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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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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서양의 교육3. 동양의 교육4. 대한민국의 교육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1. 개요

교육에 관한 역사이다. 가정 교육이나 사회 교육을 포함하여 생각해보면, 교육은 인류의 유사 이래 계속 존재해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음 세대에게 자신들의 지식과 문화를 전수하는 것은 문자가 생기기 이전에도 있었던 일이라 여겨진다. 문자가 생겨난 이후로는 문자를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중요한 내용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각종 생산 활동을 위한 교육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실습 역시 핵심적인 교육 활동이다.

2. 서양의 교육

제도화된 교육에 대해서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근대 국가에 의해 교육이 보급된 것은, 산업 혁명 이후 노동자가 필요하게 되면서부터이며, 많은 나라에서 국민에 대한 일반교육이 공교육으로서 시행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이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여가(schole)는 학교의 어원이 되는 용어이다. 아리스토텔레스[1]은 여가를 위해 일을 선택한다고 보았지만 막스 베버[2]는 인간은 일하기 위해 산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여가'의 개념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의 성격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도 있다. 이렇듯 '일, 여가'에 대한 상반된 견해 중 무엇을 택하느냐에 따라 오늘날 학교교육의 지향점이 달라진다.

소크라테스, 부버, 프레이리는 교육의 핵심을 '대화'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 교육론은 각각 다른 특징을 갖고 있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독창적인 것이 아닌 상호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말하는 대화의 의미를 비교, 종합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교육에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2.1. 고대

그리스는 고대유럽의 찬란한 문명지였던 만큼 교육도 발달했다. 무수한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3]이자 교육자였다. 소피스트들은 웅변술과 수사학을 가르치는데 몰두했고, 소크라테스는 지금도 유용하게 사용되는 발문법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다른 소피스트들의 '교육 동기, 목적'의 차이는 공교육 강화 측면에서 우리 교육의 현실에 시사점을 주기도 한다.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에서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에 의한 교육이 활발하였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교육은 다른 소피스트들의 교육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또한, 그리스에는 문자와 셈하기를 가르치는 노예가 있었다. 노예를 교사로 이용한 것으로 유명한 나라는 로마로 그리스를 정복한 뒤 저명한 학자들을 자기집에 데려와 자식 교육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말이 노예지 한때 잘나가던 타국 학자들을 가정교사로 사용했다는 말.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학을 연구하는 공동체를 운영했고, 플라톤은 아카데미에서 기하학을 연구했으며 교육에 따라 3개 계급으로 사회구성원을 나눌 것과 여성교육을 긍정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4] 사실 여성도 동일하게 교육의 대상으로 본 것의 시초는 다름아닌 스파르타다.

로마 역시 그리스와 비슷하게 수사학을 중시했으며, 로마 말기로 갈수록 사교육보단 공교육에 중점을 뒀다. 로마의 위대한 교육자로는 퀸틸리아누스가 있다. 이 사람은 현대 교육학의 원리들을 이시기에 주장하여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키케로의 글 ‘변론가론(De Oratore)’를 참고하면 당시 학원식 교육에는 ‘아동교육’과 ‘고등 인문’으로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자에는 학예 3과, 과학 4과로 이루어진 자유학예가 속하고 후자에는 법(Ius), 철학(Philosophia), 역사(Historia)가 속했다.

2.2. 중세

중세는 문화 암흑기라 부르기 어렵다. 문답 학교 본산 학교 등 여러 기독교 학교가 있었으며, 수도원이 교육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중세의 학문은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교양(De Doctrina Christiana)’에 의거한 7개 자유학예와 그 응용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동시대의 문법학자 마르티아누스 카펠라가 작성한 교과서의 학과목 명칭과 교수법들이 폭넓게 채택되어 카시오도루스, 마우루스, 이시도루스 등 6-8세기 학자들이 다양한 수도원, 성당, 주교좌 등에 딸린 부설학교들을 설립하면서 교육이 실행되었다. 이 부설학교들에서는 서유럽 민족대이동 혼란 속에서 고전 작품을 수집, 보존, 전승하는 역할을 했다.

고급 계층의 자제들은 따로 7자유학예를 공부하거나 기사도 교육을 받았다. 중세 말이 되어 학생과 교수 중심의 길드가 발전하여 이탈리아 왕국볼로냐 대학교, 잉글랜드 왕국옥스브리지, 프랑스 왕국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 같은 대학교가 생겼다. 르네상스 이후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발생하고, 민중들이 독일어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것을 본 루터에 의해 공교육 이론이 제기되었다. 라틴어는 고사하고 자국어도 못 읽으니(문맹) 자국어를 나라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것.

