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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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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불교의 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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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 한자 密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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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원3. 한국의 밀교4. 일본의 밀교
4.1. 진언종 계보(중기 밀교)
5. 실존인물6. 대중매체에서

1. 개요

밀교()는 인도 불교의 한 형태로, 금강승()이라고도 한다.

대승 불교로 분류하기도 하고 별개의 종파로 보기도 한다. 대표적인 밀교로는 중기밀교인 일본 불교의 '진언종'과 후기밀교인 티베트 불교가 있다.

2. 기원

미국 시카고 대학교 교수 크리스찬 웨더마이어(Christian K. Wedemeyer)의 저서 《Making Sense of Tantric Buddhism: History, Semiology, and Transgression in the Indian Traditions》와 불교학자 이용현의 논문을 참조하여 딴뜨리즘(Tantrism)의 기원에 대한 학계의 주장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교 딴뜨라(tantra, तन्त्र)의 기원에 대한 주장들은 대개 한 쪽이 다른 쪽에 의존하였다는 '빌린 모델(a borrowing model)'과 두 딴뜨라 이면에 공통적인 근원이 존재한다는 '기층 모델(a substratum model)' 등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공통적인 토대로 일종의 ‘종교적 기층’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20세기의 많은 저명한 학자들이 주장했다.

'종교적 기층'이란 아리안족의 인도 아(亞)대륙 진출 이전부터 존재하던("pre-Aryan") 토착부족의 종교와 문화를 의미한다. 비(非) 아리안계 토착 부족들은 아리안 족의 진출 이후에도 주변부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존속하였다. 이들 부족들의 문화에 담긴 여신(女神) 숭배와 주술적 요소가 점차 아리안족의 베다 전통에 유입되었고 그 결과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에 딴뜨리즘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가설을 1980년대 후반부터 옥스퍼드 대학교의 알렉시스 샌더슨(Alexis Sanderson)이 공격하였다. 샌더슨이 '종교적 기층' 가설에 의문을 품는 직접적인 이유는 '종교적 기층'이라는 것이 결코 지각된 것이 아니라 단지 추론된 것에 불과하다는 데 있었다. 

샌더슨은 우리가 딴뜨라로서 지각하는 것은 항상 샤이바 딴뜨라거나 바이슈나바 딴뜨라거나 불교 딴뜨라거나 혹은 어떤 구체적인 전통에 속하는 딴뜨라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종교적 기층' 가설은 불교 딴뜨라와 힌두 딴뜨라, 특히 요기니 딴뜨라들과 샤이바 딴뜨라들의 많은 공통점들을 설명하기엔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샌더슨은 비록 요기니 딴뜨라들이 다양한 의례 등 그 기원에 있어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상당히 모방했지만 요기니 딴뜨라들은 불교의 딴뜨라로서 샤이바 딴뜨라들을 배척하며 훌륭하게 기능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샌더슨의 이론도 루에그, 스페라, 데이비드슨 등에게 비판받았다. 웨더마이어도 힌두 샤이비즘과 불교는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적 공간을 공유하며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였기 때문에 불교 딴뜨리즘이 전적으로 힌두 샤이비즘으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하였다.

어느 쪽이 옳든 간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라뜨나까라샨띠(Ratnākaraśānti)나 아바야까라굽따(Abhayākaragupta) 등 인도의 후기 딴뜨라 불교의 위대한 학승들이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을 문제 삼은 자료가 지금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딴뜨라 불교가 적절한 불교적 의미를 주는 상징주의에 의존하면서 이교적인 요소들을 흡수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일단 명확한 의미가 그러한 요소들에 주어지면 그들의 불순함은 제거되고 그들은 불교의 이상을 표현하는 강력한 상징들로 탈바꿈하였다. 이용현, 《요기니 딴뜨라들의 기원에 대한 논쟁》

불교 딴뜨리즘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설들은 불교 역사의 서술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세기 근대 서구 학자들은 인도 불교의 쇠퇴와 불교 딴뜨리즘의 등장을 결부시켜 해석했다. 그들은 불교 딴뜨리즘이 힌두 샤이비즘에서 유래하였다고 규정하고 샤이비즘적 요소의 도입이 불교 내부의 도덕적 타락과 정체성 상실을 초래하여 인도 불교가 쇠멸하였다는 서사 구조를 고안하였다.

'생성-발전-번성-소멸'로 이어지는 유기체적 역사관에 익숙했던 서구 학자들에게 딴뜨리즘의 성(性)적 요소는 서양 고전(古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문명의 쇠락 징조로 해석되었다. 딴뜨리즘은 일종의 성적 타락으로 치부되어 서구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도 불교 소멸의 원인으로 채택되었다.

