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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 SLB | 1962 SLB | 1963 ACM | 1964 INT | 1965 INT | ||
1966 RMA | 1967 CEL | 1968 MUN | 1969 ACM | 1970 FEY | ||
1971 AJA | 1972 AJA | 1973 AJA | 1974 BAY | 1975 BAY | ||
1976 BAY | 1977 LIV | 1978 LIV | 1979 NFO | 1980 NFO | ||
1981 LIV | 1982 AVL | 1983 HSV | 1984 LIV | 1985 JUV | ||
1986 CSA | 1987 FCP | 1988 PSV | 1989 ACM | 1990 ACM | ||
1991 ZVZ | 1992 FCB | 1993 MRS | 1994 ACM | 1995 AJA | ||
1996 JUV | 1997 BVB | 1998 RMA | 1999 MUN | 2000 RMA | ||
2001 BAY | 2002 RMA | 2003 ACM | 2004 FCP | 2005 LI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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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FCB | 2012 CHE | 2013 BAY | 2014 RMA | 2015 FCB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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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CHE | 2022 RMA | 2023 MCI | 2024 RMA | 2025 OOO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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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컵 결승전 | ||||
1966 브뤼셀 | → | 1966-67 리스본 | → | 1968 웸블리 |
|
European Cup Final Lisbon 1967 |
1. 개요
1967년 5월 25일 포르투갈 리스본의 이스타디우 나시오날에서 열린 셀틱 FC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간의 열두 번째 유러피언컵 결승전.1966-67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셀틱 FC는 구단 최초로 결승에 올랐으며,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는 이전 세 시즌 중 두 번(1964년, 1965년)의 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이 경기의 주심은 서독 국적의 쿠르트 첸셔(Kurt Tschenscher)가 담당했다. 경기는 약 45,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또한 빅 이어가 처음으로 수여된 결승전이었다.
2. 진출 팀
| |
셀틱 | 인테르 |
2.1. 셀틱 FC
조크 스타인 감독이 이끄는 셀틱은 1965-66 스코틀랜드 풋볼 리그 디비전 원 우승을 통해 유러피언컵에 처음으로 진출했다. 이는 그들의 21번째 리그 우승으로, 라이벌 레인저스 FC보다 당시 2회 앞선 성적이었다.셀틱은 1라운드에서 스위스의 FC 취리히를 상대로 홈에서 2-0[1], 원정에서 3-0[2]으로 완승했다. 2라운드에서는 프랑스의 FC 낭트를 상대로 원정 3-1, 홈 3-1로 승리했다. 원정 경기에서는 낭트가 프랑시스 마니의 골로 선제골을 넣었지만, 조 맥브라이드가 동점골을 넣었고, 후반에 바비 레녹스와 버티 올드가 골을 추가했다. 홈 경기에서는 지미 존스톤이 선제골을 기록했고, 제라르 조르쟁이 동점골을 넣었지만, 후반 샬머스와 레녹스의 골로 승리했다.
8강에서는 유고슬라비아의 FK 보이보디나와 맞붙어 원정에서 밀란 스타니치의 골로 0-1로 패했다. 이는 셀틱이 대회에서 유일하게 패한 경기였다. 홈 경기에서 샬머스의 득점으로 1-0으로 앞서가던 중, 경기 종료 직전인 90분에 주장 빌리 맥닐이 결승골을 넣어 2-0으로 승리했다. 준결승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FK 두클라 프라하를 홈에서 3-1[3]로 이기고 원정에서 0-0으로 비기며 결승에 진출했다.
2.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이 이끄는 인테르는 1965-66 세리에 A 우승을 통해 유러피언컵에 참가했다. 이는 그들의 10번째 리그 우승으로, 볼로냐를 4점 차이로 제치고 우승했다.인테르는 1라운드에서 소련의 토르페도 모스크바[4]를 홈에서 발레리 보로닌의 자책골로 1-0 승리한 후, 원정에서 0-0으로 비겼다. 2라운드에서는 헝가리의 버셔시를 홈에서 2-1[5], 원정에서 2-0[6]으로 제압했다.
8강에서는 당시 디펜딩 챔피언이자 6회 우승팀인 레알 마드리드 CF를 홈에서 1-0[7], 원정에서 2-0[8]으로 꺾었다. 준결승에서는 불가리아의 CSKA 체르베노 즈나메와 홈 1-1[9], 원정 1-1[10]로 비긴 후, 중립 구장에서 재경기가 정해졌다. 이후 인테르는 볼로냐의 스타디오 레나토 달라라에서 열린 결정전에서 카펠리니의 득점으로 1-0으로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올랐다.
