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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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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레이만 첼레비 무사 첼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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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국 제5대 술탄
메흐메트 1세
چلبی محمد[1], [2]محمد اول | I. Mehmed Çelebi[3]
파일:Mehmet_I.jpg
출생 1386년
오스만국 부르사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부르사도 부르사)
사망 1421년 5월 26일 (향년 35세)
오스만국 부르사
(現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부르사도 부르사)
묘소 튀르키예 마르마라주 부르사도 부르사 녹색 영묘
재임기간 아나톨리아 술탄
1403년 ~ 1413년 7월 5일
재위기간 오스만 술탄
1413년 7월 5일 ~ 1421년 5월 26일
서명 파일:메흐메트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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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 아버지 바예지트 1세
어머니 데블렛 하툰(출신: 튀르크인)
형제자매 셰자데 에르투으룰, 이사 첼레비, 무스타파 첼레비, 무사 첼레비, 셰자데 이브라힘, 셰자데 카슴, 셰자데 유수프, 셰자데 하산, 무사 첼레비, 쉴레이만 첼레비, 셰자데 외메르, 이르혼두 하늠, ............. 하늠, 파샤 멜렉 하툰, 술탄 파트마 하늠, 오루즈 하늠, 훈디 파트마 하툰, 파트마 하늠
후궁 샤자데 쿰루 하늠 (출신: 튀르크인)
셰흐자데 하툰(출신: 튀르크인)
에미네 하툰(출신: 둘카디르 베이국)[4]
자녀 메흐메트 첼레비, 아흐메트 첼레비, 무라트 2세, 카슴 첼레비, 무스타파 첼레비,
마흐무트 첼레비, 유수프 첼레비, 아흐메트 첼레비, 오르한 첼레비, 인지 하툰, 셀축 하툰, 술탄 하툰, 하티제 하툰, 하프사 하툰, 일랄드 하툰, 아이셰 하툰
종교 이슬람 (수니파)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앙카라
2.2.1. 배경: 형제 살해의 관습2.2.2. 초창기
2.2.2.1. 이사 대 메흐메트2.2.2.2. 쉴레이만 대 메흐메트
2.2.3. 적의 적은 아군2.2.4. 루멜리아와 아나톨리아2.2.5. 최후의 결전
2.3. 치세2.4. 무스타파의 반란2.5. 셰이크 베드렛딘의 난2.6. 사망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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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술탄국의 5대 베이이자 3대 술탄.

1403년 앙카라 전투 이후의 내전(1402~1413)을 종식시키고 즉위했으며, 내전으로 인한 피해도 거의 극복해내는 데 성공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술탄 바예지트 1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황자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제왕 교육을 시킬 겸 자질을 알아보기 위해 지방 총독으로 내려보내는 관습[5]에 따라 1399년에 아마시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2.2. 앙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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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년, 바예지트 1세는 다섯 아들들인 쉴레이만, 이사, 무스타파, 메흐메트, 무사를 데리고 티무르와의 결전에 임했다. 하지만 결과는 바예지트 본인을 비롯해 무스타파, 무사가 사로잡힐 정도로 오스만의 대패로 끝났고, 쉴레이만과 이사, 메흐메트는 가까스로 전장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오스만 술탄국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이전까지 오스만의 신하국이었던 동로마 제국왈라키아 공국[6], 세르비아 공국 등은 오스만의 신하 자리를 박차고 나갈지 계속 신하로 남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오스만이 이전까지 정복했던 튀르크계 공국들[7]이 대거 재건되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오스만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2.2.1. 배경: 형제 살해의 관습

오스만의 내전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오스만이라는 나라를 세운 튀르크인이 유목민족이라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몽골이 그랬듯이, 튀르크인 역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아들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물려주는 관습이 있었다. 그리고 오스만 1세가 서거했을 때에도 장남이자 후계자로 임명된 오르한은 동생인 알라엣딘에게 영토를 나누자고 제안했지만, 알라엣딘은 아버지가 다음 베이[8]로 지명한 사람은 형님 뿐이며 그러잖아도 작은 나라를 둘로 쪼갤 수는 없다고 하며 오르한에게 자리를 양보했다.[9] 이로써 오스만 베이국에는 국가라는 유산을 여러 왕자들에게 분할 상속하는 전통 대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라가 찢어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지침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러한 형제 간의 우애도 잠시뿐이었고, 바예지트 1세가 동생인 야쿱을 제거하고 즉위한 것을 시작으로 '나눠 가질 수는 없는 나라를 그렇다면 누가 가져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론이 장남이 아니라 여러 왕자들 중 가장 뛰어난 자가 다음 술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가장 뛰어난 자' 란 곧 '가장 뛰어난 재능. 특히 군사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자' 를 의미했다.[10]

