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의 문제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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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 / 동남아시아 / 중동 /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1 | |||
오스만 제국, 튀르키예 | 러시아 | 인도와 인도아대륙 | |
공정성 | 구성 | ||
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
1. 개요
먼나라 이웃나라 20권, 오스만제국과 튀르키예 편의 오류들을 나열한 항목이다. 세계사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소신(?)을 당당히(?) 밝힌 것치고는 오류가 굉장히 많다. 일단 목차에 따라 분류하고 오류가 실린 부분의 페이지를 적으며, 비슷한 오류가 여러 번 나온 경우 따로따로 서술하지 않고 그 오류가 처음 나온 부분에서 한꺼번에 모아서 서술한다.2. 들어가며
- 뒷표지와 11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이후 도시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꾼 것처럼 소개해 놓았다. 특히 11쪽에서는 이 도시가 오스만의 수도가 되자 '사람들은 이 도시를 '그 도시' 또는 '큰 도시'라고 불렀고, 이것이 튀르키예 말로 ‘이스탄불’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스탄불 항목에도 나오듯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10세기경부터 비잔틴인들에 의해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
- 15쪽에는 십자군 전쟁을 비롯해 유럽의 여러 전쟁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벌어졌다고 되어 있는데, 이 말 자체는 맞으나 문제는 이 책이 역사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주 독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십자군이라고 할 때 흔히 떠올리는 건 사부아 십자군, 니코폴리스 십자군, 바르나 십자군보다는 1차 십자군, 4차 십자군 등이며, 실제로 중~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숫자가 붙은 십자군은 나와도 사부아 십자군 등은 나오지 않는다. 즉 분량 관계상 말을 짧게 줄인 것으로 이해되기는 하나 보충 설명이 필요했던 부분이다.
- 16쪽에는 튀르크족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민족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되어 있으며 "튀르크족 = 지배 민족" 이라는 그림도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오스만 시대에 튀르크라는 말은 멸칭이었으며, 튀르크인들은 스스로를 오스만인으로 여겼다. 또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기 이전까지의 오스만 법. 즉 쉴레이만 1세가 제정한 오스만의 고전 법에는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상정되어 있지 않다. 즉 "지배 민족" 이라는 말 자체도 이상하며, 굳이 지배층을 나타내고 싶다면 "무슬림 = 지배층" 정도가 적절하다.
- 21쪽과 58에는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한 비잔틴 제국이 "다시는 힘을 쓰지 못하는 약하고 초라한 제국"이 되었다느니 "다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느니 하고 나오는데, 비잔틴인들로부터 대제 칭호를 받은 마지막 황제인 마누일 1세는 12세기 중엽에 재위했다. 애초에 "약하고 초라한" 상태에서 4백 년을 더 존속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 오스만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지 비잔틴 이야기를 하려고 만든 책이 아니므로 줄인 것은 이해가 가며 약하고 초라하다의 기준은 주관적인 부분이지만 표현이 너무 지나쳤다.
- 25쪽에서는 터키인 가운데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을 돌궐과 고구려의 관계 때문이라고 소개했는데,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것이 다시 부각된 것에는 6.25 전쟁의 원인도 있다. 무스타파 케말을 끝으로 책이 끝나므로 6.25 이야기까지 넣기는 어려웠을 수 있으나, 한국과 형제국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돌궐 이야기만 한 것은 아쉽다.
3. 훈(흉노) 제국
- 36쪽에서는 서로마 제국이 브리타니아를 공식적으로 버리고 군대를 철수한 것으로 묘사했는데, 실제로는 브리타니아를 사실상 포기했음에도 군대를 물리지는 않았다. 브리타니아에 주둔해 있던 서로마군이 철수한 것은 이들이 멋대로 저지른 일. 분량 관계상 이런 묘사가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 37쪽과 38쪽에서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가 아틸라에게 청혼해서 아틸라의 서로마 침공을 초래한 과정을 잘못 설명했다.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남매가 동로마에 망명했던 건 맞지만, 형제끼리 황제 자리를 두고 다투다 망명한 게 아니라 부황 콘스탄티우스 3세가 죽고 모후 갈라 플라키디아와 삼촌 호노리우스 황제의 다툼 때문에 온 가족이 호노리우스를 피해 동로마로 망명한 것이다. 그 후 423년에 호노리우스가 죽었을 때 서로마 측에서 발렌티니아누스가 아닌 요안네스를 황제로 추대하자,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지원으로 요안네스를 내쫓고 425년에 발렌티니아누스가 즉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아닌 아틸라의 도움으로 451년에 즉위했다고 잘못 적었다. 호노리아가 아틸라를 끌어들인 조건인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반을 주겠다는 내용은 맞지만, 호노리아가 아틸라를 부른 진짜 계기인 궁정 추문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아틸라와 교섭해서 훈족을 돌려보낸 로마 총대주교(교황) 레오 1세를 동로마 황제 레오 1세로 잘못 적었는데 이름, 재위기간과 활동 시기가 거의 겹쳐서 작가가 헷갈린 듯 하다.
- 39쪽에서는 이탈리아를 침공한 아틸라가 레오 1세가 제안한 강화를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소개했는데, 문제는 이 이유를 "어떤 이유에선지" 라고만 했다는 것. 책에 쓰여 있는 것처럼 "남자는 가끔 조건 없이 쿨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이며, 학자들은 막대한 뇌물을 받았거나 당시 훈족 군대의 내부 사정으로 인한 것이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40쪽에서는 헝가리를 훈족이 5세기 경 세운 나라라고 잘못 소개했다. 헝가리가 훈족을 조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맞지만, 명백한 헝가리의 기원인 머저르인이 판노니아 평원(현재의 헝가리)에 정착한 것은 9세기 후반의 일이다.