2.3. Road to the Final
'''''' | ||||||||||
| 팀 | |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녹아웃 | 대진 | 합계 | 1차전 | 2차전 | ||
| 5:0 승 | 2:0 승 (홈) | 3:0 승 (원정) | 1라운드 | | 1:0 승 | 1:0 승 (홈) | 0:0 무 (원정) | ||
| 6:2 승 | 3:1 승 (원정) | 3:1 승 (홈) | 2라운드 | | 4:1 승 | 2:1 승 (홈) | 2:0 승 (원정) | ||
| 2:1 승 | 0:1 패 (원정) | 2:0 승 (홈) | 준준결승 | | 3:0 승 | 1:0 승 (홈) | 2:0 승 (원정) | ||
| 3:1 승 | 3:1 승 (홈) | 0:0 무 (원정) | 준결승 | | 3:2 승 | 1:1 무 (홈) | 1:1 무 (원정) | ||
플레이오프 1:0 승 (중립) | ||||||||||
6승 1무 1패 (16득점 4실점) | 합계 성적 | 6승 3무 0패 (11득점 3실점) | ||||||||
◀ 1965-66 | 결승 | ▶ 1967-68 |
3. 경기 내용
'''''' | ||
이스타디우 나시오날 (리스본) | ||
주심: 쿠르트 첸셔 (서독) | ||
관중: 45,000명 | ||
| | |
셀틱 | 인테르 | |
2 | 1 | |
<rowcolor=#000,#fff> 63' 타미 게멜 84' 스티비 찰머스 | | 7'(PK) 산드로 마촐라 |
- | ||
◀ 1966 유러피언컵 결승전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 ▶ 1968 유러피언컵 결승전 |
리스본의 더운 날씨 속에서 영국 팀으로는 최초로 유러피언컵 결승에 진출한 경기가 펼쳐졌다. 2년 전 두 번째 우승컵을 획득했던 인테르는 국제 대회에 처음 출전한 상대를 상대로 우승 후보로 평가받았지만, 최고의 선수인 발롱도르 수상자 루이스 수아레스가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그는 이번 시즌 출전 기회가 적었던 베테랑 마우로 비치클리로 대체되었다.
경기 시작 후 불과 6분 만에 인테르가 선제골을 기록했다. 셀틱의 짐 크레이그가 레나토 카펠리니에게 페널티 박스 안에서 파울을 범했고, 산드로 마촐라가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인테르가 선제골을 기록했다.
선제골을 기록한 인테르는 자신들의 트레이드마크인 카테나치오 수비 전술로 물러났고, 셀틱은 지속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인테르의 수비벽을 뚫기 어려워 주로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 원거리 슛에 의존해야 했다. 버티 올드는 크로스바를 맞췄고, 지미 존스톤의 크로스를 인테르의 골키퍼 줄리아노 사르티가 잡아냈으며, 같은 선수의 헤더를 크로스바 위로 쳐냈다.
인테르는 9명의 선수를 수비에 동원했지만, 셀틱은 계속해서 공격했다. 토미 젬멜의 위험한 프리킥을 사르티가 막아냈고, 그의 로빙 슛도 크로스바를 맞췄다. 셀틱이 인테르의 수비를 뚫지 못했지만, 경기를 완전히 지배했고 인테르는 선제골 이후 추가 득점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반면 셀틱은 계속해서 사르티의 뛰어난 선방에 막혔다.
후반전에서 인테르 선수들은 리스본의 더운 날씨와 몇 주 전 CSKA 소피아와의 3차전 영향으로 체력적으로 떨어졌다. 이로 인해 셀틱이 더 자유롭게 플레이할 수 있었고, 측면 수비수인 짐 크레이그와 토미 젬멜이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63분, 크레이그의 패스를 받은 젬멜이 25야드 강력한 슛으로 동점골을 기록했다. 경기 종료 7분을 남기고 스티비 샬머스가 바비 머독의 슛을 살짝 방향을 바꿔 결승골을 기록했고, 이는 '라 그란데 인테르'의 시대를 마감하고 '리스본 라이언즈' 시대를 여는 골이 되었다.
이 승리로 셀틱은 영국 팀으로서는 최초로 유러피언컵을 우승한 기록을 세웠으며,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 나온 첫 우승이었다.
