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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7:06:34

석전

돌싸움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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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기산풍속화도 석전.png
기산 김준근, 〈기산풍속화도〉, 석전하는 모양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박물관 소장

1. 개요2. 역사3. 해외 유사 사례4. 대중매체5. 여담6.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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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전(石戰)한민족의 민속 놀이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때는 정월 대보름이나 단옷날에 했던 놀이다.

눈싸움과 비슷하지만 석전(石戰)은 말 그대로 돌(石) 싸움(戰)으로, 눈뭉치 대신 돌멩이를 던진다. 그러니까 전장에서의 피튀기는 투석전을 민간인들이 한 것이다. 보통 인접한 두 마을끼리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직접 마주보고 던지거나 아니면 지형지물을 활용해 상대편 마을까지 밀어붙여 점령하면 승리한다.

2. 역사

每年初, 聚戲於浿水之上, 王乘腰輿, 列羽儀以觀之. 事畢, 王以衣服入水, 分左右爲二部, 以水石相濺擲, 諠呼馳逐, 再三而止.
매년 정초(正初)에 패수(浿水)[1] 가에 모여 놀이를 하는데, 국왕은 가마를 타고 와서 우의(羽儀)를 나열해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옷을 물에 던진다. 군중들은 좌우로 두 편을 나누어 서로 물과 돌을 뿌리거나 던지고, 소리치며 쫓고 쫓기기를 두 세번 되풀이한 뒤 그만둔다.
수서》 〈고구려전〉
옛 기록에 따르면 최소 삼국시대 고구려 때부터 석전과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의 석전은 이후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것과 기록상 다소 차이를 보이기에 풍년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성격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하고, 조선에서 명절이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도 석전을 행한 것으로 보아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담아 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추측이며 확실한 근거가 밝혀진 것은 아니다.
國俗於端午, 無賴之徒, 群聚通衢, 分左右隊, 手瓦礫相擊, 或雜以短梃, 以決勝負, 謂之石戰.
나라 풍속에 단오가 되면 무뢰배들이 떼를 지어 큰 거리에 모이고는 좌우로 패를 나누어 기와조각이나 돌멩이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면서 때로는 몽둥이까지도 사용하여 승부를 가렸는데, 이것을 석전이라고 한다.
고려사신우 6년(1380년) 5월
석전이 문헌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 후기로, 1345년 충목왕이 단옷날에 척석희(擲石戱: 돌을 던지는 놀이)를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기록과 1374년 공민왕격구와 석전 놀이를 금지시켰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있다. 이를 통해 석전이 14세기 당시부터 격구에 준할 정도로 고려에서 널리 성행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은 석전 경기를 구경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존성(李存性)이라는 문신이 석전은 왕이 구경할 만한 게 아니라며 말리자 하급 관리를 시켜 그를 때리게 한 뒤 탄환을 쏘아 내쫓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루는 석전에서 돌을 잘 던지는 사람 몇 명을 불러 술과 몽둥이를 하사해 기예를 마음껏 발휘하게 하기도 했다. 한편 고려 말의 문인 이색은 석전을 구경하며 느낀 소감을 시로 남긴 바 있다.[2] 이러한 석전 풍습은 하술할 내용과 같이 조선 전기에도 여러 차례의 금지령을 겪으며 살아남아 구한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파일:석전1.jpg
파일:석전2.jpg
석전을 묘사한 현대 민속화 1880년대에 촬영된 석전 장면
파일:석전3.jpg
1902년 2월 8일자 《그래픽(The Graphic)》지[3]에 실린 석전 삽화
내가 조선에 당도한 첫 해 동안에 나는 전통적인 편싸움, 즉 석전을 구경할 흥미롭고 미심쩍은 특권을 누린 적이 있었는데, 이런 경험은 한번만이라도 겪어보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더러 있었고, 지혜롭고 박식한 여자들일지라도 언제나 앞으로 나서게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입국 이후 몇 주가 흐른 뒤에 하루는 우리집을 나서 친구를 방문하고자 가는 길에, 두 패로 나뉜 것으로 보이는 아주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무리가 있는 곳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친구에게 이런 상황을 말하고 무슨 일인지를 물었더니, 그것은 내가 목격했던 석전의 전초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신랑은 나 혼자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안전하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아주 고맙게도 끝까지 바래다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우리는 이내 돌과 던지는 무기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어느 조선인의 집에 대피하고자 뛰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요리조리 피하기와 되돌아 가기를 반복하고 종종 담벼락 뒤로 우리들 몸을 숨기기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길모어 씨(Mr. Gilmore)의 집에 당도하였는데, 그때 뭔가 어수선하고 동요된 상태였으므로 나는 분명하게 평정이 이뤄지기를 기다렸고 그리하여 현명하고 사려 깊은 여인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 같은 종류의 일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번은 우리들 중 성질이 급한 한 젊은 동포가 이 석전의 모습을 사진 찍으러 나갔다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어느 냉정한 미국인 한 사람이 최근에 호랑이를 사냥하기 직전에 그 자리에서 카메라로 호랑이의 모습을 먼저 담았는데, 그것에 그가 경쟁심을 느꼈던 것인지 우리들의 젊은 친구가 그 같은 시도를 했던 것이었다. 그는 곧 모든 던지는 무기들이 조준하는 대상물이 자기이며, 이들 피에 굶주린 악당들이 완전히 자기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불운하기도 하고 불법적인 것이지만 6연발 권총으로 무장한 상태였기에, 지나치게 흥분하고 불안했던 그는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는 도망을 쳤다. 그가 쏜 총탄은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의 다리살을 파고 들어갔고, 그가 쓰러지자 다들 그가 치명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정말로 양쪽 무리 모두의 분노가 가장 격렬한 형태로 완전히 얼어붙은 이 젊은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달아났고, 군중들은 분노의 외침과 더불어 그를 추격했다.