4. 괵튀르크와 셀주크제국
- 50쪽에는 탈라스 전투로 중국이 중앙아시아 영토를 잃고 현재 위구르 지역만 지배한다고 나오는데, 송나라 때 이미 당나라의 서역 영토를 잃었으며 위구르에 대한 지배가 확고해진 것은 청나라 시기의 일이다.
- 54쪽에서는 이탈리아 편에서도 범했던 오류인 로마 제국의 동서 분리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오류가 재등장했다. 제국의 영토를 두 명 이상의 황제가 나누어 다스린 것은 군인 황제 시대때부터의 일이며[1] 테오도시우스 사후의 분할도 그와 똑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결국 분열이 고착화된 것이었을 따름이지, 나라를 둘로 쪼갠다는 선언이나 칙령 따위가 있었던 게 아니다.
- 57쪽에서는 로마노스 4세의 황후와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되어 있다. 황후는 맞으나,[2] 아들은 로마네스 4세의 아들이 아니라 전대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0세 두카스의 아들인 미하일 7세 두카스이다.
- 60쪽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두고 가톨릭 세계와 셀주크 제국 사이의 충돌이라고 소개했는데, 틀린 말이다. 이 나라 자체를 셀주크 제국이라고도 한다만 룸 술탄국이라고 해야 하며, 이 나라도 1차부터 3차까지만 해당된다. 4차야 비잔틴 제국에게 막강한 타격을 준 것으로 악명 높고, 5차 이후로는 아예 셀주크가 아니라 맘루크 왕조 등으로 바뀐다.
- 62쪽에서는 셀주크 제국이 1194년에 멸망한 이유가 십자군 전쟁인 것처럼 묘사했는데, 틀린 말. 셀주크 제국의 멸망과 십자군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또 룸 술탄국이 등장해야 하는 대목이건만, 셀주크 제국이 "몇 개의 튀르크 나라로 분산"되었다고만 나올 뿐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1307년에 "완전히 명맥이 끊겨 버렸" 던 나라가 바로 룸 술탄국이다. 64쪽에서도 룸 술탄국이 나와야 할 대목임에도 언급이 없고 오스만 제국이 "100여년 전인 1194년 멸망한 대 셀주크 제국 영토의 한 부분인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났다고 되어 있다[3].
5. 오스만제국의 창건과 발전
- 65쪽과 75쪽에서는 술탄이라는 칭호가 황제와 동격이라고 했는데[4], 황제가 아니라 왕과 동격이다. 오스만 제국이 썼던 황제와 동격인 칭호는 파디샤로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메드 2세가 승격시킨 것. 이 이후로도 그 전까지 써 오던 칭호가 관습상 남아서 황제를 술탄이라고 부르는 것이 용인되긴 했다.
- 66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고전기(1299~1600), 통합기(1600~1774), 쇠퇴기(1774~1914), 해체기(1914~1922)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자료의 출처가 어디인지 모를 일이다. 특히 통합기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술탄이 이슬람 최고의 정치, 종교 지도자인 칼리프까지 겸해 명실공히 지중해 세계의 맹주로 군림했"기 때문이라는데, 황제가 칼리프를 겸하게 된 것은 16세기 초반에 재위한 셀림 1세 때의 일이고 황제께서 칼리프이기도 하시다는 것이 본격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특히 19세기 후반인 압뒬하미드 2세 때의 일이다. 즉 "통합기" 에는 정작 이 통합이라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뒤이거나 제대로 부각되지 않았었으며, 애초에 통합이라는 건 따로따로 나뉘어 있던 것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뜻인데 오스만 제국에 황제 따로 칼리프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므로 통합이라는 말 자체가 어색하다.[5] 위키피디아 영문판, 터키어판, 이탈리아어판 등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오스만 역사의 시기 구분은 6단계로, 건국 및 성장기(1299~1453), 고전기(1453~1566), 변혁기(1566~1700), 정체 및 개혁기(1700~1827), 쇠퇴 및 근대화기(1828~1908), 멸망기(1908~1922)다.[6]
- 66쪽을 시작으로 176쪽, 185쪽, 202쪽 등에 "동방의 환자", "아시아의 환자", "보스포루스의 환자" 등의 표현이 보이는데, 실제로 쓰였던 표현은 "유럽의 환자"다. 이것은 오스만 제국도 유럽 국가로 인식되었다는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이며, 작가가 쓴 표현은 사실상 그가 만들어낸 말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문제 의식이 "역사가 (서)유럽 중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라는 것인데, 이런 의식의 연장선상인가 싶지만 엄연한 유럽 국가를 유럽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다.
- 69쪽에서는 오스만 1세가 "장자 상속 제도를 도입"했다고 소개했는데, 이런 적이 없다. 바예지드 1세가 즉위하자마자 동생인 야큐브를 제거한 일이나 바예지드가 앙카라 전투로 옥사하자 아들들끼리 내전을 벌인 일은 책에도 간략하게 나오는데, 정말로 "장자 상속 제도가 도입"되었다면 동생을 제거할 일도 없었고 바예지드가 옥사하자마자 오스만이 조각난 것도 장자가 대를 잇는다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스만 사후에 장남인 오르한이 동생인 알라엣딘에게 나라를 둘로 나누어 다스리자고 제안했으나 그가 "아바마마께서는 형님만을 후계로 삼으셨다"라는 이유로 사양하여 오르한이 단독으로 2대 베이로 즉위한 일이 있는데[7], 아마 이걸 보고 오해한걸로 보인다.
- 72쪽에서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을 당시 비잔틴 측 인사가 "어차피 무주공산 서로마는 아무 의미 없었다" 라고 하는 컷이 있는데, 전혀 이렇지 않았다. 정말로 이랬다면 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의 영토를 수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쟁을 벌였던 것일까?
- 75쪽에서는 무라드 1세가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부르사에서 에디르네로 옮겼다고 했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동 수도로 삼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에디르네가 수도 급으로 승격되긴 했지만, 역대 황제들의 거처는 메메드 1세 때에 이르기까지 줄곧 부르사였기 때문이다.
