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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1:36:07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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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할3. 비판
3.1. 평론가의 자질 문제3.2. 창작자와의 유착 관계3.3. 대중과의 괴리감3.4. 주관과 객관 사이의 균형3.5. 주례사 비평
4. 평론가가 직업인 사람
4.1. 대한민국4.2. 해외
5.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5.1. 평론가로 등장하는 인물
6. 관련 문서

1. 개요

비평은 창조의 정수다.
Criticism is the essence of creation.
오슨 웰스
미술 심사위원이라고 해서 반드시 화가여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나는 한 번도 달걀을 낳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달걀이 상한 것인지 싱싱한 것인지는 가려낼 수 있다.
윈스턴 처칠

평론가() 또는 비평가(批評家), 논평가(論評家)는 평론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1]

2.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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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가 하는 일은 특정한 대상, 작품이나 계획에 대해서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그 가치를 분석하고 판단하며 비판할 거리가 있다면 이에 대해 비평하게 되며 자신의 평가를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평론가의 평론과 기고는 문학영화 작품, 음악, 예술 등을 비롯한 문화 산업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한다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뒤집어서 평론가들이 없었다면 문화 산업은 단점을 수용하긴 커녕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한 없이 머물렀을 것이다.

평론을 통해 대중들의 예술적 시각을 길러준다. 명작은 왜 명작이며, 졸작은 왜 졸작인지 나름의 근거를 들어 설명하여 예술을 보는 시각을 길러주고, 대중들에게 여러 명작들을 소개하므로 많은 작품들이 시간이 흘러도 그 이름이 남게 한다. 묻힐 수도 있는 보석과 같은 작품이 평론가를 통해 유명해지기도 하며, 평론가들이 없었다면 역사적인 작품들은 기억에서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알아 듣기 쉬운 예로 미쉐린 별점 가이드를 통하여, 일반인들이 양질의 음식들을 맛 볼 수 있게 되는 이점이 있다.

평론가는 그것을 업(業)으로 삼아 생계를 꾸릴 수도 있으나 특정한 평론 직업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전문가로서의 자격을 심사받지도 않는다. 대체로 작가기자 등 글재주가 있는 사람, 해당 분야에 오랫동안 몸담아 왔거나 유사한 학문을 전공한 사람이 평론가로서의 일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수로도 활동하는 평론가들도 많다.

3. 비판

"당신들이 한 사람의 인생을 가지고 장난칠 때 나는 여기서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
-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
"초콜릿 라바 케이크는 덜 익은 게 아냐. 그래서 중심부가 녹아있는 게 아니라고. 가나슈를 굳힌 다음 램킨 안에 넣는 거라고. 그래야 겉은 익고 안은 녹으니까! 당신이 하는 게 뭔데? 앉아서 처먹고 되는대로 지껄이고 시시덕거리면 땡이지. 당신이 이 개고생을 알아? 우리 직원들 고생을 아냐고? 내가 하는 희생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따위로 재수없게 내 요리를 비웃어?
- 영화 아메리칸 셰프 중 음식평론가를 향한 주인공 칼의 대사

후술할 문제들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평론가를 좋아하지 않으며, 좋아하는 평론가만 찾지 비판하는 평론가는 찾지 않고 배척하려 든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베 볼처럼 자신의 영화를 혹평한 평론가들을 초청해 복싱(=현피) 대회를 열거나, 2023년 2월 13일 독일 발레단장이 자신이 만든 신작을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혹평한 평론가를 찾아가 얼굴에 개똥문질러 경찰 조사를 받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결국 이 발레단장의 상사가 평론가한테 공개 사죄했고 발레단장은 직무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3.1. 평론가의 자질 문제

이 세상 평론가의 작업은 여러모로 볼 때 쉽다.
손해볼 건 별로 없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솜씨를 발휘하며 평가해주길 바라는 위치를 즐긴다.

