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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41:46

데스티니 가디언즈/지식/끝없는 밤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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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I - 수락3. II - 균열4. III - 해안의 선물5. IV - 공모자6. V - 파괴7. VI - 이해8. VII - 숙성9. VIII - 번지르르한 칼10. IX - 예측11. X - 기념비

1. 개요

융합의 시즌에 공개된 지식이다.

2. I - 수락

"이 일의 적임자는 나야!"

까마귀의 목소리가 커다란 창문에 부딪혀 반향을 일으키자, 선봉대 사령관의 사무실은 실제보다 더 동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전에도 밤이 되면 자발라의 사무실 가장자리는 어둠에 잠기곤 했지만, 아래쪽 도시에서 소용돌이치는 벡스 에너지 때문에 지금은 더욱더 컴컴했다. 까마귀는 한숨을 내쉬고는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어둠 속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자발라는 창문을 바라보고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푸른 라리마를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무한한 인내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아이코라를 흘긋 바라봤다. 그녀는 두 손을 맞잡은 채 불안한 눈빛으로 까마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알고 있네." 영원처럼 길었던 침묵을 깨고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의 능력과 엘릭스니와의 관계만 고려해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난 정확히 언제까지 여론의 재판을 받아야 하지?" 까마귀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그런 재판이 시작되면 내 죄목이 뭔지 명확히 알 수 있을까?"

자발라는 창문에 비친 각성자의 반영을 바라봤다. 불과 얼마 전 정원을 거닐다 목숨을 잃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까마귀," 자발라는 돌아서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상당히 민감한 상황이네. 회의는 엘릭스니를 이 도시에 받아들인 것을 두고 우릴 강하게 압박하고 있어. 그들이 자네까지 무기로 이용하는 걸 감당할 수는 없네."

"그래, 그런 건가. 정치 공작." 까마귀는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당신네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거겠지. 악감정은 없다고?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당신들이 짓는 표정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인가?" 자발라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까마귀는 방안 대화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우리가 제대로 된 계획을 마련하기 전에 자네의 이전 신원이 공개된다면, 자네와 자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해악이 초래될 수 있어." 아이코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자네를 사랑하는 사람들 말이야." 그녀는 덧붙였다.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까마귀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거지? 난 계속해서 예전의 내 그림자를 피해 숨어 있어야 한다는 건가? 영원히?"

"영원히는 아니야." 아이코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야 할 필요가 있네."

까마귀는 시선을 아이코라에게 돌리고 그녀의 눈에 가득한 상처를 보았다. 아만다가 망자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녀의 눈에도 어렸던 감정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

아이코라는 눈을 감았고, 한껏 참고 있던 숨결이 그녀를 빠져나갔다. "오시리스에게 갈 겁니다." 그녀가 경고했다.

"오시리스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괜찮은 지도자라면, 같은 이야기를 하겠지." 자발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엄청난 피로를 느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내려 앉은 침묵 속에서, 아이코라는 수 세대에 걸쳐 쌓아 온 두 사람의 우정이 말 없이 화답하는 것을 느꼈다.

"그를 얼마나 더 보호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솔직히 말했다.

"나도 그렇네."

3. II - 균열

자발라는 뚫어져라 단말기 창을 바라보다가 어느덧 화면의 문구가 흐릿하게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비비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현장의 헌터들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행성계 전역에서 벡스의 활동이 증가했다. 선봉대 작전에 대해 조직적인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다. 도시 내부에서는 이례적인 방해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도시의 장벽 내에서 엘릭스니와 인간이 대치하고 있다.

웅웅 소리와 함께 자발라의 어깨 위에 형체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고스트가 어깨에 내려 앉는 부드러운 무게가 느껴졌다. "이게 시간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일까요?" 타르지는 그렇게 물으며 자발라의 눈길을 끌려고 했다. 타르지는 말을 하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굳이 말을 할 때는 늘 목적이 있었다.

"자네 의견을 물은 적은 없는데." 자발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제 의견을 얘기한 적은 없는데요."

이번에는 자발라도 고개를 돌려 타르지를 바라봤다.

"두 분이 계속 세 사람 몫을 할 수는 없다고요." 타르지는 거듭 말했다. "다시 아나와 얘기해 보세요."

자발라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타르지, 내가 설득할 방법은—"

오른쪽 제어 콘솔에서 경보가 울렸다.

"카이아틀 여제의 연락이 수신되고 있어요." 타르지가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말했다. "교환소로 연결되게 내버려 두죠."

자발라는 고집스럽게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연락을 받았다. 카이아틀의 제국 인장이 '음성 전용'이라는 알림과 함께 화면에 나타났다.

"카이아틀 여제, 무슨 일로 친히 연락을 주셨나?" 자발라가 지친 얼굴로 까칠하게 자란 수염을 긁으며 물었다. 타르지가 잠시 그를 바라본 후 사라졌다.

"사령관." 카이아틀이 인사를 했다. 여제가 바로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점점 커져 방을 가득 채웠다. "함대의 장거리 센서에 최후의 도시 인근에서 이상 현상이 커져 가는 것이 감지됐다."

"왜 갑자기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주는 거지?"