- 78쪽에서는 실제 오스만 시대의 그림을 소개하면서 "술탄과 예니체리(붉은 옷의 소년들)" 이라고 해설을 달았는데, 황제가 아니라 데브시르메 징집을 담당한 관료다. 그림 오른쪽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징집된 소년들의 가족들인데, 실제 데브시르메는 일단 소년들을 뽑은 뒤 각 지역의 정해진 가정에서 교육을 하고 한꺼번에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올려보내 다시 시험을 보게 하여 재능에 따라 예니체리 교육이나 관료 교육을 받게 했다. 이 과정에서 징집된 소년들의 가족들을 수도로 부르지는 않았으므로, 황제를 그린 것이라면 소년들의 가족이 나올 수가 없다. 또 방금 썼듯이 징집이 되어 교육을 다 받으면 예니체리가 되거나 관료가 되는 두 가지 경로가 있었으므로[8], 이 소년들 가운데 나중에 예니체리가 되는 사람도 물론 있었겠지만 모두를 예니체리라고 할 수는 없다[9]. 즉 정확하게 쓰면 술탄과 예니체리가 아니라 "데브시르메 징집 담당관과 징집된 소년들" 이라고 해야 한다.
- 81쪽에서는 1389년의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을 이끌었던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를 가리켜 "세르비아의 왕"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가 칭했던 호칭은 공작에 해당하는 크냐즈였다. 세르비아의 영토를 크게 넓혀 제국으로 성장시킨 스테판 우로시 4세(스테판 두샨)가 1355년에 승하하고 무능하고 유약한 후계자 스테판 우로시 5세도 1371년에 승하하자 세르비아 제국은 공중분해되었는데, 라자르는 이렇게 분열된 세르비아를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로 목표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가 코소보 전투 당시에 세르비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쨌든 공작이었지 왕은 아니었다[10]. 세르비아 제국의 재건에 꽤 성과를 거두었던데다 코소보 전투에서 영웅적으로 전사했기에 세르비아의 민담에서는 “차르 라자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건 라자르 사후의 일이다.
- 82~83쪽에서는 무라드 1세가 세르비아 귀족 밀로슈 오빌리치에게 암살당했다고 소개했는데, 물론 이런 이야기도 전해지기는 하나 전사했다거나 전투가 끝난 이후 전장을 둘러보다가 죽은 척 위장하고 있던 세르비아인에게 시해됐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 87쪽에서는 니코폴리스 십자군을 "대규모로는 마지막 십자군이었다"라고 했는데, 애매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나 이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정확히는 십자군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느냐가 문제인데, 멀게는 대튀르크 전쟁 당시에 결성되었던 신성동맹도 십자군으로 보기도 한다. 또 이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바르나 십자군이라는 표현도 흔히 쓰이며, 형태로 보더라도 교황이 오스만 제국에 맞서 일어날 것을 촉구한데다 헝가리와 폴란드 등이 참가했으므로 십자군으로 볼 근거는 충분하다.
- 89쪽에서는 바예지드 1세 사후의 내전에 참가한 것이 쉴레이만, 메메드, 이사 삼형제라고 소개했는데, 실제로는 막내 무사까지 사형제였다. 다만 무사는 바예지드와 함께 포로로 잡혔다가 부황이 옥사한 다음 해에 풀려나 뒤늦게 내전에 참가했으므로, "바예지드 1세가 옥사한 뒤 그 아들들끼리 내전이 벌어졌고, 이걸 통합한 게 메메드 1세라더라~" 하는 정도로만 파악하고 만화를 그렸다면 무사를 생략한 게 이해가 된다.
- 90쪽에는 무라드 2세가 비잔틴 제국을 멸할 생각이 없었다고 되어 있는데, 안 했다기보다 못 한 것이다. 책에도 잠시 나오지만 바예지드 1세 때 콘스탄티노플을 툭툭 건드려 보며 절대로 호락호락한 성벽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적이 있는데다, 무라드의 치세 자체가 바예지드 1세 사후의 내전으로 인한 후유증을 완전히 회복하고 정복 사업에 다시 시동을 건 시기에 해당한다. 또 정복 사업을 벌이다가 헝가리의 야노시 후냐디에게 밀린 나머지 이미 정복한 세르비아의 재건을 인정하는 등 불리한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의미로 퇴위한 적도 있으니,[11] 콘스탄티노플 공격 같은 무리수를 두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 96쪽에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에 배를 산으로 옮긴 일을 소개하면서, 메메드 2세가 “카슴파샤로 배를 옮기라”라고 지시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아직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기도 전인데 터키어식 지명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배를 옮긴 지역이 오늘날의 카슴파샤인 건 맞는데, 이건 메메드 2세도 아니고 증손자인 쉴레이만 1세 때 재상을 지낸 귀젤제 카슴 파샤에게서 온 이름이다. 그는 이 지역에 모스크와 마드라사를 비롯한 건물들을 지었고, 그 결과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즉 메메드 2세 시대에 카슴파샤 운운하는 것은 한국으로 치면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특별시, 대전광역시 운운하는 것과 똑같다.
- 99쪽에는 콘스탄티노플 대주교가 무슬림인 황제가 로마 황제가 될 수는 없다며 반발하는 컷이 있는데, 실제로 어땠는가 하면 메메드 2세는 바로 이 대주교 게나디오스 2세로부터 비잔틴 황제의 관을 받았다. 즉 반발이 아니라 찬성했고, 애초에 게나디오스는 동서 교회 통합에 반발하며 "교황의 삼중관을 보느니 술탄의 터번이 낫다"라고 했던 사람이다.
