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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아이아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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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리 아이아코카
Lee Iacocca
파일:005-jon-bernthal-actor-ford-ferrari-cast-lee-iacocca.jpg
본명 리도 앤서니 아이아코카
Lido Anthony Iacocca
출생 1924년 10월 15일
펜실베이니아 앨런타운[1]
사망 2019년 7월 2일 (향년 94세)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벨에어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리하이 대학교 (산업공학 / 학사)
프린스턴 대학교 (기계공학 / 석사)
직업 기업인, 전 크라이슬러 의장, 전 포드 부사장

1. 개요2. 생애
2.1. 포드에서의 활동2.2. 크라이슬러에서의 활동2.3. 그 이후
3. 여담4.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media.lehighvalleylive.com/lee-iacocca-at-lehigh-universityjpg-f4a3506cbf7fa8d9.jpg

Lido Anthony "Lee" Iacocca
1924년 10월 15일~2019년 7월 2일

리도 앤소니 아이아코카, 줄여서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는 미국의 전 기업가다.

현역일 당시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기업가들 중 하나로, 특히 1970년대 후반 존폐위기에 처했던 크라이슬러 자동차를 재건한 CEO로 유명하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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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철강 제조업 중심 도시인 앨런타운(Allentown) 시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 부부인 니콜라 아이아코카(Nicola Iacocca)와 안토니에타 페로타(Antonietta Perrotta)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인 "리도"는 아이아코카 부부가 베니스의 리도 디 베네치아(Lido di Venezia)로 신혼 여행을 가 있을때 임신 중이었기에 붙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리 아이아코카는 자서전을 통해 부친인 니콜라가 결혼 전에 리도 디 베네치아를 여행했다는 것을 근거로 "로맨틱하지만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2]

당시 아버지 니콜라는 미국에서 핫도그를 판매하는 요식업[3]을 하다가 렌터카 사업을 시작했으며, 니콜라로부터 그 누구에게라도 빚을 지지 말고 꼭 갚으라는 당부를 받았다. 자동차에 대한 관심은 아버지의 친구 찰리 찰스(Charley Charles)의 아들로서 포드 딜러에서 일하다가 독립해 자신의 딜러를 운영하고 있었던 에드워드 찰스를 통해 시작되었다.#

1942년 앨런타운 고등학교[4]를 졸업하고, 펜실베니아주 베들레헴(Bethlehem) 시의 리하이 대학교(Lehigh University) 산업공학과에 진학하여, 공학 커뮤니티인 타우 베타 파이(Tau Beta Pi) 협회와 세타 카이 사교클럽(Theta Chi Fraternity)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월래스 메모리얼 펠로우쉽(Wallace Memorial Fellowship) 상을 수여받은 뒤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기계공학 석사를 전공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포드의 엔지니어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2.1. 포드에서의 활동

리 아이아코카는 1946년 8월부터 포드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으며, 엔지니어로 입사했지만 얼마 안되어 판매 및 마케팅사업부로 옮겼다. 그는 이 때부터 필라델피아에서 보조 판매부장(assistant sales manager)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1956년식 차량을 출시할 때는 "56 for 56"이라는 이름 하에 1956년식 포드 차를 20% 할인가에 판매하고 3년간 매달 56달러씩 할부 구입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마케팅을 펼쳐 이름을 널리 알린 적 있었다. 덕분에 이 캠페인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포드 본사가 있는 디어본으로 옮겨가 성적을 꾸준히 올려 왔다. 이러한 경력 덕분에 리도는 1960년 11월 10일에 포드 디비전의 부회장 겸 총지배인(general manager)으로 승진했고, 더 나아가 1965년에는 포드 부회장, 1967년에는 승용차 및 트럭 부서 부회장, 1970년 12월 10일에는 회사 부회장까지 올라갔다.