그리고 1403년에 바예지트 1세가 서거하자, 그 아들들은 '나눠 가질 수는 없는 나라를 그렇다면 누가 가져야 하는가' 를 둘러싸고 싸워야만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2.2.2. 초창기

앙카라 전장에서 메흐메트를 구한 인물은, 알바니아계인 바예지트 파샤였다. 그는 메흐메트가 얼마 전까지 통치하던 아마시아가 고향이었으며 따라서 메흐메트를 아마시아로 데려갔는데, 이후 그는 내전이 끝날 때까지 메흐메트의 오른팔로 활약하게 된다.

한편 같은 무렵, 1396년의 니코폴리스 전투에 참가한 경험이 있으며 앙카라 당시에도 우익을 지휘했던 첫째 쉴레이만은 바예지트 1세를 섬겼던 재상 찬다를르 알리 파샤와 함께 루멜리아[11]를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동로마 제국과 겔리볼루 조약을 체결하여 마르마라 해 연안의 영토를 모조리 반환하는 대신 이후 벌어질 내전에서 자신을 도울 것을 약속받았으며, 부르사와 함께 당시 오스만 술탄국의 두 수도 가운데 하나였던 에디르네[12]에서 술탄을 자칭했다.

다른 한편, 아버지와 함께 포로로 잡혔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풀려난 막내 무사는 아시아 쪽의 수도인 부르사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둘째 형인 이사의 공격을 받아 부르사를 빼앗겼고, 바예지트 1세에게 정복당했다가 앙카라 전투 이후 재건된 튀르크계 공국인 게르미얀 공국으로 망명하여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스만령 아나톨리아 반도의 중심인 부르사를 차지한 이사는, 서쪽에 쉴레이만. 동쪽에 메흐메트의 세력이 있어 협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여 동로마 제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메흐메트는 이사에게 아나톨리아 반도를 함께 나누자고 제안했지만, 이사는 자신이 형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즉시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요컨대 내전이 시작된 1403년 당시, 바예지트의 아들 5형제 가운데 첫째인 쉴레이만은 루멜리아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고 오스만령 아나톨리아 반도는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넷째인 메흐메트, 서쪽은 둘째인 이사가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막내인 무사는 이사의 공격을 받아 게르미얀 공국으로 망명했고, 셋째인 무스타파는 여전히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다.
2.2.2.1. 이사 대 메흐메트
이사에게서 즉시 항복하라는 답변을 받은 메흐메트는, 즉시 공세에 나섰다. 그리고 1403년에 벌어진 두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 이사는 경험 많은 정치가이며 자신이 재상으로 삼았던 티무르타시는 물론 세력을 모두 잃고 맏형 쉴레이만이 있는 루멜리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쉴레이만을 만난 이사는 메흐메트와 맞서 싸울 군사를 지원받는 데 성공했고, 바예지트에게 정복당했다가 앙카라 전투 이후에 독립한 튀르크계 소국들과도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메흐메트가 새로 본거지로 정한 부르사를 함락하는 데에는 끝내 실패했고, 1406년까지 전투를 벌였으나 모두 패하고 튀르크계 공국 가운데 하나인 카라만으로 망명했다가 메흐메트가 보낸 자객들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2.2.2.2. 쉴레이만 대 메흐메트
메흐메트가 이사를 쓰러뜨리고 아나톨리아 반도를 독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쉴레이만은, 메흐메트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선수를 치기로 결정하고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출진했다. 그리고는 아이딘, 멘테셰 등 아나톨리아 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튀르크계 공국들을 차례로 쳐 없애고 부르사로 진군했고, 제아무리 아나톨리아 반도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고는 해도 세력이 쉴레이만에게 미치지 못하는 메흐메트는 부르사는 물론 앙카라까지 내어주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메흐메트에게는 다행히도 쉴레이만에게도 메흐메트를 완전히 쓰러뜨릴 만한 힘은 없어서, 앙카라를 포기하고 부르사로 회군했다.

