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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11:41:33

히에로니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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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라틴 십자가.svg 서방교회의 4대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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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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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성 예로니모 | 알브레히트 뒤러
<colbgcolor=#314568,#314568><colcolor=#c1c7b9,#c1c7b9> 본명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이명 스트리돈의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Stridonensis)
출생 342년~349년
로마 제국 달마티아/판노니아 스트리돈
사망 420년 9월 30일 (향년 71~78세)
동로마 제국 팔레스티나 베들레헴
직업 성직자(사제), 신학자, 번역가, 역사학자
종교 그리스도교
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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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4568,#314568><colcolor=#c1c7b9,#c1c7b9> 성인명 가톨릭 예로니모
정교회 예로니모스
성공회 제롬
[언어별 명칭]
고전 라틴어: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교회 라틴어: 예로니무스 (Hieronymus)
코이네 그리스어: 히에로뉘모스 (Ἱερώνυμος)
현대 그리스어: 예로니모스 (Ιερώνυμος)
영어: 제롬 (Jerome)
프랑스어: 제롬 (Jérôme)
독일어: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스페인어: 헤로니모 (Jerónimo)
이탈리아어: 지롤라모 (Girolamo)
포르투갈어: 제로니무 (Jerónimo / Jerônimo)
폴란드어: 히에로님 (Hieronim)
러시아어: 예로님 (Иероним)
일본어: 히에로니무스 (ヒエロニムス)
칭호 교부, 존엄한 증거자
상징물 갈레로[1], 나팔, 사자, 십자고상, 올빼미, , 필기구, 해골
축일 6월 15일[2]
9월 30일[3]
수호 고고학자, 백과사전 편집자, 번역가, 사서, 성서학자, 학생
}}}}}}}}} ||

1. 개요2. 생애
2.1. 유소년 시절2.2. 회심과 은수 생활2.3. 불가타의 탄생
3. 전설4. 그의 이름을 딴 것들5. 대표작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사제, 신학자, 번역가, 그리고 역사학자.

생전에 폭넓은 학식과 뛰어난 언어 능력, 그리고 빼어난 작문 실력까지 지닌 그는 종교 서적, 역사서, 에세이 등 다양한 글들을 집필함으로써 수많은 중세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 대표적으로 히브리어, 그리스어, 그리고 아람어로 쓰인 구약성경신약성경라틴어로 번역해 훗날 가톨릭 라틴 예법의 국제 표준 번역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 불가타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성별 상관없이 신앙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릇 따라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가르쳤고, 특히 배우자를 잃은 여성들에게는 성경 공부와 수도 생활 방식을 교육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서방교회에서는 교부, 동방교회에서는 존엄한 증거자라는 칭호와 함께 많은 이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다.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등 그리스도교 내 대부분의 주류 종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다만 교회별 축일은 상이한데, 대표적으로 정교회에서의 축일은 6월 15일이고, 가톨릭과 성공회에서의 축일은 9월 30일이다.

2. 생애

2.1. 유소년 시절

히에로니무스는 342년부터 349년 사이 로마 제국 달마티아 혹은 판노니아 속주의 마을인 스트리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리리아 출신의 유복한 그리스도인 집안에서 자랐으나 정작 신앙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12살이 된 무렵 그는 자신의 친구 보노수스(Bonosus)와 함께 로마로 건너가 문헌학자이자 교사인 아엘리우스 도나투스(Aelius Donatus) 밑에서 라틴어, 코이네 그리스어, 문법, 수사학, 철학, 의학, 그리고 법학을 공부했다. 학창 시절 그는 탁월한 언어적 습득 능력은 물론 방대한 저서들을 섭렵해 얻은 풍부한 지식으로 정평이 난 우등생이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종종 비행을 일삼기도 했는데, 일탈의 시간이 끝날 때마다 그는 죄책감을 뼈저리게 느껴 일요일이 되면 카타콤을 방문해 자신의 양심을 달래곤 했다. 이윽고 360년부터 364년 사이 성인이 된 그는 관습에 따라 당시 교황 리베리오에게 세례를 받았다.

