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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9:27

공자/생애 및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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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1. 조상1.2. 출생 배경1.3. 관직생활과 천하주유
1.3.1. 유랑생활
1.4. 말년과 사망
2. 사상
2.1. 인(仁)2.2. 호학2.3. 인성론2.4. 중용2.5. 예(禮)2.6. 정치2.7. 행동2.8. 융통성2.9. 친구 관계

1. 생애

파일:IMG_20190523_224624_573.jpg
여주 향교에 모셔져 있던 공자 초상

1.1. 조상

기록에 따르면[1], 공자의 조상은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의 둘째 형인 미중(微仲) 연(衍)이라고 한다. 공자는 이 미중 연의 15세손(=14대손)이다.

《공자가어》에 따르면, 주나라 무왕이 폭군 주왕을 정벌하고 나서 그의 아들 무경(武庚)에게 상나라의 제사를 모시게 했다. 그런데 무왕이 죽자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 등이 무경을 옹립하여 난을 일으켰고, 주공(周公)이 이들을 물리쳤다. 주공은 주왕의 의붓형 미자(微子) 계(啓)[2]에게 영지를 하사하여 송(宋)나라를 만들고, 여기에 상나라 유민들인 상족(商族)들을 모여 살게 하였다. 미자 계의 동생인 미중 연은 아들 송공(宋公) 계(稽)를 낳았는데, 이때부터 공(公)의 작위로 불리게 된다.[3]

이후, 송공(宋公) 계(稽) → 정공(丁公) 신(申)민공(湣公) 공(共) → 불보하(弗父何) → 송보주(宋父周) → 세자승(世子勝)[4] → 정고보(正考父) → 공보가(孔父嘉)를 낳았다. 불보하(弗父何)는 송여공의 형인데, 여공은 숙부 양공을 죽이고 형 불보하를 옹립하려 했으나 불보하가 사양하여 자신이 공(公)으로 올랐다. 여공은 불보하에게 상경(上卿) 벼슬을 주었고, 그 자손들도 대대로 상경 벼슬을 지냈다. 공보가의 이름은 그냥 가(嘉)이고 공보(孔父)는 그의 인데, 그가 살았을 때 나라에서 준 호칭으로서 훗날 자손들이 이것을 자신들의 씨(氏)로 삼은 것이다. 공보가는 원래 송나라의 대부였으나 가문이 화를 입어 공보가는 죽고 그 후손이 노나라로 도망쳤다. 이후 공보가 → 목금보(木金父)[5] → 기보(祁父)[6] → 방숙(防叔) → 백하(伯夏)[7] → 숙량흘 → 공자 순. 숙량흘에 이르러 모든 작위는 사라지고 일개 군인의 신분이 된다.

결론은, 알고 보니 공자는 상나라 자성 왕실의 후예라는 것이다. 또한 공자의 조상들이 살았던 송(宋)나라는 상나라 건국 집단인 상족(商族)들이 국가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상나라의 제사 방식을 예절로 삼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사마천《사기》에서는 공자가 죽음을 앞두고 "하나라 사람은 동쪽 계단에 장사지내고, 주나라 사람은 서쪽 계단에 지내고, 은나라(상나라) 사람은 양 기둥 사이에 지낸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일찍이 은나라(상나라) 사람이었다."[8]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자가 상나라 왕실의 후예라는 것과 주나라는 상나라의 예악 법통을 이었다는 정통성은 공자의 유학사상이 세상이 널리 퍼지자 그것을 신성시하고 높이려는 유학자들에 의해 과장됐거나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마태오의 복음서예수의 족보가 다윗에 기원하는 것 같은 포지션이라 할 수 있다.

1.2. 출생 배경

이름은 구(丘).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태어났을 때 머리 꼭대기 가운데가 움푹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 했다고 한다. 는 중니(仲尼).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9]은 장대한 체구의 무인(武人)이었다. 노나라군이 유인 계략에 속아 상대편 성 안에 갇힐 위기에 처하자, 아래로 내려오는 성문[10]을 그냥 팔로 받쳐서 아군을 달아나게 했을 정도로 힘이 좋았다고 한다. 뒤에 태어날 공자 역시 아버지 숙량흘을 닮았는지 그 또한 체구가 좋았다. 공자의 키는 9척 6촌이었다고 전해진다. 한나라의 척인 23cm로 계산하면 222cm가 나오지만 학자들은 1척이 시대마다 달라서 도량형이 명확하지 않다고 하지만, 당대의 거구인 것은 확실하다. 《사기》 기록에도 '사람들이 공자의 큰 키를 보고 신기하게 여겼다'는 서술이 나온다. 자로가 공자를 처음 봤을 때도, 공자라는 사람이 그저 글귀나 읽는 비리비리한 서생인 줄 알고 무작정 쳐들어갔다가, 그의 장대한 기골을 보고 순간 움찔했다고 한다.

숙량흘은 딸만 9명을 낳는 바람에 둘째 부인을 들여서 겨우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몸에 장애가 있었다. 이름이 맹피(孟皮)였는데, '맹'은 서장남[11]의 뜻을 지닌다. 절름발이로 추정된다. 《논어》에 형의 딸을 공자가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형이 맹피이다.