카메라와 외투는 내팽개쳐지게 되었고, 그는 미국공사관의 대피소에 도달하기 위해 거의 1마일이나 되는 거리를 달렸는데, 간신히 이곳에 도착하니 헐떡거리고 탈진한 상태가 되었다. 그의 총을 맞은 피해자는 그다지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는데, 그는 벌금을 물고 몇 주 간의 투옥, 가장 엄한 견책, 그리고 이 나라를 떠나라는 완곡한 요청을 수용하는 것으로 이 사태를 모면하였다.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4], 《상투의 나라》[5]
구한말 외국인이 기록한 석전을 보면 수십, 수백의 장정들이 서로 짱돌을 던지고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하며 심지어는 승세를 탄 쪽이 상대방 마을로 쳐들어가서 집까지 부술 정도였으니 마치 전쟁 같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듯하나, 그래도 위의 사례를 보면 '일단은' 놀이 취급이라 총 같은 무기는 반칙이었던 듯하다.

어찌나 과격한 놀이였던지 실제로 사람 몇 죽어나가는 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일례로 1903년 2월경, 석전놀이를 구경하던 운산금광의 미국인 직원 클레어 헤스(Clare W. Hess)는 재미삼아 한 편에 끼어서 다른 편으로 돌 하나를 던졌는데, 하필 다른 편 석전꾼의 머리에 적중, 맞은 석전꾼은 머리가 터저서 뇌가 흘러나와 즉사했다. 클레어 헤스는 죽은 석전꾼의 가족들에게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움에 떨었지만 백성들 생각으로는 원래 석전놀이는 상대편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려고 돌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고작 그거 가지고 문제를 삼은 조선인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석전은 때로 권력자, 예를 들어 평소에 횡포를 부리던 지주나 수탈의 앞잡이 역할을 하던 아전 등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돌을 던지는 식으로 항의하는 민심의 표출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마을간에 벌어지는 일종의 모의전 같은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의 계투처럼 마을간 이권 다툼의 전장이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권 다툼 성격의 석전이 벌어지면 투석구를 구비한 전문 석전꾼들을 고용해서 싸우기도 했다고.[6]