우린 혹평을 쓰기 좋아하고 그게 쓰기에도, 읽기에도 재미있다. 하지만 우리 평론가들이 인정해야 될 것은 모든 걸 고려해볼 때, 하찮은 음식이라도 그게 우리의 비평보다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평론가가 그 위험부담을 안아야 될 때도 있다. 그건 바로 새로운 걸 발견하고 보호해야 될 때다. 세상은 종종 새로운 재능과 창조에 냉담하다. 새로운 것은 친구가 필요하다.
안톤 이고, 라따뚜이[2]
작가를 모욕하면 비평이 되고 비평가를 비평하면 모욕이 된다.
When the critic insults the author, it’s called criticism. When the author criticises the critic, it’s an insult.
앙테 드 몽테를랑[3]

과거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PC통신, 인터넷 시대 이후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SNS 칼럼, 유튜브 크리에이터 문화의 발전과 함께 평론가의 자질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자극적인 비평이 더 많은 조회를 불러오기 때문에 거의 트롤링에 가까운 비평을 하는 비평가도 나왔다. 이들을 비꼬는 표현으로 양산형 공장 평론가라고 부른다.

이는 순수 학문이나 순수 예술 분야를 제외하면, 평론을 하는 데 특별한 자격 조건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진입장벽이 낮은 직업이란 얘기다.

한국 음악계에서는 PC통신 시절 초창기 판타지 소설의 1세대 소설가, 출판업계, 평론가들이 전부 하이텔 소모임에서 나온 인맥으로 서로를 푸시하며 띄웠듯이 한국 가요를 평론하고자 시도한 사람들[4]이 PC통신에서의 소모임을 통해서 서로의 인간 관계를 공고히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이들은 델리스파이스를 깠다. 델리스파이스는 PC통신에서는 비교적 마이너하게 취급받던 모던 록을 시도하였는데 당시 평론가들은 '한국에서 모던 록이 성공할 리가 없다.'는 식으로 도매금으로 마구 깠다.[5] 이는 사실 한국 음악계가 해외보다 한 박자 늦게 장르 전파가 이뤄지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걸출한 밴드가 나오면서 새 장르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델리스파이스와 언니네 이발관이 활동을 준비하던 1994~96년은 당대 메탈밴드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사운드로 중무장한 스래쉬 메탈 밴드인 CRASH의 등장으로 그런지와 얼터너티브가 주류로 접어들던 해외 록밴드와 달리 꾸준히 메탈이 강세를 보였고, 다른 장르라 한들 펑크나 프로그레시브가 주류였으니, 얼터너티브나 그런지보다도 비교적 잔잔한 성향의 음악인 모던 록은 평론가들 입맛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1997년 발매된 deli spice 앨범은 한국 100대 명반에서 9위로 꼽히기도 했는데 1990년대 이후의 명반 중 최상위에 해당한다.

위에 언급된 소셜 미디어 칼럼이나 유튜브 리뷰 영상이 문제가 되는 것도 그런 점과 무관치 않다.

이들은 대체로 자기 주관에 갇혀서 그 대상의 역사성, 바탕이 되는 철학(방향성), 소비자들과 창작자들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창작 문화, 창작자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상업적, 예산적) 한계, 기술적 현실적 실현 불가능성 등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까기 위해 까는 이들이다. 자신이 평론을 업으로 삼는 프로 평론가를 희망한다면, 자신의 말 한 마디에 얼마나 큰 책임감이 부과되는지를 알아야 하고, 소비자의 이익과 알 권리를 대변해주고, 창작자가 간과하기 쉬운 소비자의 관점을 불러일으키고, 소비자와 창작자의 관계를 이어주고, 자신의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특히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평가하는 입장을 지적인 상하관계로 오해하고 자신의 주관적 신념, 이데올로기를 창작자와 소비자에게 강요하려 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작계에 열풍처럼 부는 페미니즘 워싱, 핑크워싱(LGBTQ+ 워싱) 등의 정치적 올바름이 있다. 페미니즘, PC와 상관없던 원작들에 2차 창작자가 페미니즘, LGBTQ+ 등의 PC적 색채를 입히고, 기존에 흥행하던 작품의 후속작에 기생하여 개연성스토리, 핍진성 등의 작품 내 요인들을 사상을 광고하는 도구로 이용한다. 이런 시류 탓에 21세기 들어 일각에서는 평론가들이 페미니즘, LGBTQ+ 등의 PC적 관점에서 그러한 작품들을 높이 사고, 이를 비판하는 대중들을[6] '못 배운 놈(Uneducated)', 남성우월주의자, 백래시 취급한다고 주장하며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행태는 원래 그 작품을 함께 만들어온 원작자와 소비자의 문화를 무시하는 것으로도 보일 수 있다.[7]

