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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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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영향 및 비판

1. 개요

Đổi mới / 𣌒𡤓[1]

베트남어로 '변경한다'는 뜻의 '도이(đổi)'와 '새롭게'라는 의미의 '머이(mới)가 합쳐진 용어로 '쇄신'을 뜻한다.

1986년 베트남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제기된 개혁·개방 정책 슬로건이며 당시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였던 응우옌반린이 주도했다.

2. 배경

통일 이후 베트남이 오랜만에 평화를 찾으면서 경제 성장의 기회를 잡을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베트남 정부는 통일 직후 남베트남 농업에 대한 집단농장화에 착수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고 농민들은 생산한 곡물을 암시장에 팔았다. 공업도 미국경제제재로 인해 수출이 막혔고 내수 자급도 어려웠으며 그나마 생산된 물품들은 역시 암시장으로 들어갔다.

결국 1979년에 농업 집산화를 중단하고 공산품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게 하는 부분적 경제 개혁을 단행했으나 이 시기에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예산의 상당수를 국방비로 지출하게 되었고 인력 손실도 적지 않았다. 경제가 안정화되면서 시장화가 진척되고 이에 따라 빈부 격차가 급속히 늘기 시작하자 보수파들이 개혁파를 누르면서 주도권을 잡았는데 이들은 농업집산화 등 1970년대 중후반의 통제 조치를 재도입했다. 경제 기반이 탄탄하지 않았던 베트남에서 이러한 통제조치 재도입의 결과 인플레이션이 700% 이상으로 치솟았고 경제 성장은 다시 둔화되었으며 경상수지 적자가 가중되었다. 그 결과 중앙 계획 시스템 하에서 과거의 잘못에 대해 강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보수파 인사들은 자아비판을 하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 베트남 지도자들에게는 개혁을 촉구하는 3가지 정치 운동이 존재했다. 첫째, 1985년 이후 정치 개혁으로 인한 사회주의의 붕괴에 기반한 DRV 모델에 대한 최종 해결책에 대해 기술주의자와 친시장 개혁주의자들의 강한 압력이 있었다. 둘째, 부분 개혁 덕분에 상업 활동으로 이익을 얻은 사람들은 개혁이 경제적 혜택을 가져옴에 따라 더 많은 개혁을 요구했다. 셋째, 남부 자유주의자들은 1975년 이전 체제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면서 개혁을 지지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 경제는 전환기를 맞이했고 싼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국영 기업은 자유 시장으로 전환하여 이윤을 얻었으며 이는 노동자, 관리자 및 고위층을 포함한 다양한 그룹들 사이에서 공유되었고 시장경제 개혁의 기반을 제공했다.

3. 영향 및 비판

대표적으로 1988년 이전에는 베트남에서 일하는 민간 기업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1990년 회사법이 제정됨에 따라 민간 기업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2002년에 기업법의 150개의 사업 면허와 허가를 제거하고 등록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면서 민간 기업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2013년에는 헌법 개정으로 도이머이 정책을 확고히 정착시켰다.[2]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해방이 베트남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개혁 이래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 베리스퍼드(Beresford)는 1988년 이후 산업화된 도시와 농촌 지역의 소득 격차가 확대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다. 1980년대 후반 예산 보조금 폐지와 모든 산업 가격의 해방으로 인해 산업 구조가 재편되었지만 주로 소수 도시에 위치한 중앙 관리 산업은 토지 접근과 같은 특별한 특권으로 고도의 보호를 받았다. 반면 주 소유의 국영 기업은 구조 조정 과정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개혁, 개방이 가져다 준 지방 간 불평등의 또 다른 이유는 외국인 직접 투자의 집중이었다. 베트남은 1988년 외국인 투자법 제정과 함께 외국인 투자가 확대되었다. 3분의 2는 호찌민과 3개의 인접 지방에 투자되었으며 나머지는 1993년 하노이하이퐁에 투자되었다. 루옹은 외국인 직접 투자의 집중도, 특히 분야별로 중점을 두었는데 2000년 FDI의 거의 90%가 산업, 건설 및 서비스에 투자되었고 여기서 더 많은 이익을 얻은 건 도시 지역이었다.

더불어 토지가 없는 무전 농민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현재 베트남은 브라질 다음으로 가장 큰 커피 수출국인데 이 타이틀은 1990년대에 기업인들이 민간 커피 농장을 설립하여 소수 민족이 재배한 토지를 침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커피 재배 면적은 1985년 44,700헥타르에서 2000년 516,700헥타르까지 증가했는데 이에 따라 베트남의 커피 수출은 크게 증가했다. 1985년 12,300톤에서 2001년 91만 톤으로 수출량이 크게 증가했으며 2011년에는 120만 톤에 이르렀다. 그러나 토지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농부들이 토지를 적절한 보상 없이 지방 공무원에게 몰수당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돌아오는 보상은 시장 가치보다 훨씬 낮았다. 실제로 하이퐁에서는 지역 공무원에 의한 퇴거에 반대하는 어부가 경찰과 충돌한 적이 있었다.

커피와 같은 농산물과 관련하여 수출 증가가 가계 소득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세계화는 지역 농민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메콩강 삼각주와 중앙 고원은 세계 시장에 의해 결정된 농산물 가격의 변동에 매우 민감하다. 그에 따른 일례로 좋은 품질의 커피의 수출 가격이 1990년대에 10분의 1로 떨어진 것을 들 수 있다. 1994년에 1톤당 4,000 달러였던 커피가 2001년에는 380달러로 떨어진 것이다. 그에 따라 중앙 고지대의 농부들의 생활 조건도 악화되어 그들이 얻는 수익은 생산 원가의 절반에 불과하다.

베트남 공산당은 노동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헌법 4조 1항에 명시된 사회주의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본 정책이 시행되자 뒤늦게 노조를 만들면서 한국 노동조합으로부터 강사를 초빙하거나 한국으로 보내 교육을 받기도 했는데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노조 운영 노하우를 전수받는 아이러니하고 웃픈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3] 근데 웃긴 건 노동권 지수는 2023년 기준으로 베트남이 한국보다 1등급 높은 4등급이다.(...)


[1] 易 오른쪽에 對, 始 밑에 買, 유니코드: U+23312, U+21913 .[2] 베트남의 도이머이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비슷하면서도 차이점이 있다. 베트남은 현재도 토지를 포함한 생산 수단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사용권을 소유권과 유사하게 인정하지만 모든 사용권은 사용 기한이 만료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를 베트남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모든 '자본가'는 인민의 소유를 '임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자 비중이 심각할 정도로 높다.[3] 사실 한국의 민주노총은 1996년 총파업 등을 계기로 전 세계 노조에서도 일종의 모범 노조로 알려져 있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