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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무로마치 막부 室町幕府 | ||
니시키노미하타 | 가몬[1] | |
1336년 ~ 1573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겐무 신정 | 센고쿠 시대 | |
<colbgcolor=#000> 수도 | 헤이안쿄 (현 교토) | |
정부형태 | 무가정권, 봉건 체제 | |
수장 | 쇼군 | |
주요 쇼군 | 1338년 ~ 1358년: 아시카가 다카우지 1368년 ~ 1394년: 아시카가 요시미츠 1568년 ~ 1573년: 아시카가 요시아키 | |
국성 | 아시카가 | |
언어 | 중세 일본어 | |
문자 | 한자, 가나 문자 | |
종교 | 신불습합(神佛習合, 신토, 대승 불교의 혼합) | |
종족 | 일본인 | |
통화 | 몬(文) | |
주요사건 | 1336년 아시카가 정권 수립 1338년 아시카가 다카우지, 정이대장군으로 임명 1392년 남북조 통일 1467년~1477년 오닌의 난, 막부 행정력 붕괴 1573년 오다 노부나가의 교토 함락으로 멸망 158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쇼군직 반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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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로마치 시대에 일본을 통치했던 막부. 쇼군가의 성씨 아시카가를 따서 아시카가 막부라고도 불린다.가마쿠라 막부나 에도 막부가 막부가 위치했던 도시 가마쿠라, 에도에서 이름을 딴 데 비해,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라는 도시 안에서 쇼군가의 저택인 꽃의 어소가 위치했던 한 구역 무로마치(室町)에서 유래했다. 무로마치라는 지명은 지금도 교토 시내의 도로 무로마치도리(室町通)나 몇몇 지명에 남아있다. 현재 무로마치 막부의 어소 자리에는 도시샤대학 캠퍼스가 위치해 있다.
2. 특징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고다이고 덴노에 반발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덴노의 혈통 중에 한 사람을 고묘 덴노로 옹립하여 덴노 집안이 남조와 북조로 나뉘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남북조시대) 고다이고 덴노는 저항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무가의 지지를 더 얻은 아시카가 가문이 옹립한 북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다카우지는 무가 측이 덴노를 갈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다카우지는 새로 덴노로 옹립한 고묘 덴노로부터 대신직 제외 최고위의 관직인 대납언과[2] 정이대장군의 직위를 받고 막부를 개창했다.다카우지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부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쫓겨나고 이후 쇼군직을 반납할 때까지 총 15대의 쇼군이 배출되었다.
일단 무로마치 막부 자체는 1336년부터 1573년까지 237년간 이어졌지만, 다른 두 막부와 달리 실제로 일본 전국을 제대로, 안정적으로 통치해본 기간은 고작 70여년 정도로 상당히 짧다. 우선 초반부 1336년부터 1392년까지는 수도 교토에서 막부를 열긴 했지만 남북조시대로 막부 이외에도 요시노의 남조 덴노 정권이 무로마치 막부에 대항해 정통성을 주장하며 병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권위를 확립하고 일본 전국을 제대로 통치하게 된 것은 남조가 항복한 1392년[3] 이후이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뿐, 70여년이 지나 1467년의 오닌의 난과 1493년의 메이오 정변을 거치면서 아시카가 쇼군가의 실권과 권위는 상실되고 사실상 센고쿠 시대로 들어섰다. 전국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무로마치 막부는 명목상으로는 제후들에게 상전 대우를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의 본거지인 수도 교토와 주변지역 이외의 지역에는 통치력이 전무한, 중국사 춘추전국시대의 동주나 한국사 후삼국시대의 신라와 같은 꼴이 되어 지방의 강대한 다이묘들보다 세력이 못한 일개 지역세력으로 전락한다. 그래도 주나라나 신라는 망하기 직전을 제외하면 수도 주변의 통제력은 유지했고 지방세력에 심하게 휘둘리진 않았는데, 오닌의 난 이후의 무로마치 막부는 찬찬히 살펴보면 다이묘에 휘둘리며 교토 주인이 수없이 바뀌는 난장판이 벌어졌다.[4]
물론 그 이전의 가마쿠라 막부도 조큐의 난에서 승리하기 전까지는 도고쿠 지방 이외에는 세력이 닿지 못했고 이후의 에도 막부 시대에도 각 지역에는 다이묘와 번이 있었지만 전국시대의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를 제외하면 통치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수준이라 이들에 비교하는게 실례일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즉 무로마치 막부가 일본 전국에 제대로 실권을 행사한 기간은 남북조시대가 끝난 1392년부터 오닌의 난이 일어난 1467년 전까지 75년간으로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기인 셈. 그나마 전성기는 남북조 이후 요시미츠의 시대인 1392~1408의 16년 정도.