이 와중에 놀이와는 별개로 프로스포츠 성격의 석전이 또 따로 있었다. 즉 전용 코트를 정해놓고 그 영역 안에서 정해진 인원끼리 투석전을 벌였는데 민첩원딜인 투석꾼과 별개로 몽둥이를 쓰는 근딜과 방패를 쓰는 탱커가 있으며,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진을 짜고 기동하는 등 전략적인 요소도 있었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검투경기처럼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고 사람이 실신하거나 죽어나가는 맛까지 있으니 이렇게도 재미진 경기에 관중이 없을 리가 없다. 단 경기에 참가하는 것은 돌던지기와 돌피하기에 능한 전문 석전꾼이었다.[7]

이 스포츠는 상무적인 요소가 강했던 초창기 조선왕실에서도 인기가 있어서 태종 이방원은 중병에 걸려 앓아 누워 있다가도 석전경기가 열린다 하면 벌떡 일어나서 구경갔고, 태조 또한 석전을 좋아했다. 세종의 경우 처음에는 지원했지만 아무래도 유교를 국시로 삼는 국가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싸움을 즐기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다 하여 결국 금지했는데, 이런 와중에 양녕대군의 아들들이 몰래 석전을 벌이다가 사람을 죽여서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제전 성격의 석전경기는 계속 했다.
好石戰. 每歲自四月八日, 兒童群聚, 習石戰于城南. 至端午日, 丁壯畢會, 分左右, 豎旗鳴鼓, 叫呼踊躍, 投石如雨, 決勝負乃已. 雖至死傷無悔, 守令不能禁. 庚午征倭時, 以善投石者爲先鋒, 賊兵不能前.
석전을 좋아한다. 매년 4월 8일부터 아이들이 무리로 모여서 성 남쪽에서 석전을 연습하고, 단옷날이 되면 장정(壯丁)들이 다 모인다. 좌우 패로 갈려져서 기를 세우고 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놀고, 돌을 비 쏟아지듯 던져서 승부가 결판난 다음이라야 그만둔다. 비록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서 수령도 금하지 못한다. 경오년(1510년)에 왜를 정벌할 때에 돌을 잘 던지는 자를 선봉으로 삼았더니, 적군이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김해도호부
조선시대에 석전으로 가장 유명했던 고장은 안동, 김해, 평양 세곳으로 개중 안동의 석전꾼들은 기록에 이르기를 맨손으로 짱돌을 던지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작정하고 사람 죽이는 데 쓰는 전쟁용 줄팔매, 그러니까 투석구로 돌을 날렸다고 한다. 숙련자가 쓰는 투석구는 조약돌조차 시속 140km의 속도로 발사해 중갑옷을 입은 상대도 한방에 골절시킬 수 있는 흉악한 물건인 만큼 당연히 전투력이 엄청났다.

안동 석전꾼들은 특히 중무장하여 근접전에 능한 왜인들을 잘 때려잡았는데, 삼포왜란 때 제포에 웅거한 왜구가 차일(가리개)과 방패를 설치하고 조선 관군의 화살을 막으면서 버텼으나 안동 현지 주민들을 데려와서 돌팔매질을 시키니 모조리 개박살났다고 한다. ##[8] 또한 임진왜란 때는 죽령 방면 방어를 명받은 경상좌방어사 성응길이 긴급소집한 안동 석전꾼들로 안동에 접근하던 일본군 2군 선견대를 격퇴해 사흘 이상의 시간을 벌고 초조해진 가토 기요마사가 길을 바꿔 1군이 통과한 조령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파일:평양석전.png
서울대학교 소장 평양도 병풍에 그려진 석전 풍경[9]