2.2.3. 적의 적은 아군

1406년부터 1410년까지 소강 상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메흐메트는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발상을 해낸다. 게르미얀에 망명해 있는 막내동생 무사를 활용한다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일단 두 형제는 아나톨리아 반도 중부의 도시 키르셰히르에서 만나 공식적으로 동맹을 체결했으며 쉴레이만이 아이딘 공국과 멘테셰 공국을 정복하는 데에 경계심을 느꼈는지 튀르크계 공국 대다수도 이 동맹을 지지했다.

그리고 메흐메트는 동맹의 조항에 따라 흑해를 이용해 무사를 루멜리아로 파견했고, 무사는 바예지트 1세 때까지 오스만의 동맹이었던 세르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의 지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무사가 받은 메흐메트의 군대와 세르비아, 왈라키아의 군대는 쉴레이만의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쉴레이만은 어쩔 수 없이 아나톨리아를 버리고 루멜리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410년 6월에 벌어진 코스미디온 전투에서 쉴레이만은 무사의 군대를 격퇴하여, 일단 한숨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메흐메트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킨데다 무사마저 물리쳤다고 여겼던지 쉴레이만은 점차 사치에 빠지고 부하들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사는 대규모 전투를 피하면서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며 항쟁을 계속했다. 결국 쉴레이만의 세력은 그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무사에게 넘어갔고, 1411년에 무사는 오스만 술탄국의 유럽 측 수도이자 쉴레이만의 본거지였던 에디르네에 입성했다.

쉴레이만은 내전이 시작된 이래 줄곧 자신의 편이었던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도중에 살해당했고, 그로써 내전이 시작된 지 장장 10년 만에 오스만 술탄국은 서로 동맹을 맺은 두 형제가 지배하게 된 것처럼 보였다.

2.2.4. 루멜리아와 아나톨리아

하지만 '지배하게 되었다' 가 아니라 '지배하게 된 것처럼 보였다' 였던 것은, 두 형제의 동맹 조약에서 눈앞의 적인 쉴레이만을 물리치는 데에만 신경을 썼을 뿐 정작 전후 처리 문제는 소홀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무사는 자신이 루멜리아를. 형 메흐메트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통치하기를 꿈꾸고 있었던 반면, 메흐메트는 무사를 어디까지나 자신의 신하로 여겼을 뿐 왕관을 나누어 쓸 마음이 전혀 없었다.

두 형제의 불화는 1411년에 무사가 동로마 제국이 쉴레이만의 동맹이었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것으로 표면화했다. 동로마 제국은 즉시 메흐메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메흐메트는 바로 군대를 보내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위에 협력했다.[13]

2.2.5. 최후의 결전

141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으로 시작된 두 형제의 전쟁은, 1411년과 1412년에 벌어진 두 차례의 전투로 계속되었다. 하지만 두 번 모두 쓴 잔을 마신 사람은 메흐메트였고, 결국 그는 세르비아 공국과 둘카디르 공국, 무사의 휘하 지휘관 중 일부의 지지를 확보한 뒤 1413년의 차무를루 전투에 임했다.

전투 직전, 메흐메트 휘하 예니체리들의 지휘관인 하산이라는 인물이 앞으로 나서서 무사의 병사들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리고 무사는 직접 돌진하여 그를 베었지만 하산을 수행한 장교의 검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메흐메트가 승리를 거두었다. 무사는 패주하다가 사로잡혀 처형당했으며, 메흐메트가 내전에 참가한 사형제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메흐메트 1세라는 이름으로 옥좌에 오른다.

2.3. 치세

왕위에 오른 메흐메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전을 벌이는 내내 자신의 오른팔 역할을 한 바예지트 파샤를 재상에 임명한 것이었다. 상술했듯이 바예지트 파샤는 오늘날 튀르키예 영토인 아마시아가 고향이었지만 조상은 알바니아인이었는데, 이로써 그는 비(非) 튀르크인으로 재상에 오른 첫 번째 인물이 된다.[14]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해야 했기에, 메흐메트 1세는 부왕 바예지트 1세처럼 동로마 제국이나 세르비아 공국, 왈라키아 공국[15] 등의 신하국들에게 강경책을 펼 수는 없었다. 이에 그는 외교 관계를 앙카라 전투 이전으로 되돌리고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온건책을 써서 동로마 제국과 우호조약을 수립했고 세르비아와는 더 이상 신하국으로 삼지 않겠다는 내용의 강화조약을 체결했으며[16], 왈라키아 공국은 완전 정복을 목표로 했던 바예지트 1세와는 달리 신하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는 데에서 만족했다.

