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동남아시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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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티모르 전체의 역사에 대한 내용은 티모르 섬 문서 참고하십시오.
동티모르의 역사에 대해 다룬다.
티모르 섬의 서부 지역은 네덜란드, 동부 지역은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를 받으면서 서구인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졌다. 본래 하나의 섬이지만, 이쪽 동네가 대개 그렇듯 동쪽과 서쪽의 언어도 문화도 다르다. 식민 지배로 인해 달라졌다는 착각이 있는데 원래 다르다! 동티모르 안에서도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한다. 참고로 다른 인도네시아 섬도 여러 언어와 인종, 문화 모든 게 다른 이들이 살았고. 마자파힛 제국 시대때처럼 일시적으로 통일될 때를 제외하면 하나의 정치 단위로 굳어진것은 네덜란드 식민통치기인 20세기 초에나 가능했다.
티모르 섬의 경우에는 토양 일부를 네덜란드가 지배했을 뿐 문화적으로는 오스트랄라시아에 더 가깝다. 지형적으로도 인도-오스트레일리아 판(Indo-Australian Plate)에 속하며 섬 자체가 인도-오스트레일리아 판과 유라시아 판이 정확히 서로 부딪히면서 생긴 지형이다. 거기다 동티모르의 경우는 수백 년간 정치적으로도 분리되어 있었기에 독립국이 되었을 때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참고로 오스트랄라시아가 아닌 여타 인도네시아 소속 섬들의 경우는 대부분 화산섬이라 티모르 섬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다.
2. 전근대
약 4만 년 전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이동해 왔다. 뉴기니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관련이 있다. 이후 프로토-말레이인이 이주했으며 따라서 현재 동티모르에는 멜라네시아인들이 쓰는 뉴기니계 언어와 프로토-말레이인이 쓰는 오스트로네시아계 언어가 모두 쓰인다. 웨할리 등 소왕국들이 있었으나 자바 섬이나 발리섬 등과 다르게 문자는 사용하지 않았기에 동티모르의 고대사는 잘 밝혀져 있지 않다.3. 포르투갈령 티모르
1515년 포르투갈인들이 티모르 섬에 상륙하며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556년 도미니코 수도회가 리피우 마을을 세웠다. 1642년에는 딜리 지역에 목재 교역소를 설치한 후 향료/목재 무역의 거점으로 삼았고 1702년 정식 식민지로 편입시켰다.17세기 이후 포르투갈이 쇠퇴하고 네덜란드가 순다 제도의 패권을 잡으면서 1859년 양국 간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의 양도로 서티모르는 네덜란드가 차지하고 동티모르만 포르투갈 식민지로 남았다.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이 깊숙이 전파되어, 거의 이슬람교 국가에 가까운 인도네시아와는 천지 차이로 철저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것도 티모르 분쟁의 중요한 요소였다. 서티모르도 머릿수로 따졌을 때는 인구의 91%가 기독교를 믿는다. 다만 개신교 비중이 40% 정도로 동티모르보단 많이 높은 편.
4. 태평양 전쟁: 티모르 전역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1941년 12월 17일 호주-네덜란드 연합군이 포르투갈령 티모르를 점령한다. 포르투갈 총리 안토니우 살라자르는 항의했지만 그뿐이었고 포르투갈군 수비대도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일본 제국은 원래 마카오처럼 티모르를 건드리지 않을 예정이었으나 연합국 군대가 들어온 이상 일본은 티모르를 침략하기로 결정했다.1942년 2월 19일 일본이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했고 일본군이 티모르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호주-네덜란드 연합군은 1년 가까이 저항했으나 1942년 12월부터 호주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1943년 2월 일본은 티모르를 완전히 점령했다. 이후 티모르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일본군은 다른 점령지에서 그랬듯이 무차별 학살과 약탈 등 각종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의 학살과 연합군의 폭격으로 40,000~70,000여 명이 사망했다. 종전 후 호주군이 티모르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1945년 9월 27일 포르투갈군이 전후 복구를 위한 식량과 건축 자재를 싣고 티모르인들의 환영 속에 돌아왔다.
5. 1차 독립 (1975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의 식민지가 독립하는 흐름이 있었지만 포르투갈 제2공화국 정권은 이 흐름에 역행해 식민지들의 독립을 무력으로 억압하려 한 결과 동티모르를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이 일어났다.결국 끝이 없는 지겨운 전쟁에 염증을 낸 포르투갈 군부는 1974년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 살라자르를 몰아냈고 이 카네이션 혁명으로 민주화된 포르투갈은 모든 식민지를 사실상 포기했다. 포르투갈령 티모르 내에서도 티모르 원주민들의 정당 활동이 허용되어 우후죽순 정당들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동티모르 곳곳에선 독립파와 친인도네시아파가 종교 등 문화적 차이 등으로 각각 갈라져 내전이 벌어졌고 같은 해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이, 1975년 8월에는 동티모르민족해방군이 각각 결성됐다.