카이아틀은 콧방귀를 뀌었다. "신경까지 써 주는 건 아니다, 사령관. 하지만 선봉대가 갑자기 말살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인지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겠지." 자발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뭐, 아직은 아무 일도 없다."

"지금은 그렇겠지."

그녀의 말에 희미하게 남은 여운이 그의 귀를 사로잡았다. "진짜로 연락한 이유가 뭐지?"

잠시 동안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아틀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여제의 목소리는 이전처럼 차분했지만 연기를 하는 듯한 분위기는 모두 사라져 있었다. "락슈미-2가 최근 도시 백성들에게 했던 방송이 우리에게도 수신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너는 지금 고고한 한 마리 매처럼 독사의 굴 안에 서 있는 것 같구나. 안 그런가?"

"락슈미는 정치가야."

"말은 가장 위험한 무기다, 사령관." 카이아틀이 그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처음엔 신념을 속삭이는 것부터 시작하지만, 곧 큰 소리로 반대 의견을 말하게 되고, 그 다음에 네가 정신을 차릴 때는 가슴에 꽂힌 칼을 보게 될 거야."

"경험에서 하는 얘기겠지." 자발라도 맞받아쳤다.

"경험에서 하는 얘기다." 카이아틀도 부끄러움 없이 인정했다. "락슈미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너희 역할을 폄하하면서 선봉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있다. 그런 말을 큰 소리로 거듭 반복하게 되면, 생각이 같지 않던 사람들도 조만간 그녀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자발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 숨결에 실린 무게는 행성계 반대편의 카이아틀에게도 느껴졌다.

"난 네가 우리 휴전 협정의 규약을 존중할 거라고 믿는다. 누가 됐든, 네 후임자를 믿을 생각은 없어." 카이아틀이 경고했다.

자발라는 분노와 호기심을 저울질해 봤지만, 지금 이 상황에 적절한 응답을 찾아내는 데는 그런 저울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제어판으로 물러나 케이드가 할 법한 방법을 택했다. 그냥 되는 대로 해 보자고.

"내 권위를 위협하는 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자발라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러니 헛된 착각을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아버지를 폐위시킨 일을 후회한다고 해서 내게 설교를 늘어놓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지는 마라."

자발라는 낮게 으르렁거리는 상대의 목소리를 스피커 너머에서 들었다. "칼루스를 폐위시켰다는 이유로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카이아틀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울이 내 백성들에게 한 짓을 생각하며 후회하는 것이다. 우리는 군체에게 문을 열어 주었고, 시부 아라스에게 칼을 건넸고, 예상치 못한 상태로 척수에 닿는 강철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내가 인정하고 존중하는 전사가 가치 없는 적에게 그와 같은 대접을 받는 걸 원치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넌 불필요한 조언을 원치 않는 것 같구나."

자발라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빛 없는 도시 풍경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무슨 조언을 하고 싶은 거지?"

카이아틀이 입을 열었을 때, 들려온 건 여제의 목소리가 아닌 친구의 목소리였다. "우문아라스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였다. 어둠의 손은 여러 개다. 그 손이 네 목덜미를 붙잡기 전에, 어둠의 손길을 눈치챌 수 있겠나?"

4. III - 해안의 선물

두 엘릭스니는 자기들 몸무게보다 무거울 게 분명한 커다란 금속 상자를 들고 엘릭스니 구역으로 향하는 동안 세인트-14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저 녀석들이 날 얼마나 싫어하는지 좀 봐." 세인트는 투덜거렸다. 아만다 홀리데이는 상자를 스캔하여 데이터패드에 입력했다. 뒤엉킨 해안에서 도착한 예상치 못한 비상 보급품을 이제 거의 다 내린 것 같았다.

"그렇게 뚱해 있지 마세요." 그녀는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정신 건강에 좋아요."

"나도 친구들과는 잘 어울린다고!" 세인트가 반박했다. "하지만 몰락자는… 나와 같이 있는 걸 싫어해. 나도 그런 기분이고."

"아마 그래서 아이코라가 이번 일을 당신에게 맡긴 거겠죠." 아만다는 말했다.

세인트의 얼굴은 헬멧에 모두 가려져 있었지만, 아만다는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굴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엘릭스니 두 명이 다른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너무 늦게 세인트를 알아보고는 비틀거리다가 상자를 떨어뜨렸다. 떨어진 상자의 자물쇠가 떨어졌다. 빛의 가문의 색상이 담긴 옷을 입고 선봉대의 밝은 주황색과 파란색 목줄을 건 젊은 엘릭스니가 당혹스러운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세인트가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그는 엘릭스니에게 말했다. "거미가 아마 옛 땅거미 가문에서 남겨진 물품을 보냈을 거야. 우리가 적의 보급품으로 연명한다는 게 그 녀석에게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겠지." 그는 한손으로 상자를 끌어 통로에서 치우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자물쇠를 수리했다.

아만다가 손상된 상자를 스캔하는 동안, 젊은 엘릭스니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곁눈질로 세인트를 확인한 후 종이 한 장을 방패처럼 내밀었다. "적하 목록입니다."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고마워." 아만다는 꾸밈 없이 쾌활한 태도로 대답하고는 데이터패드를 두드렸다. "전자 문서로 받았어."