불교 딴뜨리즘으로 인도 불교의 쇠락을 설명하는 서술 모델(model)은 제국주의 시대에 처음 등장하여 20세기 초중반까지 서구 학계에 만연하였으며 서구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물론이고 초기에 서구와 일본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했던 한국 학계에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반면 인도 학자들, 특히 벵갈 출신 학자들은 딴뜨리즘을 불교의 등장 이전부터 존재하던 원시적(原始的)인 문화적 저류(undercurrent)와 연관시키는 정반대 모델을 내놓았다. 이들의 주장은 딴뜨리즘이 아리안족 진출 이전의 인도 토착 부족 문화에서 유래하였다는 기원설을 기반으로 한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부족 문화는 아리안족의 침공 이후에도 '종교적 기층', 혹은 '저류'를 형성하여 유지되면서 점차 주류 종교에 유입되었다. 그 결과 기존 종교의 성격과 달리 민중 지향적, 모계 지향적인 딴뜨리즘이 등장하게 된다. 서구의 낭만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학자들도 이러한 인도 학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한편 불교학자 정성준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대승불교의 중관, 유식 논사들은 학자이자 동시에 밀교 수행자들이었다. 《유가사지론》으로 대표되는 유가행 이론의 완성 이후 이들은 유가행의 실천을 목적으로 밀교 의궤를 창안하였으며 《대일경》, 《금강정경》과 같은 밀교 경전에 주석을 달았고 바라밀승의 수학 이후 진언승을 수학하는 대승 교단의 현밀겸수(顯密兼修)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밀교의 교리적, 실천적 정통성을 보여준다. 정성준, 《인도밀교의 성립에 나타난 후기중관파와 밀교의 교섭 고찰》


합장 자세가 현교와는 약간 다르다. '금강합장'이라고 해서 손가락을 교차시켜서 살짝 꼬는 듯한 자세로 합장한다.

3. 한국의 밀교

한반도에는 신라 시대에 잡밀(초기밀교)이 들어온 뒤 통일신라 시대에 순밀(중기밀교)이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이미 불교학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지만 한국인에게 ≪왕오천축국전≫으로 유명한 8세기 승려 혜초도 사실 밀교 수행승이었다. 당시 신라 유학승들이 당나라에서 배운 밀교는 티베트 불교(후기 밀교)와는 다른 형태의 밀교이다. 즉 한국 밀교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져와서 존재했던 초기 및 중기 밀교이며 티베트 밀교는 시대가 더 지나고 나서 나타난 후기 밀교다.

삼국사기에는 유가승 명랑(明朗)법사가 관정경에 의거한 밀교의 의식인 문두루 비법(文豆婁 秘法)을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명랑의 문두루 비법은 중국일본에서 행해지던 치병 목적의 문두루 비법과는 달리 외적인 재난을 소멸할 때 쓰인다는 특이점이 있다.

신라 시대에 밀교 종단 신인종(神印宗), 총지종(總持宗)이 창종되었다.

고려 시대에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여러 가지 진언과 다라니를 외우는 차제들이 경전으로 많이 나타났다. 국가적 차원에서 금광명경과 인왕경에 의한 법회를 주관하고 호마를 행하였다. 몽골원나라가 들어서고 나서 중국에는 후기 밀교(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와 일본에는 후기 밀교가 전해지지 않았다. 원 간섭기에 고려 왕에게 시집온 원나라 공주 출신 왕비가 건립한 몇몇 불교 석탑에 티베트 불교 양식에 반영되긴 했지만 천태종과 수선사 등 기존 고려 토착불교의 세력이 강하여 티베트 불교가 전파되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조선 초기에 신인종, 총지종이 사라진 후에는 독자적인 밀교종단이 나타나지 않았고 밀교의례 등이 선 사상이나 정토신앙에 융합되었다. 그나마 구한말에 집필된 <석문의범(釋門儀範)> 같은 각종 불교 의례집에 밀교와 관련된 각종 다라니와 의례가 많이 등장하긴 하는데 밀교의 교학적 연구와 즉신성불 사상보다는 실천적인 측면과 현세구복적 특성이 두드러진다.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이 지속되어 밀교는커녕 주류 불교 종파들도 크게 사정이 빡빡해서 조선 후기에는 제대로 구족계를 이어받은 승려가 나오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설령 밀교에 관심이 있는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모여서 종단을 구성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원효 같은 현교 중심의 불교 대중화를 외친 고승이 대거 출현한 것도 있고 도입 초기부터 토착신앙과 밀접하게 결합한 것도 있어 중국이나 일본에 비교하면 유달리 밀교가 힘을 못 썼다. 중국에서도 밀교는 다른 불교 종파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긴 했으나 도입된 당나라 때부터 나라의 지원을 받고 왕실·귀족 중심의 성향이 강했으며 당나라 후기에 폐불정책이 시행되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동북아시아 삼국 중에서 현재까지 밀교가 크게 성행한 나라는 사실상 일본뿐이다.