- 99쪽부터 100쪽까지는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스스로를 로마 황제라 칭했을 때 이것이 인정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유럽의 황제는 로마 제국의 후계자임을 인정받아야 하는데 당시 동로마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가 러시아로 이주해 이반 3세와 혼인하면서 동로마의 정통성이 러시아로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논쟁의 대상이 될 부분이지, 러시아 쪽이 로마 황제로서의 정통성을 확고하게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애당초 로마 제국의 후예라는 개념은 동서가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한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간에도 대립이 존재하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러시아가 제3의 로마를 칭한다 한들 서유럽 쪽에서 인정해 줄 리도 없다. 더군다나 러시아가 제 3의 로마를 처음으로 칭했다면 혹시 모를까 항목에도 소개되어 있듯 이런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낸 나라는 세르비아였고 그 다음이 불가리아였으며 그로부터 백여년 뒤에 메메드 2세가 로마 황제를 칭한 것인데,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주장이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비잔틴 황녀와 러시아 차르의 결혼으로 설명이 안된다.
- 101쪽에서는 나폴레옹이 황제로 인정받게 된 경위에 대해 작중에서는 유럽에서는 황제를 칭하기 위해서는 서로마의 후계자로 인정받아야 했기에 나폴레옹이 신성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제위를 자신이 가져간 것이라고 서술했는데, 실제로 신성 로마 제국을 없애버린 것은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가 된 프란츠 2세였고, 나폴레옹은 오히려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노린 인물이다.[12] 애초에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 거의 모든 열강들이 너도나도 황제를 칭하게 된 경위가 바로 나폴레옹이 황제를 칭하면서 가톨릭 세계에 황제가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실 신성 로마 황제라는 자리는 사실상 30년 전쟁 이후 별 의미 없는 자리에 가까워졌고, 조지 3세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이[13] 황제가 정 되고 싶다면 대충 끼워 맞추면 될 일이었다. 러시아나 불가리아 제국 등이 황제를 칭했을 때도, 유럽에서는 황제는 황제이되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식으로 넘어갔고, 나폴레옹 이후 로마 황제라는 자리가 사실상 무의미해지자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들은 황제를 칭하게 된다.
- 101쪽에서는 또 오스트리아가 제국이 되는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단독으로 황제를 칭하는 건 어폐가 있어서 헝가리를 끌어들여 이중 제국을 형성했다고 나오는데, 오스트리아가 제국을 칭한 것이 1804년이고, 대타협은 1867년으로 무려 63년의 격차가 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선포는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제국 내에 민족주의 바람이 불어 위기가 닥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헝가리를 끌어들인 것이지, 나폴레옹의 칭제 사건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 102쪽에서는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와 흑해를 차지함에 따라 동서 교역로가 끊겼고, 이에 따라 지중해의 역할이 크게 축소되어 대항해시대의 막이 열렸다고 되어 있다. 중~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이렇게 나와 있긴 한데, 사실이 어땠는가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오스만 제국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장사를 하는 유럽 상인들이 지불하는 관세를 받아 꽤 짭짤한 이득을 챙겼기 때문이다. 다만 이 "유럽 상인들"은 베네치아공화국과 프랑스 등으로 국한되어 있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이 대서양으로 진출한 것은 동서 교역로가 끊겼기 때문이 아니라 지중해 무역에 뒤늦게 뛰어들어도 이 교역로에서 베네치아와 프랑스를 제치기는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6. 제국의 전성시대
- 106쪽에서는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었다고 되어 있는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이렇게 되어 있긴 하지만 오류다. 오스만 시절에 이 도시의 공식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을 튀르크어식으로 읽은 코스탄티니예였기 때문[14]. 또 확실한 것은 아니나 일부 역사가들의 기록에는 메메드 2세가 이 도시에 "이슬람볼"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도 되어 있다.
- 107쪽에 오스만 제국의 종교 분포를 표시한 지도가 있는데, 원래 이 지도에는 진한 노란색과 연한 노란색 두 색상이 쓰였으며 그 중에 진한 노란색이 유대교이고 연한 노란색은 가톨릭 및 개신교다. 그런데 지도 아래의 해설에는 연한 노란색이 빠져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유대교를 믿는 인구가 많지 않은 것은 변함이 없으므로 가톨릭 및 개신교를 유대교로 잘못 알아보기 아주 좋다.
- 108쪽에는 오스만 제국의 최고 국정 회의를 "디반"이라고 읽었는데, 터키어 Divan은 "디완"으로 발음된다. 또 경복궁의 근정전보다 작다고 폄하하는데, 이 둘은 비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조선의 국정회의는 국왕이 참석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오스만의 디반 회의는 황제가 참석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참석이 원칙이었으나 메메드 2세를 시작으로 황제를 알현하는 일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 권위를 높이자는 목적에서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바꾸고, 회의는 재상이 주재하고 회의가 끝나면 그가 황제를 알현하여 회의의 결정을 보고하고 그대로 실행할지 재가해 달라고 요청했다[15]. 즉 근정전이 아니라 의정부나 비변사의 관청과 비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덧붙여 이는 황제의 권위가 추락한 이후 재상을 중심으로 제국이 굴러가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황제를 알현하는 과정만 생략하면 그대로 어전회의가 되기 때문이다[16].
- 109쪽에서는 하렘의 어원인 아랍어 단어 하람이 '하림'으로 잘못 표기됐다.
- 111쪽에서는 바예지드 2세의 별명을 "아달레트"라고 표기했는데, 터키어 Adlî는 "아들리"라고 해야 한다.
- 113쪽에서는 셀림 1세의 별명을 "야부즈"라고 표기했는데, Yavuz는 "야우즈"가 맞다.
- 114쪽에서 셀림 1세가 "미개하고 가난에 찌든 유럽보다 풍요로운 동방과 남방으로 진출한다"는 대사를 치며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미 이 시점(16세기)에 서유럽은 부나 인구 면에서 시리아와 이집트를 아득히 추월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이러한 유럽의 힘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며, 애초에 제국의 중추는 다른 어떤 아시아 지방도 아닌 유럽의 끝자락인 발칸 반도였다. 작가가 이따금 표출하는 고질적인 옥시덴탈리즘이 이상하게 발현된 예.
