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야마 신지로 桧山 進次郎 | Shinjiro Hiyama[1][2] | |
생년월일 | 1969년 7월 1일 ([age(1969-07-01)]세) |
출신지 |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원적 | 부산광역시 |
포지션 | 우익수, 1루수[3] |
투타 | 우투좌타 |
학력 | 헤이안 고교 - 토요대학 |
프로 입단 | 1991년 드래프트 4위 (한신) |
소속팀 | 한신 타이거스 (1992~2013) |
응원가 | 한신 시절[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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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신 타이거스 소속의 前 야구선수. 포지션은 우익수. 등번호는 24번.한신 타이거스에서 무려 22년 간 뛰며 외야수, 전문 대타로 활약하였다. 1990년대 중후반 한신 타이거스의 암흑기와 2000년대 암흑기 탈출 시기에 활약한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카네모토 토모아키와 함께 한신의 정신적 지주였다. 대타 시절엔 팀 선배 야기 히로시[5]의 뒤를 잇는 "대타의 신(代打の神様)으로 불리었으며, 유구의 젊은 호랑이(悠久の若虎) 등의 애칭으로 불리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국에선 재일 한국인 3세로 유명하기도 했으며, 선수 시절 내내 한국 국적을 유지 하기도 했다. 현재는 일본으로 귀화했다.
2. 프로 데뷔 이전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 고교를 거쳐 토요대학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 1987년 봉황대기에 재일동포 팀으로 출전한 바 있고, 대학 시절엔 통산 76시합 출장, 타율 .318[6], 13홈런 45타점을 기록하고 동도대학 리그 베스트나인에 3회 뽑혔다. 이후 1991년 드래프트 4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한다.3. 현역 시절
입단 후 3년간은 1, 2군을 오고가는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으나, 1995년 주전 우익수였던 카메야마 츠토무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그 틈을 타 1군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고, 선배 야기 히로시, 세키카와 코이치[7]와 비어있는 우익수 자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며 1군 시합에 계속해서 출장했다. 이듬해인 1996년에는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만족함과 동시에 주로 5번타자 - 좌익수로 출장해 22홈런을 쳤고, 그 다음 해인 1997년에는 4번타자 - 우익수로 출장하며 개인 최다인 23홈런 82타점을 기록하며 신죠 츠요시와 함께 한신 타선의 중심타자로써 뛰었다. 그러나 20+ 홈런을 기록하는 장타력에도 불구하고 2할대 초중반의 타율에 100개가 넘는 삼진을 기록하는 등, 함께 중심타선에 배치되었던 신조 츠요시와 함께 호쾌한 선풍기질을 즐기면서 당시 암흑기의 전성기를 누리던 한신의 부실한 득점력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1998년, 이해 시즌 우수신인상을 획득한 츠보이 토모치카에게 밀려 우익수 자리를 빼앗겼고, 이듬해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취임한 1999년엔 성적 부진으로 토니 타라스코 등에게 밀려 주전 자리를 빼앗기고 대타 요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2년간 절치부심하여 대타로 활약한 결과[8] 2001년에 토니 타라스코의 퇴단과 동시에 다시 주전 타자로 복귀했으며, 무리하게 장타를 노리지 않는 타격으로 개인 최초의 3할 타율을 달성함과 동시에 28경기 연속안타 기록도 달성하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이후 호시노 센이치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2년에도 5번타자 - 우익수로써 활약했으나 시즌 말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며 한신의 성적 하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시즌 종료 후엔 장타력으로 기대받던 우타자 유망주 하마나카 오사무의 대두와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4번타자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FA로 한신에 오면서, 이에 위기감을 느껴 주전 자리 구상에 대해 프런트에 질문했으나 확답이 없자 FA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타 구단의 오퍼도 없었고,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간곡하게 잔류를 요청했기에 결국 한신에 잔류하게 된다.