"당신은 전자 문서로 받았군요." 엘릭스니가 그 말을 따라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목줄에 매달린 배지를 자랑스럽게 들어올렸다. 거기에는 "임시"라고 적혀 있었다.

아만다는 웃었다. "그건 어디에서 받았어?"

"뒤엉킨 해안의 보급품 하역 기관입니다. 거미가 보낸 보급품이에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세인트와 아만다의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

"저희 신사님이시죠." 그는 은밀하게 덧붙였다.

아만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깜짝 놀란 세인트는 손에 든 자물쇠를 짓이겨 버리고 말았다.

세인트가 고개를 들었다. "둘 다 좀 조용히 해 주면 안 돼?"

"그러지 마세요." 아만다는 세인트를 가볍게 나무랐다. "당신은 엘릭스니어를 연습하지도 않는데, 이 친구는 우리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아만다는 엘릭스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미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우리 말을 아주 잘하는데." 그녀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엘릭스니가 대답했다. 대화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여기 인간들은 모두 거미켈을 섬기나요?"

"거미를 섬긴다고?" 아만다는 말을 뱉었다. "거미라는 자식은 그냥—" 그 뒤에 불길처럼 쏟아진 말에는 쌍자음이 가득했다.

엘릭스니는 얼어붙었다. 그녀의 말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어조에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아만다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니까 아주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라는 얘기야." 그녀는 그렇게 말을 맺었고, 엘릭스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정신이 팔려서 자물쇠가 망가졌잖아." 세인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느슨하게 말아 놓은 고무 튜브를 들어 올렸다.

"서비터 플러그, 필터, 에테르 순환기…" 타이탄이 당황한 듯 끙, 소리를 냈다.

"뭐가 잘못됐나요?" 아만다가 물었다.

"아니야." 세인트는 웅얼웅얼 대답하고 푸른색 코드가 달린 금빛 원통을 들어올렸다. "이 호흡기만 해도 내 우주선보다 더 비싸겠는데."

아만다는 세인트에게 다가가 직접 물품을 확인했다. 응축된 조립식 세라믹 판, 증기 증류기, 발전기 연결선 등 요긴한 필수품이 몇 가지 눈에 띄었다. 하지만 튜브와 필터들과 함께 외계의 보물이 담겨 있었다. 끈적한 핑크색 액체가 가득 찬 나노메시 구체, 엔트로피 도금된 크롬 도관 분배기, 섬세한 연보라색 해면 그물에 감싸인 채 반짝이는 오팔 물질까지.

"거미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아만다가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엘릭스니를 향해 말했다. "다른 상자도 다 이런 식이야?"

"네. 전부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보물로 가득해요. 우리 고향에서 온 물건입니다. 고마움의 표시죠."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달가닥 소리를 냈다. "감사드린다고 해야 할까요?"

아만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하 목록 좀 확인할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엘릭스니의 손에서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작업자들에게 돌아갔다.

"여기에서 생활하려면 우리 자원이 많이 필요할 거야." 세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봉인했다. "하지만 이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지. 아무리 동족이라 해도, 거미가 이렇게까지 너그럽다니 정말 놀랄 일인데."

아만다는 적하 목록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말이 안 돼요." 그녀는 말했다. "맨 위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절반은 뭔지도 모르는 물건이지만, 거미가 갖고 있었으니 좋은 거겠지.' 전부 손으로 적은 목록이고, 가격도 하나도 안 적혀 있어요."

세인트는 아만다의 어깨 너머로 서류를 확인했다. "이 상자들은 거미의 창고에서 바로 온 건데." 그가 말했다. "거미가 안 보냈으면, 대체 누가 보낸 거야?"

"이 목록 좀 보세요!" 아만다는 말을 이었다. "이 물품은 '최고의 삼투압 필터(맨 아래쪽 서랍에 숨겨져 있었음)'이라고 적혀 있어요.' 또 이건 그냥 물음표만 잔뜩 적혀 있고요. '시계 같은 것'이라고 적힌 것도 있네요. 이런 것도 있어요. '시끄러운 큐브. 악취가 나지만 다들 좋아함.' 그런데 이 서명은 뭐죠?"

아만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 맨 아래쪽에 끼적여 놓은 모양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무슨… 우주선인가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세인트에게 건넸다.

타이탄은 고개를 돌려 그림을 바라봤다. "아하!" 그가 외치며 손등으로 서류를 때렸다. "잘 봐. 새잖아!"

아만다는 삐뚤삐뚤한 검은색 선을 다시 바라봤다. 구불거리는 검은 새 모양을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림 실력은 형편없네요." 그녀는 말했다. "그래도 괜찮은 사람 같아요." 불현듯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5. IV - 공모자

아라크 자랄은 조바심에 눈을 가늘게 뜨고 죽은 궤도의 물류 담당이 진영의 보급품 상자에 관해 힘겨운 설명을 늘어놓는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봤다. 거대한 우주선이 짐을 내리는 것을 배경으로, 두 사람은 벌써 한 시간 째 광활한 격납고를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자랄은 천체가 사라지고 검은 함대가 침략해 온 것을 죽은 궤도의 마지막 탈출이 조만간 시작되어야 한다는 명확한 징조로 보았다. 그는 출발 준비를 서두를 것을 지시했지만, 진영의 일반 구성원들은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자랄은 부하의 갈팡질팡하는 보고를 중단시켰다. "이걸론 부족해. 우리는 조만간 지구를 등져야 하고, 죽은 궤도는 우리가 제공하는 물자로 생존해야 한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반쯤 뜬 눈이 그 말의 심각성을 강조해 주었다. "너희가 조달해야 하는 물자 말이다. 무슨 얘긴지 알겠지?"