일제강점기일본 불교진언종이 들어오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조선 현지에 사는 일본인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하였을 뿐 한국인들에게 적극적으로 포교하지는 않았다. 전라남도 목포시 근처에 살던 일본인들이 유달산 바위에 구카이부동명왕 마애상을 조각했는데 두 마애상은 2019년 기준으로도 멀쩡히 남아 있다.

현대 한국에서는 진각종, 진각종에서 분리된 진언종·총지종이라는 종단이 밀교를 표방한다. 진각종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진선여자중학교·진선여자고등학교, 대구광역시심인중학교·심인고등학교, 경상북도 경주시위덕대학교를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도 많이 한다.

그러나 진각종 등 3개 종단은 일반적으로 실제 티베트일본에서 전수되는 밀교와 많이 다르다. 진각종의 창시자 회당 손규상이 책을 읽어 밀교 지식을 습득하긴 했어도 그보다는 '생활불교'라는 기치 아래 자신의 독자적인 교리를 더 강조했기 때문이다. 진각종에는 출가하여 머리를 깎는 승려 제도가 없고 전통적인 밀교와 달리 불상을 모시지 않으며 복잡한 의례 등을 행하지 않는다. 꼭 밀교라고 해서 불상을 모시고 화려한 의례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불보살을 종자자로 모시기도 하는가 하면 존격을 도상화한 삼매야형을 모시고 단순히 진언을 외우기도 한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불교로 인정하지 않고 원불교처럼 완전한 신흥종교로 보기도 하지만 백용성 스님 등 고승들도 진각종을 불교 종단이라고 확실히 인정한 적이 있다. (실제로 백용성 스님이 진각종을 접하거나 진각종 창시자인 손규상 대종사를 만났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한국에서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밀교 종파는 없고 사찰중에서 비밀불교 금강승 혜인선원(일붕선교종 소속, 주지 영우스님)이 있다.(본인들도 밀교라고 명시하니.)

4. 일본의 밀교

일본 불교에서는 밀교를 순밀(純密)·잡밀(雑密)로 구분한다. 다만 이는 일본 불교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데, '순밀'로 지칭되는 밀교적 경향이 '잡밀'로 지칭되는 밀교적 경향보다 더 우월하다는 일본불교 내의 당위적 판단이 내재된 표현이기 때문이다.[2] 일본에서 밀교세가 강한 이유로 이 분야는 워낙 일본 불교학의 영향이 큰지라 순밀과 잡밀이라는 표현이 통용되기는 하지만, 엄밀한 학술적 작업에서는 이런 표현들이 갈수록 기피되는 측면이 있다.

순밀(중기밀교)은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목표로 극단적인 신비주의 체계 속에서 발달한 비밀스러운 상징주의 철학을 중시하고 잡밀(초기밀교)은 철저하게 주술력을 활용한 현세구복성이 강하다. 일본 불교에서는 주술성과 강력한 주술력의 힘을 강조하는 밀교를 상당히 중요시했다. 특히 일본 황실과 지배층의 입맛에 맞추어 나라의 안위나 재앙을 제거하는 것에 밀교는 기존의 불교보다 최적화된 새로운 불교였고 당나라에서 일본인 최초로 정식 밀교를 배워 정통 계승자가 된 승려 구카이가 일본에 오면서 진언종이 성립되어 번성했다. 그래서 일본 불교의 유물이나 유적 중에는 대일여래나 허공장보살 등 밀교와 관련된 것이 많다.

종파로는 진언종(真言宗) 계열 종단들이 밀교에 속한다. 일본의 진언종은 교리상, 시대상에 의해 크게 2가지로 나누면 본지신설(本地身説)을 따르며 구카이를 종조로 하는 고의 진언종(古義 真言宗)과 구카이를 종조로 하고, 타락해가던 고야산을 비판하며 네고로지를 신설한 가쿠반(覚鑁)을 중흥조로 하며 가지신설(加持身説)을 따르는 신의 진언종(新意 真言宗)으로 나눌수 있다.

본지신설은 우주에 형태도, 언어로도 존재하지 않는 밀교의 교주 대일여래가 모든 현상과 사물의 근본이 된다고 보는 학설이고 가지신설은 우주에 형태 없이 존재하는 대일여래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나타난다는 가지신으로 나뉘어져 모든 현상과 사물이 근본이 된다고 보는 학설이다.