잔류 이후 첫 해인 2003년에는 이해 맹호타선(猛虎打線)으로 일컬어지는 한신의 강타선의 중심축[9]을 맡아 4번타자 - 우익수 또는 1루수로 활약하면서 이해 한신의 18년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에 대공헌하였다. 또한 이해 시즌 4월 10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서 통산 1000시합 출장, 4월 18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전에선 개인 첫 끝내기 홈런, 7월 2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서 사상 58명째, 기록으론 62번째의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는 등 개인 기록도 연달아 세웠으며, 일본시리즈에서도 비록 한신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혈투 끝에 패배했지만 히야마 본인은 5차전의 결승 적시타, 6차전의 홈런 등 좋은 모습을 보이며 우수선수상을 획득하는 등 본인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후 2004년에도 개인 최다 기록인 143안타, 2루타 26개, 타율 .306, 84타점(홈런은 18홈런), 장타율 .481[10]을 기록하며 활약했으나, 2005년에 개인 통산 1000안타, 150홈런을 기록했지만 기량의 하락이 보이면서 후반부에 타격력이 올랐긴 했지만 전년도보다 대폭 하락한 시즌 성적과 함께 주전에서 밀려났고, 이후로는 주로 대타로 출장하게 되었다.
이후 대타로 주로 출장하기 시작한 2006~2007년엔 1할대 타율의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2007년 이후 스윙을 짧게 바꾸는 등 전문 대타요원으로써 변신을 시도하였고, 2008년 (비록 규정타석 미만이었지만) 다시 타율 3할을 찍으면서 전문 대타요원 전환에 성공한다. 이해부터 한신 팬들에게 야기 히로시의 뒤를 잇는 "대타의 신(代打の神様)으로 정착하게 된다.
2007년 8월 21일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경기에서 대타 만루 홈런을 터뜨려 팀의 역전 승리에 공헌하는 장면.
이후로도 전문 대타로써 뛰며 팀을 지탱했고, 2010년 5월 18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전에서 구단 타이 기록인 대타 안타 108개를, 6월 4일 대 오릭스 버팔로즈 전에서 구단 신기록인 대타 안타 109개를 달성하였고, 이듬해인 2011년 5월 14일 대 주니치 드래곤즈 전에선 구단 신기록의 대타 홈런 14개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2011년 시즌 종료 후 본인의 공식 사이트에서 개최한 행사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수술을 받게 되었고, 이 때문에 2012년에는 부상의 영향으로 22타석 연속 무안타를 찍는 등 성적이 나빠졌다.
2013년엔 대타 타점 구단 신기록을 세움과 동시에 대타 통산 100타점, 155안타(센트럴리그 통산 2위)를 달성했지만, 1할대 타율로 떨어지는 등 전년도보다 더 부진해졌다.
결국 노쇠화를 더 이상 견딜수 없었는지 2013년 9월 7일,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10월 5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은퇴 경기를 가졌고,[11] 시합 종료 후 은퇴 세레머니에서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들과 함께 2차례의 리그 우승을 손에 넣었지만, 일본제일(일본시리즈 우승)은 아직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이 잊어버린 것(일본제일)을 언젠가 반드시 되찾기 위해 돌아오겠습니다. 그 땐 다시, 팬 여러분, 타이거스 구단의 여러분, 함께 싸웁시다. 정말로 저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23년간 정말 감사했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22年間の思いを込めて!」
「タイガースファンへの感謝を込めて!」
「打倒巨人への希望を込めて!」
「桧山進次郎の一振り!ライトスタンドへ消えた2ランホームラン!」
「だからタイガースファンはこの男を神様と呼んだ!」
「22년간의 기억을 담아!」
「타이거스 팬에 대한 감사를 담아!」
「타도 교진을 향한 희망을 담아 쏘아올린!」
「히야마 신지로의 한방! 우측 스탠드로 사라진 투런 홈런!」
「이렇기에 타이거스 팬들은 이 남자를 (대타의) 신이라 불렀습니다!」
이후에도 클라이맥스 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어 대타로 출장하였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선 1차전에서 7회 말 1사 1, 2루 상황에서 대타 출장해 유격수 플라이에 그쳤지만, 이어지는 2차전에서 7-2(5점차)로 뒤진 9회말 2아웃 1루 상황에서 대타로 등장,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마무리 투수 캄 미콜리오를 상대로 추격의 투런 홈런을 쳤다.[12] 하지만 다음 타자 아라이 타카히로가 삼진으로 아웃당하며 한신은 CS를 탈락했고, 이것이 히야마의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タイガースファンへの感謝を込めて!」
「打倒巨人への希望を込めて!」
「桧山進次郎の一振り!ライトスタンドへ消えた2ランホームラン!」
「だからタイガースファンはこの男を神様と呼んだ!」
「22년간의 기억을 담아!」
「타이거스 팬에 대한 감사를 담아!」
「타도 교진을 향한 희망을 담아 쏘아올린!」
「히야마 신지로의 한방! 우측 스탠드로 사라진 투런 홈런!」
「이렇기에 타이거스 팬들은 이 남자를 (대타의) 신이라 불렀습니다!」
통산성적은 1959시합 출장, 4863타수 1263안타, 159홈런[13] 707타점 41도루, 13희생타, 46희생플라이, 541사사구, 1100삼진, 타율 .260이다.