화가 난 듯 붉은 기운이 관리자의 얼굴에 번졌다. 자랄이 언짢은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뒤쪽에 높이 쌓인 상자의 미로 속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떠나려는 겁니까, 자랄?"

고개를 돌려 보니 락슈미-2와 집행자 히데오가 거기 서 있었다. 미래 전쟁 교단의 지도자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정중한 태도로 서 있었지만, 신 군주국의 수장은 편안한 모습으로 화물 상자를 살펴보고 있었다.

"굉장한 수집품인데. 죽은 궤도의 자금줄이 이렇게 튼튼한 줄은 몰랐어." 히데오는 상자를 향해 과장된 손짓을 해 보였다.

자랄은 어깨를 으쓱했다. "평생의 결과물이니까, 히데오. 전부 다른 곳에서 인간의 씨앗을 다시 뿌리는 데 필요한 거야. 당신도 함께 가지."

"말씀은 감사하지만, 우린 여기가 좋습니다." 락슈미가 끼어들었다. "사실, 그 문제 때문에 온 겁니다."

자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격납고 출구를 향해 손짓했다. 세 사람은 느긋하게 밖으로 나갔다.

"히데오와 저는 현재의 선봉대 지도부에 대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락슈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자랄은 즐거운 기색 없이 키들키들 웃었다. "그래, 당신의 공개 연설은 잘 들었어. 굉장한 선동가가 되고 있던데. 당신이 몰락자를 그렇게 증오하는 줄은 지금껏 몰랐군."

"진실을 말하는 것이 선동이라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죠." 락슈미는 의도한 것보다 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몰락자가 유용한 촉매가 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우리 말이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선봉대에 관한 얘기는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자랄이 대답했다. "하지만 교단은 구성원을 잃고 있어. 당신에게도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이 가장 명민한 녀석들일 것 같지는 않은데."

"떠나고 싶다는 사람을 붙잡진 않습니다." 락슈미는 죽은 궤도의 우주선을 흘겨보며 말했다. "쭉정이를 쳐내면 우린 더 강해질 테니까요."

"대변자가 죽은 이후로 자발라와 아이코라는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어." 집행자 히데오가 끼어들었다. "그 와중에 행성들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은 거지. 수호자들에게 어둠의 사용을 허가하고, 이제는 기갑단과 거래를 한다고?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지."

"이제는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지도부를 수립해야 합니다." 락슈미가 말했다.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나?" 자랄과 일행은 넓은 간선 도로 한쪽 구석에 멈춰 섰다. 화물 차량의 굉음에 그들의 이야기가 묻혀 버리는 곳이었다.

"첫 번째는 살라딘이었지." 히데오가 짓궂게 씩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겉보기만큼 냉철한 사람은 아니더군. 그 강철 군주도 자발라 사령관만큼은 끔찍이 아끼는 것 같았어."

락슈미는 불필요한 말까지 늘어놓은 것을 비난하듯 히데오를 흘겨봤다. "지금은 세인트-14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대화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자랄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번 쿠데타에 또 누가 참여하고 있지?"

"영향력 있는 사람의 협력을 확보했습니다. 권력이 질서정연하게 이양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인물이지요." 락슈미가 대답했다.

"아주 똑똑한 사람이어야 할 텐데." 자랄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 말이야. 아이코라 레이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고."

자랄이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하자,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는 지도부의 변화가 죽은 궤도에 어떤 의미일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었다. 인간이라는 종의 재정착과 생존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고민해 왔었다. 언제나 그렇듯, 개인적인 권력과 죽어가는 사회의 새롭게 거듭날 명성에 대한 기대감은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6. V - 파괴

간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이십여 명의 인간이 어둠을 틈타 봇차 구역으로 들어섰다. 개중 일부는 진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쇠지렛대나 렌치 같은 작업 도구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엘릭스니 구역으로 침입하여 침략의 증거를 찾을 계획이었다. 그 계획이 실패하면, 빛의 가문이 최후의 도시에서 환영받지 않는다는 메시지라도 명확하게 전할 생각이었다. 칼이 깃발을 찢었다. 매캐한 연기가 주위를 가득 채웠다. 페인트 깡통이 달그락거렸다. 주위에서 기계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그들이 내는 소음을 가리고, 그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간결하게 음모를 논의했다.

"이게 그 녀석들 식량인 것 같아." 한 젊은 여자가 곁에 있는 남자에게 속삭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어깨 너머를 돌아봤다. 커다란 에테르 탱크 옆에 쪼그려 앉은 그들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인근 건물에 모여 앉은 엘릭스니 무리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 녀석들도 잠을 자기는 할까?