- 114쪽에는 "찰디란 전투"라는 표기가 있는데, 현대 터키어로 Çaldıran이라고 씀을 감안하면 찰드란이 맞다. 찰디란이라고 표기되는 경우도 많긴 하고 저자가 터키어를 잘 몰랐다면 그나마 넘어가겠으나, 27쪽에서 터키어 ı는 i가 아니라고 설명하기까지 했으니 이해가 안 된다.
- 116쪽과 117쪽에서는 러요시 2세가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한 뒤 헝가리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의 왕이 되었지만 오스만 측이 합스부르크 왕가와 적대하던 야노시 1세를 꼭두각시로 세웠다고 되어 있는데, 대충 보면 맞는 말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잘못됐다. 일단 아노시 서포여이는 모하치 직후의 헝가리에서 꽤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헝가리 귀족들이 지지한 건 페르디난트가 아니라 이쪽이었다. 다만 현대에는 슬로바키아로 떨어져나간 지역의 귀족들은 페르디난트를 지지했다.
- 117쪽에서는 헝가리가 도나우 강을 경계로 합스부르크령과 오스만령으로 반반 나뉜 것처럼 서술했는데, 자세하게 소개할 수 없는 사정은 알겠으나 틀렸다. 헝가리를 둘러싼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분쟁이 계속되던 와중인 1540년에 야노시 1세가 승하하고 갓난아이인 야노시 2세가 뒤를 잇자 오스만 제국은 태어난 지 이제 두 달 된 아이에게 헝가리를 맡기는 것은 불가하다고 판단, 1541년에 헝가리 중부를 직할령으로 삼고 야노시 2세에게는 헝가리 동부를 남겨 주었다. 즉 헝가리 서쪽 3분의 1은 합스부르크령, 중앙부 3분의 1은 오스만령, 동부 3분의 1은 동헝가리왕국, 이후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되었다고 하는 게 옳다. 덧붙여 오스만령 헝가리와 합스부르크령 헝가리의 경계가 도나우 강인 것도 아니었다.
- 120쪽에서는 오스트리아가 사파비 제국을 "꼬드겨"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게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거리가 먼데다 오스만이 사이에 버티고 있어 연락하기가 어렵고 그에 따라 손발을 맞추기도 어려워서 그렇지 이 둘도 오스만과 프랑스가 그렇듯이 동맹 관계였다. 오스트리아가 사파비를 꼬드겼다는 식으로 서술할 수 있다면 오스만이 프랑스를 꼬드겨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게 했다고도 쓸 수 있다.
- 121쪽에는 "아마샤 조약"이라는 표기가 있는데, 터키어 Amasya는 아마시아라고 써야 한다.
- 122쪽에는 "쉴레이만 법전"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쉴레이만이 오스만의 고전 법을 정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쉴레이만 법전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가 정비한 법은 카눈니 오스마니(Kanun‐i Osmani). 즉 오스만 법이라 불린다.
- 124쪽과 126쪽에서는 휘렘 술탄을 언급하면서 황후에 해당하는 직위를 '하렘 술탄'이라고 썼는데, 황후는 하세키 술탄이라고 했다. 최초의 하세키 술탄은 휘렘이었으며, 이브라힘 1세 때 8명의 후궁이 동시에 이 직책에 임명되어 변질되더니 18세기부터는 쓰이지 않게 된다. 이후 하렘의 최고직은 카든에펜디라고 불리게 되지만, 황후라고 보기는 많이 부족한 위치였다.
- 125쪽에서는 휘렘 술탄을 쉴레이만 1세에게 바친 사람이 이브라힘 파샤였으며, 그는 이후 휘렘에게 암살당했다고 소개했다. 다만 이브라힘이 바쳤다는 것은 카더라 정도일 뿐 정설이 아니며[17], 휘렘과의 전쟁에 패해 숙청당한 건 맞지만 암살이 아니라 처형이었다. 다만 밤에 농아 처형인들을 이브라힘 파샤의 집으로 보내 암살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기는 한다.
- 126쪽에서는 휘렘 술탄이 황제의 후궁은 한 명의 아들만을 낳아야 한다는 전통을 깨고 아들 넷을 낳았다고 되어 있는데, 누가 이런 소리를 하는지 의문이다. 2대 황제 오르한의 후궁 가운데 닐뤼페르 하툰은 무라드 1세를 비롯해 아들 셋을 낳았으며, 무라드 1세의 후궁인 귈치첵 하툰도 바예지드 1세 등 아들 둘을 낳았다. 아마 쉴레이만이 셀림의 외아들이라 평화롭게 황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18]는 것이 어찌저찌 변형되다 보니 이렇게 되었는가 싶기는 하다.
- 127쪽에서는 셀림 2세가 오스만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처음으로 원정을 직접 지휘하지 않았다고 소개하며, "그건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도 마찬가지다"라는 셀림의 대사가 있다. 그러나 셀림 2세와 펠리페 2세를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데, 스페인에는 왕이라고 하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복에 나서야 한다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19]. 또 자기 변명이라는 것이 본래 이런 것이긴 하지만 허구한 날 황궁 안에 틀어박혀 술이나 마시고 계집질이나 했던 셀림과 치세 내내 열심히 정사를 살피느라 바깥 출입도 좀처럼 하지 않던 펠리페를 비교하는 건 펠리페에게 매우 미안한 일이다.
- 130쪽에서는 2차 빈 공방전을 소개했는데,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제국은 무려 150여 년이나 싸워 왔고, 이제 드디어 그 끝장을 봐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라는 식의 표현이 있다. 하지만 당시 두 나라 모두 "이것이 마지막 싸움이다"라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았으므로, 잘못된 표현. 많이 양보하여 2차 빈 공방전이 이 두 나라 간의 마지막 전쟁이었다면 문학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이해할 수 있긴 하나, 2차 빈 공방전과 그에 뒤따른 대튀르크 전쟁 이후로도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는 세 번의 전쟁을 더 치렀다.