혹자는 PC로 분류될 만한 것 외를 이유로 호평한 평론가도 pc주의자라고 비판받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유튜버 거의없다는 이러한 행태가 매카시즘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동진 평론가 역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추천했다가 친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며 인터넷 방송에서 분한 마음을 드러낸 바 있다.

당연하지만 일반적인 창작자들 측에서는 "대중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우선, 작가의 태도에서 출발하라. 해결할 문제가 있거나 주장하는 바가 있거나 혹은 작가가 생각하는 식으로 세상이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면 작품이 아닌 논문을 쓰는 게 옳다. 이야기를 하는 데 흥미를 느끼고, 이웃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하고 싶고, 복잡한 세상에서 발견되는 삶의 모순을 말하고 싶으면 작품을 써라.
- 로널드 B. 토비아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김석만 옮김)>, 풀빛, 개정판, P. 85
위험 요소는 이런 것이다. 작가가 세상에 널리 증명하고 싶어하는 아이디어가 작품의 전제가 될 때,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끔 확증하는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설계할 때 작가는 계몽주의에 빠진다. 관객을 설득하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이야기의 한 쪽 축을 이뤄야 할 목소리가 질식할 것이다. 예술을 설교 수단으로 오용 또는 학대하다 보면 그 작가의 시나리오는 세상을 개종시키기 위해 영화로 서투르게 위장한 설교나 논문밖에는 안 된다. 계몽주의란, 예술은 사회의 암을 수술해 내는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고 믿는 천진한 낙관주의의 산물이다.
- 로버트 맥키, <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고영범∙이승민 옮김)>, 민음인, P.189
이러한 조언들은 예술가가 설득이나 계몽만을 위해 작품을 만들면 이야기가 일방적인 면만 부각할 여지가 커진다는 것이다.[8] 예시로 라스트 오브 어스 2는 이야기 구조를 보면 어느 한 쪽만 조명하려고 하지 않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캐릭터 간의 형평성을 지적하는 것을 보면 이 원칙이 작중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로즈 티코는 소위 계몽을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의 전형이다. 당연히 평가가 좋지 않아 후속작에선 대사 몇줄짜리 조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3.2. 창작자와의 유착 관계

"정치가가 정치 기자들을 경멸하고 예술가가 미술 평론가들을 혐오하는 것처럼 생리학자, 물리학자, 수학자들도 대개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 창조하는 사람이 해설하는 사람에 대해 갖는 경멸감은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고 명백히 정당한 것이다. 설명이나 비평, 평론 등은 이류급 인간들이나 하는 일이다."
-G. H. 하디
비평이란 비평가가 예술가의 명성에 자기도 함께 참여하려는 예술이다.
- G.J. 네이딘(미국의 연극 평론가)

작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묘하다. 평론가는 비평을 통해 다양한 평가를 작품에 내리지만, 대개 작가가 기대했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작품을 평가절하하거나 지나치게 찬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비평가는 작품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기도 하고,[예시] 이를 바탕으로 작품의 가치를 드높이기도 한다. 문학상 수상 같은 경우 대부분 평론가들이 수상작을 심사한단 점에서 비평이 작품의 가치를 드높인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일부 영역에서 평론 대상의 풀이 넓지 않거나 평론가의 풀이 넓지 못하다면, 특히 소비자와 괴리되어 있다면 평론가와 창작자는 공생관계를 가지기가 쉽다. 이때 평론가는 대상에 대하여 과도하게 칭찬만을 늘어놓고[10] 그 대가를 받고, 생산자는 그 평론을 이용해 마케팅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주머니를 불린다. 서로가 서로의 돈줄을 쥐는 형국이 된다. 이러한 비평 권력은 곳곳에 있으며, 조금만 찾아보면 문학계와 영화계, 만화계를 비롯한 곳곳에서 발견된다. 또한 위 인용문과 같이 비평가가 유명 예술가의 명성에 편승하기 위해 평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즉 자신이 비평하는 사람이 인기가 많고 영향력이 클수록 이들은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고 그와 동급이 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고 친목질의 폐해의 주범이 되기도 한다.