"이것 좀 도와줘." 남자가 말하며 제어판으로 추정되는 것을 가리켰다.

그들은 함께 외부 판을 떼어내 아래쪽에 복잡하게 뒤엉킨 전선을 드러냈다. 그들은 은밀한 시선을 교환한 후 떨리는 손으로 전선을 한 주먹씩 뽑아내기 시작했다. 빨라진 심장 박동에 귓속이 쾅쾅 울렸다.

새소리 같은 낮은 휘파람이 밤공기를 갈랐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헌터의 모습이 보였다. 두건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정조준하지는 않았지만 손에 들린 핸드 캐논이 그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소리에 이끌린 다른 공모자들도 달려와 그들을 둘러싸고는 머릿속으로 승산을 계산했다. 그 결과를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장을 하고 온 사람들도 몰락자와 싸우는 건 몰라도 수호자를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헌터는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아."

여자가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사이, 곁에 있던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헌터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안 돼!" 그녀가 말했다. "미쳤어?" 그녀는 그의 팔을 붙잡아 파괴된 에테르 탱크 옆으로 당기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청년은 천천히 헌터를 향해 다가섰다. "당신 지금 잘못된 편에 서 있는 거야." 그가 입을 열었다.

헌터는 핸드 캐논의 공이치기를 젖혀 찰칵, 소리를 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그가 대답했다.

헌터의 솜씨를 시험해 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어깨 너머로 외쳤다. "가자."

헌터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헌터는 그가 슬그머니 곁을 지나며 발치에 침을 뱉는 걸 지켜봤다. 뭔가 오래되고 끔찍한 것이 헌터의 몸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온 정신을 집중해서야 겨우 손이 떨리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공모자들은 하나씩 은신처를 벗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작은 소리로 헌터에게 욕설을 퍼붓는 자들도 있었지만, 감히 그 헌터와 시선을 맞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분 후, 그 구역은 헌터 한 명만 남기고 텅 비었다. 거리에 가만히 서 있는 그의 어깨 위로 고스트가 생성되었다.

고스트가 걱정스러운 듯 삑삑거렸다. "정말 쏠 생각은 아니었죠?"

헌터는 무기를 집어넣으며 잠시 주저했다. "내가 진지하다는 걸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어, 글린트."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잖아요." 고스트가 다시 물었다. 헌터는 아무 말 없이 파괴의 현장을 떠났다. 조만간 누군가 경보를 울릴 것이다. 그때 거기서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얘기해 줘요." 고스트가 뒤로 쳐지며 또다시 말했다. "…혹시 그럴 생각이었나요?"

7. VI - 이해

아이코라 레이는 미래 전쟁 교단 본부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교회처럼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였지만, 그곳에 침투한 벡스 기술로 인해 성스러운 느낌은 크지 않았다. 덩굴처럼 얼기설기 뒤엉킨 전선이 천장을 가로지르고, 공기 중에는 희미한 오존 내음이 가득했다. 중앙에는 왕좌와 수술대를 모두 닮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락슈미-2가 앉아 있었다. 천장의 전선에 연결된 헬멧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분주한 교단 신도들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바삐 오가면서도 아이코라를 수상쩍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워록이 락슈미에게 다가가려 하자, 한 신도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침묵과 인내를 요구했다. 아이코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신도는 장치 옆에 있는 작은 마이크에 대고 무슨 말인가 속삭였다. 지금까지 장치가 가청 주파수 이하로 웅웅거리는 소리는 크게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작동을 중단하고 나니 엄청난 고요함이 아이코라를 짓눌렀다.

락슈미는 편안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현재 시간대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리를 비켜 줘." 그녀는 눈도 뜨지 않고 말했다. "14:25에 다시 시작하지." 부관들은 아이코라에게는 눈길 한 번 안 주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한참이 지난 후, 락슈미는 눈을 뜨고 워록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협상을 하러 온 거겠죠."

"아니야." 아이코라는 차분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름의 경고를 하러 온 거네."

"경고를 한다고요?" 락슈미는 새된 목소리로 웃었다.

"이전과 같은 선동 행위가 다시 발생한다면, 내가 직접 자네를 외딴 얼음 위성에 버리고 오겠어."

락슈미는 혀를 찼다. "마음이 편협한 사람만이 예언을 선동이라 칭하지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미지의 상황을 앞두고는 광신도가 나타나기 마련이지." 아이코라는 장치를 보며 말했다. "미치광이도 그렇고. 이건 부탁이 아니네."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군요. 자, 아이코라, 당신은 제가 본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락슈미는 장치를 향해 손짓했다. "봇차 구역이 두 번째로 공격받습니다. 세인트-14은 적에게 포위되어 총알받이가 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통신 장치에 대고 도와달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지요."

"자네 예언 중에서 실현되지 않은 게 몇 개나 있지, 락슈미?" 아이코라는 매섭게 쏘아붙였다. "자기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게. 얼마나 겁에 질린 목소리인지 들어 보라고."

"오시리스 밑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고도 여전히 이렇게 순진하군요." 락슈미가 대답했다.

아이코라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교단의 지도자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헛된 짓은 집어치워. 아니면 그 결과를 감당하거나. 알겠나?"