그는 자동차가 이동수단에서 개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는 기호품으로 성장하던 미국의 전성기를 타고 포드에서 포드 머스탱, 링컨 컨티넨탈 마크 III, 포드 에스코트 등의 명차들을 개발해 왔고, 1960년대 말에 머큐리 쿠거마퀴스(Marquis)를 출시해 그룹 내의 매스티지 브랜드였던 머큐리를 회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시기에 관여한 신차 중에는 중장기적으로 불명예를 안긴 실패작도 있었는데, 일본차 및 유럽차에 대응하기 위한 내수시장용 완전 신형 소형차인 포드 핀토를 개발하게 했다. 이 소형차는 포드 측에서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에 수입판매했던 앵글리아코티나를 대신하여 내수용으로 직접 완전 신차로 만들고 싶어했기에, 유럽에서 팔던 에스코트 대신 핀토를 개발했다. 출시가 2천 달러 이하에 총중량 2,000파운드(약 0.9톤)을 목표로 잡아 완성된 핀토는 시장에서 그럭저럭 잘 나갔지만 성급하게 개발하는 바람에 품질문제가 불거졌고, 비용절감을 시도할 때 사고 시의 보상금까지 계산해가면서 연료탱크 보호 장치를 빼 버리는 등으로 안전을 희생하는 바람에 결국 1970년대 말에 인기를 크게 잃어버린 데다가 거액의 보상을 안기고 포드에 대한 평판을 흐리면서 아이아코카가 포드에서 쫓겨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혼다 소형차의 엔진을 들여와 소형차를 만들자는 제안[5]을 하는 등, 포드 측에서 반기질 않아했던 아이디어들도 구상하며 당시 회장인 헨리 포드 2세와 갈등을 계속 빚다가 회사에 수많은 이익을 남겨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1978년 7월 13일에 포드에서 해고되었다.

2.2. 크라이슬러에서의 활동

리 아이아코카의 청문회 현장을 녹화한 ABC의 1979년 10월 19일 보도
포드에서 쫓겨난 아이아코카는 당시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회장 존 리카르도(John Riccardo)를 통해 크라이슬러로 스카웃되어 폐업 위기의 회사를 재건하기 위한 시도를 시작했다.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를 재건하기 위해 먼저 35명에 달하는 부사장급 임원 중 33명을 경질하고, 그가 일했던 포드 출신의 엔지니어 할 슈펠리히(Hal Sperlich)를 포함해 새로운 임원진과 개발진을 구성하였다. 더불어 노동조합을 이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 의사결정의 주체 중 하나로 참여시키고 "1달러 연봉 선언"[6]을 하는 등으로 크라이슬러의 노동조합을 설득하여 2번이나 임금 삭감과 동결을 이끌어 냈으며 1980년 한 해만 1만 5천 명의 정규직원을 해고한 뒤 유럽, 호주, 남아프리카 지사도 매각하고 각종 공장을 폐쇄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여 5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 절감을 이루었다. 그리고 워싱턴 D.C.에 가서 상원, 하원 청문회에 불려 다니며 노력한 결과, 연방 정부로부터 15억 달러 규모의 융자금 보증을 얻어 냈다.#

그렇게 융자 보증을 받아낸 아이아코카는 가스터빈 엔진[7]을 비롯한 비현실적인 계획들을 중단시켰고, 급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유럽 지사인 심카루츠 그룹이 공동개발한 소형차를 활용해 당시 첨단기술로 떠오르던 가로배치 전륜구동 소형차 기술을 가지고 새 차를 개발했으며, 포드에서 구상했다가 받아들여지지 못한 미니밴 라인업이나 가로배치 전륜구동 플랫폼인 크라이슬러 K 플랫폼[8]을 개발했다. K 플랫폼의 참고모델이 된 소형차인 심카 호라이즌 역시 아이아코카가 취임한 해에 플리머스닷지의 소형차로 출시하고 융자금 보증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로도 제시했다.

