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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7:43:53

표트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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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러시아 제국 제7대 황제
표트르 3세
Пётр I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ronation_portrait_of_Peter_III_of_Russia_-1761.jpg
출생 1728년 2월 21일
홀슈타인 공국
(現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
사망 1762년 7월 17일 (향년 34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현 페테르고프구 로프샤읍 로프샤 궁전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레닌그라드주 로모노소프군 로프샤 궁전)
묘소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재위기간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1739년 6월 18일 ~ 1762년 7월 9일
전러시아의 황제
1762년 1월 5일 ~ 1762년 7월 9일
서명
파일:표트르 3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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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가문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가문
이름 독일어: 카를 페터 울리히
(Karl Peter Ulrich)
러시아어: 표트르 표도로비치 로마노프
(Пётр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
아버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어머니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
형제자매 없음
배우자 예카테리나 2세 (1745년 결혼)
자녀 파벨 1세, 안나
종교 러시아 정교회 }}}}}}}}}

1. 개요2. 생애
2.1. 가문2.2. 유년기
2.2.1. 포츠담에서 거주2.2.2. 러시아 제국의 후계자로 지목2.2.3. 조피 프리데리케 아우구스테와 결혼
2.3. 황태자 시절2.4. 즉위2.5. 폐위와 의문사
3. 기타4. 대중매체에서5. 가족관계
5.1. 조상5.2. 자녀

[clearfix]

1. 개요

One of the most peculiar cases of the right man at the right time was Peter III of Russia. An ardent admirer of Prussian militarism and Frederick the Great, he became tsar just in time to take Russia out of the coalition against Frederick at the moment when the latter was facing catastrophe. Peter III, soon thereafter killed, was on the throne just long enough to save Prussian militarism. A nincompoop himself, a man who certainly had no conception of the importance of his act, he nevertheless indirectly played an important part in the molding of modern Europe.
역사를 바꿨다고 볼 만한 사람들 중 가장 기묘한 케이스는 러시아의 표트르 3세다.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열성적인 팬으로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7년 전쟁에서 재앙을 맞이하는 도중 딱 맞는 시간대에 즉위해서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교전을 중단시켰다. 표트르 3세는 곧 죽임을 당했지만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구할만큼 적절한 기간 동안 즉위해 있었다. 멍청이[1]답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고, 본의 아니게 현대 유럽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역사의 서문』 칼 G. 구스타브손(Carl G. Gustavson). 해당 글귀는 구스타브손 교수의 역사 입문서 『역사의 서문(A Preface to History)』에 있는, 영웅론에 대한 반박 중 일부분이다. 참고로 함께 언급되는 인물들은 윈스턴 처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표트르 1세, 프리드리히 2세 같은 당대의 쟁쟁한 거인들 뿐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은 모두 하나씩 이유를 붙여서 역사의 흐름에 있어 이들의 영웅적인 재능 하나가 역사를 뒤바꾼 게 아니라는 점을 피력하는데 표트르 3세는 케이스가 하도 황당해서 그런지 멍청이라 의도가 없었다는 식으로 그냥 퉁치는 느낌이 강하다.
러시아 제국황제.

재위 기간은 극히 짧고 업적이랄 것도 없으며 다 이긴 전쟁을 프로이센에 대한 본인의 사적인 호감 하나만으로 망쳐 자국에 큰 피해를 끼친 암군으로 유명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방면에서 역사에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

2. 생애

2.1. 가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Haus Holstein-Gottorp)은 덴마크 올덴부르크 왕조의 방계 가문으로[2] 유럽내 왕족과 대등한 결혼이 가능한 집안이었다. 혈통으로 보면 어머니 안나 페트로브나는 표트르 대제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고, 아버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3]스웨덴과 덴마크 왕실과 혈연이 있었다. 다만 카를 프리드리히는 러시아의 힘을 빌어 스웨덴 왕위를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정략결혼을 했던지라 안나와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2.2. 유년기

어머니는 그를 낳고 곧 사망했고 10살을 갓 넘겼을 때 부친을 잃고 작위를 이어받아 홀슈타인 공작이 되었다. 그런데 작위는 거의 명목상 작위로 선대때 본가인 덴마크에게 거의 대부분 뺏겼고 여러곳을 유랑하며 살아 불우했다. 사실 남은 영토도 어린 시절 유랑할 때 거의 다 뺏겼다.

