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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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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colcolor=#FED11E> 상무위원 <colbgcolor=#fff,#222>2010년 9월 전원회의 김정일·김영남·최영림·조명록·리영호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김정은·최룡해(승진)
2015년 2월 정치국 확대회의 황병서
가나 2010년 9월 전원회의 김영춘·전병호·김국태·김기남·최태복·양형섭·강석주·변영립·리용무·주상성·홍석형·김경희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김정각(승진)·장성택(승진)·박도춘(승진)·현철해·김원홍·리명수
2013년 3월 전원회의 박봉주
2015년 2월 정치국 확대회의 김양건(승진)·오수용(승진)·곽범기(승진)·최룡해(강등)[1]
[1] 이때 현영철도 보선되었다는 추정 존재.
후보위원 2010년 9월 전원회의 김양건·김영일·박도춘·최룡해·장성택·주규창·리태남·김락희·태종수·김평해·우동측·김정각·박정순·김창섭·문경덕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곽범기·오극렬(강등, 복귀)·로두철·리병삼·조연준
2013년 3월 전원회의 현영철·김격식·최부일
2014년 4월 정치국 회의 리영길·오수용[2]
[2] 이때 장정남도 보선됐다는 추정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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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조선로동당 총비서
2010년 9월 전원회의 김정일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김정은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제1비서로 직함 변경
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당중앙위원회 비서국
<colcolor=#FED11E> 가나 <colbgcolor=#fff,#222>2010년 9월 전원회의 김기남·최태복··최룡해·문경덕·박도춘·김영일·김양건·김평해·태종수·홍석형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김경희·곽범기
2014년 4월 정치국 회의 최룡해·강석주·오수용
2016년 초 김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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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前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경공업부장
김경희
金敬姬 | Kim Kyong-hui
파일:북한 김경희사진.jpg
출생 1946년 5월 30일 ([age(1946-05-30)]세)
북조선인민위원회 평양시
(現 북한 평양시)
본관 전주 김씨 (全州 金氏)[1]
국적
[[북한|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모스크바 대학교 (학사)
계급 대장
직업 군인, 관료, 정치가
주요서훈 김일성훈장 (1992년)
로력영웅 (1995년)
김정일훈장 (2012년)
가족 아버지 김일성, 어머니 김정숙
큰오빠 김정일, 작은오빠 김만일
이복동생 김경진, 김평일, 김영일
남편 장성택, 딸 장금송
조카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조카손자 김한솔, 김금솔
조카손녀 김솔희, 김주애
친척 작은아버지 김철주, 김영주
사촌 김정현, 김영성
오촌당숙부 김창주, 김원주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종교 무종교 (무신론)

1. 개요2. 상세3. 가계4. 장성택과의 관계5. 장성택 사후
5.1. 2013년5.2. 2014년5.3. 2015년 이후 신변 이상설5.4. 2020년5.5. 2022년
6. 대중매체에서7.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1967년 열병식 젊은 김경희.jpg
1967년 열병식에 참석한 젊은 시절의 김경희
북한의 정치인. 북한의 초대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장녀이자 2대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여동생이다. 3대 최고지도자 김정은고모이자 김정은의 정치적 목적으로 처형된 장성택의 부인이기도 하다.

김일성김정숙 사이에는 김정일, 김만일, 김경희 3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둘째 아들 김만일은 1947년 익사하면서 김정일에게는 유일한 친동생이 되었다. 러시아식 이름은 타티아나였지만, 김정일이 유라 이르세노비치 김[2]에서 김정일로 고쳤듯이 그녀도 타티아나 이르세노브나 김에서 김경희로 고쳤다.[3]

2. 상세

김성애가 김일성과 결혼한 후 김정일이 마지못해 김성애와 화해하려고 시도한 것과는 달리 김경희는 단 한 번도 김성애와 화해를 시도하지 않았는데 1972년, 김일성의 환갑 잔치에서 김일성에게 문안을 올린 다음에는 김정숙을 찾으면서 통곡함으로 김성애에게 면전에서 엿을 날려버린 일이 있었다. 이 때 같이 동석한 빨치산들이 "정숙아! 정숙아!"하고 울부짖는 등 잔치판이 울음바다로 변했고 김경희도 이렇게 김성애 라인을 '곁가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조선로동당 경공업부 부부장을 거쳐, 조선로동당의 경공업부 부장 겸 중앙위원회 위원, 조선인민군 대장을 지냈다. 김정일의 유일한 동복 형제로서 신임을 받았다. 김일성 사망 직후 김정일은 "김경희는 곧 나고, 그녀의 말은 곧 나의 말이고, 그녀의 지시는 곧 나의 지시다"고 말했다.[4] 김정일 사후에도 한동안 김정은고모이자 유일한 혈족이자 후견인으로서 북한의 실세로 군림했다. 김정은 집권 초기에 김경희와 김정은이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몇번 포착되기도 했다. 당시엔 조카와의 관계가 원만했던 모양이다.