흔들림 없는 태도로, 락슈미는 인공 눈을 환하게 빛냈다. "알겠습니다."

아이코라는 뒤로 물러났고, 한숨과 함께 그녀의 분노도 빠져나왔다. "그러면 더 할 얘기는 없겠군." 그녀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본부를 빠져나갔다.

그곳을 떠나며, 아이코라는 방금 실현된 것이 락슈미의 예언인지 자신의 것인지 생각에 잠겼다.

8. VII - 숙성

나는 부러진 다리로 도시를 거닌다. 나는 많이 약해졌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나를 배려해 준다.

이 모습을 선택하기를 잘했다.

나는 비틀거리다가 낮은 돌 벽을 붙잡고 선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준비가 됐지만, 그래도 다음 단계를 알아내야 한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가 펼친 거짓 황혼을 바라보지만,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렵기도 하지만,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고 뭔가 새로운 것, 미지의 것에 몰입하는 건 꽤 설레는 경험이다. 눈알이 튀어나오려는 것 같아 나는 눈을 꼭 감는다.

그 느낌이 사라진다. 나는 다시 눈을 뜨고 주위 사람들에게서 익숙한 얼굴을 찾는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역겨운 마음에 뱃속이 뒤틀린다.

처음 그들이 내게 접근했을 때, 나는 조롱의 의미로 그들에게 접근했다. 그러자 그들은 어리석고 벌거벗은 순진함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였다. 나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내 손가락이 그들의 정신을 할퀴었다. 나는 말만을 사용해서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의지를 그들의 정신에 밀어 넣었다. 그들이 어찌나 순진한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두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흐를 때까지 기만을 삼켰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들처럼 자주 접근하고, 그들이 마주 접근하면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그들과 대화한다. 그들과 함께하려 한다. 그들을 곁에 두려 한다.

이건 연민이 아니다. 연민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 이 기분은—

나는 무릎을 꿇고, 가면을 벗고, 구토한다. 가느다란 검은색 액체가 증기로 변해 사라진다.

나는 이 육신의 껍질 안에서 무모하게 풀어지려고 흐느적거리는 검은 덩어리를 단단히 붙잡는다. 새로운 팔은 너무 가늘고 너무 약하다. 새로운 껍질은 여전히 끈적거리는 점액으로 붙잡혀 있다. 아직은 안 된다.

잠시 어둠이 내리고…

한 남자가 내 어깨에, 내 등에 손을 얹는다. 내게 어디 아프냐고 묻는다. 그는 내 검은 눈과 검게 물든 치아를 보고는 비명을 지르려 한다.

나는 그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망가진 입을 통해 간단히 거짓을 말한다.

그는 잠시 멈춰 미소를 짓고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삿대질을 하고는 멀어져 간다.

나는 그의 무지가 남긴 기름진 조각을 삼키고 다시 한번 일어설 힘을 얻는다. 나는 얼굴을 가리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축축한 힘줄로 미약하게 묶여 있는 지금의 형체가 껍질 아래에서 조각조각 갈라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안쪽 깊은 곳에서 마지막 기만의 조각이 꿈틀거린다. 나는 벌레의 번들거리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여기에서 풍요롭고 다채로운 기만을 포식하고서도, 벌레는 게걸스럽게 울부짖는다. 벌레는 과식을 하여 기괴한 모습으로 부풀어 올라 있으면서도 계속 더 내놓으라며 포효한다. 내게 자기 생명을 유지할 것을 명령한다.

나는 고개를 들고 깜빡이는 어둠의 그물 너머에 있는 것을 본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벌레가 포효한다.

9. VIII - 번지르르한 칼

핵심 구역의 산책로는 잠들지 않는다고들 한다. 축제의 시기에 그곳은 수호자들의 미덕을 기리고 늘 어딘가 아련해 보이는 그들의 얼굴을 도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가두 행진의 장이었다. 그곳이 텅 빈 것은 붉은 전쟁 이후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신 군주국의 집행자 히데오는 미래 전쟁 교단의 락슈미-2와 함께 걸으며 깜빡이는 네온 불빛으로 밝혀진 가판대를 둘러봤다. 하지만 그곳에는 상인도 소유자도 없었다. 히데오는 어깨 너머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는 미래 전쟁 교단의 경호원 네 명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이 거리가 텅 비었던 때를 기억하나?" 그가 물었다.

"네." 락슈미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그때도 날 바보라 했었죠." 그녀는 경멸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는 반복해서 실수를 합니다, 히데오. 스스로 만든 절망 속을 맴돌고만 있지요."

미처 대답할 말을 떠올리기 전에, 히데오는 끝없는 밤 아래로 산책을 나온 이유를 찾아냈다. 버려진 광장 위에 몸을 드리운, 크롬과 연보라색 천의 거수였다.

세인트-14은 준비해 온 씨앗을 발치에 있는 비둘기들에게 흩뿌리면서 만족스러운 듯 구구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산책을 하기엔 날을 잘못 고른 것 같은데." 그가 다가오는 히데오와 락슈미에게 말했다. "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위가 필요한가?"