결국 숙량흘은 66살의 나이에 10살 무녀(巫女)[12] 안징재를 부인으로 들인다.[13] 안씨 집안에서는 3명의 딸이 있었다고 하는데, 숙량흘이 셋 중 하나를 아내로 맞으려 하자, 막내딸 안징재가 스스로 나서서 숙량흘의 아내가 되었다. 안징재는 이후 공구에게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고 죽었고 후한의 학자 정현은 안징재가 숙량흘과 관계를 맺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라고 기록했다.[14][15]

안징재는 노나라 수도 곡부 인근의 니구산(尼丘山)에서 살았고 숙량흘은 가끔 찾아오다가, 여러 해 지난뒤에 야합하여 안징재가 16살에 공자를 낳았다. 사마천은 《사기》 <공자 세가>에서 공자의 탄생을 '야합'(野合)이라고 표현했는데, 도올 김용옥은 이를 말 그대로 '들에서 했다'라고 설명한다.[16] 즉,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비공식적 관계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공자는 거의 사생아나 다름 없었고 크게 별 볼 일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공자의 부친을 숙량흘로 보더라도 그는 60대 이상의 노인이었고, 직책은 귀족의 끝자락인 사(士)였으며 공구가 2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다. 이후 모친인 안징재와 공구는 굉장히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공자의 자가 둘째 아들을 의미하는 '중'이 들어가서 '중니'인데, 형인 맹피가 서장자라면 공자도 적자는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숙량흘도 부친이 아닐 것이라는 주장까지 가면 더해지는데, 공구는 단순 평민 집안이 되기 때문이다.[17] 공자는 자기가 젊어서 비천한 일을 많이 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이런 이유인지 공자의 제자 중에서는 평민들의 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1.3. 관직생활과 천하주유

오늘날 공자사상가로 유명하지만, 생전 그는 고향이기도 한 노나라에서 벼슬 생활도 했는데, 일단 사기의 공자세가에 따르면 젊은 시절엔 계손씨들의 창고를 관리하는 말단 관리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관두고 제자를 키우거나 천하를 주유하다 중년 쯤부터 정관계에 본격 진출해 50대에 꽃을 피운 것으로 보인다. 노나라 중도(中都)라는[18] 지역의 원님(시장격)인 중도재(中都宰)를 지냈는데, 이때 제법 잘 다스렸는지 그가 다스린 지역은 몇 년 안에 질서가 바로잡히고 내실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이에 노 정공(定公)의 신임을 얻어 중앙정계에 들어온 그는 삼환에 대한 양호[19] 반란 실패 전후해 토목공사를 관장하는 사공(司空)에도 임명되었고, 지금의 법무부장관격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의 벼슬도 제수받았다.[20][21]

외교가로서도 일가견이 있었는지, 노나라 정공 10년(기원전 500년)의 일인데, 《춘추》 경문에서 "여름, 공이 제나라 군주와 협곡에서 만났다. 공이 협곡에서 돌아왔다. 제나라 사람이 와서 운과 환과 귀음 을 돌려줬다."라고만 서술한 사건이 있다. 《춘추》 3전(곡량전, 공양전, 좌전)에서는 이 만남에서 공자가 보여준 활약을 각각 서술했는데, 《좌전》에 나오는 얘기가 가장 자세하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나라가 이웃한 강대국 제나라에게 협박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제나라는 "중니(공자)는 예를 좋아하지만 용맹하지 못하니 담판 때 주변에서 무기를 들고 춤추게 해서 겁을 주면 우리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공자는 회담 전부터 위엄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해 군사를 대동하고 회담장으로 향했고 무기를 든 이민족 춤꾼들이 노나라 군주를 위협하자 공자는 "두 나라의 임금이 만나는 곳인데 이런 자들은 있어선 안됩니다."라고 꾸짖어 물리쳤고, 제나라 군주가 요상한 차림의 미녀와 광대들을 들여보내자 "양국의 군주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행패를 부리며 분위기를 어지럽힌 것들은 마땅히 다 처단해야겠죠?"라고 외쳐서 광대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게 만들었다.[22] 결국 제나라는 노나라를 협박하긴커녕 노나라에게 기가 죽어버렸다. 쉽게 말해 제나라의 잘못된 예악을 지적해 명분과 실리를 다 챙긴 것이다. 공자의 정치력을 보여주는 일화.

한편, 왕권 강화를 원한 노정공의 지지에 힘입어 공자는 당시 노나라의 세 권세가인 삼환(三桓)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근거지인 비읍, 후읍, 성읍의 성벽을 허물려 했다. 이때도 공자는 "대부는 1백치 이상의 성벽을 쌓으면 안된다"는 예법을 내세워 숙손씨와 계손씨의 성벽은 허무는데 성공하지만, 동북방의 강대국 제나라와 국경을 접한 맹손씨가 이를 격렬히 거부하자 수포로 돌아가고 삼환의 공세에 공자도 결국 실각하고 만다.

이때 이웃 대국인 제나라도 공자를 견제하기 위해 노나라 실권자인 삼환에게 제나라 미녀 가무단과 선물들을 보내 3일간 조회를 정지시키는 등 수작을 부리는데, 예악을 강조한 공자에게 대놓고 "니들 노나라도 예악이 개판인데?"라는 식으로 조롱을 시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당연히 공자는 불쾌함을 느꼈지만, 자신을 기용한 노정공에 대한 미련이 남아 그가 참여하는 제천행사까지 기다리지만 대부들에게 나눠주는 제사음식이 공자에겐 오지 않자 노정공조차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23] 결국 벼슬을 버리고 노나라를 떠나 천하를 주유하게 된다.

공자는 50대 중반 이후 10여년간 여러 나라를 떠돌며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결과적으로 공자의 천하 주유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마음에 이상을 품고 위나라, 송나라, 정나라, 진나라 등 천하를 주유했지만, 많은 나라들은 공자의 명성만 이용했을 뿐 난세에 그의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래도 공자가 남의 나라에 등용되긴 원치 않았는지, 초나라에서 그를 초청했을 때는 초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변국들이 합동으로 병력을 파견해 공자를 죽이려고도 했다.

하여튼 여차저차 고생 끝에 공자는 말년인 60대 후반 다시 노나라로 돌아오는데, 공자의 제자인 염구가 계씨(계손씨) 밑에서 일하면서 제나라와의 전쟁때 혁혁한 공을 세우는 등 이때 공자의 제자들은 어느 정도 노나라에서 지위를 굳혔고, 그들은 존경하는 스승이 끈 떨어진 연처럼 바깥에서 지내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1.3.1. 유랑생활

춘추시대 말기는 유세객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때이기 때문에 공자가 천하를 돌아다닌 게 유독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30대부터 60대까지를 전부 공자의 유랑생활이라고 열거해 놨지만, 공자의 유랑생활은 1기와 2기로 나뉜다.