2.2.1. 포츠담에서 거주

거의 망국의 왕자나 다름없었지만 스웨덴과 러시아 양쪽의 유력 계승자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결국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2세가 거둬줘서 12세까지 베를린 근처 포츠담에서 살았다. 프리드리히 2세가 먼치킨인지라 생전에도 빠가 넘쳐나서 주목받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런 개인적 관계도 후술할 내용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2.2.2. 러시아 제국의 후계자로 지목

선대가 스웨덴 왕실 혈통이 있었기 때문에 스웨덴 왕위 계승자 후보로도 꼽혔지만,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표트르 대제의 혈통에 매우 집착한 이모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독신이었던 관계로 어린 나이 때부터 신체적 정신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1742년 후계자로 낙점받았다.

같은 해 스웨덴 의회도 '카를 울리히'를 스웨덴의 왕위계승자로 선언했지만 옐리자베타 여제의 압력에 굴복한 스웨덴[4]은 카를 울리히를 포기하고 그의 5촌인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아돌프 프리드리히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했다.

1742년 11월에 정식으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표트르 표도로비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2.2.3. 조피 프리데리케 아우구스테와 결혼

이모이자 양어머니인 옐리자베타의 뜻에 따라 같은 독일계인 안할트조피 프리데리케와 결혼했다. 이 둘은 6촌인데다가 근친혼의 영향으로 혈연상 가까워서[5] 가족처럼 서로를 잘 봐줄거라 기대한 옐리자베타가 조피를 며느리로 낙점했다. 표트르와 혼인해 러시아 황가의 일원이 된 조피 프리데리케는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개명했다.

2.3. 황태자 시절

같은 독일 출신인 조피 프리데리케는 표트르와 결혼하자마자 스스로 러시아어를 배우고 종교도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거나 이름도 러시아식인 예카테리나로 개명하는 등 스스로 러시아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면을 보여주어 귀족들과 황실 근위대의 호감을 샀다. 반면 제위 계승자인 표트르는 프로이센 궁정 시절의 영향에다 당시 유럽 젊은이들의 우상 프리드리히 2세의 열광적인 추종자라 프로이센 특유의 군대 문화에 빠져있었다. 러시아로 오기 전 스웨덴 출신이었던 표트르의 가정교사가 천박한 또라이여서 양육 과정에서 받은 학대로, 안 그래도 허약하던 신체적, 정신적 상태는 더 심해졌다. 나이에 안 맞는 유아틱한 병정 놀이, 장난감 등에나 빠지고 표트르의 지적 수준으론 도저히 새로운 학습이 어려워서 러시아어를 배우다 싫증을 내고 때려쳐버렸다. 사실 이 정도면 그러려니 하는데 정신연령이 현재 추산하기론 초등학생 수준이라서 괴상한 장난을 많이 치고 유치한 짓으로 곧 러시아의 귀족들은 물론 외교관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후계자를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옐리자베타가 워낙 표트르 1세의 혈통에 집착하여 후계자 변경 건의는 일절, 완전히 무시했다.