1980년 말에는 중형차 라인으로서 크라이슬러 K 플랫폼으로 만든 첫 신차인 플리머스 릴라이언트닷지 아리스를 출시했으며 1982년에는 K 플랫폼 기반의 컨버터블 라인업과 레 바론의 세대교체 모델, 1983년 말에는 같은 플랫폼을 토대로 만든 미니밴 라인인 플리머스 보이저, 닷지 캐러밴도 출시해 수익을 거두었다. 특히 1980년대 초 미국에서는 불황기가 시작되어 소형차의 수요가 높아졌고, 아리스/릴라이언트는 가로배치 전륜구동의 이점을 살린 넓은 실내공간과 1열 벤치시트 사양으로 거둔 6인승 레이아웃 때문에 중형차였다 뿐이지 시장에서 전임 모델인 닷지 아스펜/플리머스 볼레어를 따라 준중형차로 분류할 정도로 상당히 작고 연비가 좋아 잘 팔렸다. 미니밴 역시 K 플랫폼에 기반한 덕분에 작으면서도 공간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을 갖춰 당시의 대형 밴과 스테이션 왜건 사이의 틈새 수요를 잡아내는 데 성공, 새로운 세그먼트와 시장을 개척하며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꾸준한 돈줄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반면 아이아코카 휘하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은 실패도 거뒀는데, 회사의 기함이자 기함급 브랜드로 1981년에 부활시킨 임페리얼이 실패사례였다. 1981년형 임페리얼은 크라이슬러 코르도바를 토대로 완전 전자식 연료분사장치나 완전 디지털 대시보드같은 당대 신기술들을 대거 적용한 퍼스널 럭셔리 카였는데,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첫 차를 주고 콜라보레이션 특별판까지 출시하는 등의 시도로 흥행을 끌어 보려고 했으나 품질 문제로 얼마 안 가 단종되었다. 닷지 아리스의 고급형 파생차인 닷지 400과 레 바론보다 윗급의 중형차였던 크라이슬러 E클래스도 실적이 좋지 못했다.
리 아이아코카가 출연하는 1982년의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 기업광고[9]
리 아이아코카가 출연하는 1984년의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 기업광고[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아코카 휘하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은 상업적인 흥행을 이어나갔는데, 신차 라인업마다 모두 적용시킨 크라이슬러 K 플랫폼 자체가 수익성이 높은 구성인데다가 시대에 맞는 제품군을 만들면서도 새로운 세그먼트도 같이 개척하는 것과 더불어 마케팅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이 유효했다. 특히 아이아코카 본인이 토크쇼, 광고, 발표회같은 각종 미디어에 자주 참여해 자사 제품과 개발과정을 소개하는 캠페인 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한다는 이미지를 심어 미국 국민들의 신뢰를 얻었고[11][12] 회사 직원들에게 자부심을 안기기 위해 상품성을 강조하는 "자부심이 돌아왔다(Pride is Back)", "더 나은 차를 찾았다면 그걸 사라"같은 공격적인 모토를 활용한 캠페인도 주도했다.[13] 이런 마케팅은 캐나다에도 적용되어 크라이슬러 캐나다 법인의 회장이 직접 TV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끝에 1982년 여름, 크라이슬러의 회장으로 된 지 만 7년이 되기 전에 아이아코카는 고질적인 부채 15억 달러를 일시에 갚고 7억 달러의 순이익을 남기는 신화를 이루어냈다. 5% 삭감했던 노동자 연봉도 원래 수준으로 올려 놓았고 해임했던 직원들의 상당수도 다시 불러들였다. 이렇게 회사가 커지다보니 아이아코카는 밥 루츠를 포함해 포드에서 일했던 회사 동료들을 크라이슬러로 데려왔으며, 크라이슬러 K 플랫폼을 대거 활용해 다양한 세그먼트를 아우르는 수많은 신차들을 개발하게 하는 건 물론 평소 관심을 두어 왔던 AMC/지프, 람보르기니 등을 1987년에 인수했다. 그렇게 인수한 지프를 통해 크라이슬러의 돈줄로 삼은 건 물론, 지프 랭글러체로키, 그랜드 체로키 등의 히트작들을 개발해냈던 AMC 내의 인재들을 자사의 차량 개발 프로젝트에 투입하고 창의적인 제품개발 과정을 도입하기까지 했다.[14][15]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무리한 인수합병으로 회사가 다시 재정난에 처한 건 물론 회사 라인업의 정리가 시급해졌고, 람보르기니의 운영[16]이나 마세라티와 합작 개발한 크라이슬러 TC 바이 마세라티, 새턴의 대항마로 기획한 리버티(Liberty) 브랜드와 이글 브랜드[17]같은 무리수들이 실패한 건 물론 아이아코카가 K-바디 플랫폼의 활용과 보수적인 디자인을 고집하는 점,[18][19] 공장별 생산대수 유지와 매출 극대화를 위한 적극적인 뱃지 엔지니어링,[20] 주가에 대한 집착도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1달러 연봉 선언"의 진정성까지 논란에 휘말림에 따라, 아이아코카는 1992년 말 후계자로 로버트 이튼(Robert Eaton)을 지명하고 회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2.3. 그 이후