4. 경기 후
| |
빅 이어를 들어올리는 빌리 맥닐 |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셀틱 팬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들어 셀틱 팀이 경기장에서 트로피를 수여받지 못했다. 일부 선수들은 팬들에게 유니폼을 빼앗기기도 했다. 셀틱의 주장 빌리 맥닐은 무장 경비원의 호위를 받으며 경기장 외부를 돌아 스탠드의 단상에서 트로피를 수여받아야 했다.
이 경기는 '라 그란데 인테르'(위대한 인테르)의 몰락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인테르는 이전 3년간 유럽 최고의 팀 중 하나였지만, 셀틱뿐만 아니라 국내 두 대회에서도 실패한 시즌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다음 시즌에도 트로피를 획득하지 못했고, 그들의 성공 촉매제로 여겨졌던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은 클럽을 떠났다.
셀틱의 공격적 플레이는 인테르의 카테나치오 수비 전술을 이겨낸 축구의 승리로 칭송받았다. 인테르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는 "우리는 불평할 게 없다. 셀틱이 승리할 자격이 있었다. 우리는 셀틱의 힘에 패배했다. 비록 우리가 졌지만, 이 경기는 스포츠의 승리였다"라고 말했다. 한 포르투갈 심판은 "이 공격적인 플레이, 이것이 축구의 진정한 의미다. 이것이 진정한 경기다"라고 말했다. 포르투갈 신문 문도 데스포르티보는 "이것은 불가피했다. 언젠가는 에레라의 인테르, 카테나치오의 인테르, 부정적인 축구의 인테르, 미세한 승리를 거두는 인테르가 즐거운 축구를 거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고 평했다.
셀틱 감독 조크 스타인은 경기 후 리버풀의 감독 빌 샹클리로부터 "존, 당신은 이제 불멸이 되었소"라는 말을 들었다. 이후 셀틱 파크의 스탠드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고,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CBE)도 수여받았다. 그는 알렉스 퍼거슨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스코틀랜드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여겨지며, 이 결승전 승리가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셀틱은 이 우승으로 그 해 스코틀랜드 리그, 스코틀랜드 컵, 스코틀랜드 리그컵, 글래스고 컵에 이어 유럽 챔피언스컵까지 차지하며 유럽 축구 역사상 최초의 트레블 및 쿼드러플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달성했다. 이 쿼드러플은 6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 어떤 팀도 달성하지 못한 대업으로 남아있다. 우선 쿼드러플은 난이도가 매우 어려운 것도 있지만, 21세기 들어 선수 혹사 문제로 많은 리그들이 리그컵을 폐지한 상태라 도전 가능한 리그 자체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11]. 앞으로도 쿼드러플 달성 팀이 나오려면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5. 여담
이 경기에서 활약한 셀틱 팀은 '리스본 라이언즈(Lisbon Lions)'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셀틱 역사상 최고의 팀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셀틱 FC는 클럽 본국의 국적의 선수들로만 구성해 우승한 세 클럽 중 하나이며[12], 팀의 모든 선수들은 셀틱 파크 주변 30마일 이내에서 태어났으며, 이 우승을 통해 'Lisbon Lions'로 전 유럽에 알려졌다.2000년, 셀틱은 셀틱 파크의 스탠드에 '리스본 라이언즈'라는 이름을 붙였다. 현재 셀틱 파크의 동쪽 스탠드는 리스본 라이언즈, 서쪽 스탠드는 조크 스타인이라 명명되어 있다. 이 팀은 1967년 BBC 스포츠 퍼스낼리티 올해의 팀상도 수상했다.
주장이었던 빌리 맥닐이 빅 이어를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은 스코틀랜드 축구의 상징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되었다. 2015년 12월엔 셀틱 파크 앞에 맥닐이 빅 이어를 들고 있는 동상이 세워졌다.
[1] 토미 젬멜, 조 맥브라이드 득점[2] 젬멜 2골, 스티비 샬머스 1골[3] 존스톤, 윌리 월리스 2골 득점[4] 대회에 참가한 최초의 소련 구단이었다.[5] 카를로 솔도, 마리오 코르소 득점, 라요시 푸슈카시가 버셔시의 득점[6] 산드로 마촐라 2골[7] 레나토 카펠리니 득점[8] 카펠리니 득점, 이그나시오 소코 자책골[9] 자킨토 파케티 득점, 니콜라 차네프 동점골[10] 파케티와 니콜라이 라들레프 득점[11] 리그컵이 없는 국가에 속한 팀은 쿼드러플에 도전 자체가 불가능하다.[12] 나머지 두 클럽은 2연패 시절의 SL 벤피카와 전시즌 대회 우승팀인 레알 마드리드 C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