2.3. 근대

<대교수학>으로 유명한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에밀>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 관념론 철학자이자 교육가였던 임마누엘 칸트, 성자로 불린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유치원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프뢰벨, 교육학의 아버지인 헤르바르트 등이 이시기에 활동했으며 국가주의의 팽창과 산업수요에 맞는 인재를 만들기 위한 공교육제도가 생겼다.

장 자크 루소의 저서 에밀의 첫 문장[5]에는 성선설을 기초로 루소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인간관'과 '소극적 교육'이 암시되어 있다. 그 의미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과 해결책에 시사점을 준다.

19세기 J.F. 헤르바르트는 수업을 '교육적이지 못한 수업 vs. 교육적인 수업'으로 구분하면서, 수업에서 흥미를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흥미는 수업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그가 주장한 교육적 수업의 목적은 다면적 흥미이다. 그 개념은 교육적 시사점이 크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이나 식민지의 각 대학은 "파리 대학교식 교육 모델"이라 하여 중세의 자유학예 전통에서 조금밖에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1810년에 빌헬름 폰 훔볼트의 건의를 받은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훔볼트식 교육 모델에 따라 세계 최초의 근대적 연구중심대학인 베를린 대학교를 설립한 뒤로 대학들은 전문가와 연구자를 양성하는 석박사 학위와 대학원, 발전하는 학계와 사회의 요구를 반영한 다양한 전공과 학과, 각 교육자 및 연구자의 자율성, 각 학생의 자기주도학습, 입시에서 성별, 종교, 인종 등에 따른 차별 금지 등을 보장하도록 서서히 개혁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미국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인 존스 홉킨스 대학교가 세워졌고, 세계 각지의 수많은 대학이 서로를 벤치마킹하여 새로 설립되거나 성균관 같이 이미 존재하는 교육기관들이 근대식 대학으로 전환됐다. 영국맨체스터 대학교, 미국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및 수많은 주립대학들, 일본 제국도쿄대학, 조선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처럼 변화하는 사회상을 따라 작은 기술대학, 사범학교, 농과대학, 의과대학 등으로 설립됐다가 19, 20세기에 걸쳐 중산층의 성장과 고등교육 수요의 급증에 따라 거대한 명문 종합대학으로 성장한 경우도 많았으며, 1898년 변법자강운동에 의해 청나라베이징대학이 설립되는 등 기존 대학이 없던 문화권에도 대학들이 생겨났다. 한편 미국에서는 중세의 자유학예 전통을 간직한 체로 교양교육 위주로 발전한 학부중심대학들도 등장했는데, 이들은 리버럴 아츠 칼리지라고 부른다.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신흥 대학들은 코넬 대학교처럼 앞서 언급한 근대적인 특징들을 모두 가진 체로 설립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19세기 이전에 설립된 대학들의 경우는 프랑스 혁명으로 사회 전체가 발칵 뒤집어져 버린 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 정도를 제외하면 이 개혁들이 완벽히 자리 잡는데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예를 들어 영국 옥스브리지의 주요 칼리지나 미국콜로니얼 칼리지 등이 1960~1980년대가 돼서야 남녀공학으로 전환되었다던지.

2.4. 현대

20세기가 들어서며 존 듀이 등 대표적인 교육학자들이 활동하며 현대 교육의 틀을 잡게 되었다. pragmatism을 교육에 적용한 '도구주의'라는 교육사상을 제창했다. 그 의미는 인간의 생각을 문제 해결의 도구로 보고, 문제 해결의 과정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이런 이유로 지식을 습득하는 원리 또한 차이가 나게 된다.

이외에도 실존주의, 분석철학, 비판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있다. 비판 이론[6]의 관점은 초기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론가들이 전개한 '도구적 이성 비판'을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현대 한국교육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의 제시가 가능하다. 가령, 위르겐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행위이론에서 '도구적 합리성'의 대안으로서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을 제시하였다. 두 개념의 의미는 각각 학교 수업에 시사하는 바가 다르다.