은퇴 후 파인 다이닝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설립하고 아내와의 사별을 계기로 당뇨병 치료 재단을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해 왔으며, 영화사 MGM의 이사진 중 한 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5년에는 자신의 억만장자 친구였던 커크 커코리언(Kirk Kerkorian)과 손을 잡고 크라이슬러의 회장으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커코리언이 크라이슬러의 지분을 사들였다가 터진 논란과 갈등으로 인해 1996년에 인수한 지분을 도로 매각했고, 커코리언과 크라이슬러가 1996년부터 5년간 아이아코카가 크라이슬러에 대해 대중 앞에 언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면서 사그라들었다.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은 공학계 기업인인 탓에 미국 민주당으로부터 여러차례 정계 영입 및 대선 출마 제의도 받았지만 정치에는 뜻이 없었던건지 전부 거절했다. 이리하여 조용히 말년을 보내나 싶었는데...

2005년 7월, 다임러크라이슬러에서 아이아코카를 홍보대사로 다시 기용하면서 다시 크라이슬러로 되돌아왔다! 아이아코카는 제이슨 알렉산더(Jason Alexander)와 스눕 독(Snoop Dogg)과 같이 크라이슬러의 직원 대상 캠페인을 홍보하는 데 참여했고, 과거 그가 제시했던 모토였던 "더 나은 차가 있다면 그걸 사라"는 멘트도 다시 사용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에서는 아이아코카를 기용하면서 2005년 7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파는 차량에서 대당 1대씩의 수익을 아이아코카의 당뇨병 치료 재단에 기부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크라이슬러가 파산한 2009년 4월, 아이아코카는 인터뷰를 통해 크라이슬러의 회장이었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하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현지 시간으로 2019년 7월 2일 오전 7시 반, 캘리포니아 벨 에어의 자택에서 작고했다. 사인은 파킨슨병 합병증. 7월 10일에 첫 아내 메리가 묻힌 미시건 주 트로이의 화이트 샤펠 묘지(White Chapel Cemetery)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안장될 때 사용된 자동차는 자신이 회장으로 있었던 당시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주력 라인업이었던 미니밴의 최신 세대였던 퍼시피카가 활용되었다.