7. 기우는 제국
- 145쪽에서는 2차 빈 공방전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날개 꺾인 독수리 신세"가 되어 "사방에서 매떼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소개했는데, 2차 빈 공방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쇠퇴해간 것은 맞지만 서유럽 국가들이 곧바로 오스만을 만만한 호구로 여기게 되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책에서도 바로 이어서 이야기하듯 20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냈는데, 200년을 더 갔다는 것 자체가 이전만은 못하더라도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며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뜻이다. 앞서 비잔틴 제국이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약소국으로 전락했다는 부분과 함께 지면상 축약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나, 표현이 너무 거칠다.
- 147쪽에서는 대튀르크 전쟁에서 강화조약인 카를로비츠 조약을 체결한 오스만 측이 "이슬람 세력이 아닌 국가들과 평화 조약을 맺기는 처음"이라고 했는데, 베네치아공화국이나 합스부르크 제국과 전쟁을 치르고 오스만 측에 영토를 할양하며 연공을 바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 적이 여러 번 된다. 또 "이거야 불리한 조약만 센 거 아닌가"라고 할 수도 없는 게, 2백년 전 무라드 2세 때 이미 정복된 세르비아가 재건되는 것을 인정한다는 등 불리한 조약을 체결한 적이 있다[20].
- 157쪽에서는 "정교를 믿는 기독교 신자가 다수인" 발칸 반도의 주민들이 "이슬람을 믿는 아시아계 민족인 튀르크인들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언제나 큰 불만이었"다고 했는데, 종교는 맞는 얘기라고 쳐도 민족을 이유로 불만을 품은 것은 "언제나"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으로 민족주의가 확산된 이후부터 이야기다. 위에서 썼듯이 오스만의 고전 법에는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나오지 않으며, 그리스인이나 세르비아인 등이라도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되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고위 장교나 고관이 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 또 오스만 제국은 투르크인이 세운 건 맞지만, 방금 전술했듯이 오스만 제국은 민족이니 혈통이니 하는 것을 크게 따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제국을 세운 투르크인도 제국 초창기에 다른 민족들과 통혼하며 투르크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진작에 사라지고 없는 지 오래였다.
8. 개혁의 몸부림 탄지마트
- 165쪽을 시작으로 173쪽, 187쪽, 188쪽, 189쪽, 192쪽 등에 "압뒬라지즈"라는 표기가 보이는데, 이 이름의 터키어 원어 표기는 Abdülaziz이며 Abdül과 Aziz가 결합한 형태이다. 이 경우 서로 이어서 쓰면 안 되며 구분해서 써야 하므로, 압뒬라지즈가 아니라 압뒬아지즈가 맞다[21].
- 169쪽에서는 탄지마트 개혁을 소개하면서 무슬림이 아닌 자는 법정에서 증인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되어 있는데, 틀린 이야기다. 먼저 개혁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에서는 피고의 종교에 따라 법정을 여럿 운영했다. 즉 기독교도가 피해자인 사건이라면 기독교 법정에서, 아르메니아 정교도가 피해를 본 사건이라면 아르메니아 정교 법정에서 판결했다. 그리고 기독교 법정의 경우 당연히 기독교도가 증인이 될 수 있었고. 다만 무슬림과 비(非)무슬림이 연관된 사건은 피고가 누구든간에 이슬람 법정에서 처리되었는데, 이 때도 비무슬림이 증언을 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다만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증언이 서로 어긋날 경우 무슬림의 증언이 채택되곤 했는데, 증언을 하기 전에 의례적으로 "알라와 무함마드께 맹세코 진실만을 말할 것이며~" 하는 식의 말을 했기 때문. 무슬림이 아니라는데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를 믿을 수 있겠느냐는 이유였다.
- 170쪽에서는 탄지마트 이전까지 오스만의 군사 제도가 "전쟁 때마다 원칙 없이 백성을 데려다 병사로 내몰던" 것이라고 썼는데, 이랬다면 오스만이 그렇게 강대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책에는 언급이 없지만 시파히 같은 경우 봉토로 받고 있는 티마르의 면적에 따라 몇 명의 보조병을 동원할 것 등등이 세부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또 백성을 데려다 병사로 내몰았다는 것이 보조병인 아자브를 가리켜 한 말이라면, 이것은 전쟁이 터졌을 때마다 모집을 한 것이었지 강제로 내몬 것이 아니었다.
- 171쪽과 258쪽에서는 탄지마트와 무스타파 케말의 개혁을 일본과 비교했는데, 탄지마트가 일본의 개혁보다 30년 이른 것이었다거나 모든 터키인들이 성을 갖게 된 것이 일본보다 60년 늦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웃나라도 아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도 많지 않은 오스만, 터키와 일본을 서로 비교한 것은 괴이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아마 오스만과 터키를 "동양". 즉 아시아 국가라고 규정하고 비교한 것 같은데[22], 상술했듯이 오스만 제국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유럽 국가였던데다 터키는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지만 터키 스스로 유럽의 일원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역사, 문화, 외교 등을 보면 아시아라고 규정하기 쉽지 않다. 이 책 자체가 한국인을 주된 독자층으로 상정하고 만들어졌으니 한국과 비교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일본과의 비교는 여러모로 부적절하다.
- 172쪽과 173쪽, 189쪽에서는 탄지마트를 실패한 운동으로 규정했는데, 책에서 지적했듯이 부채 문제라든가 이런저런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실패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갑오개혁을 보더라도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일본의 압력으로 인한 것이었다든가 하는 등 한계를 지적할지언정 실패라고는 하지 않지 않는가. 또 189쪽에서는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군주정으로 나아간 것을 두고 "이제부터 술탄은 실권 없는 허수아비가 되고 신하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두르게 되었으니 대혼란은 불을 보듯 뻔했다"라는 식으로 소개했는데, 정작 이 대혼란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고[23] 압뒬하미드 2세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오히려 그가 전제군주정을 펴려 한 것을 비판하여 앞뒤가 맞지도 않는다.