무엇보다 러시아에 적응하고 있었던 아내와 크게 충돌하여 부부관계도 소원해졌다. 표트르 3세 사후, "사실 그는 고자였다!"부터 시작해서 지적장애나 반미치광이 등 온갖 유언비어가 돌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그의 정신적 문제로 지적인 수준이 낮은 건 맞는데 병크섞인 일화 등은 예카테리나 2세 시절 많이 왜곡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표트르도 자신과 지적수준이 비슷한 애첩을 총애해서 대놓고 바람을 피는 등 고자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표트르 1세 혈통에 집착한 옐리자베타 여제마저 파벨이 태어난 직후 부모에게서 빼앗아 키우면서 장성하면 표트르 대신 후계자로 세우려고 했을 정도였다. 예카테리나의 친정 어머니도 표트르처럼 어리석어서 처음에는 같이 욕을 퍼먹다가 결국 예카테리나의 묵인으로 어머니를 러시아 궁정에서 추방하는 병크도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러시아인이라 정의하고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도 많이 한 예카테리나에게 신하들의 지지가 더 많이 몰릴 정도였다. 파벨 출산 후 그녀도 여러 남자를 끌어들였지만 러시아 궁정은 원래 문란해서 애첩 두는 정도는 워낙에 흔한 일이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행각도 허물이 될 일은 아니었다.

둘 사이는 결혼 초반을 제외하고 곧 냉랭해졌는데 장자 파벨은 어쨌든 일단 둘 사이의 자식으로 인정받았다. 서로 바람피웠다는 식으로 친아버지가 표트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있지만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다.[6] 이런 소문이 났던 건 표트르가 예카테리나를 죽이려고 여러번 간통 구실 드립을 쳤기 때문인데 러시아 귀족들은 물론 홀슈타인에서 데려온 신하들조차 그건 좀 아니라고 표트르를 말렸다.

사실 아들인 파벨 1세를 보면 표트르 3세와 외모가 붕어빵이기 때문에 친아버지가 맞다는 의견이 주류. 표트르의 아버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3세', 파벨 1세를 보면 진짜 못생긴 게 3대가 붕어빵이다.

7년 전쟁 시기 러시아 제국군은 적 프로이센군과 싸우는데 어려움 뿐만 아니라 궁정 눈치보기도 바빴는데 당시 차르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현재 백혈병으로 추정되는 불치병으로 전쟁 초반부터 건강상태가 심각했고, 표트르는 대놓고 친프로이센이라 장군들은 이겨도 속이 타는 판국이었다.

그렇다고 못 싸운건 아니어서 역시 많은 피해를 입긴 했지만 동프로이센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프로이센군오데르강까지 밀어붙이는데 성공했다. 다만 보급 한계로 인해 결정적인 승리는 거두지 못했는데...

2.4. 즉위

이전 표트르는 7년 전쟁 중 자기 입으로 적국인 프로이센에게 군사기밀을 넘기겠다는 등의 실언을 여러 차례 하면서 민심까지 잃어버렸다.

여하간 1761년 12월 25일,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자 표트르 3세가 러시아 제국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그는 즉위한 직후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그만둔다는 폭탄 선언을 내뱉었다. 7년 전쟁 문서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 시점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프랑스-스웨덴으로 연결되는 4국 동맹은 독일 지역 지상전에서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었다.[7] 프로이센의 최대 요새인 콜베르크[8]러시아 제국군에게 함락되었고, 영국은 지상전에서 프로이센에 현금 지원을 하다 그마저도 끊긴 지라[9] 러시아 제국군의 우세가 여전했다.

워낙 전쟁사에 황당하고 전무후무한 일이며, 심지어 표트르 3세는 단순히 전쟁을 중단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프로이센에 2만명에 달하는 지원군까지 보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이전까지 서유럽에서는 그저 표트르 3세의 빠심으로 항복 받아낼 일만 남은 전쟁을 엎었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것은 러시아 쪽 연구를 무시한 사례에 불과하다. 일단 러시아 제국군의 보급선이 매우 길어서 전쟁 초기에는 이겨도 후퇴한게 옳았다는 판단이고 1760년 러시아 제국군이 베를린을 함락하긴 했는데 역시 후방위협 때문에 금방 후퇴했다. 정확히는 베를린 시장에게서 사례금을 받고 약탈은 면제했다. 대신 호엔촐레른 가문의 별궁이 모여있는 포츠담은 베를린의 바깥이므로 철저히 약탈했으나 왕족들은 미리 소식을 듣고 피신해서 잡지 못했다.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병력을 갈아가면서 버티는 것보단 차라리 살은 내주고 뼈를 취하는 식으로 땅을 내주더라도 방어 병력을 온존하는 것을 선호해 아까운 병력을 수비에 쓰지 않았고, 1760년 수도 브란덴부르크까지 몰리며 외견상으로는 상황이 최악이긴 했는데 1761년엔 오스트리아군을 조금씩 밀어내서 조금 호전되는 추세였다.