히데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세인트. 격납고로 당신을 찾아 갔었는데, 홀리데이 양이 여기로 가 보라고 하더군요. 당신이 그…" 그는 새들을 보며 덧붙였다. "…생각할 게 있다고 했다면서요."

"새들은 단순해. 썩 괜찮은 대화 상대지. 덕분에 생각할 여유도 찾을 수 있고." 세인트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도와줄까?"

"최근 회의에 불만이 많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선봉대의 일부 결정이 도시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아요. 그에 관한 논의에 당신을 포함시키고 싶습니다." 락슈미가 말했다.

"그런데 아라크 자랄은 빼 놓고?" 세인트가 물었다. 히데오나 락슈미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명민한 질문이었다.

"네." 히데오는 재빨리 대답했다.

락슈미는 바위를 스쳐 지나가는 물처럼 유려하게 히데오의 대답을 보충했다. "이건 선봉대가 도시의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도록 하기 위한 방안입니다."

세인트는 투구를 쓴 얼굴로 락슈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엘릭스니." 그건 질문이 아닌 선언이었다.

"선봉대는 군사 조직입니다. 회의도 그들이 경계 너머의 세력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락슈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하지만 저희는 과연 그런 군사 조직에 의존하는 것이 이 장벽 내에서 도시를 통치하는 최선의 방식인가 하는 문제에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세인트는 결투를 신청하기라도 하듯 어깨를 펴고 당당히 일어서 히데오와 락슈미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 냉철한 모습을 보니 히데오의 뱃속이 옥죄어 들었다.

"도시 지도부의 재구축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선봉대에는 장벽 밖에서의 일에 대한 권한을 위임하고…" 히데오는 산맥을 향해 손짓했다. "그리고 도시 내부의 일에 대한 권한은 별도의 지도자에게 일임하는 거죠." 그는 이번엔 세인트를 향해 손짓했다.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야." 세인트는 감정을 속일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당신도 민간 분야에 전장의 전술적 선택지를 일방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시겠죠." 히데오는 애원하는 듯했다. "게다가 선봉대의 활동 범위가 너무 넓어졌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된 지도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세인트는 불쑥 말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온 거지? 난 정치가도 아닌데."

"당신은 지도자입니다." 락슈미는 가슴에 손을 얹고 반박했다. "영웅이죠. 시민들에게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세인트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는 입을 다물었다.

"자발라 사령관과 아이코라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선뜻 내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변화는 원래 불쾌할 때가 많죠. 하지만 당신이라면 사명을 무시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인트는 발치의 새들을, 새들이 쪼는 씨앗을 내려다봤다. "오시리스와 얘기해 봐야 할 것 같군." 그는 말했다.

락슈미는 히데오를 흘긋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파트너에게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러지." 세인트는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손 안의 마지막 씨앗을 새들에게 뿌려 주었다. 그리고 그는 광장을 떠났다.

히데오와 락슈미는 여행자의 시선 아래에서 세인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그가 자발라나 아이코라에게 말하기라도 하면…" 히데오는 악다문 이 사이로 말했다.

"그렇게 멍청한 짓은 하지 않도록 오시리스가 막아 줄 겁니다." 락슈미가 말했다. 목소리의 부드러운 기색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살라딘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근시안적으로 우리 제안을 거부한다면…"

히데오의 뱃속이 다시 뒤틀렸다.

10. IX - 예측

큐리아가 패배한 이후 하늘은 밝아졌고, 끝없는 밤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면서 도시의 분위기도 조금씩 밝아졌다.

락슈미-2는 도시 장벽 높은 곳에 서서 모험심이 강한 시민들이 엘릭스니와 어울리는 것을 지켜봤다. 그녀는 버려진 고철을 이용해서 작은 로봇을 몇 개 만들어 팔고 있는 엘릭스니 행상인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 몇 명이 그 로봇들에 관심을 보이며 상인 맞은편에 서 있었지만, 엘릭스니에게 겁이 나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락슈미는 그 상인이 로봇은 하나 정도 팔더라도 고철은 전혀 팔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기분으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날이 화창하군, 그녀는 생각했다.

"날이 화창하군."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락슈미는 고개를 돌려 벽을 따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전 워록 오시리스를 바라봤다.

"묘한 어휘를 선택하셨군요." 락슈미가 대답했다. "어둠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어둠속에서는 아군과 적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 그녀는 장치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런 대화를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기계가 보여 준 여러 잠재적인 미래가 그녀를 지금 이 순간으로 이끌었다. 오시리스는 예측 가능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 오시리스가 말했다. "그리고 어둠속에서는 아군과 적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

락슈미는 속으로 웃었다. 그들은 여전히 표준 편차 내에 존재했다. "당신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오시리스. 그런 면에서는 항상 명료한 영감이라는 축복을 누리시지 않았던가요."

"빛을 잃은 후로 내 관점도 달라졌다." 오시리스는 천천히 운을 뗐다. "시간이 갑자기 유한한 것이 되면서, 모든 것이…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할까. 내 인식이 변화할 수 있다면, 어쩌면 내 적들도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필멸의 어리석음이군요." 락슈미는 아래쪽 풍경을 향해 손짓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우리처럼 시간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오시리스. 당신은 장막 너머를 엿봤습니다. 벡스 시뮬레이션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도 보았죠. 역사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변화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필연적이기도 합니다."

