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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Great Interregnum; Zwischenherrschaft)는 1254년에서 1273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가 공석이었던 공위시대(interregnum)를 가리키는 표현이다.2. 배경
12세기 후반부 들어 절정의 위세를 과시하던 교황과 강력한 황권을 추구했던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잦은 대립을 벌였다. 특히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까지 차지하며 남부 이탈리아까지 손에 넣게 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두고 황제와 교황의 권력 싸움은 절정에 달했다.교황들은 황제를 견제하고 길들이기 위해 파문을 남발하고 대관식을 자꾸 연기하며 정식 황제로 임명하지 않는 수법을 사용했다.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불리며 시대를 앞서나갔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인노첸시오 3세 등 당시 절정의 위세를 과시하던 교황들과 잦은 대립을 벌였다. 교황들은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마다 수차례 파문을 남발하여 황제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파문당하자 각지에서 파문을 명분으로 황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반란을 토벌하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3. 전개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고, 뒤를 이어 선출된 차남 콘라트 4세 역시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고 대관을 받지 못해 황제 자리에도 오르지 못하며 각지에서 계속되는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콘라트 4세가 1254년 사망하자 그 후계자를 두고 제국은 분열되었다. 콘라트 4세에게는 콘라딘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2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배제되고 말았다.[1] 이미 프리드리히 2세 시절 대립왕으로 즉위한 홀란트 백작 빌헬름(재위 1247~1256)이 있었으나 그도 1256년 사망했다.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후계 제위를 두고 제후들은 분열되었다. 라인 지방의 영주들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영향으로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재위 1257~1272)를 독일왕으로 선출했고, 다른 세력은 프랑스 국왕의 지지 아래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10세를 대립왕(Gegenkönig)으로 옹립하였다. 두 명의 외국인 출신 대립왕들은 누구도 결정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교황은 이러한 사태를 즐겼고 두 명의 대립왕 중 누구에게도 황제 대관을 하지 않았다. 결국 장기간 제위가 비는 사태가 발생했다.교황은 자신의 권력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인 황제가 없는 상황을 반겼다. 이렇게 황제 자리가 공석으로 방치된 채 20년이 유야무야 지나버렸고(...), 시간이 갈수록 독일 지역의 상황은 막장이 되어가 마침내 교황조차 황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유력 제후들의 세력 다툼에 시달리던 중소 영주들과 여러 도시들에서도 황제 옹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 1273년,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의 요청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선거가 열렸다. 황제 선출을 위해 모인 제후들은 스스로 황제 후보로 나서지 않으면서도 다른 유력 가문이 제위를 차지하는 것을 견제했다. 한동안 공전으로 흐르던 황제선거는 힘의 균형을 위해 일부러 한미한 가문 출신을 황제로 선출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인츠 대주교 베르너 폰 에프슈타인(Werner von Eppstein 1225~1284)과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2]의 주도로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代子 godson)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 루돌프 4세가 독일왕으로 추대되어 루돌프 1세로 즉위했다. 이로써 대공위시대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백작이 선출된 것은 첫 사례였고, 그전까지는 당연하게도 공작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야심가 루돌프 1세는 즉위하자마자 권력을 이용해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루돌프 1세는 선출 후 아스카니아 가문의 작센 공작과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비텔스바흐 가문의 라인 궁적백과 바이에른 공작 등 선거권이 있는 유력 독일 제후 및 이웃의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의 혈손들과 딸들을 결혼시켜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자신의 최대 정적인 보헤미아 왕국의 오타카르 2세를 겨냥해 제국의회에서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있었던 영토 변경을 무효화시켰고, 오타카르 2세가 굴복하지 않자 제국추방령을 선언해 오타카르 2세의 운신의 폭을 좁혔다. 결국 오타카르 2세가 무력으로 반전을 꾀하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라슬로 4세와 손잡고 빈 근처 뒤른크루트에서 오타카르 2세를 전사시켰고,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획득하여 맏아들 알브레히트에게 분봉하는 한편 케른텐 공국, 크라인 변경백국 등을 자신의 충실한 동맹이었던 괴르츠-티롤 백작 마인하르트 2세에게 양도하여 자신의 세력권 하에 두는 등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한미했던 시골 백작가 합스부르크 가문은 불과 몇년 만에 신성 로마 제국 최대의 가문으로 급부상했다. 이에 다른 제후 세력들이 다시 루돌프 1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루돌프 1세는 일부 세력의 반대로 교황의 대관식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워낙 황제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교황은 대관식을 하지 않고도 그를 실질적인 황제로 인정했다.
루돌프 1세의 즉위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세력을 급격하게 팽창시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위를 세습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3] 선출권이 있는 제후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위를 세습하지 않고 나사우 백작, 룩셈부르크 백작, 바이에른 공작 등으로 돌려가면서 즉위시켰다. 게다가 이시기 독일왕들은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와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를 제외하면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치르지도 못했다. 이 와중에 하인리히 7세의 아들 요한이 보헤미아 왕국을 상속받아 세력을 크게 확장하면서 룩셈부르크 가문이 거의 제위 세습에 가까이 다가갔으나 15세기 중반에 지기스문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단절되고 말았고, 정작 지기스문트의 사위였던 알브레히트 2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기 잠깐 동안을 제외하고는 1806년 제국 해체선언 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준세습화했다.[4]
4. 관련 문서
[1] 선대 프리드리히 2세 역시 하인리히 6세가 사망했을 당시 3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제위를 물려받지 못한 바 있다. 그리고 콘라딘은 시칠리아 왕국 왕위를 놓고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의 샤를과 싸우다 붙잡혀 처형당했다. 콘라딘은 20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고 거기에 후계자가 없었다. 또 프리드리히 2세에겐 황위 계승권은 없지만 적법한 서자라고 인정받은 사생아가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시칠리아 왕 만프레디와 사르데냐 왕 엔조(후에 폐위)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 남계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패사하거나 옥사했다.[2] 나중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거쳐 프로이센 왕국을 형성해 독일 통일을 주도하는 호엔촐레른 가문 프랑켄계의 직계 선조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초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5대조이다. 루돌프 1세의 첫번째 부인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데가 호엔촐레른 가문 슈바벤계의 후손이라 먼 친척이었다.[3] 루돌프 1세의 맏아들 알브레히트 1세는 자력으로 나사우 가문 출신 아돌프를 물리치고 나서야 즉위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실력으로 제후들에게 인정받은 셈.[4] 1804년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면서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기 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