신의진언종은 창종 초기에는 단일 종단이었으며 네고로지의 승병들은 센고쿠시대조총을 잘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상대하다가 패한 이후 네고로지가 파괴되면서 본래의 신의진언종은 군소종단 수준으로 축소됐고 교토(지샤쿠인)와 나라(하세데라)로 대피한 승려들이 각각 지산파와 풍산파의 형태로 재창종하여 현재와 같은 3개 종단으로 분리됐으며 나라불교(奈良仏教)의 율종(律宗)과 융합되어 계율을 중시하는 에이손(叡尊)의 진언율종(真言律宗)이 있다.

일본의 천태종은 한국이나 중국의 천태종과 달리 개창 때부터 법화, 염불, 참선, 계율, 밀교를 통합한 종합불교종단을 목표로 하였으나 밀교에 있어선 밀교만의 전문종단인 진언종에 비할 수 없기에 개조 전교대사 사이초가 견당사로 같이 가 밀교를 배워온 구카이에게 밀교를 배우기 위해 노력했으나 견해 차이 등으로 인하여 좌절되었고 그의 후학인 지카쿠대사 엔닌(慈覚大師 円仁)과 지쇼대사 엔친(智証大師 円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천태밀교(태밀)를 완성시킨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태밀을 중시하고 엔친을 종조로 하는 천태 사문종(天台 寺門宗)으로 나뉘었다. 진언종의 중심사찰인 교토 동사(東寺)의 밀교라는 의미로 진언종의 밀교는 동밀이라고 한다. 이후 일본에선 법화의 일련종, 염불의 정토종, 선의 임제종 조동종, 태밀과 수험의 천태사문종이 독립[3]하는데 모두 천태종에서 나왔다.

일본의 밀교계 종단들은 정토계열 다음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 오히려 황족이나 화족 등 상류층 사이에서는 밀교의 영향력이 더 큰 편인데 이는 '몬세키'(門跡)라 해서 전통적으로 일부 대형 사찰의 주지승 자리를 황족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며 밀교 계통 종단들이 교종의 영향력을 흡수했기 때문인 면도 있다. 지금도 도지(東寺)나 닌나지(仁和寺), 센뉴지(泉涌寺) 등 교토의 일부 대형 사찰들은 구황족들이 주지승을 맡고 있는 사례가 꽤 많다. 이방자 여사의 할아버지인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메이지 유신 전에는 천태종 사찰인 쇼렌인의 주지승이었다.

재일교포 출신 야구선수 아라이 타카히로가 매년 새해마다 밀교의 의식인 호마수행을 하러 가는데 아라이가 유명 밀교승인 이케구치 에칸의 제자이기도 해서 그렇다.

일본판 호국불교(진호국가) 성향에 주술적 요소까지 겹쳐 정치적으로도 공공연하게 문제가 되는 행보를 보이는 밀교 승려들이 많다.[4] 2019년 1월 11일 야스다 구겐(安田空源)이라누 고야산진언종 승려가 "한국인은 개인적으로 사귀면 좋은 사람들인데, 국가나 조직 단위로 모이면 막장이다. 한국인 3명 모이면 개쓰레기"라고 트윗을 올려#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곤고부지(金剛峰寺) 총무원장이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리는 지경까지 갔고 문제를 일으킨 승려는 트위터 계정을 폭파했다.

일본의 주요 불교 종파들 중 기복적 요소가 가장 강한 종파인지라 돈이 얽힌 사건사고도 많았다.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 시대에는 악명 높은 여자 투자가 오노우에 누이(尾上 縫, 1930-2014)[5]가 저택 안에 법당을 지어 놓고 해괴한 의식으로 부동산 투자가들을 끌어모으다가 버블이 꺼지고 나서 순식간에 사기꾼으로 전락한 사건이 있었으며 2000년대 초에는 고야산 종정이 신도들의 시줏돈을 주식투자에 유용했다는 사실이 대침체 직후 뒤늦게 폭로되면서 난리가 나기도 했다.

4.1. 진언종 계보(중기 밀교)

5. 실존인물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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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설에 따르면 원래 사냥꾼이었으나 자신이 잡아먹은 수달의 뼈가 살아 움직이고 굴 속으로 돌아가 새끼들을 끌어안은 것을 보고 살생에 회의를 느껴 출가했다고 한다.[2] '대승'과 대비되는 '소승'이라는 표현이 문제시되고 기피되는 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3] 율종은 나라 시대에 성립했다.[4] 물론 그렇지 않은 승려들도 많다.[5] 레스토랑 사장 및 투자가로 알려졌지만 진언종 승려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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