아래의 정이대장군 표를 보아도, 매우 복잡함이 드러난다. 그나마 좀 안정적이던 초, 중기에도 쇼군이 요절하거나 공석이었던 시기도 자주 있었으며, 후기에 가면 두 명 이상의 쇼군이 동시에 존재하거나, 쇼군 자리를 뺏고 뺏기는 등 혼란이 그치지 않았다. 사실상 이 막부에 쇼군다운 쇼군은 초대 다카우지와 2대 요시아키라, 3대 요시미츠, 6대 요시노리 4명 밖에 없었다.[5]
1573년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교토에서 쫓겨나며 멸망했지만, 모리 가문의 영지이던 빈고국 토모[6]로 내려가 후에 토모 막부라고 불리는 일종의 망명 정부를 세우기도 했었다. 1588년 최종적으로 쇼군직을 조정에 반납하며 무로마치 막부는 완전히 멸망했다.
3. 역사
무로마치 시대 참조.4. 역대 쇼군
무로마치 막부 정이대장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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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의 역대 쇼군 | |||
이름 | 재임기간 | 비고 | |
1대 |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 尊氏) | 1336 ~ 1358 | |
2대 |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足利 義詮) | 1359 ~ 1368 | |
3대 | 아시카가 요시미츠 (足利 義満) | 1368 ~ 1394 | 남북조 통일 1394년 쇼군 퇴임, 출가. 태정대신에 오른 무로마치의 유일한 쇼군 1408년 사망 때까지 권력 장악 |
4대 |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 義持) | 1395 ~ 1423 | 이종무의 기해동정[7] 1423년 쇼군 퇴임. 요시카즈 사후 1429년 사망 때까지 쇼군직 대행[8] |
5대 | 아시카가 요시카즈 (足利 義量) | 1423 ~ 1425 | 요절 |
6대 | 아시카가 요시노리 (足利 義教) | 1429 ~ 1441 | 제비뽑기 쇼군 만인 공포(万人恐怖)로 통칭되는 공포정치 시행 암살 |
7대 | 아시카가 요시카츠 (足利 義勝) | 1442 ~ 1443 | 질병으로 인해 10살에 요절. 이후 6년간 쇼군직 공석. |
8대 | 아시카가 요시마사 (足利 義政) | 1449 ~ 1473 | 오닌의 난 발생 |
9대 | 아시카가 요시히사 (足利 義尚) | 1474 ~ 1489 | |
10대 | 아시카가 요시타네 (足利 義稙) | 1490 ~ 1493 | 1493년 메이오 정변으로 폐위 |
11대 | 아시카가 요시즈미 (足利 義澄) | 1495 ~ 1508 | 메이오의 정변으로 본격적인 센고쿠 시대 시작 전임 10대 요시타네의 교토 점령을 피해서 도주, 퇴위 |
10대, 복위 | 아시카가 요시타네 (足利 義稙) | 1508 ~ 1521 | 1508년 오우치 요시오키의 도움으로 복위 1521년 호소카와 타다오키와의 갈등으로 교토에서 도주, 퇴위 |
12대 | 아시카가 요시하루 (足利 義晴) | 1522 ~ 1547 | |
13대 | 아시카가 요시테루 (足利 義輝) | 1547 ~ 1565 | 미요시 요시츠구군의 공격으로 사망 |
14대 | 아시카가 요시히데 (足利 義栄) | 1568 | 시노하라 나가후사에 의해 옹립 오다 노부나가의 입경, 축출 |
15대 | 아시카가 요시아키 (足利 義昭) | 1568 ~ 1588 | 노부나가의 통일 사업 전개 1573년 교토 축출, 실각. 쇼군직은 유지 1588년 쇼군직 사임 |
[1] 문서에 있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문장과는 별개로
이 검은색 바탕에 흰색 문장도 사용되었다.[2] 일본의 관직은 좌대신, 우대신, 내대신이 가장 높고 그 다음이 대납언(다이나곤)이다.[3] 한반도에서 조선이 건국된 연도와 동일하다.[4] 이런 면에서는 후한 말의 헌제와도 일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정말 완벽한 꼭두각시 신세였던 헌제에 비하면 노부나가 포위망을 주도하는 등 그보다는 좀 더 실권이 있었다.[5] 그나마 13대 요시테루는 자질은 상당하였으나 그의 시대에 막부의 힘은 워낙 처참하게 약화되어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6] 현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7]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부른다.[8] 이 외에 특이한 점이라면 태종~세종 시기에 골치를 썩이게 한 코끼리를 선물로 준 시기가 이 시기다.
이 검은색 바탕에 흰색 문장도 사용되었다.[2] 일본의 관직은 좌대신, 우대신, 내대신이 가장 높고 그 다음이 대납언(다이나곤)이다.[3] 한반도에서 조선이 건국된 연도와 동일하다.[4] 이런 면에서는 후한 말의 헌제와도 일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정말 완벽한 꼭두각시 신세였던 헌제에 비하면 노부나가 포위망을 주도하는 등 그보다는 좀 더 실권이 있었다.[5] 그나마 13대 요시테루는 자질은 상당하였으나 그의 시대에 막부의 힘은 워낙 처참하게 약화되어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6] 현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7]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부른다.[8] 이 외에 특이한 점이라면 태종~세종 시기에 골치를 썩이게 한 코끼리를 선물로 준 시기가 이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