다만 모든 비평가가 그런 건 아니고 비평 권력을 깨부수려고 하거나 오히려 자신의 자존심 등을 내세워 주류 의견과는 일부러 정반대로 나서는 경우도 꽤 있다. 단순히 돈벌이 수준만으로 평론을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해당 분야에 대해 전문가적 지식을 갖고 있고 대중보다 우월하다는 관점의 경우는 오히려 유착도 거부하지만 대중적 시각을 인정하는 것 역시 거부하는 상황이 되기 쉽다.

당연히 평론이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줄 수는 없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소위 좆문가라고 까이는 경우가 많고[11], "제대로 평가한게 맞냐?",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직접 하든가", "악플러네" 등등 여러 바리에이션으로 까이기도 한다. 비평가는 스스로 대단한 뭔가를 만들지 못하며, 남이 만들어 놓은 것에 편승하는 사람이란 견해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창작자에게 비평가의 말을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도 있다.
" 세상에는 비평가들을 위해 세운 동상은 없다 "
- 장 시벨리우스[12]

3.3. 대중과의 괴리감

"비평가를 즐겁게 할 필요는 없다. 일반 대중이 대상이다."
- 월트 디즈니
"공연을 즐기지 못하는 공연 평론가가 진짜 사기꾼이지."
- 위대한 쇼맨 [13]

대중들이 평론가들의 평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자주 볼 수 있다. 이렇게 둘 사이에 시선 차가 생기는 이유는, 작품을 보는 방향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주로 서사의 개연성과 반전요소, 혹은 즐길거리등을 우선시하는 반면 평론가들은 이에 더해 작품의 구조, 작가의 작품세계, 메시지나 상징 등 훨씬 다층적으로 작품을 이야기해야 하는 만큼 작품에 대한 태도 부터가 다르다. 또한 대중들은 통념적, 보편적인 사상과 관념들에서 벗어난 주제, 혹은 소재를 쓴 경우에 거부감을 느끼고 꺼리는데, 평론가들은 단순히 통념에 위배됐다거나, 보편적이지 못한 주제임을 근거로 작품을 비판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있다. 즉 평론가는 오로지 대중의 취향대로 작품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둘 사이의 괴리가 있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봐야 한다. 다만 '대중과 괴리된 평론가'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주장도 있다. 대중들이 평론가의 평가에 공감하지 못하고, '좋은 작품'을 선택하는데 있어 평론가의 평가를 참고하지 못한다면 그 평론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

물론 일부 평론가들이 대중들을 낮춰보는 경향도 종종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자신의 사상과 동조하지 않으면 교육받지 않은 사람으로 몰고 가며 노골적인 선민사상을 내비치기도 한다.[14]

이러한 대중과의 괴리가 양극단으로 나뉜 대표적인 예가 조커, 디워,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프레디의 피자가게. 평론가와 관객 간의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며, 영화 평론가라는 직업군 자체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이 폭발하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15] 이는 영화 입문에 대한 진입장벽으로 깊게 남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관객들이 공감 못하는 어려운 영화가 왜 있는지, 이동진 평론가가 친절히 설명해주고있다 #

