔 군번줄을 걸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원래 군인이면 군번줄은 24시간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는 물건이다) 맨 먼저 군번줄부터 챙겨,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신원만은 파악할 수 있게끔 대비한다는 의미이다.[5] 레지넘버 ROKAF 19-002, 한국 공군이 도입한 4대의 에어버스 A330 MRTT 중 2번째 기체이다.[6] 야전이라고 붙인 이유는 사실상 카불 공항이 전쟁터나 다름없는 아수라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는 카불 공항이 관제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어도 CCT는 주로 경호 임무 및 조력자 보안 검색 임무를 담당했다.[7] 타국 수송기들은 이륙하며 플레어를 살포하기도 했다.[8] 대상자들 상당수가 서방국의 아프간 재건 계획 참가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재를 빼간다는 주장은 핑계고 처형이나 강간 등의 다른 목적이 있는 걸 감추려고 생떼부리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9] 문서 하단에 언급되는 8월 17일 한국인 탈출 시 제일 마지막까지 남았던 교민 1인의 사업장인 것으로 보인다. 해당 사업장은 한국을 도운 아프간인 협력자들이 탈레반들에게 핍박받을 것을 우려해 대피하여 쉴 수 있도록 사업주 교민이 대사관 측에 요청하여 만들어 두고 떠난 임시 쉼터이며, 일부러 탈레반에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엠바고 등을 걸어 기밀사항으로 해뒀다. 덕분에 협력 아프간인들이 이곳을 구심점으로 빠르게 집결하여 작전 수행 버스로 갈아탈 수 있었다.[10] 필수적인 용품 외에도 어린이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기 위한 곰 인형까지도 준비되어 있었다. 어린이들은 서울입국할 때까지 이 인형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서 지급된 인형을 손에 쥐고 입국한 걸로 보아 하기할 때 공군에 반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낯선 외국에서 마스크를 쓰고 움직이다가 아이들이 뒤섞이거나 미아가 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디자인의 아동복을 준비하여 형제끼리는 같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11] 본래 378명으로 집계되었으나, 377명으로 정정되었다.[12] 영주권이 발급되면 3년 지나면 시민권 시험까지 볼 수 있으며, 귀화에 성공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된다.[13] 이들은 미군의 신원조회도 통과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14] 특임단의 개인 짐의 나머지는 후발대로 오는 C130 편으로 싣고 왔을 가능성이 있다.[15] 실제 코로나 사태 발발 이후 설치된 격리시설에선 수용자가 몰래 시설을 탈출하여 도주하다 검거되는 일이 잊을 만 하면 발생하고 있다. 때문에 해당 시설이 위치한 지역의 주민들이 불안을 호소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16] 만약 난민으로서 거주(F-2)자격을 받으려 한다면 1% 미만의 허가율에 도전해야 할 정도로 한국의 난민심사는 엄격하다. 이 자격은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는 업종을 제외하고는 취업제한이 없으며, 조건만 되면 제한없이 기간연장도 가능하다. 취업의 자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례인데 무기한 연장이 가능하고, 궁극적으로는 한국 영주도 가능하다.[17] 본래 378명으로 알려졌으나, 1명은 명단에 없는 아프간인으로 확인돼 파키스탄에서 환송하면서, 인원 집계가 정정되었다. #[18] 국외에서의 작전 수행이 국방부와 외교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면, 아프간인들의 입국 이후에는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이들을 관리하게 된다.[19] 거의 200kg 밖에 안되는 여유를 두고 이륙했을 정도니 장난감은 커녕 살림살이도 챙겨오지 못했다.[20] 해당 호텔은 코로나19 유행 이후 해외 입국자의 자가격리 시설로 쓰이고 있다.[21] 울산대학교와 함께 현대그룹과 관련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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