- 177쪽과 178쪽, 181쪽에서는 크림 전쟁의 발단을 소개했는데, 대체로 맞는 이야기지만 러시아와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내정에 간섭하려 한 것은 밀레트 제도와 관련이 있다. 황제가 여러 종교의 수호자라는데 이 역할을 제대로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니 자신들이 대신 기독교/정교 밀레트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것. 마침 밀레트 제도도 책에서 소개되어 있으니, 두어 컷 정도 할애하면 이런 배경까지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9. 무너져내리는 제국
- 193쪽에서는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언급하는데,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독자가 간과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독일 통일 당시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 민족의 하나로 통일의 대상으로 지목되었으나, 오스트리아는 독일 민족 이외에 다른 민족이 사는 지역까지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포기하려 하지 않아 통일에 걸림돌이 되었기에, 결국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러 패해 연방에서 쫓겨난 것이다.[24] 그러나 작중에서는 이러한 설명 없이 그저 오스트리아를 외세라고만 부르고 있어 마치 오스트리아가 독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라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25] 당장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붙어있으며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만 가지고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능한 부분인데도 말이다. 근데 정작 작중에 나온 독일 연방의 지도에는 독일의 범주에 오스트리아가 버젓이 끼어 있다(...).
- 215쪽부터 216쪽까지는 2차 발칸전쟁이 불가리아의 지나친 영토 독점이 원인이 된 전쟁이라고 소개했는데, 실제로는 세르비아의 영토독점[26]에 반발한 불가리아가 전쟁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불가리아 역시 독립 직후부터 대불가리아주의를 주창하며 주변국들의 경계심을 샀으며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차지한 마케도니아를 힘으로 빼앗으려 한 것도 사실이다.
10. 제국의 멸망
- 233쪽에서는 비잔틴 측 인사가 "로마 말은 시골말이며 그리스어가 표준어다"라는 대사를 치는 컷이 있는데, 동로마 제국 초기의 역사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까지만 해도 라틴어는 공용어로서, 로마법 대전 역시 라틴어로 쓰인 것이었다. 다만 이후 영토가 그리스어권으로 급격히 축소되면서 공용어가 그리스어가 되었고, 그 때쯤이면 미하일 3세 같은 황제가 대놓고 라틴어를 폄하하는 등 옛 로마의 언어를 타자화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다.
11. 튀르키예 공화국
- 258쪽에서는 터키의 성 Göker를 "괴커"로 표기했는데, 괴케르가 맞다.
[1] 영토를 나누지 않고 황제가 둘이었던 사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가 처음이다.[2] 일단 전대 황제의 황후랑 결혼해서 즉위한 거라, 황후는 맞다.[3] 덧붙여 룸 술탄국이 이렇듯 통째로 잘려나간 것은, 한국사로 비유하면 "신라는 신문왕 때까지는 잘 나갔으나 이후 허약해져 여러 지방 세력가들의 손에 의해 나라가 산산조각났으며, 그 세력가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왕건이라는 사람이 나라를 재통합해 고려를 세웠다" 라고만 소개하고 혜종과 정종은 이름만 언급한 다음 광종으로 넘어가는 격이다.[4] 심지어 75쪽에서는 같은 페이지도 아니고 같은 컷에 "술탄(왕)" 이라는 단어와 "술탄(황제)"라는 단어가 나란히 나와 있다. 작가의 실수가 아니라면 황제와 왕의 차이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의심되는 대목이다.[5] 시기 구분이라는 건 정답이 없는 것이며 각자 자유롭게 할 수 있으므로, 저자가 "내가 만든 구분이다!" 라고 주장해도 문제가 안된다. 다만 통합기라는 것이 이렇게 어색하다는 것은 문제가 되며, 책의 뒤쪽에 나오듯이 저자는 1683년의 2차 빈 공방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시기 구분에서는 1683년이 아니라 1774년이 통합기와 쇠퇴기의 경계이므로 모순이 발생한다.[6] 이 구분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기준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쾌하다. 1453년은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해, 1566년은 쉴레이만 1세가 서거한 해, 1700년은 대튀르크 전쟁이 종결된 무렵이며, 1828년은 예니체리가 해산된 무렵, 1908년은 청년 튀르크당이 봉기하여 압뒬하미드 2세의 전제정치를 무너뜨린 해다. 그리고 이 다섯 모두 이 만화에도 나올 정도로 중요한 사건들이다.[7] 여담으로 오르한은 동생의 겸양에 감격하여 그를 재상으로 삼고 통치를 돕게 했는데, 이로써 그는 오스만 제국의 첫 번째 재상이 된다.[8] 여담이지만 시작이 이렇다는 것이고, 예니체리라고 평생 군인 일만 하거나 관료가 된다고 평생 문서만 만졌던 것은 아니다. 오스만 제국은 각 지역에 파견한 지방관들에게 그 지역의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군사권도 주었고, 유목전사집단에서 출발한 나라답게 관료들의 공과를 평가하여 승진과 강등을 결정할 때 중요하게 보았던 것 가운데 하나가 군공이었기 때문이다. 즉 관료 수업을 받다가 지방관으로 나간 경우라도 유사시에는 전투에 임해야 했고, 반대로 예니체리 군단장이라도 중요한 국경 지대의 지방관으로 부임하기도 했다.[9] 잘 이해가 안 된다면, 문과와 무과에 급제한 사람들이 국왕을 알현하는 그림이 있다고 하자. 이 때 "국왕과 문무과 급제자들" 이라고 해야 정확하지 "국왕과 무과 급제자들" 이라고 하면 문과 급제자는 뭐가 되는가.[10] 이후 라자르의 아들로 중세 세르비아의 마지막 번영기를 이끌었던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데스포트 직을 받기도 했다.