은퇴 뒤엔 호리프로에 입사해 야구 해설자로 활동 중이다.
4. 응원가
입단 초부터 쓰이던 현역 시절의 응원가는 한신 역사상 최고의 응원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2005년에 저작권 문제 등을 이유로 한신 선수들의 응원가가 대거 바뀌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도 바뀌지 않고 남아있던 2개의 응원가 중 하나가 바로 이 히야마의 응원가였을 정도로[14] 매우 오랫동안 쓰인 응원가다. この一打にかけろ 気合いで振り抜けよ 이 한방에 걸어라 기합으로 휘둘러라 誰もおまえを止められぬ 桧山よ突っ走れ 누구도 널 멈출 수 없다 히야마여 질주하라 |
5. 기타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뒤늦게 기량을 만개하고 철인의 이미지를 굳힌것에 반해 히야마는 카네모토가 한신에 입단한 2003년 이후를 기점으로 기량이 점점 떨어졌으나, 대타로 다시 기사회생해 국내 모 구단만큼 화끈한 투자를 하는 한신에서 질긴 선수생활을 이어가면서 엄청난 생존본능을 보여주었다.저서로는 "生え抜き タイガースから教わったこと"('평생을 함께 한(본토박이) 타이거즈로부터 배운 것')가 있다..
현역시절 그것이 알고싶다나 허구연이 출연한 EBS 다큐멘터리 '불멸의 전설, 재일동포 야구단' 등 한국 언론과도 상당히 자주 인터뷰를 했다.
위에 서술되어있듯이 재일 한국인 3세(한국명 황진환) 출신으로, 2016년 3월 3일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가 2016년 3월 4일 일본으로 귀화했다.[15]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6. 관련 문서
[1] 이 이름은 귀화 전부터 통명으로 쓰던 이름이기도 하다.[2] 귀화 전 한국명은 황진환(黄進煥).[3] 입단 1년차엔 내야수로 등록되어 있었으나, 초창기부터 선수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외야수를 맡았다. 주로 맡은 위치는 우익수.[4] この一打にかけろ 気合いで振り抜けよ 誰もおまえを止められぬ 桧山よ突っ走れ (이 한방에 걸어라 기합으로 휘둘러라 누구도 널 멈출 수 없다 히야마여 달려라)[5] 90년대 초반 한신의 주전 3루수를 맡았다. 이후 후배 선수들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었지만 전문 대타로 변신해 맹활약하며 2004년까지 한신에서 뛰었다.[6] 261타수 83안타[7] 한신에서 외야수, 포수로 뛰었으며, 1998년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해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의 한국인 3총사와 함께 1999년 주니치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2005년 새로 창단한 라쿠텐 이글스로 이적하여 3년간 뛴 후 은퇴했다.[8] 근데 정작 이때도 타율은 2할대 초중반이었다(...)[9] 2003년 한신 주전 라인업엔 이마오카 마코토(2루수)-아카호시 노리히로(중견수)-카네모토 토모아키(좌익수)-히야마 신지로(우익수)-조지 아리아스(1루수)-카타오카 아츠시(3루수)-야노 아키히로(포수)-후지모토 아츠시(유격수)-투수. 대타 요원으로 야기 히로시, 세키모토 켄타로 등이 있었다.[10] 정확히는 1994년 기록한 .500이 최고기록이지만 이해는 타석수가 고작 36타석이라 제외.[11] 다만 이날 시합에선 3타수 무안타로 그치며 8회에 교최되었다.[12] 이 기록은 2003년 일본시리즈에서 당시 함께 한신에서 뛰던 히로사와 카츠미의 포스트시즌 최고연령 홈런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2003년 당시 히로사와는 41세, 2013년의 히야마는 44세)[13] 이승엽의 일본 통산 홈런 하고 같은 수치다.[14] 나머지 하나는 포수 야노 아키히로의 응원가. 근데 이 야노의 응원가는 2004년에 만들었던 것이라 1년만에 바꾸는 게 무리긴 했다. 사실상 바뀌지 않은 건 히야마의 응원가뿐인 셈.[15] 일본 국립 인쇄국에서 발행하는 일본 관보 본지 제6728호에 고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