3.4. 주관과 객관 사이의 균형

감히 말하건데 현대문학이론에 대한 이해는 (문학을 포함한) '세계'를 읽어내는 다양한 패러다임을 익히는 일에 다름 아니다. 소위 '발상의 전환'이란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며,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서 우리는 그동안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패러다임들은 다른 종류의 '맹목(blindness)'이 보지 못하는 '통찰(insight)'을 제공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통찰의 이면에 맹목을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이론은 '총체적(total)' 정당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국부적(local)' 정당성만을 갖는다. 한 마디로 말해 '모든 것을 정확히 읽어내는 창(window seeing all things clearly)'은 없다...(중략)...이론들은 저마다 맹목과 통찰의 이면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폴 드망(Paul De Man)의 주장처럼 때로 맹목과 통찰은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오민석(시인, 문학평론가), 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中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평론가는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펼치되, 사실에 기반해야 한다. 따라서 주관에 갇힌 평론은 평론으로서 실격이다. 물론 평론가들도 로봇이 아닌 사람이기에 자신의 취향이 뚜렷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취향이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므로, 주관에 치우친 평론을 하면 같은 사람의 말이 어제 오늘이 달라 신뢰감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고전 작품이라 할 지라도 취향을 타는 작품은 분명히 존재한다. 일례로 심지어 김소월의 시도 일부 어르신 중엔 유치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16]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객관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객관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주관인지, 소신과 독선의 기준이 무엇인지가 분명치 못하여 키배가 벌어지는 것이다. 예시를 들기엔 다소 위험하지만, 이런 경우는 주관에 치우친 최악의 평론이라 볼 수 있다.

반면, 평론가의 소신 때문에 억울하게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다.

평론가가 주관과 객관이 균형을 이룬 평론이 가능한지는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알 수 있다. 만약 음식을 평론할 경우, 화려한 미사여구로만 현혹하려는 평론가라면, 음식의 재료, 조리 방식, 여러 맛의 조화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고, 추상적인 표현만 남발할 것이다. 반면 전문성이 있다면, "이 음식은 고수가 들어가 있어 대중적인 맛이 아니다."라고 실제 사실에 근거한 평을 내릴 것이다.[18] 그런데 식재료의 맛을 가려낼 능력이 없으면서 단지 자기 입맛에 맞지 않다고 "화학 조미료 맛이다."라고 평가했다면 객관적인 사실에 어긋난 것이다.[19]

클래식 음악 평론에 대한 필요성과 객관적인 잣대에 대한 분석기사가 실렸다. 타 예술영역에 비해 클래식 음악은 평론의 존재감이 미미한데, 그건 그만큼 클래식 음악을 듣는 계층이 엷다는 방증이다는 내용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클래식 음악 평론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기사에 언급된 탁계석 음악 평론가도 있다. 탁계석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참고. 그래도 이 경우는 아무래도 순수예술 분야이다 보니 일단 진입장벽 자체가 높다.[20] 일반 대중들이 클래식 음악 평론이란 분야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점도 크게 작용한다. 일단 기본 스펙이 대학원이니 평론가들이 다수 나오기도 어렵고, 영화나 대중음악처럼 매스컴에서 잘 다뤄 주는 분야도 아니다.

3.5. 주례사 비평

상술한 모든 문제점을 종합한 한국 비평계의 고질적 병폐로 주례사 비평이 있다. 본래 주례사는 결혼식에서 가내의 평안과 번창을 축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처럼 맥락없이 무조건적으로 작품에 대한 좋은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비평에 대해 주례사 비평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으며, 당연히 이는 멸칭이다. 칭찬 일색 ‘주례사 평론’ 판치는 시대

주례사 비평이 특히 한국 문단에서 고착화되어있는 것은 등단제도 및 학벌화의 악영향으로 풀이된다. 한국 문단은 특이하게도 등단을 통해 문학상을 받거나, 또는 등단 문인의 추천으로 문예지에 기고를 해야 비로소 '문인'으로서의 자격이 부여되는데, 여기서 볼 수 있듯 문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인 문인들에게 사정을 부탁하여 천거를 받는 방식이 흔히 사용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즉 현상공모나 신춘을 통해 등단하는 작가도 결국에는 문단에서 안면을 트고 인맥을 넓혀야 한 쪽의 지면이라도 차지하게 되는데, 이 때 누구의 심사를 받았으며 누구의 추천을 받았는지, 또 누구와 자주 어울리는지가 인물 평가의 중요한 지표로 작용된다.