3. 여담

4. 같이 보기



[1] Allentown[2] 자서전에서는 결혼 전에 자신의 외삼촌과 함께 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3] 당시 오르페움 위너 하우스(Orpheum Wiener House)라는 이름이었으며 리도의 삼촌인 시어도어 아이아코카가 1922년에 설립했다. 지금은 아이아코카의 네덜란드식 발음에서 따 온 상호인 요코스(Yocco's)라는 이름으로 5개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다.[4] 지금의 윌리엄 앨런 고등학교(William Allen High School).[5] 포드 피에스타에 사용하기 위해서 혼다 CVCC 엔진+변속기 세트 30만대를 도입해오려고 했다.[6] 사실 무임금 선언을 하면 법적 문제와 사회적 논란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서류상으로 남겨놓는 것이다. 실제로 다른 주제이긴 하지만 오늘내일 하는 회사를 인수시 공짜로 한다면 그에따른 행정적 문제가 엄청나지기 때문에 형식상으로 1달러에 인수하는 것이다. 물론 그 만큼 리 아이아코카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7] 20년 이상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이 개발해 왔으며 회사가 휘청이던 1977년에도 크라이슬러 브랜드의 엔트리 라인업 레 바론에 기반한 콘셉트카를 출품하고 1979년에 선보일 계획까지 잡는 등, 양산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8] 원래 아이아코카 시절 포드에서는 할 슈펠리히를 통해 포드 페어몬트와 그 기반이 되는 폭스 플랫폼을 전륜구동으로 구상했으나, 아이아코카 본인도 포드의 재정악화로 인해 계획을 취소하고 후륜구동으로 변경했다.[9] 자사 제품의 품질에 대한 자신감을 과시하며 보증수리 정책을 소개하고, 이와 함께 후반부에는 더 나은 차가 있거든 경쟁사 차를 타라는 내용으로 진행된다.[10] 광고 내용을 보면 아이아코카가 직접 미니밴이나 컨버터블같은 자사 제품의 실적과 상품성을 과시하는가하면, 앞으로 출시될 신차들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11] 원래 리 아이아코카는 자신이 직접 광고에 출연하는 것을 꺼렸으나 당시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광고대행사 케년 & 에크하르트(Kenyon & Eckhardt)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론 델루카(Ron DeLuca) 등이 회사에 대한 국민,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설득,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말하는 방법을 아이아코카가 배우고 수많은 재촬영까지 거쳐 성사시켰다.#[12] 리 아이아코카 이전에도 아메리칸 모터스 코퍼레이션의 회장이었던 조지 W. 롬니가 대중 앞에서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펼쳐 회사를 성장시킨 사례가 있다. 타임 지의 1959년 4월 6일 기사는 조지 롬니가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사의 소형차 라인업을 홍보하며 직접 타볼 것을 권하고 있다는 내용을 싣었다.#[13] 여기에 일각에서는 크라이슬러도 GM, 포드처럼 노골적인 뱃지 엔지니어링을 이용했음에도 오히려 1977년 폐업위기 이후로 각 브랜드가 무의미해진 크라이슬러였기에 오히려 개별 브랜드보다는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이라는 그룹 자체를 강조(즉, 크라이슬러 그룹이기에 남들과 다르다)하는 마케팅으로 뱃지 엔지니어링을 역이용해 기업 이미지 항상에 활용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당시 크라이슬러에서 닷지와 플리머스 차량을 한 광고에 등장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을 "크라이슬러 미니밴"이나 "K-카"같은 표현으로 수식한 것이 그 근거.# 1980년에 집행한 닷지 에어리스와 플리머스 릴라이언트의 런칭 광고에서도 두 차량이 같이 등장했으며 중간에 각 모델명을 한번씩만 호명하는 것을 제외하면 "K-카"로 통칭했다. 아이아코카도 자서전을 통해 모든 것을 밑바닥부터 새로 만드는 완전신차는 경제성이 없는 허상에 불과하며, GM이 자원공용화를 추진하면서 저지른 고객과의 충분한 의사소통 및 차별화의 부재를 지적하는 동시에 결국에는 신차개발의 경제성을 갖추려면 기존 부품들을 유용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14] 그 중 아이아코카가 좋아했던 그랜드 체로키는 당시에 개발이 거의 다 되어 있었는데, 체로키의 후속이었던 게 너무 커지자 그 윗급 라인업으로 개조해 수년 뒤인 1992년에야 출시될 수 있었다. 또한 AMC의 제품기획을 물려받음에 따라 르노 기반 준대형차인 이글 프리미어의 세로배치 전륜구동 플랫폼 구성을 참조해 차기 대형차 플랫폼인 크라이슬러 LH 플랫폼에 반영하거나, 당시 개발중이던 AMC의 소형차 기획을 크라이슬러의 자체 브랜드로 편입시켜 닷지 네온으로 출시한 사례도 있었다. 닷지 네온의 원형 헤드램프도 리 아이아코카가 제안하여 밀어붙였다.