프랑스는 영국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각축을 벌이느라 유럽 지상전에서 로스바흐 전투 후에 거의 제2차 세계 대전 마냥 도움이 안됐고, 스웨덴도 전쟁 후반 소극적인건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 역시 프로이센처럼 많은 손해가 누적되어서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10]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옐리자베타가 죽어가던 당시엔 슐레지엔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협상으로, 동맹이 성사되어서 봄이 되면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를 공격할거란 희망에 호기를 부렸다. 그러나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 문서에도 나오지만 결국 프로이센은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조너선 듈(Jonathan Dull)과 같은 근대사학자들의 최근 견해에 따르면, 표트르 3세가 외교상으로는 실용적인 판단을 했다는 견해가 중론이다. 1762년 러시아가 패색이 짙어진 프로이센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을 계속 유지했을 경우엔 프로이센이 완전히 패망할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이렇게 되면 프로이센은 당시 폴란드처럼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영토가 분할당해 과거의 패권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프로이센이 몰락한다는 것은 곧 중부유럽에서 오스트리아가 단일 강국으로 부상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것은 더 나아가 유럽 대륙의 힘의 균형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문제가 되었다. 또한, 러시아 역시 비대해진 유럽 영토를 노리는 오스트리아-프랑스를 비롯한 중서부 유럽 세력과 각축전을 벌여야 하는데다, 비록 결과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지만, 당시엔 그것을 몰랐을테니 오스만 제국의 참전도 경계할 필요성이 높았다.

즉, 현대인들의 시각과 달리 당시 러시아 역시 공세종말점에 가깝게 슬슬 전쟁에서 발을 뺄 빌미를 마련해두는게 좋은 시기가 딱 표트르 3세의 제위 시기였던 셈이다. 계속 전쟁을 수행할 경우엔 프로이센 멸망은 기정사실이나, 이미 부동항 지역을 얻은 러시아 입장에선 굳이 병력을 더 진군시켜 프로이센을 멸망시켜봐야 추가로 이득이 될게 전혀 없는걸 넘어, 오히려 합스부르크 제국의 강성화만 도와주는 죽 쒀서 개주는 헛짓거리에 불과했고, 오히려 그렇게 군을 진주시키면 병력을 온존한 프로이센 왕국의 거센 반격에 시간이 끌리다가 이를 보고 결심을 굳힌 오스만 제국이 뒤통수라도 갈겼다면 러시아 입장에서도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어마어마한 출혈이 강요됐을게 뻔한 만큼, 러시아 입장에서도 슬슬 전쟁에서 발을 빼는게 좋을 시기에 도달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표트르 3세는 러시아군이 직접 베를린까지 진격하는 것보다는 콜베르크와 같은 북독일의 거점만을 장악해 중부 유럽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면서도, 프로이센의 패권은 어느 정도 유지시켜 오스트리아가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중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표트르 3세가 왜 희대의 등신이라는 평가를 받는가 하면, 후술하듯이 프로이센과의 전쟁만 그치고 러시아가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걸 정말 프로이센에 대한 우호심 하나만으로 거의 100% 확률로 얻을 수 있는 국익은 물론 이미 벌어놓은 국익까지 죄다 걷어찬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장기화된 상황에서 마침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으니 전쟁에서 빠질 핑계로는 충분했다. 문제는 협상의 내용이 패전국이나 내걸 법한 조건이었다. 사실 옐리자베타 시절에도 러시아는 7년 전쟁에서 이겨봐야 얻을 게 별로 없다는 이유로 개전 초에 내부에서 반대가 상당했고 러시아도 참전했을 때 많은 병력과 자원을 투입했기 때문에 계속 전쟁을 수행한 것인데, 문제는 표트르 3세가 그동안 점령한 영토를 배상금도 안받고 돌려주고 병력까지 대여해줄 것을 제의한 것이다. 수세에 몰린 채 힘겹게 버텨나가던 프리드리히 2세가 이게 웬 떡이냐하고 이 제의를 받아들인 건 당연지사. 가장 체급이 컸던 러시아가 물러나자 스웨덴도 판세가 나가리가 된 걸 보고 프로이센과 강화했다.[11] 이러한 황제의 독단적인 결정은 귀족들과 군인들의 반발을 크게 불러왔다.

