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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6 17:29:33

임근준

파일:임근준.jpg
성명 임근준, 임우근준[1]
출생 1971년 9월 29일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경희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디자인과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술이론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술교육 박사과정 수료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활동3. 경력4. 저서5. 논란6. 여담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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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미술·디자인 비평가이자 미술사연구자, 양성애자로서 1995년부터 2000년까지 LGBT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다.

2. 활동

파일:이정우1996.jpg
1996년, 뮤지엄바 ‘살’에서 이루어진 임근준의 퍼포먼스를 보도한 기사
1995년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재학 당시 커밍아웃 1세대로서 동성애 동아리 ‘마음001’을 조직하고,[2] 여기서 더나아가 연세대 동성애 동아리 '컴투게더'와 함께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를 조직하여 최초의 동성애운동 연대 체제 형성을 주도했다. 개인적으로는 퀴어적 퍼포먼스 작업을 병행했다. #

3. 경력

4. 저서

5. 논란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단정짓기와 독선, 폭언 등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적 인물이기도 하다.

역사 전공자들과의 논쟁 과정에서 이런 말을 남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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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원본은 삭제된 상태.


문명인에 대한 나름대로의 잣대.

파일:external/pbs.twimg.com/CEK0duNVEAEi3JZ.jpg
세계사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에서 나온 아시아 비하 발언.[3]

파일:external/pbs.twimg.com/CJ4BvYKUcAAE05G.jpg
그리고 이런 식의 발언은 진중권에게 공개적으로 비판당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저 시절에는 인권 자체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반면, 당시 상대적으로 더 부유하던 아시아에서는 의외의 인권 의식이 발견되기도 한다.조선의 장애인 정책을 보면 서양에서 장애인을 악마의 자식, 저주 따위로 취급하는 미개한 시각을 못 벗어났을 때, 조선에서는 장애를 폐질(낫지 않는 질환)으로 보고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그 중에서는 시각 장애인에 대하여 독경이나 악사, 점술가 등 눈이 안 보여도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을 가져 자립이 가능하게 지원하는 정책, 자립이 어려운 장애인에 대한 보조금, 말단 관리직으로 취업 우대 등 체계성을 보였다.

경제력으로 보아도, 우리가 흔히 '문화적으로는 발전했지만 군사력과 경제력이 약한 나라' 로 인식하는 송나라만 해도 당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수준으로 전 세계 GDP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유럽이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명나라, 청나라 초 시기까지만 해도 여전히 전 세계 부의 40%가 중국 차지였다. 경제사학적으로 보면 무역 흑자의 44%를 쭉쭉 빨아들이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었던 것이다. 비록 내부적 모순과 영국이 가져온 아편 등으로 인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지만 진짜 역사학자들은 적어도 18세기에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으며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의 막을 열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살던 국가를 꼽으라고 하면 청나라, 그 다음으로 무굴 제국을 꼽는다. 전 세계 GDP의 40%, 무역흑자의 44%를 차지한 중국,세계 생산량의 25%를 담당한 무굴 제국.

6. 여담

7. 같이 보기


[1] 초명은 ‘임범묵’이었다고 하며, 이정우(Chungwoo Lee)라는 이름도 사용한다. 필명이나 아명이 많지만 본명(이쪽 계열 인물들이 그렇듯 부모 성 같이 쓰기에 의거한 성씨 표기 포함)은 이정도로 정리되는듯 하다.[2] 성소수자 인권의식이 향상되었다고 판단될 때마다 숫자를 올렸다고 한다. 홍석천 커밍아웃 당시에는 006에서 005로 하락했다고.[3] 이 당시 프로필 사진은 미술가 차지량이 퍼포먼스를 위해 임근준 흉내를 내던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실제로 임근준 본인이 차지량의 퍼포먼스에 매우 화를 내기는커녕 한동안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하며 응원해주었다. 차지량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여타 심사위원들을 설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