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로무샤 퍼레이드 장면 | 로무샤 가혹행위 장면 |
로무샤(労務者, Romusha)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1942~1945) 일본 제국의 점령 하에 있던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군은 석유·석탄·철·구리·주석·목재 등 전쟁 물자를 확보하고, 철도·도로·항만·비행장·군사시설 등을 건설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인 약 400~1,000만 명을 강제노동에 동원하였다. 이들은 가혹한 노동, 식량·의료 부족, 전염병, 폭력, 고문, 살해(즉결처형) 등 각종 전쟁범죄에 시달렸으며, 대다수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2. 상세
수카르노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로부터 인도네시아를 독립시키고 신생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동남아시아 침략이었다. 1942년 일본군은 인도네시아를 정복하고 군사정부를 설립한 후 이 나라의 독립운동 세력과 접촉했다. 일제는 이미 상세한 정보를 입수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카르노에게 접근, 그에게 일부 권력을 약속하는 대신 일제에 협력할 것을 종용했다. 수카르노는 조국의 독립을 이루는데 일본의 힘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이런 제안을 수용했다. 일제는 네덜란드인 관리들을 구금하고 군사정부의 상급직에는 일본인들을 배치했지만 하급직에는 교육받은 인도네시아인들을 고용했다. 일제가 동남아 침공이 반(反)제국주의 해방운동이라고 뻔뻔스럽게 강변하는 것이 이런 정황에서 나온 것이다.그러나 일제는 구 식민세력을 대신한 또 다른 식민세력일 뿐이었다. 그들은 연합군과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네덜란드보다 더 악랄한 착취를 했다. 수카르노는 라디오 방송과 연설을 통해 일제에 대한 협력을 촉구했으며, 특히 일제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징병과 징용 작업에 앞장섰다. 1945년까지 계속된 자바 섬 주민들의 '지원병' 징집은 무려 200만 명에 이르렀고, 수많은 농민이 '로무샤(勞務者)'로 동원되어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그 수치는 정확하지 않으나 400만 명에서 1,000만 명 사이로 추산된다. 특히 30만 명 가까운 자바 농민들이 해외 전선에 끌려갔는데,[1] 이들은 버마-태국 철도 건설을 비롯한 여러 사업에 투입되었다. 일본군의 가혹행위[2], 굶주림, 질병 등으로 인해 이들의 사망률은 80%에 이르렀는데, 이는 포로수용소 사망률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다. 이런 일 때문에 수카르노는 1943년에 천황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았으나, 그 자신은 로무샤 문제로 평생 괴로워했다고 한다.#
3. 피해 규모
강제노동에 동원된 인원과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로무샤는 약 400~1,000만 명이 동원되었고 대다수가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와 같은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만약 로무샤의 사망자 수가 실제로 약 1,000만 명에 근접한 것으로 입증된다면, 이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시 인명 피해 가운데 하나로 평가될 수 있다. 참고로 가장 큰 규모로 알려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약 600만 명으로 알려졌다.- 1947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는 일본군의 인도네시아 점령 기간 동안 자바섬에서 약 300만 명, 그 외 섬에서 약 100만 명, 총 약 400만 명[3]의 주민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거나 기근, 질병, 강제노동 등으로 사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4. 관련 작품
- 영화 <로무샤>(ROMUSHA, 1972): 인도네시아 Herman Nagara 감독의 작품으로, 1943~1944년 일본군으로부터 가혹하게 탄압을 받은 로무샤들이 이에 저항해 봉기를 일으키는 내용을 담았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이 잔혹하게 묘사되었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 측에 영화 배급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고, 인도네시아 당국은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 악화를 우려해 영화 개봉을 금지하였다.#
5. 기타
- 당시 로무샤(강제노동)로 인해 자바섬의 농업 노동력이 크게 감소하면서 식량 부족이 심화되었고, 그 결과 자바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 로무샤는 주로 인도네시아 남성을 대상으로 한 강제 징용으로 알려져 있으나, 여성도 일부 강제 징용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