더욱이 비평가로 활동하는 이들 중 대중에게도 이름이 어느정도 알려진 비평가들은 대체로 국내 상위권 대학 출신으로, 대부분은 국문과 대학원을 나오는 경우가 빈번하다. 국문과 대학원의 경우 대부분 평론계로 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연히 문단이나 출판계 쪽의 인맥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인맥이 전혀 없는 사람보다는 추천을 받거나 또는 청탁을 받기가 쉬울 수밖에 없다. 보통 문예지의 편집위원은 문학을 전공한 등단 비평가가 맡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원고 게재나 청탁의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맥이나 학연 등의 관계가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합하자면 평론계라고 하는 것이 결국 서로가 인맥으로 연결된 그들만의 리그로 종합할 수 있는데, 서로가 서로를 빤히 알다보니 날선 비평을 발표하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대학원 지도교수가 추천하여 데뷔한 작가에 대해 평론가로 데뷔한 그 제자가 문단의 시류에 반하는 평론을 쓴다면, 그 작가가 정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또는 독자나 평론가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작가의 기량이 떨어졌다고 인정하지 않는 이상 문단 내에서 좋은 대접을 받기란 어렵다. 워낙 인간관계가 촘촘하게 얽혀있다보니 조금의 분란도 일으키지 않기 위해 그저 좋은 말만 남발하는 비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주례사 비평이라는 관행이 한국 문단에 정착하게 되었다. ‘주례사비평’이 한국소설 죽인다 비판 정신 잃은 주례사 비평, 문학의 소외 자초

결국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없어 옥석을 가릴 수 없다보니 비평가와 독자의 시각차가 점차 넓어지면서 독자들이 비평을 외면하기 시작하고, 좋은 말만 남발하고 문학 이론에 입각한 고차원의 비평 작업을 등한시하면서 비평가의 수준 또한 지속적으로 하락하게 되며 결국 한국 문예비평에 대한 인지도와 신뢰도는 계속해서 추락하는 중이다. 결혼식 주례하듯 좋은 말만 떠벌리는… '주례사비평' 이젠 떠나라! 사실 주례사 비평이 지적된 지가 벌서 20년도 더 넘었지만, 워낙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한국문단 특성상 조금의 개선 의지도 보이지 않아왔던 것이 사실이고, 비평가가 아닌 학계 연구자를 제외하고 오늘날 한국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전업 문예평론가들이 주례사 비평에 매몰되어 있는데도 정작 스스로 자신이 주례사 비평을 쓰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는데, 아마 이러한 상태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4. 평론가가 직업인 사람

4.1. 대한민국

4.2. 해외

5.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당연히 좋을 리가 없다. 매우 독설적인 비판을 많이 해 주인공들에게 미움을 사는 경우가 많고 충돌이 잦다. "어디 네 놈이 뭘 만들지 기대되는구나"라고 말하면서 쓰레기라고 평가하지만 마지막에 감동하는 클리셰가 있다.