1.4. 말년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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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부 공림(孔林)에 있는 공자의 무덤.
묘비는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었다.[28]

60대 후반 노나라에 돌아온 이후, 공자는 정사엔 참여하지 않은채 생전 몇년간 국로(國老) 대접을 받으며 교육을 통한 후학 양성과 춘추 집필 등 고문헌 정리에 전념했다.

사망 2년 전엔 "(애공) 14년 봄에 서쪽에서 사냥하여 기린을 잡았다."(十有四年春, 西狩獲麟)라는 기사를 끝으로, 《춘추》의 집필을 중단한다. 붓을 꺾은 이유는 기린 문서에도 나오지만, 성인이 나타나야 출현하는 상서로운 신수가 어찌 이런 혼란스러운 시절에 나타나는지, 성인의 앞이 아니면 복종하지 않는 짐승이 기린이 뭔지도 못 알아보는 자에게 잡히다니 하늘의 도가 이것으로 무너진 게 아닌가라고 탄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이 시절 기린 자체가 상상의 동물이라 실제로 잡혔는지는 의문이다만.

사망 1년 전인 기원전 480년 공자는 병석에 눕는데, 첫째 아들 백어와 애제자 안연이 사망하고, 자로마저 위나라에서 반란군을 꾸짖다 피살당해 젓갈이 되어 공자에게 보내지자 그 충격으로 드러누운 것으로 보인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 사망 일주일 전 소식을 듣고 황급히 온 자공에게 공자가 왜 이리 늦었느냐고 탄식한 후,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는가! 철인은 죽어가는가!"[29]라는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기》 <단궁>(檀弓)편에는, 《사기》에 전해지는 것과 거의 같은 이야기가 상당히 다른 뉘앙스로 서술되어 있다.

자공과 만난 후 일주일이 지난 노나라 애공 16년 4월 기축일(기원전 479년 3월 9일), 공자는 향년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30]

2. 사상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듯, 아이러니하게도 공자가 오늘날 중국 역사의 성인으로 남은 이유는, 그의 인생이 보란듯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벼슬에 올라 제대로 이상을 펼치지도 못했고, 안회, 자로와 같은 아끼는 제자들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내는 비극을 맞이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여 '仁'에 입각해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이상은 과장 좀 보태 당시 천하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허나 공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논어》의 구절 중엔 공자가 정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부분도 있다.
자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충분하게 하고, 군대를 충분하게 하며, 백성의 믿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부득이하게 버려야 한다면, 세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대를 버려라."

자공이 말했다. “부득이하게 버려야 한다면, 두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버려라. 옛날부터 누구에게나 다 죽음은 있었지만,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었다."
논어》 <안연>편 7장.[31]

춘추시대의 난세에서 군대를 가장 먼저 포기할 줄 알아야 하고, 식량까지 버리는 한이 있어도 이런 '사람다움'을 바탕으로 한 국가와 백성들의 신뢰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공자의 주장은 얼핏 듣기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도리어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을 가슴에 새긴 제자들이, 갖은 배신하극상으로 두려움에 떨던 각국 군주들에게 쓰임을 받기 시작하면서 공자의 가르침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자로의 충성스러운 죽음'은 공자 무리의 가치를 드높인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의 죽음 이후, 공자의 제자들이 노나라에서 대거 등용되기 시작했다. 계씨 밑에서 자공과 염구는 각기 외교와 군사 부문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충심을 다하는 인간적인 제자들이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수없이 되뇌면서 유교는 동아시아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32]

2.1. 인(仁)

번지(樊遲)가 인(仁)을 물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을 아끼는 것이다"
번지가 다시 지(知)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을 아는 것이다"
《논어》 안연편 22장.[33]
유가에서 인에 대한 정의로 역사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인용된 문구이다. 번지(樊遲)는 공자의 수레를 몰던 공자의 제자로, 재치는 없지만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늙은 공자가 그러한 어린 제자에게 '인(仁)이란 남을 아끼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이다. 논어에 인(仁)이란 글자는 총 109번 등장하지만, 정작 A=B와 같은 식으로 명확히 정의를 하는 부분은 발견되지 않고, 위 문구가 그나마 가장 그러한 형식에 가까워서 자주 인용되었다.
마굿간에 불이 났다.
공자께서 조정에서 퇴근하여 말씀하시길,
"사람이 다쳤느냐?" 하고 물으시고
말(馬)에 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
《논어》 향당편 12장.[34]
공자의 가르침은 생각보다 체계를 갖춘 현란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으며, 평범하고 상식적인 수준의 말만 간단하게 해주는 스타일이었는데, 공자의 중요한 사상 중 하나인 인(仁) 또한 명확한 개념을 논리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후대의 해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좋은 것을 좋아하고 안 좋은 것을 싫어할 줄 아는 마음, 궁극적으로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 많은 교류와 접촉을 하기 전부터 상대를 먼저 인식하려 노력하고 적극 배려하는 마음을 의미한다.[35] 요즘 말로 하면 비언어적 소통 혹은 다중적 소통, 즉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에 가깝다.[36] 공자는 그럴듯한 말재주를 늘어놓거나 좋은 표정을 꾸미면서 남에게 가식 떠는, 교언영색하는 인간은 불인(不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위와 같이 인(仁)함을 배려심 정도로만 보는 것은 너무 좁은 해석일 수 있다. 공자는 인함을 현대의 휴머니즘 의미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자공이 말했다. "만일 어떤 자가 백성들에게 좋은 것을 주어 많이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인(仁)자라 할 만합니까?
공자가 말했다. "어찌 인(仁)자에 그칠 것이냐? 분명 성인일 것이다!"
《논어》 옹야편 28장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공자의 제환공의 재상이었던 관이오에 관한 평이다. 관포지교로도 유명한 인물인데, 그는 명재상이었지만, 관직에 있는 동안 큰 부를 모으고, 이를 과시하는 것도 좋아해서 씀씀이도 컸으며, 사람을 속이는 것도 망설임이 없는 전형적인 춘추시대 위인이라 도무지 공자가 좋게 보기 힘들어 보였다. 공자의 제자들도 그가 본래 섬기던 주군(제환공의 친형)이 죽자, 제환공 밑에서 일한 것을 두고 지조가 없다고 깠는데, 공자는 그럼에도 관이오가 인(仁)하다고 말했다.
자로가 말했다... "관중을 인(仁)하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공자가 말했다. "환공이 군대를 일으키지 않은 것은 모두 관중의 힘이었다. 이것이 인(仁)이다. 이것이 인(仁)이다."
자공이 말했다. "관중이 인(仁)자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백성들은 지금까지 그의 혜택을 받고 있다.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했을 것(=오랑캐[37])이다.
《논어》 현문편 17-18장