1975년 11월 28일, 동티모르 내전이 독립파의 승리로 끝나고 동티모르 민주주의공화국의 선포와 독립이 선언되었다. 초대 총리는 니콜라우 두스 레이스 로바토. 그러나 독립 주도 세력이 공산권 좌익 계열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베트남이 적화통일로 마무리되던 상황에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위기감이 고조되어 있었고, 미국-호주-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모두 태평양의 쿠바가 태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6. 인도네시아의 강점(強占)
제노사이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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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목록 | <colcolor=#000,#ddd> 세부 사항 | ||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 발생 위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 ||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 |||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관동대학살 ,1923, | 발생 위치 일본 제국 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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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1937, | 발생 위치 일본군 점령하 중화민국 난징시 | ||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파슬리 학살 ,1937, | 발생 위치 도미니카 공화국 | ||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 |||
제2차 세계 대전 |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홀로코스트 ⚖️ ,1941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 |||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뮐러 | 루돌프 회스 | 프란츠 슈탕글 | 크리스티안 비르트 | 아몬 괴트 | |||
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 |||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크로아티아 독립국 | ||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 |||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 |||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 |||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 ||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 |||
관련 단체 체트니크 | |||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 발생 위치 과테말라 | ||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 발생 위치 동파키스탄 | ||
이키자 ,1972, | 발생 위치 부룬디 | ||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 발생 위치 우간다 | ||
관련 인물 이디 아민 | |||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 발생 위치 인도네시아령 동티모르 | ||
킬링필드 ⚖️ ,1975 ~ 1979, | 발생 위치 민주 캄푸치아 | ||
재판 ECC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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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 발생 위치 짐바브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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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팔 학살 ,1986 ~ 1989, | 발생 위치 이라크 쿠르디스탄 | ||
재판 안팔 학살/재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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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크 학살 ,1987 ~ 1989, | 발생 위치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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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쟁 |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 발생 위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 스릅스카 공화국 | |
재판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라도반 카라지치 | 라트코 믈라디치 |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 니콜라 요르기치 | 프라뇨 투지만 | 슬로보단 프랄략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 |||
관련 단체 스릅스카 공화국 | 헤르체그 보스니아 | 스릅스카군 | |||
세부 사건 스레브레니차 학살 | 프리예도르 인종 청소 | 포차 학살 | |||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 발생 위치 르완다 | ||
재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르완다 제노사이드 가해자 목록 |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인물들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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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부티 피그미족 학살 ,2002 ~ 2003, | 발생 위치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 ||
다르푸르 학살 ,2003, | 발생 위치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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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위구르 자치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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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란의 여지가 있음. | }}}}}}}}} |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합병 과정을 나타낸 영상
1975년 12월 7일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침공해 27번째 주인 티모르티무르 주로 일방적으로 병합했다. 이 침공 당시 민간인 포함 사상자 및 포로만 185,000명에 달하며 인도네시아군도 1,000여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호주 기자 4명과 뉴질랜드 기자 1명이 이 전쟁을 취재하러 동티모르에 갔다가 인도네시아군에게 처형당했으며 그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온 호주 기자 로저 이스트도 동티모르 시민들과 함께 인도네시아군에게 처형당한 후 바다에 수장당했다.[1] 이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 발리보(2009)이다.[2]
이후 동티모르는 23년 10개월간 주변국과 국제 사회의 무관심을 등에 업은 수하르토 군부독재 정권의 잔혹한 식민 통치와 폭정에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학살, 질병, 기아 등으로 약 10~3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추방도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동티모르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티모르 섬과 가까운 발리의 주민들을 이주시키거나 동티모르 인들을 서티모르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의 동화 정책을 펼쳤다. 당시 진행된 이주 정책의 유산으로 딜리 인근에는 푸라 기리나타 힌두 사원이 있는데, 80년대 당시 이주된 발리 힌두교도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동티모르의 재독립 후 발리 이주민들이 다시 떠나고 동티모르의 힌두교도 수는 200여에 불과하기에 해당 사원은 현재 거의 폐허로 남아있다.