90년대의 분석에 따르면 김정일의 특각에 갈 때마다 김정남을 데리고 가는 등 김정남을 총애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일본 NHK에서 제작한 북한사 다큐멘터리에서는 김정일의 건강 악화 이후 열린 가족회의에서 김정은의 후계자 자리 확정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어린아이에게 나라를 맡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김정은은 당시 밥 먹다가 젓가락을 집어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대안도 없었던 만큼 김정은의 승계를 인정하였다.

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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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장성택과의 사이에서 공식적으로 하나뿐인 자녀로 알려진 딸 장금송이 미혼인 상태로 2006년 향년 29~30세로 자살함으로서 김경희의 직계 후손은 끊겼다.

===# 가계도 #===
한성희
홍일천
김혜경


2
신정희
(리씨)
김혜순
리혜경
김솔희
홍영숙
서영라
김이순
장길선
김영숙
김춘송
(자녀)
(부인)
(장남)

3
(셋째)
(아들)
(남편)
(딸)
(딸)
김경진
김인강
(부인)
김은송
김성강
(부인)
(자녀)
제갈순복
김송죽
김백연
김형록
김영성
(부인)
(부인)
김정현
(부인)
김원주
김구일녀
김형실
김형복

4. 장성택과의 관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같은 과 같은 반으로[5] 재학 중이던 장성택에게 반해서, 아버지 김일성에게 그와의 결혼을 추진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즉 과 cc였다. 하지만 김일성은 장성택의 출신 성분이 낮은 것과 장성택의 아버지가 자신이 싫어하던 함경도 공산주의자라는 점 때문에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인 황장엽에게 둘을 떨어뜨려 놓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김경희는 황장엽을 직접 찾아가서 "총장 선생이 뭔데 남의 연애사에 간섭이시오?"라며 대놓고 항의할 정도의 열성을 보였다. 결국 김일성은 김대 안에서는 도무지 둘을 떨어뜨려 놓을 수가 없다고 판단해서 동생 김영주를 시켜 장성택을 원산경제대학으로 전학시키는 꼼수까지 부렸다. 하지만 김경희는 자기 아버지 차를 탈취해서 원산까지 장성택을 찾아다니며 장거리 연애에 돌입했고[6] 빨래까지 해주는 등 일편단심으로 나갔다.

결국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오빠 김정일이 원산까지 오고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냐, 낮은 성분은 높여주면 그만이다라는 논리로 장성택과 김경희의 사이를 인정해주자고 김일성을 설득하여, 둘은 1972년 결혼하여 1976년 공식적인 딸 장금송을 얻었다. 일각에서는 이 딸이 친딸이 아니라 양녀라는 설이 있다.

1980년대, 선전부장 겸 당 조직지도부장으로 권력 승계 절차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던 김정일은 김경희를 위해서 평양시 보통강구역의 경흥음식점거리와 경흥상점거리의 독점적 운영권을 김경희에게 맡김으로 본격적으로 김경희를 중용하기 시작했다. 80년대에는 국제부에 들어와서 국제비서 김용순에게 대단한 힘을 실어주었으며, 김용순이 철직된 후에는 사실상 부장급의 실세로 군림했는데, 김용순의 후임 국제비서 황장엽은 그런 김경희의 존재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김경희를 아예 국제부장에 임명해서 국제부를 책임지게 하자고 김정일에게 제의했으나 김정일은 시기상조라고 거절했다. 이후 경공업부로 옮긴 김경희는 김정일 시대 김씨 정권의 자금줄 관리책을 맡게 되는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후에는 최고 알짜배기 수입원인 희토류, 고급수산물, 귀금속 거래를 모두 독점하게 되었다. 경공업 육성을 꾀하던 김일성은 김경희를 노동당 경공업부장에 임명하여 이를 감독하게 하였고 노동당 경제담당 비서인 유능한 테크노크라트 박남기를 보좌관으로 붙여주었지만, 김경희는 자신에게 아첨하지 않는 박남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경공업 정책의 실패를 그에게 뒤집어씌워 숙청해버렸다. 1995년 10월 7일, 오빠를 등에 업고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 로력영웅 칭호를 1등으로 받았다.