관이오가 비록 예도 제대로 모르고, 인격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만, 그로 인해서 평화롭게 제환공이 패자가 되어서 주나라 왕을 섬기는 질서가 회복되었고,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모두 이롭게 되었으니 인(仁)하다고 말한 것이다. 이로 볼 때 공자가 뜻한 인(仁)이란 것은 사적인 차원(인격적 결함)과 공적인 차원(백성들에게 혜택을 입힘)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38]

다만 이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로 오해하면 안된다. 공자는 정반대의 입장이다. 그는 뜻이 좋아도 선을 넘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반대했다. 대신에 요즘 말하는 소위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봤다. 관이오가 비록 결함있는 인물이지만, 어찌됐든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니 인하다는 것이다.
"죽여서 이롭게 하면 어떻습니까?"
"어찌 정사를 하면서 죽임을 말합니까?"
...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따라서 쓰러집니다."
《논어》 안연편 19장

2.2. 호학

섭공(葉公)이 자로에게 공자에 관하여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왜 말하지 않았느냐? 그의 사람됨은, 분발하면 밥 먹기를 잊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어서 늙음이 곧 닥쳐온다는 것마저 모를 따름이라고."
《논어》 술이 19장.[39]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에게 가르쳐 주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논어》 위정편 17장.[40]
자공이 물었다. "공문자는 무엇 때문에 문(文)이라고 부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를 문(文)이라고 부른다."
《논어》 공야장 14장.[41]
공자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호학(好學)이다. 배우기를 좋아하라는 것. 논어에서 공자는 '10호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도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것이 나만큼은 되는 사람들이야 분명히 있겠지만, 나보다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부하며 말하기까지 했다.[42]

그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배운다는 것은 '묻는 것'이다. 학문(學問)이 여기에서 나왔다. 무엇을 물어본다는 것인가? 다른 사람(人)의 상태를 물어보는 것이다. 남에게 끊임없이 물어봄으로써, 남을 더 이해하고 남에 대해서 배워 나가는 것이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仁)인 셈. 묻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묻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아낄 수 없다. 이렇기 때문에, 인(仁)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다른 사람을 아끼는 것이라고 말했고, 지(知)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는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43]

2.3. 인성론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날때부터 아는 사람([ruby(生而知之, ruby=생이지지)])은 으뜸이요,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다.
곤란해서 배우는 것은, 또 그 다음이다.
곤란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곧 아래(下)로 여겨질 것이다.
《논어》 계씨편.[44]
공자는 타고날 때부터 저절로 알아서 선(善)을 행하면 가장 최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배운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논어》 양화편 3장.[45]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사람의 본성(性)은 서로 비슷하나, 익히는 것에서 서로 차이가 난다"
《논어》 양화편 2장.[46]
여기서 '익힌다(習: 익힐 습)'는 것은 학습(學習)할 때 습(習)으로, "배우고 익힌다(배운 것을 반복하여 익숙해진다.)"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갑골문에서도 습(習)은 작은 새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르는 모습이어서, 아기새는 계속해서 날려고 연습해야지만 익숙해져서 날 수 있다는 뜻. 즉, 반복이나 연습을 뜻한다. 그러므로 공자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의 타고난 성품은 비슷하나, 반복해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그 차이가 난다고.

종합해보자면, 태어날 때부터 아는 똑똑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해서 곤란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의 타고난 본성(性)은 그닥 차이가 나지 않는다.(近) 공자는 사람마다 타고난 차이가 있긴 해도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배우려고 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익숙해지려는 그 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4. 중용

자공이 물었다. "자장(師)과 자하(商) 중에 누가 어집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
자공이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자장이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논어》 선진편 15장.[47]
지나치지도 않고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닌, 딱 알맞은 적절한 정도가 중용(中庸)이다. 여기서 중(中)이란 갑골문에서 깃대를 뜻한다. 깃대에 달린 깃발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지만 그 중심에 있는 깃대는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중용도 마찬가지다. 이는 '중간만 가라'면서 남들이 하면 우루루 따라가서 똑같이 해라는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의견의 정 가운데에서 관망하다가 이기는 쪽을 선택해라는 뜻도 아니다.[48] 자신의 중심은 꽉 잡으면서도, 변하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하는 것(時中)이 중용이다.[49]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려서 적절하게 대하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꾸준히 정도(正道)를 펼쳐 나가라는 것이 중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50]
자공이 물어 말하였다.
"한 마디로써 종신토록 지켜 행할 만한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이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51]
《논어》 위령공편 23장.[52]
서(恕)는 '같은(如) 마음(心)'이다. 즉, 공감하는 마음. 남의 불행에 같이 아파하고 남의 행복에 같이 즐거워하는 공감에서 가장 기본되는 것은,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 중용에서 충(忠)과 서(恕)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자신의 중심을 지키면서도(忠)[53], 남의 상황을 적절하게 이해할 줄 알아야(恕)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54]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되, (말과 행동이 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和而不同)
소인은 (말과 행동이 그 사람들과) 한가지로 같아 보이나,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진심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논어》 자로편 23장.[55]
화(和)는 갑골문에서 '피리를 부는 것'을 뜻한다. 서로 다른 소리가 함께 어울려서 하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것이 '화(和)'의 본 뜻이다. 하지만 공자는 그냥 조화롭게 어울리려고만(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음악으로 예를 든다면 '하나의 톤'으로만 노래를 한다면 좋은 노래라고 할 수 없다. 여러가지 '다른' 음정을 '조화롭게' 섞어서 불러야 좋은 노래가 되는 것이다. 즉 각 개인의 '다름'을 지키면서도 전체 '조화'의 화합을 꿈꾸는 것이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이다.