6.1. 독립 투쟁과 내전
1981년 사나나 구스마오가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 총사령관이 된 후 1992년 투옥될 때까지 끈질기게 저항했다.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을 중심으로 한 독립파 저항군의 활동으로 인도네시아 군경 2,277명이 사망했고 친인도네시아파 민병대 또한 1,527명 사망 및 2,400명 부상 등의 피해를 입었다. 1991년 10월에 일어난 산타크루즈 학살 사건이 1992년 1월 방영된 영국 ITV 다큐멘터리 <Cold Blood: The Massacre of East Timor>에서 소개된 후 전 세계 방송사에 차차 보도되며 국제 사회의 관심을 받아 해외에서 구호물자가 쇄도했고, 자원봉사자들이 동티모르를 찾았다.1996년에는 해외 망명 중이던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 대표 조제 하무스오르타와 카를로스 벨로 대주교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인도네시아 정부를 놀라게 했다. 1998년 5월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지고 인도네시아는 민주화된다. 이제 과거처럼 억지로 탄압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독립 열망이 고조되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하비비 대통령이 타개책을 제시해 1999년 2월에 종신형을 살던 사나나 구스마오를 가택연금 형식으로 석방했고 8월 30일에 열린 UN 감독 하의 주민투표에서 독립 찬성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잔류파와 인도네시아인 거류민들이 조직하고 인도네시아 군부와 유착한 친인도네시아파 민병대가 또 다시 학살을 시작했다. 이들은 군경의 묵인 하에 독립운동가, 기자 등을 참수하고 학교, 병원 등 공공 시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연구에 따르면 당시 티모르섬의 주요 인프라 70%가 파괴되고 2,000여 명 이상이 살해당했다. 이 상황이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결국 미국, 영국 등 강대국의 비호 아래 유엔은 파병을 결정했다.[3]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전 한국 대통령의 적극적 노력이 있었다. 김대중의 20세기 마지막(2000년) 노벨평화상 수상은 남북평화 노력뿐 아니라 한국 및 아시아의 민주화에 대한 도움과 동티모르에서의 학살을 막은 평화협상을 주도한 데에 대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서 철수를 진행하며 가는 곳마다 학살을 자행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APEC 정상회담 자리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여타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시아의 문제를 다루는 회의이니 이런 심각한 민간인 학살의 위험을 막는 것도 의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해 긴급 안건으로 상정하였다. 이렇게 동티모르에서의 학살을 막고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와 개발 원조를 약속함으로써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양쪽이 윈윈하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이에 따라 양국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께서 주도하신 일이니 그쪽에 감사를 표하라"는 말을 했다.
7. 재독립
1999년 10월부터 유엔 감시 하에 동티모르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무정부 상황을 타파하고, 헌법과 국가 건설의 기틀을 다진 후 2002년 5월 20일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며 정식 정부를 수립하고 해외 원조를 통한 국가 인프라 재건에 주력했다. 당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유엔 외교관 세르지우 비에이라 디 멜루는 현지인들을 존중하고 민주주의 국가의 기틀을 닦는 정책을 훌륭히 수행하여 현재까지 동티모르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4]독립에 반대하는 친인도네시아파 민병대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반정부 테러를 벌였고 2006년 해고된 친인도네시아파 군인들의 쿠데타도 일어났으나 진압되었다. 2008년에는 조제 하무스오르타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 등 테러로 치안이 극도로 불안한 탓에 한동안 유엔 평화유지군에 치안을 맡겨야 했다. 2012년에 치안권을 반환받았고, 2022년 4월 21일 대선에서 조제 하무스오르타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1] 더러운 전쟁 시절 아르헨티나와 칠레 군사정권이 그랬듯 마찬가지로 막나가는 극우 군사정권이었던 그 당시 인도네시아 정부는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도 얄짤없이 자국민과 똑같이 처벌하였다. 군사정권기 한국마저도 살인,마약밀매 같은 중죄가 아닌 이상 독재의 참상을 알리려던 외신기자나 외국인 단체들을 억류하거나 재판 없이 처벌하진 않았다. 그저 영구 추방 형식으로 입국만 막았을 뿐이다.[2] 조제 하무스오르타가 이 때 로저 이스트 기자를 동티모르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3] Joshua Kurlantzick, 2013, Democracy In Retreat, Yale University Express; 조슈아 컬랜칙, 2015, 어떻게 민주주의는 망가지는가, 노정태 역, 들녘, 75-76면[4] 이 사람은 2003년 9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기자 회견 중 폭탄 테러로 순직했다. 넷플릭스에서 그를 다룬 극영화 '세르지우'와 다큐멘터리 영화 '세르지우의 마지막 임무'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