[15] 당시 크라이슬러로 영입된 인재 중 하나가 르노/AMC 출신의 엔지니어인 프랑수아 카스탱(Francois Castaing)으로 AMC의 연구개발조직 구성을 모델로 크라이슬러의 플랫폼 팀을 혁신, 각 차량의 부위별, 담당업무별로 쪼개져 있던 제품개발팀을 철폐하고 컨셉트부터 양산에 이르는 프로젝트 팀을 구축해 보다 적은 인원으로도 빠르고 저렴하게 신차를 개발할 수 있는 제품개발환경을 구축했다. 이렇게 AMC의 창의적이고 유연한 인재들과 제품개발과정이 1990년대 크라이슬러 내부에 널리 퍼짐에 따라, 1990년대의 크라이슬러는 오히려 AMC가 크라이슬러를 집어삼킨 거나 다름없었다는 평가도 나올 정도.[16] 아이아코카의 부하이자 회사의 상급 임원이었던 밥 루츠는 자서전을 통해 "람보르기니를 산 건 수익성보다 브랜드 때문이며, 크라이슬러 차를 람보르기니와 적절히 크로스오버해서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크라이슬러 차종의 람보르기니 에디션을 만들라는 지시를 아이아코카가 내렸었다는 점을 회고했었다. 어떻게 보자면 람보르기니에 대한 아이아코카의 인식이나 이해를 엿볼 수 있는 대목.(###)[17] 리버티는 새턴을 따라 매우 진보적인 국산 소형차로 수익을 내겠다고 1985년에 발표, 1990년에 런칭하려고 했으나 비용문제로 아예 개발 과정에서 취소되었다. 이글은 AMC의 승용차 부문을 개명한 뒤 과거 AMC의 모회사였던 르노 산하의 이글 프리미어, 메달리온같은 르노 차종 기반 라인업들과 미라쥬, RVR, 갤랑, 이클립스같은 미쓰비시 차종들을 AMC 계열의 딜러망이었던 지프-이글 딜러로 몰아넣는 데 그쳤기 때문에 판매가 부진했다.[18] 밥 루츠가 갓 크라이슬러로 넘어온 1980년대 중반, 리 아이아코카는 루츠에게 포드 토러스머큐리 세이블을 언급하면서 "어차피 실패할 차들인데 이들이 출시되기 전에 크라이슬러로 잘 넘어왔다"며 환영하기도 했다. 당시 크라이슬러에서 토러스 대항마로 준비한 차는 크라이슬러 K 플랫폼 기반의 중형차였던 닷지 다이너스티크라이슬러 뉴요커였으며 아이아코카는 디자인에 대한 고객조사 점수의 평균이 포드가 10점 만점에 5점, 자사가 7.5점이었다며 자신만만해했다. 밥 루츠는 자서전에서 고객조사의 허점을 이야기하며 평가가 극과 극이었던 토러스/세이블, 중간 점수로만 들이찬 다이너스티/뉴요커의 평점을 설명했다. 즉 토러스와 세이블은 확실히 좋아하는 고객들 반+확실히 싫어하는 고객들 반이었다면 뉴요커와 다이너스티는 "생각은 해보겠지만 가장 먼저 살 차는 아니다"같은 그저 그런 평가로 가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밥 루츠는 같은 자서전에서 아이아코카를 "시대에 대한 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던 1980년대까지는 무적"이라고 코멘트를 해 아이아코카가 1980년대의 시대변화를 잘못 읽은 부분이 있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19] 물론, 1990년대 들어서 당시에는 상당히 혁신적이었던 '캡 포워드' 디자인의 LH 플랫폼을 선보이는 등 보수적인 디자인을 탈피한 적도 있었다.[20] 밥 루츠의 자서전에 따르면 지프 그랜드 체로키를 닷지 브랜드로 공급하는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플리머스 호라이즌과 닷지 다코타의 지프 브랜드 버전이 계획되는 등, 지프로도 기존 크라이슬러 차종들의 뱃지 엔지니어링 라인업을 도입하려다가 지프 측의 반대로 무산된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21] 이는 한국 출판업계의 역사에서도 현대적 의미의 마케팅 성공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군사 독재 정권이 물러가고 언론에 대한 검열이나 통제가 점점 철폐되기 시작하자, 때맞춰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신문과 방송 미디어를 중심으로 책과 잡지 등에 대한 공격적인 광고를 비롯한 다양한 출판 마케팅 사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마침 80년대 말 소련 붕괴 및 90년대 초반 세계화 바람까지 타고 이러한 산업계 거물의 성공 사례를 다룬 경영서적이 급격히 주목을 받던 분위기 속에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던 것. 참고로 이 때 함께 국내 시장에서 베스트셀러로 잘 팔렸던 책이 바로 80년대 말에 발간된 도널드 트럼프의 자서전인 '거래의 기술'이었다. 어쨌든 당시에는 그야말로 리 아이아코카의 자서전이 셀러리맨들의 집집마다 한권씩 있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로 많이 팔렸다. 참고로 이러한 아이아코카 자서전의 성공 사례를 국내에서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했던 경우가 바로 1989년에 나온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자서전인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발간했던 자서전인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였다.[22] 원문은 When it's your last turn at bat, It sure is nice to hit a home 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