이것을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말하는데, "남들과 사이 좋게 어울리되(和), (자신의 중심과 원칙을 잃어버려) 남들과 똑같아져서는 안된다(不同)"는 것이다. 남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또는 남들이 한다고 해서, 자신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얼떨결에 해버려서는 안된다. 남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할 말은 하며 자신의 뜻은 굽히지 않는 자야말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는 당당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지키고자하는 원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어울리고자 남들에게 맞춰준다면, 아첨하는 것이랑 무엇이 다르겠는가? 적당히 어울릴 줄 알아야 되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신의 원칙을 바꾸면서까지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56] 화이부동은 공자만이 말했던 것은 아니다. 안영의 고사에서도 나오니 참조.

2.5. 예(禮)

공자가 태묘[57]에 들어가면서 매사를 하나하나 물으셨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추인의 아들[58]이 예를 안다고 하였는가? 태묘에 들어가면 매사를 묻는데"라고 했다.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이다."
《논어》 팔일편 15장.[59]
임방(林放)이 예(禮)의 본질을 물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질문이 훌륭하구나!
예(禮)는 사치스러운 것보다 차라리 검소해야 되며,
장례는 평온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슬픔에 젖어야 된다."
《논어》 팔일편 4장.[60]
大禮必簡
훌륭한 예(禮)는 반드시 간결해야 한다.
《예기》 악기.
예(禮)란, 존중의 뜻을 표현하여 양보하는 행동양식을 말하는 것으로, 그 사회가 서로 합의한 형식을 뜻한다. 또한 검소한 것을 지향하며, 장례 같은 경우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예(禮)의 형식은 반드시 간결해야 되지 복잡해서는 안된다. 결국 예절이란, 존중을 표현하는 방식일 따름이라는 것. 지나치게 형식적이어도 예절이 아니고, 사치스러워도 예절이 아니며, 감정을 완전히 숨기는 것도 예절이 아니다. 또한 지나치게 굽신거리면서 재차 행하는 것도 예절이 아니니, 공자는 이를 두고 '과례(過禮)는 비례(非禮)'라고 하였던 것이다.(과한 예절은 예의가 아니다.)
안연이 인(仁)에 관하여 여쭈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ruby(克己復禮, ruby=극기복례)])이 인이다.
날마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온 천하가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을 위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지 남에게 달려 있겠느냐?"
안연이 말했다. "청컨대 그 요점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듣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하지 말아라."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모쪼록 이 말씀에 힘쓰겠습니다."
《논어》 안연편 1장.[61]
예의는 귀찮지만 그런 귀찮음을 이기고 하는 것은, 거기에 어진 마음(仁)이 있기 때문이다. 어진 마음(仁)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이 예의(禮)이고, 거꾸로 형식적인 예의(禮)의 본 뜻은 어진 마음(仁)에 있다. 매번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은 자신이 닦아온 그 어진 마음이 저절로 표현되기 때문이지, 형식에 집착해라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예의를 지키지 못하더라도 배려하려는 마음이 보인다면 그게 사람다움(仁)'이고, 보통의 상황에서 친하기 때문에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되더라도 굳이 예의를 지키는 것은 그게 서로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최소한의 방식(禮)이기 때문이다.

2.6. 정치

섭공(葉公)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 하시길,
"가까운 곳에 있는 자는 기뻐하고, 멀리 있는 자는 찾아오는 것입니다"
《논어》 자로편 16장.[62]
정치는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 하셨다.

"정치(政)는 바르게 하는 것(正)입니다.
당신이 앞장서서 바르게 행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논어》 안연편 17장.[63]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그대로 따라하기 마련이다. 윗사람이 스스로 본보기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윗사람을 따르겠냐고 얘기하고 있다.
제나라 경공(景公)이 공자께 정치에 관하여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논어》 안연편 11장.[64]
각자의 직분을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공자가 군주인 경공에게 직접 말하는 내용이므로, 공자가 이 말을 할 때는 '군주'에 초점을 맞춰 얘기를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즉, 군주는 군주다운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을 다른 직분들과 같이 놓으므로써, 군주 역시도 그 책임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섭공은 반란을 제압했던 군사전략가이자 초나라의 재상이다. 자신의 영지에 법을 엄격하게 하여, 아버지가 양을 훔치더라도 그 아들이 그것을 신고할 정도가 되었는데, 섭공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 섭공에게는 엄격한 것이 자랑이 아니며, 백성의 민심을 얻는 것이 정치라고 말한 것이다.

계강자는 노나라의 대부로 자신의 군주보다 더 많은 군사와 돈을 가지고 있었던 실권자였다. 그런 계강자에게는 아랫 사람이 자신을 따르게 하려면, 자신도 윗사람인 노나라 군주를 잘 모셔야 된다고 꾸짖은 것이다.