1950년대 초기부터 제기된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우리 학교교육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학교교육의 문제를 극복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교육정책 방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

1980년대 이후 자유주의 vs. 공동체주의는 대표적 윤리학/정치철학적 논쟁이다. 두 입장의 주요 차이점은 오늘날 다문화 교육의 목표에 적용할 수 있다.

3. 동양의 교육

논어에서는 공자[7]와 안회[8]가 좋아했던 학문과 배움의 의미에 비추어 위인지학(爲人之學)[9]의 관점을 비판할 수 있다. 그리고 논어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교과의 내재적 가치에 비추어 설명이 가능하다.

현대 동양 교육사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들 중에는 6.25 전쟁 동안 부산에서 운영된 전시연합대학이나 국부천대 이후 이루어진 재대복교 등이 있다.

4. 대한민국의 교육

4.1. 고구려

372년, 한민족 최초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태학이 설치되었다. 지방에는 경당이라는 중등 수준의 학교가 있었다. 경당은 한학과 더불어 무술(습사)을 연마했다고 한다.

4.2. 신라

화랑도라는 청소년 수양단체가 있었다. 화랑도는 비형식적 교육과 제도적 교육의 과도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여 국학을 설치했고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를 신설하여 6두품 관리들을 뽑으려고 했다. 사실상 한반도의 최초의 과거제.

4.3. 백제

교육기관 혹은 제도는 알 수 없으나 '박사' 제도가 있어서 이 시기에 이미 교사나 교육자, 대학자를 뽑았다는 걸 알 수 있고, 일반학문 뿐만 아니라 숙련된 기술자에게도 '전업박사'로 우대했는데 예를 들면 기와를 전문으로 하는 기술자는 와박사(瓦博士)라고 불렀다. 오늘날 정부에서 기능장이나 기술사, 무형문화재 지정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백제가 시대를 상당히 앞서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에 논어천자문을 전한 왕인과 백제 역사서인 <서기>를 지은 고흥이 대표적인 박사다.

4.4. 발해

주자감이 있었고 유학을 비롯한 7학을 가르쳤다. 발해의 학생들은 통일신라의 유학생들과 더불어 의 외국인 대상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여러 번 1, 2위를 다투는 수준이었으므로 주자감의 교육 수준도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사 제도'가 있어서 왕족 등의 고위층 여성들을 위한 교육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현대에는 성균관대가 성균관을 통해 주자감을 간접 계승한다고 본다.

4.5. 고려

광종 때부터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로 관리를 뽑았다. 고려의 과거제는 조선과 달리 명경과(경전 중시)보다 제술과(논리 중시)를 중시했다고 하며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정식 무과가 없었다가[10]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공양왕 때에서야 설치되었다.

992년, 성종 11년에 국자감이 설치되었다. 국자감은 뒤에 국학, 성균관 등 이름이 수차례 바뀌었다가 조선의 성균관으로 계승된다. 국자감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과 율학, 서학, 산학 등으로 나뉘어 신분에 따라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고려의 교육기관은 국자감 말고도 향교와 동서학당, 5부 학당, 사학 12도와 서당이 있었다. 최충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 12도는 이때에도 국가고시를 위한 사교육과 명강사에게 배우는 문화가 흥행했음을 알려준다..

4.6. 조선

교육기관은 성균관과 4부학당, 향교, 서원, 서당이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지금의 대학생들처럼 정부의 정책이 마음에 안들면 소를 올리거나 집단행동을 취했다. 유학을 제외한 기술교육은 각 관청에서 담당했다. 장악원에서 음악을 가르친다던가 사역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친다던가. 조식이라거나 이이와 이황 같은 이시기의 대학자들은 동시에 교육자여서 학파를 발전시키고 유지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조선의 왕들은 몇몇 폭군을 제외하고는 평생 경연을 통해 학문을 갈고 닦고 정책을 의논하는 고된 학생(...)들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권근이 <입학도설>을 펴내 한국최초의 시각교재이자, 세계최초의 시각교재로 보기도 한다. 코메니우스의 <세계도회>보다도 빠르기 때문. 하지만 일부 한국 교육학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리 주목하지 않아 학계에서 외면당하는 중이다.

조선 중기 유학자 퇴계 이황은 서원의 보급 및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다. 퇴계 이황이 서원 교육을 강조했던 배경이 있다. 그는 서원교육을 통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현하려고 했다는 의의가 크다.

실학[11]주자학에 비해 교육사적 의의를 지니지만 한계 또한 있다.