한편 아나톨리아 반도에서도 현상 유지 정책을 펼쳐, 오스만에게 정복당했다가 내전을 계기로 독립해나간 튀르크계 국가들을 한동안 존속시켰다. 이렇듯 메흐메트 1세의 시대에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국력을 재정비한 결과, 오스만 술탄국은 무라트 2세 때부터 다시 활발한 군사 활동을 벌일 수 있게 된다.

한편 메흐메트 1세 이전까지, 오스만의 술탄들은 줄곧 아나톨리아 반도 쪽의 수도인 부르사에 거주했다. 하지만 메흐메트는 즉위식을 에디르네에서 거행한 것을 시작으로 루멜리아의 수도 에디르네를 크게 강조했는데, 이를 시작으로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수도가 될 때까지 오스만의 술탄들은 에디르네에 거주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전까지 술탄의 거주지였던 부르사에 형제간의 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음을 기리는 의미에서 예실 모스크를 세우기도 했다.

2.4. 무스타파의 반란

하지만 평화가 도래했음을 기린 것이 무색하게 메흐메트 1세의 치세에는 두 차례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가 무스타파의 반란이다.

상술했듯이,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트의 다섯 아들들 가운데 셋째인 무스타파와 막내인 무사는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무사는 1403년에 바예지트가 세상을 떠나면서 풀려났지만 무스타파는 1405년에 티무르가 눈을 감은 뒤에야 자유를 되찾았고, 그 뒤 튀르크계 공국들을 전전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메흐메트가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1416년, 무스타파는 동로마 제국왈라키아 공국, 아이딘 공국 등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대동하고 에디르네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예전에 무사가 바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술탄국을 두 사람이 나누어 다스리자고 주장했는데, 메흐메트는 그를 거절하고 군대를 보내 무스타파의 군대를 격파했다.

결국 무스타파는 동로마 제국의 도시 테살로니키로 망명했고, 메흐메트는 동로마 제국과 협상하여 그를 렘노스 섬으로 추방했다.[17]

2.5. 셰이크 베드렛딘의 난

메흐메트 1세의 치세 동안 일어난 두 번째 반란인 셰이크 베드렛딘의 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베드렛딘이라는 인물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1359년에 에디르네 인근에서 가지와 동로마 제국군 지휘관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무슬림이고 어머니는 기독교도다 보니 두 종교의 영향을 모두 받았으며 이후 오스만 군대에서 군법관을 지내기도 하고 콘야, 카이로, 아르다빌 등 대도시들을 방문하며 종교학을 연구하면서 이슬람과 기독교 모두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후 베드렛딘은 이러한 사상을 설파하여 많은 지지자들을 얻었고, 메흐메트의 동생 무사에 의해 법무장관 겸 대법원장 정도에 해당하는 카자스케르라는 관직에 임명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10년 간의 내전에서 최후의 승리는 메흐메트에게 돌아갔고, 이에 따라 베드렛딘은 1413년에 이즈니크로 유배에 처해졌지만 내전 이후의 혼란이 가시지 않은 틈을 타 탈출했고, 1416년에 오스만의 지배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반란을 일으킨다.[18]

무슬림과 기독교도는 평등하며 오직 신 앞에서만 복종할 뿐이라는 베드렛딘의 주장은 아나톨리아 반도는 물론 발칸 반도 동남부에서도 가지들과 봉토를 잃은 시파히들, 마드라사의 학생들,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폭넓은 인기를 얻었고, 이들은 곧 반란군에 합류했다. 실제로 오늘날 튀르키예 서부의 도시 카라부룬에서만 6천 명이 반란을 일으켰을 정도였는데, 이에 메흐메트는 재상이자 친우인 바예지트 파샤에게 진압군을 이끌게 하고 신하국인 왈라키아 공국의 지원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이 일어난 지 4년 만인 1420년에야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2.6. 사망

1421년, 메흐메트는 8년간의 치세를 끝으로 35살에 눈을 감았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는 평생 친우였으며 재상이기도 한 바예지트 파샤를 불러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아마시아 총독으로 나가 있는 아들 무라트(당시 18살)를 급히 부를 것이며 무라트가 에디르네에 도착한 뒤에야 자신의 죽음을 공표하라고 명령했으며, 재상은 술탄의 마지막 명령을 그대로 이행했다.