경공은 부유한 제나라의 군주로 사치를 일삼고 노는 것을 좋아했으나, 중요한 일에는 명재상 안영의 말을 꼭 들었기에 춘추시대의 준패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경공에게는 노는 것을 삼가고 군주다운 행동을 하라고 꾸짖은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말하는 정치란, 군주 스스로가 그에 걸맞은 바른 행동을 하여,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백성들의 민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정치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재화가 적은 것보다는 분배가 고르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라며 분배의 형평성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대동 사회(大同社會)를 이상 사회로서 지향하였다.

2.7. 행동

자로(子路)가 석문에서 묵었다. 새벽에 문지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자로가 말하였다.
공(孔)씨 문중에서 왔소.
문지기가 말했다.

안될 줄 알면서도 굳이 하려는 사람 말인가?
《논어》 헌문편. 38장.[65]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하는 인간다운 사회를 꿈꿨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안된다고 보이는 것을 하는 이유는, 결국에는 사회는 조금씩 바뀌고, 한명한명 행동들이 쌓여 원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사회가 한번에 바뀔리 없거니와, 자신과 자신의 주변부터 바꿔나간다면 언젠가는 모두가 바뀌어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컨대 산을 쌓는 것과 같아서, 한 삼태기의 흙을 갖추지 못해서 그만두더라도, 내가 그만둔 것이다.
예컨대 땅을 고르게 하는 것과 같아서, 비록 한 삼태기의 흙을 덮는데에 나아가더라도, 내가 나아간 것이다."
《논어》 자한편 19장.[66]
조그만 것이라도 자신이 참여한 바가 있었다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된다. 또한 공자는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됨을 항상 강조했다.

2.8. 융통성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곧으면서도 고집 부리지 않는다."
《논어》 위령공편 36장.[6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일러 잘못이라 한다."
《논어》 위령공편 29장.[68]
학문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계속해서 바꿔 나간다는 것이다. 학문하는 자는 자신을 바꾸기 위해 항상 열려 있어야 된다.

2.9. 친구 관계

자공이 벗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고하여 선한 것으로 이끌되
안된다면 그만두어야 하니,
(이 일로 인하여) 스스로 욕됨이 없게 하라”
《논어》 안연편 23장.[69]
선한 것을 서로 권하는 것이 친구의 역할인데, 권하고 그 친구가 바뀌지 않는다면 거기서 그친다. 강요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친구로서 권유할 뿐이다.
공자께서 외출을 하려고 하시는데, 마침 비가 내렸으나 우산이 없었다.
문인들이 말하였다.
"자하(商)가 가지고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였다.
"자하의 사람됨은 재물을 매우 아낀다. 내가 듣기로 남과 사귐에 있어서
그의 장점은 추켜 주고, 그의 단점은 피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러므로 오래 갈 수 있는 것이다."
《공자가어》 치사(致思)편 14장.[70]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기 위해서는, 장점은 띄워주되, 그 친구의 단점에서는 멀어져야 한다. 그렇지만 단점을 용인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친구를 억지로 좋게 바꾸려하지 않고, 그 단점에서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는 것으로 그친다. 친구를 친하게 여겨 아끼되, 너무 친해져서 함부로 하는 것을 삼가고 조심한다면, 친구는 나를 믿게되어서, 내가 모범을 보이면 은연중에 그 친구는 그것을 따라하게 될 것이다. 말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가르치는 셈.

하지만 이럴 경우, 친구가 끝내 나쁜 짓을 하고 그것이 내눈에 많이 거슬리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어볼 수 있다. 우선, 공자의 가르침은 강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감동을 통해서 사람을 달라지게 만드는 '감화(感化)'가 모든 공자 가르침의 기본이다. 억지로 변하게 하는 것은 그 억지력이 더 이상 없게 되면 다시 되돌아오게 마련이지만, 감화를 시킨다면 자신의 신념이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한 종신토록 그 선함을 지키고자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강요를 통해 잠시 친구를 바꿀 수 있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71]