[11] 이 때 즉위한 사람이 어린 메메드 2세였다. 다만 즉위했을 당시 만 12세로 너무 어렸던데다 이것을 기회로 본 헝가리와 폴란드 등이 침입해 와 무라드가 급히 군대를 이끌고 나서야 했으며, 이후 아들을 폐위시키고 복위했다.[12] 다만 나폴레옹도 처음에는 신성 로마 제위를 노리다 오스트리아가 제국을 선포해 별 의미가 없어지자 태도를 바꿔 신성 로마 제국 폐지를 요구했다. 그렇다 해도 제국을 직접 멸망시킨 것은 프란츠 2세가 맞다.[13] 조지 3세 치하에 미국이 독립해 나가자 신하들이 울적함도 달랠 겸 영국과 아일랜드의 황제라는 논리로 조지 3세에게 황제 칭호를 쓰도록 권유한 일이 있다.[14] 다만 코스탄티니예를 강요한 건 아니어서 이스탄불이라는 이름도 널리 쓰였고, 관직명 중에서도 현대 대한민국의 수도방위사령관 쯤 되는 자리를 이스탄불 아아스라고 했고 서울특별시장을 이스탄불 에펜디시라고 불렀다.[15] 이 때 황제는 니들은 다 틀렸고 내 말이 맞다며 회의의 결정을 뒤집을 수도 있었으나, 재상을 비롯해 제국의 최고 브레인들이 모인 자리이니만큼 결정을 뒤집기보다 존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재상이 황제를 어떻게 알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규정이 없어서, 황제의 성향이나 사정에 따라 직접 만날 수도 있었고 회의의 결론을 문서로 적어서 제출하라고 명하기도 했다. 한편 다른 나라에 전쟁을 선포해야겠다거나 하는 등 황제가 디완 회의에서 논의되기를 원하는 사항이 있을 경우, 환관을 회의장으로 보내 이러저러한 것을 논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다.[16] 나중에는 이러다 못해 디완 회의는 건성건성 하고 정해진 회의 시간이 끝나면 다 같이 재상의 저택에 모여 제대로 국정을 논의하기 시작하는 관행도 나타났고, 한 술 더 떠서 조선 시대의 편전이나 고려 때의 교정도감처럼 아예 재상이 거처도 하고 이런 회의를 비롯한 업무를 보기도 하는 것을 상정한 재상 전용 관저가 건설되기도 했다.[17] 일본 만화 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에서 이렇게 그리긴 했는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증 오류가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18] 엄밀히 말하면 위베이스라는 이복동생이 있긴 했다. 다만 생모가 행실에 문제가 있다 하여 아들을 낳기 전에 출궁당했는데, 이 경우는 황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처형되는 대신 부황 셀림 1세와 이복형 쉴레이만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위베이스는 바그다드 대총독에 올라 오늘날의 예멘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다가 전사했는데, 소식을 전해들은 쉴레이만은 아우가 죽었다며 통곡했다고 한다.[19] 상술했듯이 오스만 제국은 본래 유목전사집단에서 출발한 나라이며, 따라서 나라 체제가 제대로 잡힌 이후에도 상당히 상무적이었다. 특히 황제라고 하면 웬만큼 큰 전장에는 친정을 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으며, 셀림 2세 이전까지 가장 문치적(文治的)인 황제였던 바예지드 2세도 재위 초에 몰다비아 원정을 단행한 적이 있었다.[20] 다만 카를로비츠 조약이 오스만의 외교사상 의미가 있긴 한데, 무라드 2세 때의 조약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오스만이 승자 측에서 체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정교한 외교술 같은 것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오늘날의 외무장관에 해당하는 자리는 카를로비츠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본래 디완 회의에서 기록을 담당하고 보관하는 니샨즈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려다 보면 이때까지 이 나라와 오스만 제국의 관계가 어땠으며 어떤 조약들을 체결해 왔는지 살펴봐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즉 "네가 다른 나라와의 조약을 보관해 왔으니, 그걸 잘 읽어보고 새 조약을 체결하는 일에 임하라." 라는 식으로, 이후 니샨즈가 외무장관 역할까지 맡게 된다.[21] 이와 비슷한 예는 이스탄불의 한 구역인 Beyoğlu. ğ는 음가가 없고 앞의 모음을 장음으로 발음하라는 것임을 안다고 하더라도 "베요올루" 로 표기하기 딱 좋은데, Bey(베이)와 Oğlu(아들)의 결합이므로 "베이오올루" 로 써야 한다.[22] 174쪽에서 탄지마트를 청나라의 양무 운동과 비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 둘은 비교하는 게 많이 어색하지는 않으므로 문제가 덜하지만.[23] 심지어 이 부분은 "한 명의 황제가 통치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고 여러 관료들이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독재정치야말로 바람직한 것이다" 라는 식으로도 읽을 수 있다.[24] 이렇게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의 통일을 주장한게 대독일주의,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의 통일을 주장한게 소독일주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제2제국은 소독일주의 제3제국은 대독일주의와 비슷하다.[25] 사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조명한 적이 없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일에 대해서도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일원이었다는 얘기는 전혀 없고 뜬금없이 히틀러가 "내가 태어난 곳이었으니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한 나라인겨!"라는 황당한 소리를 하는 내용만 나와있다.[26] 그렇지만 여기에 세르비아도 할 말이 있는게 원래 세르비아 몫이었던 알바니아를 삼국 동맹이 압력을 넣어 토해냈기 때문이다. 또 불가리아가 차리그라드를 차지하겠답시고 트라키아에 집중하는 사이 세르비아가 차지한 북마케도니아는 세르비아가 열심히 피를 흘려 정당하게 차지한 영토인데 줄 이유가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