5.1. 평론가로 등장하는 인물

6. 관련 문서



[1] 비평가나 논평가라는 명칭보다는 평론가라는 명칭이 덜 부정적이고, 더 널리 쓰인다. 국어 사전의 개념을 살펴봐도 비평보다 평론이 좀 더 무난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2] 작중 후반, 평범한 라따뚜이를 먹은 뒤 이에 감명하고, 그 요리와 관련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생각을 고치게 된 뒤의 내용. 음식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든 평론가의 위치 및 스스로의 선입견에 갇힐 수 있는 한계와 그로 인해 부당한 피해를 입는 창작물의 입장, 그리고 이를 극복한 자신의 심정을 하나의 평론 속에 잘 표현해냈다.[3] Henry Marie Joseph Frédéric Expedite Millon de Montherlant, 1895.4.20 ~ 1972. 9.21. 프랑스의 현대작가로 대표작으로는 「죽은 여왕」, 「산티아고의 수도원장」이 있다.[4] 1960년대 이후 한국 가요계는 일본 엔카와 미국식 팝, 락의 추종자에 불과했던지라 이들 평론가들은 한국 가요의 계보를 만들게 되면서 해외의 대중음악이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의 시조를 찾아야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그때까지 거의 인정받지 못하던 신중현을 '발굴'하여, 한국 락의 대부라는 왕관을 씌웠다. 그러나, 신중현은 락 음악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거의 최초로 시도했으며 1960~1970년대의 대중음악계를 거의 이끌다시피 한 사람인데다 락의 대부 뿐만아니라 '한국 대중음악계의 대부'로 불릴만한 인물이라 오히려 명성이 저평가되면서 너프된 것에 더 가깝다. 여러모로 평론의 개념이 맞지 않는 것이다.[5] 델리스파이스가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하이텔 출신의 평론가들을 까기 위해 작곡한 노래가 챠우챠우 -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이야기가 있다.[6] 페미니즘, LGBTQ+ 등의 PC와 같은 사상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러한 주제 의식과 요소를 훌륭히 전달하는 작품들도 분명히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중이 비판하는 작품들은 대개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들이 뜬금없이 등장하여 몰입을 방해하고, 극의 개연성을 파괴시키며, 재미를 떨어뜨린다는 특징을 가진다.[7] 이런 선민의식적인 시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평론. 나는 이런 종류의 게임이 사회현상이 되는 흐름은 곧 '작가주의 노선의 예술 게임이 인류를 계몽할 수 있는 수준의 미디어가 되었다'는 증거라고 본다.[8] 출처는 마찬가지로 <로널드 B. 토비아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김석만 옮김), 풀빛, 개정판 2007, P. 85>와 <로버트 맥키, "Story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고영범∙이승민 옮김), 민음인, 2002>[예시] 새로운 의미부여의 대표적인 예시로 이어령이 진달래꽃을 비평한 사례를 들 수 있다.[10] 특히 대중이 나쁘게 평가하며 문제가 많은 범작이나 망작을 이상하게 평론가들은 좋게 평가하는 경우가 의외로 굉장히 많다. 이 경우엔 당연히 평론가를 불신하게 된다.[11] 사실 실제로 이렇게 비난받을만한게 의외로 평론가의 평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평론가보다 평가를 잘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12] Bengt de Törne, "Sibelius: A Close-Up" (Houghton Mifflin, 1937), p. 27.출처[13] 여담으로 위대한 쇼맨도 평론가와 대중과의 괴리감이 큰 영화 중 하나다. 물론 평론가가 안 좋게 보는 쪽으로.[14] 정작 평론가라는 직종 자체가 위에서 언급했듯 평론을 하는 데 특별한 자격 조건이 필요하지 않아 끊임없이 논란을 일으키는 직업이다. 따라서 이런 일부 평론가들의 경향은 남들에게 조금 더 전문적이고 똑똑해보이고 싶어하는 열등감의 발로로 보인다.[15] 특히 뒤의 두 작품 모두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 평론가들은 평가를 낮게 준 반면 원작 팬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들의 평가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16] 원래 소년, 소녀적인 감성을 싫어하는 성향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나이에 맞는 태도를 강요하는 한국 특성상 의외로 그런 사람이 많을 수 있다. 다만 시인의 명성 때문에 대놓고 드러내진 못하는 것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 사람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지 못했을 경우, 대놓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치고 애당초 만장일치로 지지받은 작품은 없다. 오히려 일부의 취좆에도 오랜 시간 마니아를 확보하며 살아남았기에 고전인 것이다.[17] 한 마디로 어른들이 뽀로로를 즐겨 보지 않는다 해서 뽀통령의 장기 집권을 폄하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18] 대한민국과 같이 고수가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국가들의 경우.[19] 사실 고수 같은 식재료는 비누나 화장품 맛으로 오해하기 쉽다. 오히려 화학 조미료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연스러운 맛에 가까운 경우도 있다. 품위있는 그녀에 등장하는 김치 전문점에서는 화학 조미료를 몰래 썼으면서도 자연 레시피라고 속였다.[20] 그래서 오히려 대중문화 분야에 비하면 깨끗한 면도 있다. 적어도 익스트림무비 사태에서 보듯이, 시사회에 초대를 안 해 줬다고 갑질을 하는 자격 미달자는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21] 나무위키에서는 언론인이라 기술되어 있으나 위키백과 등에서는 시사평론가로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22] 지식의 기록자 내에서 각종 안건에 대한 비평을 제시하는 것이 본래의 사명.[23] 권오중이 담당하는 프로가 유흥업소를 소재로 쓴 것에 관해 작가가 저질이라며 비판했었다. 정작 본인은 퇴폐업소에 드나드는 내로남불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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