만약 황제 개인으로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호감을 표하고 싶었다면, 점령한 영토는 챙기고 불가침조약 및 병력과 자금만 지원해주는 정도로도 자살을 고민하던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충분했으며, 프로이센을 합스부르크 제국을 견제할 체급을 유지시킬 것이었다면 최소한 콜베르크를 비롯한 폴란드 지역 연안은 그대로 장악하고, 베를린을 비롯한 독일 지역 땅을 돌려주는 대가로 전후에 갚도록 배상금을 짊어지게 해서 프로이센을 제어할 목줄을 채워두기만 했어도 어마어마한 이득이었을 것이다. 혹은 프로이센이 향후 이 땅을 재점령할걸 우려했다면 아예 전 영토를 돌려주는 대신에 대량의 배상금을 짊어지게 한 후, 이 배상금을 빌미로 강제 동맹 존속을 비롯한 각종 이권을 뜯어내는 것도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충분히 러시아가 이득을 볼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한데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조약을 걸고 냅다 튀어버렸으니 러시아는 진정한 의미로 힘만 들이고 얻은 건 하나 없는 희대의 등신 짓을 하게 된 셈이다.

거기다 표트르 3세는 러시아 정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성직자들에게 개신교의 목사들처럼 하고 다닐 것을 강요하는 등 국가 권력의 중요한 축인 교회마저 적으로 돌려버렸으니 실각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거기에 농노들이 전쟁으로 인한 징병과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키자 표트르 3세는 전통적인 귀족의 권리를 지키시겠다고 그들을 잔혹하게 진압한 것은 덤이었다. 어찌보면 귀족들과 성직자들에게는 독일식 근대 궁정문화를 강요해서 불만을 샀으면서 백성들에게는 누구보다도 봉건 러시아 귀족스러운 짓을 저질렀다고 볼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러시아의 모든 군인들과 평민들, 귀족들, 성직자들은 모두 멍청한 황제에게 분노했고 심지어 멍청한 남편과 달리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어를 배우는 등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서 러시아 귀족들의 호감을 사고 있던 프로이센 출신인 아내(훗날 예카테리나 2세) 또한 분노했다.

2.5. 폐위와 의문사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틈을 타 근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아내인 예카테리나 2세가 주도했다는 설이 있는데 예카테리나의 역할이 별로 크지 않았다는 설이 새로 제기되고 있다. 근위대가 왜 반란을 일으켰냐면 표트르 3세는 고위 귀족자제들이 주축인 근위대를 홀대하고, 홀슈타인 출신 떨거지 양아치들을 데려와서 근위대 대신 자신의 호위병력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양아치 호위대들이 쓸모가 있었냐면 그것도 아니고, 주색잡기나 하는 잉여들이라 이들의 비행까지 합쳐져서 귀족들은 물론 평민들에게도 반감을 크게 사면서 민심은 완전히 떠났다. 근위대의 반란에 표트르 3세는 해군 기지로 피신했으나 해군 장교들도 평소에 표트르 3세를 증오하는 터라 오히려 그를 감금한다.