조선 후기의 평양 석전꾼들은 맷집으로 유명했는데, 당장 나무 몽둥이에 방패까지 든 평양 석전꾼들이 터프하게 돌맞으면서 밀고들어오자 서울 석전꾼들이 밀렸다는 내용도 있다. 위장 잠입하여 적 마을에 침투 사보타주를 벌이거나, 상대 마을로 처들어가 집을 부수기도 하고, 부락의 체급별로 다양한 단체전을 벌이기도 하는 등, 군사 작전에 버금갔다. 한양 깍쟁이 석전꾼들은 몸 사리면서 재미없게 석전을 한다고 하찮게 보았다는 일화가 존재한다.
三門外及阿峴人, 成群分隊, 或持棒或投石, 喊聲趕逐, 爲接戰狀於萬里峴上, 謂之邊戰. 以退走邊爲負. 俗云三門外勝則畿內豊, 阿峴勝則諸路豊. 龍山麻浦惡少, 結黨救阿峴方.
삼문[10] 밖 사람들과 애고개 사람들이 떼로 모여 편을 가르고, 몽둥이를 들거나 돌을 던지며 함성과 함께 달려들어 만리재 고개 위에서 접전한다. 이를 편싸움[邊戰]이라고 하는데, 도망가는 편이 싸움에서 진다. 속설에 삼문 밖 편이 이기면 경기 일대에 풍년이 들고 애고개 편이 이기면 팔도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용산과 마포의 무뢰배들은 패를 지어와 애고개 편을 돕는다.

其酣鬪呼聲動地, 纏頭相攻, 破額折臂見血, 不止. 雖至死傷而不悔, 亦無償命之法, 人皆畏石回避, 掌禁該司另行禁, 而痼習無以全革.
바야흐로 싸움이 무르익으면 고함소리에 땅이 흔들릴 정도가 되며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한다.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져 피를 보고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다가 죽거나 다쳐도 뉘우치지 않을 뿐 아니라 목숨을 보상하는 법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돌을 두려워하여 피했다. 담당 관청에서 특별히 이를 금하기는 하지만 고질적인 악습이 되어 제대로 고쳐지지 않는다.

城內童竪, 亦效而爲之於鍾街·琵琶亭等處, 城外則萬里峴雨水峴爲邊戰之所.
성안의 아이들도 이를 본받아 종가비파정 부근에서 편싸움을 하고, 성 밖에서는 만리재와 우수재가 편싸움의 장소가 된다.
동국세시기》 정월 15일 中
한성부(서울) 근교에서는 특히 염천교 패와 애고개 패[11]가 만리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석전놀이 앙숙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기록에 왕왕 석전 부대가 나타나지만, 조총 등 개인화기가 발달하면서 유희 수준으로 내려간다. 그래도 영조 때에도 기록이 보이는 등 꾸준히 나타난다. 조선 전기에는 안동의 석전꾼들이 이름이 높았으나,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평양의 석전꾼이 유명했으며, 돌을 던지면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평양 장정들은 머리에 돌을 맞은 흉터가 없으면 치욕으로 여겼고, 석전에 패해 집으로 도망오면 어머니가 이를 크게 질책하며 석전장으로 돌려보낼 정도였다고 하니, 그 열기가 대단했고 터프했다 하겠다. 소년들도 사내다움이 있어야 한다며 참여가 권장 되었을 정도. 석전에 승리한 마을은 석전꾼들이 환영을 받으며 마을로 개선했고, 패배한 마을의 석전꾼들은 마을 밖에서 노숙해야 했다고 한다. #

매우 위험한 행위이기에 조선시대 당시에도 여러 차례 금지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워낙 뿌리가 깊어 명이 잘 안 먹히다가 20세기에야 일제에 의해 근절되었다. 금지한 명목상의 이유는 치안 안정이지만, 실제로는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원태우 지사의 사례처럼 투석을 통한 독립운동을 우려했다는 이유도 있다. 이후로는 주로 총격전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큐멘터리 '깡패건달로 보는 100년'에 따르면 석전꾼들은 정월 대보름에 강을 사이에 두고 돌싸움으로 한 해의 농사를 여는 풍습인 석전에 전문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다. 석전꾼은 범죄자나 거지 등 불량배들이 많았고, 관의 감시를 받았던 이들은 관리들의 동원에 쉽게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 반체제적인 독립협회가 집회를 할 때 공권력으로는 해산시킬 수 없었기에 사적인 인력들[12]을 동원하여 해산시켰는데, 이 중에 오강의 석전꾼들이 기록되어 있다. 즉, 석전은 일반적으로 을 사이에 두고 일어났다는 뜻이다.