"나도 전에는 그렇게 확신했었다." 그는 동의했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군. 역사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왜 항상 놀랄 일이 생기는 거지?"

락슈미는 쿡쿡 웃었다. 물론 이미 들어 본 말이었지만 그때의 예견으로는 오시리스의 얼빠진 듯한 어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시리스? 화창한 오늘 하루가 지속될 수 있을까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엘릭스니 거주지를 가리켰다. "우리가 몰락자들과 빛을 나눠야 하는 걸까요?"

당신은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겠지,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 예측은 당신의 능력을 벗어났으니까.

"이제 예측은 포기했다, 락슈미. 지금까지도 그러했지만, 난 이제 모든 운명을 여행자의 손에 맡겼다." 그는 락슈미를 곁눈질했다. "네가 보기엔 어떻지? 이게 새로운 여명인가?"

락슈미는 그 장치 내에서 그토록 치열하게 찾았던 환영을 떠올렸다. 엘릭스니에 대한 정의로운 승리가 역사적으로 또 운명적으로 모두 실현되는 순간. 그녀 평생의 과업이 매 순간 미래에서 현재로 편입되고 있었다.

"아니요." 그녀는 답했다. "이건 폭풍이 오기 전 내리치는 번개의 섬광일 뿐입니다."

11. X - 기념비

장벽 위 대기는 희박했다. 그건 락슈미 말이 옳았다.

미스락스는 중앙 집결지 위에 있는 기념비를 말없이 바라봤다. 그는 강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아래쪽에서 엘릭스니와 함께 움직이는 수호자와 시민들을 지켜봤다.

드렉 하나가 기념비에 다가와 자기 아이를 애도하는 사람들 곁으로 이끌었다. 부드럽게 밀어주는 손길에 힘을 얻은 아이는 도금된 달걀 껍데기를 기념비 아래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수많은 조각으로 깨진 껍질이 금으로 용접되어 다시 온전한 달걀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미스락스의 목이 메어 왔다. 그들은 세상을 떠난 아이를 추모하고 있었다.

미스락스 뒤쪽 통로에서 삐걱 소리가 들리고, 세인트-14의 커다란 실루엣이 화창한 하늘을 가렸다. 그들은 어깨를 맞대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코라와 자발라가 떠나는 추모객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드렉과 그의 아들이 다가오자, 아이코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자발라에게 소개해 주었다. 크고 엄중하고 냉정한 자발라는 한쪽 무릎을 꿇어 아이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했다.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군." 세인트가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미스락스는 대꾸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세인트와 같은 자세로 묵직하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리처럼 여린 동맹을 주먹 속에 쥐고 있는 것 같은 이런 상황이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세인트가 물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무엇이 다가오는지는 오직 거대한 기계만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의 제한된 관점으로 만족해야 한다." 미스락스는 확신을 갖고 말했다.

세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쪽에는, 아만다 홀리데이가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초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선 후 잠시 기다렸다. 미스락스와 세인트는 아무 말 없이 그녀가 까치발을 들고 군중을 훑어보는 모습을 지켜봤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사람들을 헤치고 하얀 망토를 입은 다른 추모객에게 손을 뻗었다. 두 사람 다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아만다는 뭔가 오해가 있었는지 망토를 입은 여자에게 사과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잠시 대화하며 어색한 웃음과 연민의 감정을 나눴다. 그러다가 아만다는 살라딘 경을 보고는 그녀의 곁을 떠나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강철 군주의 개인적인 공간과 명성을 지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주위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살라딘은 경건한 태도로 기념비 앞에 산탄 탄피를 한 줌 내려놓았다. 그 공물이 무슨 의미인지, 미스락스는 알 수 없었다.

기념비 앞에서 일어선 살라딘은 고개를 들어 전망대 위의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의혹과 회한, 불확실성의 그림자에 뒤덮인 얼굴로, 그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저 사람은 누군지 모르겠군." 미스락스가 세인트를 향해 말했다. "어딘가… 불행해 보이는데."

세인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살라딘 경이야." 그가 설명했다. "그는 너무 많은 사람을 잃었다. 자기 심장과 희망까지 잃었지. 너무 많은 것을 잃은 탓에,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도 자기는 혼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나도 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그가…" 그는 오시리스라면 어떻게 말할지 잠시 생각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

미스락스는 세인트의 목소리에 담긴 상처를 들었다. "당신은 어떤가?"

그 질문에 세인트는 잔뜩 긴장했다.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난간이 삐걱 소리를 내며 휘어 버렸다. "난 괜찮아." 그는 거짓말을 했다.

"그렇겠지." 미스락스는 최선을 다해 비꼬는 말투로 대답하며 세인트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전사라고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니다. 마음의 상처를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아니야." 미스락스는 그 어깨를 꼭 쥐며 세인트를 달래고, 안정시켰다. "전사라고 해서 조금도 무너지지 않아야 하는 건 아니다."

세인트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 봐야겠어." 그는 미스락스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어조로 말했다. "고맙다, 켈 중의 켈. 넌 진정한 친구다."

"잘 가라, 세인트." 미스락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잃어버린 불사조를 찾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