3. 여담



[1] Çelebi Mehmed[2] Mehmet-i evvel[3] Mehmet Çelebi라고도 쓰며, 위의 오스만어는 'Çelebi Mehmet'[20] 라고 쓰인 것이다. 여담으로 오늘날에는 메흐메트 역시 내전을 벌였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Çelebi(첼레비)' 라는 칭호가 붙어 Mehmet Çelebi(메흐메트 첼레비)로 불리지만, 동시대 사료에는 메흐메트에 맞서 싸웠던 형제들만 첼레비라 불렀다. 이 칭호 자체가 지체 높은 남성들에게 사용하는 것이지만, 술탄이나 황제는 그 '지체 높은 남성' 에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 조악하게나마 한국의 경우에 비유해 보면 고위 관료들을 '대감' 이나 '영감', '나으리' 등으로 부르기는 했지만 국왕을 이렇게 부르지는 않았던 것과 같다.[4] 둘카디르 베이국의 제5대 군주 나스렛딘 무함메드 베이의 딸이며 무라트 2세의 어머니.[5] 후에 메흐메트 2세가 법제화한다.[6] 당시의 공작은 위대한 미르체아 1세[7] 오스만 이전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룸 술탄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일 칸국의 공격을 받아 쇠약해지면서 오스만을 비롯한 여러 튀르크계 공국들이 룸 술탄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이후 오스만이 강성해지면서 이 공국들은 하나둘씩 멸망했지만 공국의 군주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이 티무르에게 망명하여 도움을 요청했고, 이것이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침공한 명분이 된다.[8] Bey. 당시 오스만은 대제국은커녕 아나톨리아 반도의 한 점에 지나지 않았을 때이며, 따라서 오스만의 군주도 술탄보다 격이 낮은 베이를 칭하고 있었다.[9] 여담으로 이러한 말에 오르한은 크게 감명을 받아 동생을 재상에 임명했는데, 이로써 오스만은 여러 관료들의 대표자인 재상직을 비로소 신설하게 된다.[10] 이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 술탄의 형제가 군사를 일으켜 술탄을 폐위한 뒤 '내가 더 뛰어나다. 즉 나야말로 술탄이 될 자격이 있다' 라고 선언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즉 술탄을 폐위하면 그 자체로 정통성을 갖춘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따라서 술탄의 입장에서는 형제들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11] 당시 기준으로는 대략 오스만령 유럽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12]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360년대의 어느 시점에 에디르네를 정복한 이후, 오스만은 수도를 아나톨리아 반도의 부르사와 루멜리아의 에디르네 두 군데에 두었다. 원래 유목민족들이라 바다를 잘 모르는데다, 사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떡하니 끼어 있어 서로 소통이 어려웠기 때문. 이것은 훗날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는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13] 40년 뒤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는 사람들끼리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는 걸로 읽었다면,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본 거다.[14] 이때까지 오스만은 튀르크계가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이후 다시 튀르크인이 아닌 인물이 재상이 되려면 1453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15] 당시의 공작은 위대한 미르체아 1세[16] 이후 세르비아는 메흐메트의 뒤를 이은 무라트 2세의 공격을 받은 끝에 1430년에 다시 신하국이 된다.[17] 이후 무스타파는 메흐메트의 아들 무라트가 즉위한 이듬해인 1422년에 다시금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에 대해서는 무라트 2세 항목 참고. 여담으로 이 무스타파가 정말로 바예지트의 아들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역시 항목에 소개되어 있다.[18] 오스만은 건국 당시부터 '무슬림이 최고, 나머지는 그 다음' 이라는 체제를 유지해 왔는데, 이는 메흐메트 1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슬람이나 기독교나 어차피 거기서 거기' 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무슬림과 기독교도를 차별할 명분이 사라지게 되므로, 베드렛딘의 사상과 오스만의 지배 체제는 양립할 수가 없었다.[19] 여기에서 '거의'를 떼어버리는 경우도 있는데, 무스타파 문제가 남아있었던 데다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의 세력을 재확립하는 과제도 남아있었으며 이는 무라트 2세가 완수한다. 한편 서거할 때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무라트를 급히 불러들여야 했던 것 역시, 당시 정세가 불안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