[1] 물론 공자의 위명이 더해져 후대에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2] 미(微)는 영지 이름, 자(子)는 작위, 계(啓)는 이름이다.[3] 미자와 미중까지는 미(微)의 작위로 불리다가, 이후 송공(宋公) 계(稽)부터 공(公)의 작위로 불리게 된 것.[4] 송의 세자가 아니라, 이름이 세(世)이고 자가 보승(父勝)이라고 한다.[5] 이름이 목(木), 자가 금보(金父)라고 한다. 이 시기에 노나라로 이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 이름은 고(睾), 자는 이보(夷父).[7] 방숙과 백하는 이름이 아니라 자라고 한다.[8] 공자세가 中: 夏人殯於東階周人於西階殷人兩柱閒昨暮予夢坐奠兩柱之閒予始殷人也[9] 숙량흘은 '공'숙량흘이 아니다. 춘추시대 초중기에는 를 이름보다 먼저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표시된 것이다. 즉, 공자의 아버지의 이름은 공흘이고, 숙량은 그 자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숙량 공흘이다. 이렇게 를 쓴 대표적인 한국 사람은 추사 김정희.[10]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문이 아니라, 수직으로 올렸다가 내리는 식의 성문[11] 서자이자 장남.[12] 일본쪽 학설이다. 안징재는 얼굴 안()자를 쓰는 씨족의 사람이었는데, 당시 성씨로 '얼굴'이라는 뜻의 한자를 사용했다면 샤머니즘 계열의 집단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13] 70 이상이라는 말도 있고 60대라는 말도 있는데 이 당시의 나이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공자가 태어나기 10년쯤 전에 노나라의 전쟁에서 숙량흘이 몇 차례 용력을 뽐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70 이상이라면 고대 시대에 60대 노인이 전쟁터에서 용력을 떨쳤다는 얘기인데 50대라면 어느 정도 참작이 가능하지만 60대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고령이었기에 신빙성이 떨어진다.[14] 간혹 이때까지 공자는 어머니 안징재가 알려주지 않아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는 얘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 부분은 후대에 계속 논쟁거리가 된다. 어떻게 어머니 안징재가 사망할 때 이미 17살이나 된 공자가 아버지 무덤의 위치를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당시 17살이면 이미 성인으로 행세해도 전혀 이상한 나이가 아니고 장애인인 이복형 맹피를 대신해 숙량흘의 뒤를 계승해야 할 위치에 있는 공자가 아버지 무덤의 위치를 어떻게 모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이 부분은 틀린 얘기라고 후대의 학자들이 주장했고 청나라의 고증학자 손호손(孫濩孫)에 의해 완전히 부정된다. 한마디로 정현이 오독한 거라는 이야기다. 공자가 몰랐던 것은 아버지 무덤의 위치가 아니라 그것이 임시 무덤인지 정식 무덤인지 몰랐던 것이다. 즉 어머니 안징재가 사망했으니 아버지 숙량흘의 무덤에 합장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정식 무덤이라면 그 자리에 바로 합장하면 되지만 임시 무덤이라면 숙량흘의 무덤을 따로 정식으로 만들어서 어머니 안징재와 합장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5] 나는 아버지 무덤을 모르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항녕 교수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16] 이는 김용옥 뿐만이 아니라, 꽤 세계적으로 널리 채택된 해설이다.[17] 춘추시대에 평민들은 성씨도 없었고, 대부분의 관직을 포함한 직책은 세습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대였다. 전국시대가 되면 이런 분위기가 상당히 줄어들게 되는데, 귀족 같은 신분 따질 여유도 없어지기 때문이다.[18] 노나라 수도라는 말도 있으나, 이때 노나라 수도는 곡부이기 때문에 그냥 고을 중 하나라는 의견도 있다.[19] 항목에도 있지만 공자가 기피한 인물이었다.[20] 노나라에서 재상을 지냈다는 기록도 있지만, 사실이라 치더라도 당시 노나라의 실세는 계씨(계손씨)를 비롯한 삼환이였기에 활동에 제약이 있었다. 애초에 재상을 지냈다는 기록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의견도 있는데, 왜냐하면 《논어》는 공자 관련 어록 이외의 것들은 공자를 높이기 위해 제자들이 어느정도 조작한 것 아니냔 혐의도 받는 책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기되어있듯 노나라에서 상당히 높은 관직을 한 것은 맞다.[21] 반면 공자에 관한 관직 기록을 어느 정도 신뢰하는 입장도 있는데, 본문에 추가된 중국 학자 리카이저우의 글도 그런 입장을 보인 바 있다. 사실 《논어》를 포함한 글들을 제자들이 이후에 추가했다고 한다면, 공자의 말이건 행적이건 진실 공방부터 복잡해진다. 그리고 이 입장에서도 공자가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진 않는다. 다만 오로지 정치적 실패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뿐이다. 후술되어있듯 공자가 삼환과 대립하다 실각했지만 애초에 계손씨를 포함한 계씨는 공자의 후원자이지 경쟁자가 아니었고, 공자 역시 재상에 올랐는지는 불분명하나, 40대에서 50대 중반까지의 기간 동안 나름 중책인 중도재, 사공, 대사구의 직책을 거쳤으며 이 과정에서 녹봉도 적지 않게 받았다. 다만 노나라건 위나라건 제나라건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다고 판단할 뿐이다. 그래서 공자는 다시 55세 이후에 다시 유랑을 떠났다가 60대 후반에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공자는 노나라에서 보낸 10여년의 시기를 제외하면 제대로 관직에서 활동하지 못했지만, 이걸 인생에 있어서 좌절로 보긴 어렵다는 얘기. 공자는 관직 생활 과정이나 명성으로 인하여 재산도 꽤나 모았고, 수치는 갑론을박이 있지만 수십~수천명 단위의 많은 제자를 받아들이면서 수업료도 받았다. 집도 당대의 대신들만큼 잘 산 것은 아니지만, 100묘[72]라는 집 크기는 일반인들이 5묘의 집에 살았던 것과 비교하면 20배나 되는 크기였다.[22] 이때 제나라가 공연하라고 데려온 이민족들은 당시만 해도 중화권에서 동이족 취급하던 산둥반도 바닷가에 사는 소수민족 ‘래인’(萊人)으로 알려져있다. 근데 강인욱 교수 설에 의하면 이때 공자가 군자들의 모임에 저질스런 공연을 한다고 분개하여 칼을 뽑아 들고 단상에 올라가 춤을 추는 광대들의 손발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렸다고(...) 하는데, 단지 겁만 줘서 쫓아낸게 와전된건지 아님 위협이 되거나 진짜 홧김에 벤건지 확인이 필요한 부분.[23] 다만 노정공은 BC 495년 사망하는데,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기 전이긴 하다.[24]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의하면 이 때 노나라 대부였다 사망한 맹리자의 동생인 남궁경숙은 노소공에게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공자의 낙양행을 국가의 시찰사업으로 포장해서 노나라 군주에게 마차, 말 2마리, 마부, 일체의 경비를 얻어낸다.[25] 이때 낙읍 방문을 계기로, 본인을 상나라 후예라고 생각하고 상을 멸망시킨 주나라에 짐짓 거리감을 느끼던 공자는 상나라 문화도 이어받은 주나라를 본격 숭상하기로 생각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주나라는 이대(하나라·상나라)의 (나쁜 문화는 버리고 좋은 문화는 흡수해) 예를 절충해 거울로 삼았으니 그 문화가 찬란하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노라." (논어 ‘팔일’편.)[26]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이때 만난 노자에게 배움을 구했다고 한다.[27] 그리고 중국에서 천하라는 개념은 중국의 영토와 함께 확대된 개념이라서 요즘 중국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교통이 불편한 고대에는 중국의 2-3개의 성 수준도 천하였다.[28] 비석의 제일 밑에 있는 글자는 干처럼 보이지만 사실 王이다. 