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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5:08:16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colbgcolor=#de0000><colcolor=#fff>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Željko Ražnatović | Жељко Ражнатовић
파일:35c2b10801b048b49bcb1ad847a0f3e4.jpg
출생 1952년 4월 17일
유고슬라비아 SFR 슬로베니아 SR 브레지체
사망 2000년 1월 15일 (향년 47세)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세르비아 공화국 베오그라드
국적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유고슬라비아 S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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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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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FR
]][[틀:국기|
속령
유고슬라비아 FR
]]
직업 군인, 정치인
배우자 체차(Ceca)[1] (1995년 - 2000년)
자녀 9명
정당 세르비아 연합당[2]
별명 아르칸, 발칸의 백정

1. 개요2. 생애3. 사망4. 여담

[clearfix]

1. 개요

<colbgcolor=#de0000><colcolor=#fff> 파일:150459500615415608.jpg
아르칸과 세르비아 의용방위군 대원들

"아르칸"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세르비아 민병대 "아르칸의 호랑이들"의 지휘관이다.

세르비아인이지만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에서 무자비한 집단학살을 자행한 인물이자 전범으로, 한때 세르비아에서는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2. 생애

1952년 슬로베니아의 브레지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벨리코(Veljko) 라즈나토비치는 몬테네그로 지역 출신으로 과거 빨치산 활동에도 참여한 공군 군인이었는데, 매우 가부장적이었고 집에서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아르칸은 14세부터 범죄에 투신해서 소년원을 들락거렸으며 16살 때는 프랑스 파리까지 가서 소매치기와 갈취를 하다가 체포,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보내져 3년간 교도소에서 지낸다. 어릴 적부터 이런 인생을 산 탓인지 학력이 초졸이다.

감옥에서 불과 16-19살의 나이였는데도 지내는 동안 자신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성인들을 부하로 부리면서 감옥에서 폭력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출소 후 20세에는 서유럽으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암흑가의 삶을 시작한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출신 세르비아 마피아들과 결탁해 강력범죄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주로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스위스 등의 선진국의 은행과 보석상이 타겟이었다. 그리고 5번이나 체포됐고 5번 모두 탈옥했다. 그가 척척 탈옥할 수 있었던 건, 범죄를 벌이면서 유고슬라비아 국가보안국의 각종 청부(살인이나 납치)를 도우면서 생긴 보안국의 연줄을 통한 도움이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31살에는 베오그라드로 돌아와 베오그라드 시장 일대를 장악한 폭력조직에 들어가 성장하여 32세 무렵에는 독립해 자신의 조직을 이끌며 시장상인들로부터 보호세를 거두며 조직을 운영했다. 이 때 경찰관들에게 총을 쏴서 중상을 입히는 등 사고를 쳤지만 판결은 징역 6개월에 그치는 등 솜방망이 판결만 받았다. 재판 때에는 젤리코는 자신이 국가보안국을 위해 일했다고 판사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애초에 젤리코가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밀로셰비치를 후원한 이반 스탐볼리치[3]가 젤리코를 열심히 밀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젤리코는 1990년 37살 때 자신의 폭력단을 극우 민병대 '아르칸의 호랑이들'로 탈바꿈시키는데, 1991년부터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시작된 점을 감안하면 이미 사회 전반에 흐르던 불안한 조짐을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인증샷에도 나오지만 민병대인데도 전차자주포, 공격헬기도 보유하여 사실상 정규군 수준의 무장을 갖췄다. 이는 누가 봐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지원이 틀림없었다.

크로아티아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의 명령과 비호 아래 전쟁 중인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로 잠입해서 잔인한 인종청소를 자행하였다. 이 학살로 젤리코는 세르비아의 영웅으로 추앙 받고 세르비아 연합당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코소보 전쟁 당시에도 똑같은 인종청소를 했다. 그리고 코소보 전쟁이 끝나고 유엔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전쟁범죄자로 기소됐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헤이그 소재 유엔국제전범재판소가 자신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더라도 "숨어 살거나 항복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가겠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다.