다산 정약용의 주장 내용 및 근거 역시 우리나라 교육의 방향 설정에 시사점을 준다. 그는 '오학론'에서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의 해악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과거 제도삼국사기, 고려사, 동국통감 등의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동에게 천자문, 통감, 사략 등의 서적을 읽혀서는 안 된다는 '불가독설'을 주장하였으며, 아동의 학습 원리를 고려하여 '아학편'을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

조선의 초등 교육으로 볼 수 있는 서당은 상당한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천자문>, <아희원람>, <훈몽자회>, <동몽선습>, <소학> 등 체계적인 교재와 교육과정이 있었고, 면강과 배강 등 완전 학습을 중시했으며, 무학년제였으나 1:1 교육을 중시하고 한 학급의 인원은 30명을 넘지 않게 하는 소그룹의 선진적인 교육을 했던 것이다. 고종 시기에 이르러 근대적 교육에 대한 요구가 일어나 원산학사와 육영공원 등이 세워지고 교육입국조서가 발표되었으며 수많은 관립학교들과 서양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민간과 애국지사들이 세운 학교들이 문을 열었다. 1886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

1895년 2월 고종은 '교육입국조서'[12]를 발표했다. 거기서 강조된 내용은 교육적 의의를 가진다.

4.7. 통감부

을사조약 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부터 민족교육이 제한되었고 보통학교령, 고등학교령, 사립학교령등을 시행해 수많은 사립학교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기존의 대한제국의 소학교와 중학교는 수업 연한이 각각 6년과 7년으로 지금의 초등학교 6년과 중-고등학교 6년보다도 길었다. 게다가 대한제국에서는 의무교육이었기에 무상 교육을 실시했고 서당의 전통처럼 한 학급의 인원은 30명을 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통감부의 보통학교령과 고등학교령으로 수업연한은 각각 4년과 3~4년으로 격감했고, 초-중등교육기관이었음에도 수업료를 받는걸로 바뀌었다. 게다가 보통학교 학급의 인원을 60명으로 늘려서 수업의 질을 확 떨어뜨려버렸고, 중등교육기관에다가 고등학교라는 명칭을 넣음으로써 조선인들의 고등교육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라는 인식을 심게 만들었다.

4.8. 일제강점기

민족 말살 정책은 교육도 피해갈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교육의 중대성을 일찍부터 알았던 일제에 의해 제4차 교육령에 걸쳐 교육령이 반포되었고 철저히 조선인들을 일본 신민으로 만들려고 했다. 1차 조선교육령은 이미 통감부가 만든 체제 위에 수정을 가한 실업교육이었고, 천자문 등을 외우며 민족 교육을 하는 서당들을 서당 규칙으로 탄압했다. 조선어가 아니라 일본어를 국어로 규정하고 일본어 보급에 치중했다. 2차 조선교육령은 문화통치와 함께 등장했으며 조선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의 연한을 늘리고 폐지됐던 조선어를 필수적으로 부과했다. 이에 조선인들의 학구열이 증가하자 일제는 간이학교라는 분교를 늘려서 초등교육을 보급했다. 한편, 조선인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일었으나 여러 논란과 현실적 한계로 인해 실패했으며, 일제는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여 본토의 제국대학을 한반도에 이식했다. 3차 조선교육령부터 황민화 교육으로 조선어는 다시 사용금지되었고 조선이 병참기지화 되는 것에 맞게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 그 유명한 궁성요배와 황국신민서사를 낭독하게 했다. 4차 교육령부터는 그나마 수의과목으로 존속했던 조선어와 조선사, 조선지리를 없애버리고 국민과를 중시하여 황민화에 박차를 가했다. 부가적인 것은 일제강점기 문서 참조.

4.9. 미군정

이 시기(1945~1948)를 교육계에서는 교육에 대한 긴급조치기와 교수요목기라고 부른다.[13] 해방 후 38도선 이하에 진주한 미군정은 소위 '가방끈 긴' 한국인들을 모아 새로운 한국교육제도를 만들려고 했다. 당연히 이시기에 가방 끈 긴 한국인들 중에는 과거 친일했던 사람들이 다수 있었는데[14] 이들은 미군정이 만든 한국교육위원회에 참여하곤 했다. 미군정은 자신들의 교육과정인 6-3-3 교육제를 직수입했다. 이 교육제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그 교육제도이다. 이 시기의 교육과정안은 초중등 교육 편제와 교과별 시간 배당이 전부였으나, 홍익인간이라는 민족의 이념이 교육목표로 자리잡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4.10. 대한민국