이렇게 王의 아랫부분이 짤려 보이도록 한 이유에 대해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고 추측설들만 있는데, 예를 들어 황제가 공자의 무덤을 봤을 때 혹시나 왕 드립 비석을 만든 후손들이 건방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여겨 후손들이 알아서 王자를 干으로 오해하도록 아랫부분만 숨겼다 등이 그것이다.[29] 공자세가 中: 太山壊乎! 梁柱摧乎! 哲人萎乎![30] 춘추좌씨전의 경문(經文)도 "夏四月己丑, 孔丘卒"로 끝난다. 예기에서 "天子死曰崩, 諸侯曰薨, 大夫曰卒, 士曰不祿, 庶人曰死"라고 했으니, 공자가 대부(大夫)로서 죽었다고 평한 셈이다. 노정공의 아들 노애공이 공자의 죽음을 애도하자 자공이 '정작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등용하지 않고서 막상 돌아가시니까 이러시는가'라고 비판했다고 전해진다.[31]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32] H. G. 크릴의 《공자 ~ 인간과 신화》에서 부분 인용한 글이다. 조지프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33] 원문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34] 원문 廐焚, 子退朝, 曰. “傷人乎?” 不問馬.[35] 이에 대해 공자가 주장한 대표 방법론 중 하나가 이다. (오늘날엔 후대 유학자들의 주관으로 충성할 때 충으로 많이 쓰지만, 본뜻은 '올곧은 마음'으로, 진심을 뜻하는 한자였다. 사실 이렇게 보면 인을 중시한 공자는 순수한 대의론자로 보긴 어려운데, 이 충의 주체가 언젠가부터 백성만으로 줄어들고, 상대는 모든 타인에서 나라 혹은 군주로 줄어들었다.) 행동 전 먼저 상대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마음. 공자의 이론에서 이 '사전에 적극적인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36] 그래서 도올 김용옥은 간단하게 심미적 감수성이라고 설명했다.[37] 활을 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유목민족은 중국인들과 반대 방향으로 옷깃을 묶었다. (여담으로 훗날 한반도 삼국시대 사람들도 중국인과 반대 방향이었다.) 이때 말한 의도를 보면 공자 기준 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인들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38] 물론 공자 말씀을 교조주의적으로 받들지 않는 딴에야, 당장 직계제자들도 의문을 표했듯 다른 견해도 오늘날엔 얼마든지 있을 순 있을 것이다. 다만 공자는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39] 원문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40] 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41] 원문 子貢問曰: "孔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42] 논어 공야장편: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43]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44] 원문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也.[45] 원문 子曰: "唯上知與下愚不移."[46] 원문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47] 원문: 子貢問. 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然則師愈與 子曰過猶不及.[48] 이것은 자신의 의견이 없기 때문에 다수가 하는 것에 아무 생각없이 따라가는 것이다. 중용은 자신의 뜻과 의지는 세워진 상태에서, 무대뽀로 돌진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처신해가면서 자신의 뜻과 의지를 관철시켜 나가라는 뜻.[49] 자신의 뜻과 이상을 지키고 나아가나, 상황에 맞게 그 뜻을 적절하게 펼쳐나가는 것을 중용이라고 한다.[50] 《중용》 11장 : 君子 遵道而行 半塗而廢 吾弗能已矣.[51]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52]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 勿施於人."[53] 忠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患은 중심(中)이 두 개라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 즉 근심을 말한다. 우리가 보통 충성스럽다는 것을 '윗사람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따른다'로 알고 있지만, 충(忠)은 단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일 뿐이다. 윗사람이 잘못한다면 신하된 입장에서 흔들지 않는 마음으로 '충'고(忠告)를 해주어야 하니, 무조건적으로 윗사람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54] 중용에서 중(中)은 충(忠)을 뜻하고, 용(庸)은 서(恕)를 뜻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55]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56] 중용을 통해 감정이 적절하게 드러나는 것이 화(和)이다. 자세한 것은 중용 참조.[57] 大廟를 대묘, 태묘라고 부름. 주(周)나라의 시조(始祖)인 '주공(周公)'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을 말한다. 보통은 종묘라고 부르는데, 제후국이었던 노나라는 종묘라고 부르지 못하고, 태묘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58] 공자를 말한다.[59] 원문 子入大廟, 每事問. 或曰: "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子聞之曰: "是禮也."[60] 원문 林放問禮之本, 子曰: "大哉問! 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61]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62] 葉公問政, 子曰: "近者說, 遠者來."[63] 원문 季康子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 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64] 원문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65] 子路宿於石門, 晨門曰: "奚自?" 子路曰: "自孔氏." 曰: "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66]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67] 원문 子曰 君子 貞而不諒[68] 子曰 過而不改 是謂過矣[69] 子貢問友, 子曰: "忠告而善道之, 不可則止, 無自辱焉."[70] 원문: 孔子將行 雨而無蓋 門人曰 商也有之 孔子曰 商之爲人也 甚恡于財 吾聞與人交 推其長者 違其短者 故能久也.[71] 물론 이런 부분은 다른 제자백가들에게 많이 비판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묵자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좋은 가르침을 알게 해야 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설득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했다.(묵자참조) 반면 유교는 시대가 사람을 원하면 나아가서 그 군주에게 왕도 정치를 알려주되, 시대가 사람을 원하지 않고 무법천지라면 차라리 벼슬에서 내려와 침묵을 지키며 숨어지내는 것이 낫다고 말했을 정도.(중용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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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북위 시대의 지리학자 역도원이 직접 관찰한 것을 《수경주》에 기록한 것. '묘'는 춘추전국시대의 측량 단위로, 현대로 치면 20,000평방미터에 달한다. 물론 이 전체에 건물이 있던 것은 아니고, 집과 농원, 전답 등이 모두 이 안에 있었던 것이 고대 중국 건축의 특징이다. 즉, 집 하나가 자급자족이 가능한 완성된 생활공간이고, 심지어는 여기서 농사를 짓지 않으면 벌금을 걷는다는 법률도 제정되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