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의 前 축구 심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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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 이름 |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Rudolf Kreitlein | |
출생 | 1919년 11월 14일 | |
바이마르 공화국 퓌르트 | ||
사망 | 2012년 7월 31일 (향년 92세) | |
독일 슈투트가르트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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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 심판 (은퇴) | |
소속 | <colbgcolor=#eee><colcolor=#000> 국내 |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 (1955~1963) 분데스리가 (1963~1969) |
국제 | FIFA (1964~1966) |
1. 개요
독일의 前 축구 심판. 1966 FIFA 월드컵에서 켄 애스턴과 함께 레드카드와 옐로카드를 발명하여 축구 역사를 바꾼 인물로 유명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심판 중 한 명으로, 1966년 월드컵에서는 잉글랜드 대표팀과 아르헨티나 대표팀 간의 8강전에서 심판을 맡아 '용감한 재단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1965 인터컨티넨탈컵과 1966 유러피언컵 결승전 등 중요한 경기를 주관했다.2. 경력
크라이틀라인은 1919년 퓌르트에서 태어났다. 본업은 재단사였으며, 1937년 심판 경력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미국에서 심판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플레잉 코치로 활동했으며, 1949년부터 슈투트가르트 SC의 계약 선수로 뛰었으나 1951년 반월상 연골판 부상으로 축구 선수 경력을 마쳐야 했다. 이후 다시 심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2.1. 심판 경력
1950년대와 1960년대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심판 중 한 명으로 꼽혔다. 1963-64 시즌부터 분데스리가에서 심판을 맡아 총 66경기를 주관했으며, 1969년까지 분데스리가 심판으로 활동했다. 1967년 연령 제한에 도달하여 국제 심판 경력을 마감했다. 그는 총 18회의 A매치를 주관했다.그는 DFB-포칼 5경기, 1955년부터 1963년까지 독일 축구 선수권 대회 7경기, 그리고 분데스리가 승격 플레이오프 9경기의 주심을 맡았다. 뷔르템베르크 축구 협회의 가장 중요한 심판 중 한 명으로, WFV-포칼 결승전도 두 차례 주관했다. 또한 1965-66 시즌 튀르키예 쿠파스 결승전에서 갈라타사라이 SK와 베식타스 JK 간의 더비 경기를 주관하기도 했다.
크라이틀라인 경력의 정점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 FIFA로부터 지명된 것이었다. 그는 월드컵 결승전 주심으로도 고려되었으나, 결승전 진출팀 중 하나가 독일이었기 때문에 자국 심판으로서 결승전을 주관할 수 없었다.
특히 8강전 잉글랜드 대 아르헨티나 경기 주심을 맡은 것이 유명하다. 이 경기는 초반부터 거친 플레이가 많았고, 전반 35분 아르헨티나 주장 안토니오 라틴이 심판 뒤를 쫓아가 소리치는 일이 발생했다. 크라이틀라인은 스페인어를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라틴의 표정에서 모욕감을 느껴 그를 퇴장시켰다.
라틴은 독일어나 영어를 하지 못했고, 단지 통역을 요구했을 뿐이었으나 퇴장을 거부하며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영국 경찰이 거구의 라틴을 끌어내야 했다. 경기가 끝난 후 168cm의 크라이틀라인은 이 사건으로 인해 '용감한 재단사'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이 사건 직후, 경기가 끝난 뒤 심판들을 담당하던 영국의 켄 애스턴은 호텔로 향하던 중 신호등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그는 빨간불과 노란불처럼, 경고의 의미인 옐로카드와 퇴장의 의미인 레드카드 시스템을 고안하면 의사소통 문제가 없는 국제적인 축구 소통 수단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다음 날 이 아이디어를 크라이틀라인과 상의했다. 크라이틀라인은 이 제안을 FIFA에 제출했고, FIFA는 이를 수용하여 1970년 월드컵부터 도입함으로써 전 세계 축구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