감금된 표트르 3세에게 귀족들이 찾아와 황제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퇴위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고 겁에 질린 표트르 3세는 이에 서명하면서 공식적으로 폐위당했다.

그 전에 표트르 3세는 공식 자리에서 아내 면전에다 대고, 모두가 듣는 데서 자식이 있긴 한데 '다들' 내 자식은 아니거든? 이런 취지의 드립을 쳤다고 한다. 예카테리나는 태연하게 침묵을 지켰지만 이후 사태는 모두가 아는대로.

실각한 표트르 3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0베르스타[12] 떨어진 로프샤 궁전에 유폐되었다가[13] 얼마 지나지 않아 급사했는데, 공식 사인은 복통으로 인한 출혈로 급사라고는 하지만 정황을 봐선 독극물에 의한 암살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폐위된 군주가 살아있으면 현재 군주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니. 물론 그 폐위된 군주를 섬기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말이다.

부인 조피가 예카테리나 2세로 차리나에 즉위했지만, 권력기반이 전무한지라 기득권층인 귀족들에게 이권을 퍼주는 식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전근대적인 농노제가 오히려 강화되면서 전제군주제에서 벗어나서 서유럽처럼 근대적 개혁을 통해서 한단계 도약할 기회를 상실하였다. 문제는 그러고도 재위 중 푸가초프의 난이 일어난데다가,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어 훗날 프로이센을 적대하지 않고 폴란드를 분할해야 했다.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표트르 3세
(Peter III))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Charles Frederick, Duke of Holstein-Gottorp)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리드리히 4세
(Frederick IV, Duke of Holstein-Gottorp)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
(Christian Albert, Duke of Holstein-Gottorp)
덴마크의 프레데리케 아말리 공주[17]
(Princess Frederica Amalia of Denmark)
스웨덴의 헤드비그 소피아 공주
(Princess Hedvig Sophia of Sweden)
칼 11세
(Charles XI)
덴마크의 울리케 엘레오노레 공주[18]
(Princess Ulrika Eleonora of Denmark)
러시아의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nna Petrovna of Russia)
표트르 1세
(Peter I)
알렉세이
(Alexis)
나탈리야 키릴로브나 나리쉬키나
(Natalya Kirillovna Naryshkina)
예카테리나 1세
(Catherine I)
사무엘 스코프론스키
(Samuel Skowroński)
엘리자베트 모리츠
(Elisabeth Moritz)

5.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파벨 1세
(Paul I)
1754년 10월 1일 1801년 3월 24일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 루이제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슬하 4남 6녀[19]
1녀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nna Petrovna)
1757년 12월 9일 1759년 3월 8일

부부간의 냉담한 관계 때문인지, 신체적 문제 때문인지 결혼 9년만인 1754년이 되어서야 장남 파벨 1세가 태어났다. 장녀인 안나는 생후 1년 3개월 만에 요절했으니 파벨 1세가 사실상 유일한 자녀다.[20]