2번의 결혼을 통해 9명의 자녀를 남겼고, 두번째 부인은 세르비아의 인기 여가수 체차(Ceca)였다.[4] 결혼식 영상 젤리코보다 21살 어린 1973년생으로 이 여인 역시 대세르비아주의를 신봉하는 인물이다. 아르칸과 결혼하기 전 18세의 나이로 전쟁 중인 크로아티아 부코바르에 가서 세르비아계 민병대에 합류하고 크로아티아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아르칸이 죽고 유고가 완전히 붕괴되어 연방에서 분리독립한 나라들이 유엔에 가입하는 등 아예 국제사회로부터 별개 주권국으로 완전히 인정받게 된 국제 정세의 현실을 부정하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북마케도니아 등 유고 연방에 속해 있던 나라들을 무력으로 재침공, 강제 합병해서라도 구 유고 연방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지금도 틈만 나면 남편은 세르비아의 영웅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대다수의 세르비아 정치인들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비난한다.

3. 사망

2000년 1월 15일 오후 5시 15분 경에 젤리코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구내식당 다프네에서 식사를 마치고 경호 경찰과 경호원과 함께 로비로 걸어나왔다. 그 순간 경찰학교 훈련생인 도브로사브 가브리치가 그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암살에 사용한 총기는 자스타바 Cz 99 권총. 관자놀이, 눈, 입을 맞춘 헤드샷으로 젤리코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가브리치가 쏜 총탄이 몸으로 막는 경호 경찰들을 먼저 맞히는 바람에 경찰 중 한 명은 하반신 마비가 됐다. 근처에 있던 여성 투숙객도 총상을 입었지만 경상으로 그쳤다.

가브리치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통해 징역 30년을 선고받지만 보석 도중 세르비아를 탈출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도주했다. 2020년 5월 시점에서 세르비아의 범인 송환 요구를 받은 남아공이 가브리치를 송환하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케이프타운에서 재판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사실 세르비아로 돌아가면 극우파들에게 죽을지도 모른다.

현재 젤리코의 암살의 배후를 두고 여러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가브리치의 단독 범행인지 아니면 코소보 전쟁에서 위축된 밀로셰비치 당시 유고 대통령이 본인의 정치적 안위를 지키기 위해 젤리코를 토사구팽했다는 등 여러 설들이 있다. 사건 당시 세르비아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설은 밀로셰비치 다음 유고의 대통령이자 당시 야당의 대권 주자였던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가 배후라는 설이었다. 아르칸(젤리코)은 2000년 유고 대선에 출마했던 코슈투니차에 대해, 코슈투니차는 코소보 전쟁 때 침묵했다며 세르비아 민족의 반역자라고 맹공격했다. 코슈투니차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아르칸한테 암살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정권을 창출하려다 암살당하기 전에 먼저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자 돈세탁을 해서 가브리치를 매수하고 아르칸을 죽였다는 설이 돌았다. 코슈투니차는 코소보 정책에 관해서는 코소보의 분리독립을 반대하는 대신, 밀로셰비치 정권 시기 박탈당했던 코소보내 알바니아계에 대한 구 유고 연방 시절의 자치권을 회복시키는 선에서만 온건하게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실제로 코슈투니차는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된 이후에 밀로셰비치 집권 시절에 자치권을 박탈당했던 코소보보이보디나의 자치주 지위를 복원시키는가 하면, 밀로셰비치가 그 동안 파기했던 구 유고 연방 시절의 국내 정책들을 되살리고, 그 동안 밀로셰비치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제정되었던 악법을 대거 폐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게 바로 아르칸과 엄청난 갈등을 빚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아르칸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코소보 전쟁을 지지하며 코소보의 알바니아인을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제노사이드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1만 명이 참석했다.장례식 영상

4. 여담



[1] 세르비아의 가수[2] 아르칸이 창당함[3] 밀로셰비치는 정권 장악 이후 스탐볼리치를 숙청해버린다. 토사구팽 스탐볼리치는 2000년 8월, 아침에 조깅한다고 나가서 행방불명된 지 3년 뒤에서야 전신이 부패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때문에 스탐볼리치의 유족들은 밀로셰비치를 증오하여 그가 죽자 오히려 너무 편하게 죽었다고 반발했다.[4] 결혼 후 이름은 스베틀라나 라즈나토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