당연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금지다. 했다가는 폭처법은 기본이요 돌멩이를 던지는 것이므로 특수상해 내지 살인미수죄도 성립하고, 재수 없으면 소요죄가 적용될 공산이 크며, 사상자라도 나오면 가해자는 폭행치사죄가 적용된다. 대신 현대에는 학교 운동회나 행사 같은 때 돌 대신 콩주머니나 모래주머니를,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박을 향해 던지며 노는 '박터트리기 놀이'[13]를 한다.[14]

북한에서 1980년대 말, '민속경기놀이'라는 이름으로 널뛰기나 각종 민속놀이를 인민들에게 권장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석전놀이도 딱 한번 재현되었는데,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서 취소시켰다. 대신 군사체육종목으로 미국놈 까부시기라며 미군이 그려진 나무판을 세우고 돌을 던지는 것으로 변형되었다.

3. 해외 유사 사례

석전과 비슷한 행위를 하는 전통들을 세계 각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파일:연중행사석합전.png
12세기 《연중행사 에마키(年中行事絵巻)》[15]에 수록된 단오 석합전 장면 #
파일:석합전.jpg 파일:f2b0817e8b3063c317b8945b8f07e51707eb943d605f0bb9ad608137e88b8db4.jpg
에도 시대의 화가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18~1694)가 그린 석합전 풍경 석합전을 설명한 일본 만화

실제로 일본에는 석합전(石合戦, いしがっせん)[16]이라는 명칭으로 조선의 석전과 같은 풍습이 존재했다. 이쪽도 유서 깊은 역사가 있어 《일본삼대실록간교 5년(881년) 기사와 가마쿠라 시대 군기소설 《겐페이 성쇠기》[17]에서부터 언급되며, 마찬가지로 단옷날에 주로 치러졌다. 아츠타 신궁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사원에서 성행한 것으로 보아 신령과 부처를 받들어 액을 물리치는 종교적인 의미도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1231년 싯켄 호조 야스토키가 석합전 금지령을 공포했으나 백성들의 반발이 심해 결국 제재를 완화했을 정도로 일찍이 그 인기가 대단했다.[18]

영지민들이 투석을 잘 하면 수성전에서 농성할 때도 유용하므로 다이묘들이 전투 훈련의 일환으로써 권장했다고 했다. 오히려 전근대 일본은 더욱더 마을 간에도 배타적인 데다가, 전쟁이 나면 제일 큰 피해를 입는 것이 농민들이었으므로 낙오무사 사냥이라고 해서 패잔병 사무라이를 기습해 죽이고 무기와 갑주를 약탈할 정도로 농민들도 독이 잔뜩 올라 있었으니 조선보다 수위가 낮았을 턱이 없다. 조선의 석전처럼 칼, 몽둥이 등의 무기가 병용되었고 무려 투석기를 동원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에 존재한 계투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마을 간 패싸움으로 돌팔매에서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장병기를 들고 싸울 정도였다. 역시나 중앙권력이 잘 닿지 않는 외변에서는 이민족의 맹습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묵인해줬었다.