2.2. 회심과 은수 생활

367년 로마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친 히에로니무스는 보노수스를 포함한 세 명의 졸업생들과 함께 트리어로 건너가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전제정에 속한 아젠테스 인 레부스[4]라는 직책을 맡았다. 그렇게 일을 하던 중 어느 날 우연히 동방교회의 수도 생활을 접하게 된 그는 이에 크게 감명을 받아 자신의 삶을 종교에 헌신해야겠다는 마음을 품었고, 그 출발점으로 세속과의 연을 단절하고자 372년 혹은 373년에 일을 그만두었다. 머지않아 그는 아퀼레이아로 떠나 그곳에서 다른 신자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으며, 374년에는 더욱 철저한 수덕을 이루기 위해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성 예로니모의 환시
(The Vision of Saint Jerome)
조반니 바티스타 란제티 作, 클리블랜드 미술관
목적지로 이동하는 여정은 마냥 순탄치는 않았으나 히에로니무스에게 결정적으로 종교적 의지를 고취한 신비스러운 경험이 하나 있었다. 성경 독서에 대한 열정이 떨어진 그는 375년 어느 날 원인 모를 열병에 시달려 겨우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천사가 자신의 눈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예고하는 나팔을 불었던 것이다.[5] 이 기이한 꿈이 결의가 부족한 자신을 일깨우려는 하늘의 계시라고 받아들인 그는 온전히 금욕적인 은수 생활을 이행하기로 마음먹어 병이 회복된 후 몇몇 은수자들이 머물고 있는 칼키스의 사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는 375년부터 약 2~3년 간 황량한 사막에서 안티오키아에서 온 유대인 사제의 가르침 아래 히브리어를 공부하고 해당 언어로 쓰인 성경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고행을 실천했다. 일례로 그는 현재는 소실된 히브리인 복음[6]의 일부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2.3. 불가타의 탄생

교황 성 다마소 1세의 부름을 받고 그의 비서사제 생활을 하며 성경 번역 겸 해설가 직무를 맡았다. 이때 교황은 그가 당대 최고의 성서학자임을 알고 당시 사용되던 여러 번역본을 토대로 만족할 만한 라틴어역 성서를 출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로니모는 처음에는 70인역 성서를 번역대본으로 삼아 새로운 라틴어역을 펴냈다. 그러나 70인역 성서와 히브리어 필사본을 검토한 뒤 좀 더 원전에 가까운 문서를 번역대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판단하여 다마소 1세의 사망 뒤 389년 무렵 베들레헴에 수도원을 세우고, 예수 성탄 성당 지하동굴에서 제자 성녀 바울라와 성녀 에우스토키움 모녀(母女)의 도움으로 히브리어 성서를 토대로 구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본을 예로니모가 팔레스타인으로 가기 전에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것과 합본하여 '불가타(Vulgata) 성서'라는 이름으로 가톨릭교회에서 표준 라틴어 성서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라틴어 성경하면 보통 불가타 성서를 말한다.[7]

그 외 니케아 공의회 때 결정된 니케아 신경의 핵심인 삼위일체론 교리에 관한 연구를 통해 삼위의 각 페르소나(위격)개념 정리를 더 구체적으로 정립했는데, 당시 그 누구 보다 삼위일체에 관한 깊은 고찰과 깨달음으로, 이를 바탕으로 후일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모든 정통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삼위일체 교리와 부활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사망 후 그의 작업실이었던 동굴에 매장되었으나 후에 십자군들이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성모설지전 성당)으로 이장하였다. 성인은 유언으로 "나는 영원히 이곳에서 잠들기를 바란다." 하는 말을 하였고 관에 새기기까지 했다.

예로니모는 폭넓은 학식, 특히 고전, 성서, 그리스도교 전승에 대한 이해로 유명하며. 성인이 쓴 성서와 금욕주의·수도원주의·신학에 대해 쓴 수많은 저서들은 중세 초기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예로니모가 마지막 34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남긴 문학 유산은 당대의 논쟁들, 성서에 대한 열정, 수도원 생활의 산물이다. 서방 가톨릭 교회의 4대 교부(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이자 교회학자이다.