이러한 성격이 결혼생활에서도 드러났는지, 결혼 전에 장성택에게 지극정성이었던 것과는 달리,[7] 정작 결혼한 후에는 자신이 김일성의 딸이자 김정일의 친누이라는 위세를 부리며 장성택에게 매우 거만하고 거칠게 행동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는데 특히 90년대부터 그 정도가 극심해져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남편인 장성택에게 야, 너라고 부르는 등 존중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알코올 중독이 되어 주사까지 부리며 남편에게 폭언을 퍼붓고 물건을 던지는 등 행패를 부렸는데, 장성택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했다고.[8]

날이 갈수록 김경희의 알코올 중독 증세는 심해져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양주를 포도주처럼 마구 들이켰으며 급기야 술로 만족을 못해 마약까지 하는 등 날이 갈수록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덕분에 김경희는 비교적 젊은 나이부터 온 얼굴에 검버섯이 피는 등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김정일이 사망할 때 즈음 돼서는 김정은의 비자금을 관리한다는 중책을 맡고 있음에도 골골거리면서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김경희의 이런 막장행보에 대해서, 장성택이 김정일을 흉내내어 기쁨조 파티를 벌이는 등 여성 편력을 벌인 걸 김경희가 알게 되어서 남편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려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다.[9] 나중에 김경희는 남편이 자꾸만 여자들과 놀아나는 것에 열받은 나머지 북한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김성호와 맞바람을 피우기에 이른다. 김성호는 김경희의 개인 음악교사였으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까지 할 정도로 실력파였다. 이에 꼭지가 돈 장성택이 심화조 사건 때 김성호를 반동으로 몰아 총살형을 선고해버렸다. 김경희가 오빠 김정일을 찾아가 난리를 쳐서 총살 명령을 철회했지만, 타이밍을 못 맞춰서 이미 총살이 집행된 후였다고 한다.[10] 그 사건으로 남편과는 완전히 틀어져 아예 별거했다고 한다.

아내와 별거하게 되면서 장성택의 여성편력은 더욱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에는 고명딸인 장금송이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이를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 때문에 유학 중이던 프랑스 파리에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부부를 엮던 최후의 끈도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모 탈북자는 탈북자 매체인 데일리NK 기고문에서 장금송은 혼외자녀이며 타살당했다고 주장했다. 기고문 입양한 딸이라는 설도 있다.

장성택의 숙청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상당히 고생했는데 김경희가 찾아오지도 않아서 관계가 완전히 파탄났다는 말도 있다.

5. 장성택 사후

5.1. 2013년

김경희가 장성택의 숙청을 막아달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고 반면에 김경희가 장성택 숙청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있어 앞으로가 주목된다. 김경희가 장성택의 죽음에 관여했건 아니건 김경희 본인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각에서는 김경희가 중증 치매를 앓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장성택의 숙청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김길선 기자는 김경희가 김정일의 유훈 집행인으로써 조카 김정은을 우습게 알고 세도를 부리는 것을 보고 어차피 80년대부터 별거하느라 사이도 안 좋았는데 쳐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장성택이 처형된 며칠 뒤 친오빠 김정일의 기일에 열린 중앙추도대회에 참석하지 않아 건강 이상설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그 외에 장성택 처형에 분노해서 참석하지 않았다는 설이나 북한 지도부에서 참석을 막았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만 백두혈통이라 불리는 김씨 일가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최악의 경우에도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 저 북쪽 왕조는 공산주의를 자칭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저치들 하는 짓이 제대로 된 게 뭐 있겠냐마는 혈통을 따지는데 김경희는 첩의 소생이 아닌 김일성의 황후 정실부인 김정숙에게서 태어난 적통 공주적녀이기 때문에 재일교포 고영희에게서 태어난 굳이 따지자면 서자인[11] 김정은이 순수한 백두혈통인 김경희마저 건드리면 백두혈통이고 뭐고 다 끝이기 때문. 백두혈통을 부정해 버리면 김정은이 3대 수령 왕조를 해야 될 정당성이 없어져 버리는 상황이 된다. 즉, 김정은으로서는 김경희를 숙청하는 것은 굳이 번거로운 방법으로 자살하는 셈.