[1] 원문에서는 'nincompoop'. ###[2] 시조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세의 3남 아돌프, 표트르 3세는 아돌프의 6대손이다.[3] Karl Friedrich von Holstein-Gottorp 1700~1739. 스웨덴 국왕 칼 11세의 외손자로, 원래는 이모인 울리카 엘레오노라보다도 왕위계승권이 앞섰지만,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왕권을 제한하는 조건으로 스웨덴 의회와 협력하며 조카를 밀어내고 스웨덴 왕위를 계승했다. 여기에는 카를 프리드리히의 외증조모이자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할머니인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드비히 엘레오노라(Hedwig Eleonora von Holstein-Gottorp 1636~1715)가 어린시절 양친을 잃은 카를 프리드리히를 너무 오냐오냐하며 응석받이로 키워 카를 프리드리히가 오만방자한 성격을 지녔던 것도 원인이 있었다.[4] 1721년 뉘스타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스웨덴은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잉에르만란드, 비보리와 켁스홀름(Kexholm)을 포함한 카리알라의 일부를 러시아에 할양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스웨덴 내정에 간섭할 권리를 허용하게 되었다. 이는 1790년 구스타브 3세와 예카테리나 2세가 베렐레 조약을 체결하면서 철폐되었다.[5] 둘의 증조할아버지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Christian Albrecht von Schleswig-Holstein-Gottorf 1641~1698)로 같다.[6] 예카테리나의 다른 자식, 딸 하나는 친부를 놓고 의견이 갈리며 마지막 낳은 아들은 사생아라 백작 작위만 주었다.[7] 프랑스는 사실 전쟁초반 독일 전역에서 로스바흐에서 참패하고 주전장을 식민지로 시선을 돌렸으나 캐나다, 인도 등지에서 영국에 완전 발렸다.[8] 현재의 폴란드 코워브제크(Kołobrzeg). 이곳은 단순히 최대 요새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왜냐하면 힌터포메른의 유일한 항구 도시였기 때문이다. 러시아 제국군의 최대 약점은 보급로가 너무나 길다는 것인데, 항구도시를 점령하면 해상으로 빠르고 대규모의 배급이 가능해져 보급 문제가 해결된다.[9] 영국이 유럽 지상전에 나서지 않은건 아니다. 조지 2세의 3남 컴벌랜드 공작에게 원정군을 맡겼다가 실패하자 친척이자 프로이센군의 장성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에게 영국군을 맡기기도 했다. 친척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국과 헤센카셀 방백국도 프로이센-하노버-영국의 동맹이었다.[10] 당시 오스트리아는 제6차 러시아-튀르크 전쟁(러시아 제국과 함께 참전)-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7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전쟁으로 재정이 파산 직전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동맹국인 러시아의 보급까지 책임져야 했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로 파견온 러시아 제국군이 본국이 워낙 멀어서 항상 보급 문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7년 전쟁 말기에는 재정이 나빠진 오스트리아가 러시아 제국군에게 보급을 제대로 못해주면서 러시아 제국군이 항의하여 보급 지원 문제로 러시아 장교들과 오스트리아 간의 갈등도 심해졌다.[11] 스웨덴 왕비 프로이센의 루이제 울리케 공주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여동생인 영향도 있었다.[12] 제정 러시아 시절의 길이(거리) 단위로 1베르스타는 야드파운드법으로는 3500피트, SI 단위계로는 1.0668㎞에 해당한다.[13] 이때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한테 선물로 애견과 바이올린, 그리고 침대를 감옥에 넣어주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표트르 3세가 곧바로 사망했으니 별로 사용하지도 못했지만.[14] 표트르 3세 - 파벨 1세 - 니콜라이 1세 - 알렉산드르 2세 - 알렉산드르 3세 - 니콜라이 2세로 이어지는 황제 계보가 바로 표트르 3세의 직계다.[15] 남편 파벨 1세보다 키가 훨씬 컸다고 한다.[16] 이걸 반대로 말하면 적국인 독일 입장에서 표트르 3세는 대체 불가능한 요소가 매우 극단적이면서 긍정적으로 작용한 인물이다. 실제로 독일에서는 그가 집권한 덕분에 지고 있었던 7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걸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이라고 부른다.[17] 프레데리크 3세의 차녀.[18] 프레데리크 3세의 4녀다.[19]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오스트리아의 알렉산드라 대공비,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비 헬레나,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비 마리아, 뷔르템베르크의 왕비 카타리나, 네덜란드의 왕비 아나, 니콜라이 1세[20] 반면 아내 예카테리나 2세는 그를 유폐시키고 제위에 오른 뒤 수많은 남첩들을 두었고 사생아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