3. 전설

대개 성화 중에서 삐쩍 마른 노인이 사막 한가운데나 동굴에서 고행하고 있는 그림이면 99% 예로니모를 그린 그림이며 거기에다가 돌을 쥐고 가슴을 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면 100%인데, 사막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가슴을 돌로 쳤다고 전한다. 또한 중세에는 추기경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빨간 추기경 모자를 쓰고 있는 성화도 있다.

한편 예로니모를 그린 그림에는 종종 해골바니타스 정물이 놓여 있다. 바니타스 정물화는 삶이 덧없음을 나타내 회개하고 현재에 충실할 것을 주문하는 그림인데, 해골은 더할 나위 없는 죽음의 상징이고 예로니모는 회개의 성인이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St.%2BJerome.jpg

예로니모는 사막에서 고행을 하며 신앙을 키웠다고 한다. 그렇게 고행하던 중 갑자기 사자가 나타나 잡아먹힐 각오를 하고있는데, 사자가 가만히 낑낑거리고만 있어 자세히 보니 발에 가시가 박혀있어 뽑아주었더니, 이후 사자가 예로니모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한다. 고로 성화 중에서 삐쩍 마른 노인과 그를 애완동물마냥 쫄쫄 따라다니는 사자가 나온다면 예로니모를 그린 게 확실하다고 보면 되며 서재에서 책을 쓰는 그림에도 사자가 따라붙어 있다.

다만 사자의 가시를 뽑아줬다는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안드로클레스에서 먼저 등장했기 때문에, 이는 후대의 창작되었다는 것이 성경학자의 평이다. 사자의 가시에 대한 일화는 후대에 덧붙여졌다.

특히 본의 아니게 이 사람에게 능욕당한 성인이 한 명 있는데, 그 바닷물 가르는 기적으로 유명한 모세다. 모세의 외양을 묘사한 히브리어 원전에는 "...모세의 머리가 빛으로 둘러싸여..."라고 했는데, 히브리어로 빛과 뿔이 거의 표기가 비슷한 바람에 예로니모가 "...모세의 머리에는 뿔이 나 있어..."라고 오역해버렸다. 게다가 구약성경의 문화에서 뿔은 권위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 또한 그럴 듯했다. 그 때문에 수백 년 간 예술가들이 모세를 그릴 때마다 을 그렸는데, 머리에 흉악스럽게 뿔이 난 건 악마들뿐이니 작고 귀엽게 묘사했다. 제일 유명한 케이스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모세 성상. 물론 예로니모의 번역을 수정한 '노바 불가타'에서는 이 유명한 오역을 원전에 맞게 수정하였다.[8]

4. 그의 이름을 딴 것들

5. 대표작

6. 관련 문서



[1] Galero. 추기경들이 착용하는 챙이 넓은 붉은 모자.[2] 정교회 축일.[3] 가톨릭, 성공회, 루터교회 축일.[4] 라틴어로는 Agentes in rebus. 로마 제국 내 적들의 동선, 폭동, 예기치 못한 사고 등에 관한 정보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고위 관리에게 알리거나 도로와 우편 운송을 감독하는 직책이다.[5] 일부 전승에서는 나팔을 분 천사뿐만 아니라 다른 천사들도 나타나 성경에 몰두하지 않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심취한 히에로니무스를 꾸짖고 채찍질한 꿈이었다고 한다.[6] 코이네 그리스어로는 τὸ καθ' Ἑβραίους εὐαγγέλιον, 영어로는 Gospel of the Hebrews라고 하며,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에서 유대계 신자들이 사용한 복음서다.[7] 하지만 당시에는 불가타 성경을 두고 매우 부정적인 여론이 들끓었다. 위 각주에 나온 전설을 신봉한 나머지, 개인의 번역이 어떠한 귄위도 없다고 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예로니무스에게 편지를 여러 통 보내어 그의 불가타 번역을 비판했다[8] 출애굽기 34:39 - "... quod cornuta esset facies ..."(불가타), "... quod resplenderet cutis faciei suae ..."(노바 불가타), "... 자기 얼굴의 살결이 빛나게 된 것을 ..."(공동번역). 출애굽기 34:35 - "qui videbant faciem egredientis Mosi esse cornutam ..."(불가타) "Qui videbant cutem faciei Moysi resplendere ..."(노바 불가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쳐다보면 그 얼굴 살결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