4달 동안 공개활동을 하지 않아 사망설이 대두되고 있는데 한국 정보기관에서는 한때 김경희가 진짜로 죽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정부 일각에서는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으며 치료를 위해 외국에 있거나 장성택 처형으로 자숙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다른 주장에 의하면 장성택 처형 당시에는 워낙에 술과 마약으로 몸이 병든 상태였기에 장성택 처형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장성택이 처형된 지 며칠 후 김정은은 측근 몇 명을 대동하고 고모 김경희의 집을 방문했다. 문병을 할 겸 그리고 그 동안 일어난 일을 보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형식적인 행동이지만 곁가지가 아닌 친고모에게 이런 절차를 밟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김경희는 김정은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앉아 있던 의자 밑에서 권총을 꺼내어 김정은을 겨누었고 이에 놀란 김정은은 몸을 피했고, 측근들이 달려들어 앞을 막고 총을 빼앗았다. 이에 김경희는 별로 저항하거나 반발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입을 떼지도 않았으나, 단지 희미하게 웃었다고 한다.(출처 : 장성택의 길 268페이지)

5.2. 2014년

5.3. 2015년 이후 신변 이상설

2016년 1월에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직도 상실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2014년 3월 선거에서 선출된 김경희는 동명이인이었다고.

2016년 2월 뉴스에 따르면 생존이 확인되긴 했는데, 건강악화 정도가 위중해서 얼마안가 자연사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편 최근 CNN 인터뷰에서도 제기된 피살설 등의 진위 여부는 아직도 파악되지 않았다.

2017년 8월 29일 국가정보원의 국회 보고에 따르면, 생존이 확인되었으며 평양 근교에 은둔하면서 신병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5.4. 2020년

2020년 1월 26일 북한 관영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1월 25일 김정은과 함께 '설 명절 맞이 기념 음악 공연'을 관람했다고 하며, 공연 관람 사진을 공개했다. # 2013년 이후 공개 매체에 첫 등장한 것이다. 사진 상 아주 건강하다고 볼 순 없지만, 일단 바깥 활동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양호한 상태로 보인다. 최룡해, 현송월, 김여정 등 김정은의 최측근 인사들과 동석한 점, 그리고 김경희가 공식 석상에 등장하기 전부터 김정은이 '혁명 1세대'인 황순희의 장례를 직접 조문하고 시국에 대한 정면 돌파를 강조하는 모습 등을 보인 것을 볼 때 이른바 '백두혈통'의 결집을 과시하며 북한의 내부 결속을 꾀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로 인해 고위 탈북자발 신변 이상설은 모두 낭설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5.5. 2022년

2022년 2월 2일 북한 관영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같은 달 1일 김정은과 함께 설명절경축공연을 관람하였다. 약 2년만의 공개행보이다. 7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다르게 자력으로 원활히 거동이 가능하였고, 2020년 당시와 비슷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건강 상태가 나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김정은의 부인인 리설주를 제외하면 가장 가까운 좌석에 앉은 것으로 보아, 외형상으로 예우는 계속 이뤄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방송상에서 호칭은 불리지 않았다.

6. 대중매체에서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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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3세 혹은 34세손이라는 설이 있다.[2] 유라는 유리의 애칭이다.[3] 김정일의 이름이 유라였듯이 김경희 이름은 에라, 혹은 조야였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일종의 줄인 이름이나 별칭 같은 것으로 보인다.[4] 김정일은 보안에 굉장히 예민해서 간부들이 사전 보고 없이 자기 사무실로 찾아오거나 관저를 방문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신경질적으로 굴었는데 오직 김경희에게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5] 북한의 대학은 남한의 초중고교처럼 반으로 나뉘고 지정좌석제다.[6] 이때 김일성의 차를 본 원산경제대학 관계자들이 김일성이 불시에 시찰나온 줄 알고 혼비백산해서 뛰어나왔다가 뜻 밖에도 차에서 김경희가 내리는 걸 보고 또 다시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7] 후지모토 겐지의 회고에 따르면 애주가인 김경희는 술판에서도 장!성!택! 마시라요! 남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가 북한 권력 2인자로 승승장구 할 때마다 축하 건배를 들고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8] 북한은 아직도 전근대적 가부장제 사회라서 대부분 아내는 남편에게 존대를 하며 남편이 가정폭력을 해도 아내는 묵묵히 맞아야 하는 분위기인 사회이다. 김씨일가라서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9] 여담으로 이 문제로 친오빠 김정일과도 심하게 다투었다고 한다. 장성택이 바람을 피우며 롤모델로 삼은 게 바로 오빠인 김정일이었다는 이유로.[10] 출처 동아일보.[11] 고용희는 김정일의 자식을 셋이나 낳고 13년간 집안의 밥상을 책임지는 등 사실상 본처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김정숙처럼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에 김정은이 혈통상으론 김경희보단 아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