1차 교육과정은 1963년까지 시행되었으며' 교과 중심의 교육과정'이었다. 북한의 침략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눈으로 봤던 시기였던 것 만큼 반공교육과 실업교육이 강조되었다는 점. 2차 교육과정은 1973년까지 시행되었고 '경험 중심 교육과정'이었다. 북한보다도 못살았고 늘 군사적 위협에 시달렸기에 반공교육은 필수였다. 3차 교육과정은 1981년까지이며 '학문중심 교육과정'이었으며, 일본의 메이지 유신 시기의 교육칙어를 답습한 국민교육헌장이 중시되었다. 4~6차 교육과정은 인간중심-통합중심 교육과정으로 진행되었고 7차 교육과정에 들어서면서 현재의 교육에 가까운 틀이 완성되었다. 7차 교육과정 이후부터는 20XX년도 개정 교육과정이라고 부르며 8차 등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는 큰 틀 안에서 조금씩만 개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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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 24학년도 입학자 이후부터 적용되며, 인공지능 교육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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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삶 전체는 일(ascholia)과 여가 (schole), 전쟁과 평화 등, 두 개의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우리의 모든 행위는 유용한 것과 고상한 것의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중략) 만약 우리가 전쟁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일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여가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유용한 것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고상한 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중략) 아이건 그밖에 어떤 나이의 사람이건 간에 교육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교육할 때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2] 인간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산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중)[3] 이 당시의 철학이란 곧 학문 그 자체였다.[4] 플라톤과 아리스트텔레스 모두 말년에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몰두했다.[5] "조물주가 처음에 만물을 창조할 때는 모든 것이 선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닿으면서 모든 것이 타락한다."[6] Kritische Theorie, Critical Theory. 2차 세계대전 직전에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지칭된 일군의 사회이론가들에 의한 이론.[7] "공자가 말하였다.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 정도의 충신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8]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제자들 중에 누가 학문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안회가 배우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화를 내지 않았으며 결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요절하여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저는 아직 안회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9] 옛 사람은 자신을 위해 배웠는데(위기) 요즘 사람은 남을 위해 배운다.(위인)[10] 국자감의 7재 안에 무학재가 있어서 무과와 관련된 학문을 가르치긴 했으나 미미한 수준.[11] 실학은 17세기 이후 실용과 실증을 강조한 일부 유학자들의 학문적 성향을 가리킨다. 실학은 반주자학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지만 전통 유학과 궤를 달리하는 것은 아니었다.[12] 아! 백성을 가르치지 않으면 나라를 굳건히 하기가 매우 어렵다. 세상 형편을 돌아보면 부유하고 강성하고 독립하여 웅시(雄視)하는 여러 나라들은 모두 그 나라 백성들의 지식이 개명(開明)하고 지식이 개명함은 교육이 잘됨으로써 말미암은 것이니, 교육은 실로 나라를 보존하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짐이 임금과 스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교육하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있다. 교육에는 또한 그 방도가 있으니, 허명(虛名)과 실용(實用)의 분별을 먼저 세워야 할 것이다. 책을 읽고 글자를 익히어 고인(古人)의 찌꺼기만 주워 모으고 시대의 큰 형국에 어두운 자는 문장(文章)이 고금(古今)보다 뛰어나더라도 쓸모가 전혀 없는 서생(書生)이다. 이제 짐은 교육하는 강령(綱領)을 제시하여 허명을 제거하고 실용을 높인다. 덕양(德養)은 오륜(五倫)의 행실을 닦아 풍속의 기강을 문란하게 하지 말며, 풍속과 교화를 세워 인간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의 행복을 증진시킬 것이다. 체양(體養)은 동작에는 일정함이 있어서 부지런함을 위주로 하고 안일을 탐내지 말며 고난을 피하지 말아서 너의 근육을 튼튼히 하며 너의 뼈를 건장하게 하여 병이 없이 건장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지양(智養)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데서 지식을 지극히 하고 도리를 궁리하는 데서 본성을 다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며 옳고 그르며 길고 짧은 데 대하여 나와 너의 구별을 두지 말고 상세히 연구하고 널리 통달하여 한 개인의 사욕을 꾀하지 말며 대중의 이익을 도모하라.[13] 정확히 교수요목기는 1954년까지다.[14] 김성수김활란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