또한 이탈리아 북부 이브레아에서 개최되는 '오렌지 전투 축제'에서는 이름대로 오렌지를 던진다. 19세기 평민 출신의 비올레타라는 여성이 결혼식을 치른 뒤 초야권을 요구하던 영주의 성에 불려가게 되는데, 영주를 마주한 순간 그녀는 숨겨 가지고 있던 단도로 영주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에 자극을 받은 민중들이 폭정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켰고, 이때 변변찮은 무기가 없어 영주의 사병을 향해 오렌지를 던진 것이 오렌지 전투 축제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주로 시칠리아산 오렌지를 사용하는데, 축제에서 던지는 오렌지는 상하거나 상품가치가 떨어진 것만을 사용하며 사전에 손으로 주무르거나 해서 최대한 물렁물렁하게 만들어 부상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한다. 또한 집중 사격받는 영주의 사병 역할을 맡은 인원들은 높은 탑을 형상화한 축제 차량 위에 올라가고 투구도 쓴다.

남아메리카 엘살바도르에는 불덩이 던지기 축제가 있다. # 17세기에 악령이 화산 폭발을 일으키는거라 믿으며 역으로 산을 향해 불을 던지며 저항하던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4. 대중매체

5. 여담

6. 관련 인물



[1] 지금의 대동강으로 추정.[2]절구〉, 〈단오석전[3] 영국의 화보 주간지다.[4]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으로, 1888년 조선에 파견되어 선교사 겸 제중원 의사로 활동했다.[5] 원제는 "상투쟁이들과 함께한 15년: 조선에서의 삶(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6] 지금이야 발전된 법으로써 분쟁이 심화되는 걸 막는다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권을 두고 다투는 분쟁이 없을 수 없었고 법이 발달하기도 전이었으니 분쟁의 심화를 막을 수단이 필요했고 그게 석전놀이였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 끼리는 다른 마을이라는 적을 통해 유대감 공동체 의식을 높여 분쟁을 가라앉히고, 마을끼리는 이권을 걸고 분쟁을 이런 국지전(?)을 통해 해소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7] 프로 리그에서 아마추어 팀이 살아남기도 힘들었겠지만, 실력이 낮은 아마추어가 참가했다가 돌을 관중 쪽으로 잘못 던지기라도 하면 큰일이 난다.[8] 이때 왜구의 돌격을 막기 위해 녹각목을 들고 전진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략 40에서 50미터가량의 거리가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또 왜구가 차일과 방패를 설치했다는 것에서 어설프게 만든 차일과 제대로 된 방패의 구분도 가능하다.[9] 두 패로 나뉜 석전 참가자들과 구경꾼들은 물론 간식거리를 파는 엿장수의 모습까지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초 당시 석전의 인기가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그림이다.[10] 숭례문, 돈의문, 소의문을 일컫는다.[11] 각각 현재의 서울역 북부 염천교와 애오개 역이 있는 마포구 아현동을 말한다. 아현이라는 한자 자체가 애오개(애고개)의 한자 음차이다.[12] 풍운한말비사 기록에는 팔도의 역사, 보부상과 함께 오강의 석전꾼이 나타난다.[13] 콩주머니 던지기라고 부르는 곳도 있다.[14] 이 박터뜨리기를 포함한 운동회는 영미권의 Field Day 형식을 일본에서 수입하여 만들어진 문화다.[15] 궁정 화가 도키와 미츠나가(常盤光長)가 고시라카와 덴노의 명으로 당시 헤이안쿄의 갖가지 풍속과 연중행사를 그린 두루마리 형식의 문헌이다. 원본은 소실됐으나 17세기 스미요시 죠케이(住吉如慶)의 모사본 등 여러 사본이 남아있다.[16] 인지우치(印地打, いんじうち) 또는 무카이츠부테(向礫, むかいつぶて)라고도 불렸다.[17]헤이케모노가타리》의 이본이다.[18] 이듬해 무가법(武家法)이 제정된 이래 간토 지방에서는 석합전의 빈도가 줄어들었으나, 교토에서는 여전히 석합전이 행해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석합전은 이후 에도 시대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금지령과 메이지 유신,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점차 사그라들었고 현재는 일부 지역에만 남아있다고 한다.[19] 1980년대 이전의 오지에 있는 시골 등지에서도 석전 비스무리한 돌싸움 놀이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