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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팔미라 유적†[1] |
영어 | Site of Palmyra | |
아랍어 | موقع تدمر | |
프랑스어 | Site de Palmyre | |
국가·위치 | 시리아 홈스 주 타드모르 | |
등재 유형 | 문화유산 | |
등재 연도 | 1980년 | |
등재 기준 | (i)[2], (ii)[3], (iv)[4] | |
지정 번호 | 23 |
- 팔미라어: 𐡕𐡃𐡌𐡅𐡓 (Tadmor)
- 아람어: ܬܕܡܘܪܬܐ (Tedmurtā)
- 고전 그리스어: Παλμύρα (Palmýra)
- 아랍어: تَدْمُر (Tadmur)
- 라틴어: Palmy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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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리아 홈스 주에 위치한 고대 오아시스 도시.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서 북동쪽으로 214km 떨어진 시리아 사막에 위치하고 있다.팔미라는 북쪽으로는 산맥을 등지고 동쪽과 남쪽은 사막이 펼쳐진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실크로드에 위치한 중계도시 중 하나였는데, 20세기 초엽 이곳에서 발견된 한금[5]이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실크로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계속된 연구로 단순히 중국산 비단같은 동서양의 사치재 중계 무역만 했던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비단, 울, 면직물 같은 원단류도 생산하고, 대추야자 같은 관개농업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고대 팔미라어/현재 아랍어의 지명은 각각 '타드모르'와 '타드무르'[6]로 와디와 오아시스 덕분에 관개농업이 발달하여 발굴된 유물로 추정하면 신석기 시대부터 군락을 이루며 산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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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실질적으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청동기 시대로서 이미 아시리아 때부터 지중해 쪽으로 나가기 위한 무역의 중계 도시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이는 에마르에서 발견된 점토에서도 '2명의 타드모르인을 증인으로 삼았다'라는 기록과 아시리아의 왕 티그라트- 필레세르1세가 '타드모르의 아람인을 복속시켰다'라는 기록으로 확인이 가능하다.현지인들의 무역 거래장에 불과했던 팔미라는 헬레니즘 제국 시절인 기원전 217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치하에 들어가면서 역시 이 도시의 지리적 이점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팔미라 유적지인 벨 신전, '무덤의 계곡'에 건설된 묘탑 등이 건설된 것도 이 시기의 건축뿐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시리아의 토착적인 문화와 그리스 문화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문화가 결합한 독특한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기원전 62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셀레우코스 왕조를 병합하면서 시리아 속주를 만들었지만, 팔미라는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며 여전히 정치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지역으로서 남게 되었다. 기원전 41년 두 세력 사이에서 물타기를 하는 팔미라에 대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자신의 기사들에게 이익을 나누어 주기 위해' 이 도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미 그가 온다는 소식을 알고있던 시민들은 전 재산을 싸들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파르티아로 도망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안토니우스를 맞이한 것은 아무것도 안 남은 텅 빈 도시뿐이었고, 결국 빈손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서기 1세기 티베리우스 대에 이르러서야 시리아 속주의 도시로서 로마 제국에 편입이 된다.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로마의 영향력은 적었지만 파르티아와 친선을 맺으려던 게르마니쿠스가 이 지역 인사를 사절단으로 보내고 로마의 제10프레텐시스 군단이 들어오고 세금 징수원들이 거주하게 되는 등 차츰 로마의 도시로 바뀌게 된다. 로마의 지배로 인해 이 지역은 점점 안정되면서 일대의 무역을 지배해 나갔으며, 특히 로마의 페트라 정복 이후에는 아라비아 반도의 무역 루트가 전부 팔미라 쪽으로 바뀌게 되면서 급성장을 하게 된다.
서기 129년에 로마 제국의 전역을 돌고 있던 하드리아누스가 이 도시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하드리아네 팔미라'로 불리며 자유도시로 선포되었으며, 이때 그리스 문화들이 대거 확산되었다. 카라칼라에 이르러서는 식민시로 또 다시 승격하게 된다. 이는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전쟁, 그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대상들을 습격하는 비적들의 증가에 따라 팔미라가 자체적으로 군대를 키우기 시작함으로써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을 담당하는 일부로서 그 중요도가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었다.
3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 혼란과 사산 왕조의 증흥으로 팔미라의 무역로는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샤푸르 1세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붙잡은 기세를 몰아 팔미라까지 공격했지만 당시 팔미라의 지배자였던 오다에나투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으며 결국 샤푸르는 철수를 하게 되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황제 갈리에누스를 지지하며 이러한 공적을 인정 받아 오다에나투스는 갈리에누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받으며 동방 속주의 방위까지 담당하게 된다.
샤푸르 1세를 격퇴한 오다에나투스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을 받아 '동방의 수호자'라는 호칭을 얻고 스스로 팔미라 왕에 오른다. 그러던 와중 262년 아나톨리아 원정이 끝난 후 오다에나투스는 그의 첫째 아들이자 공동 통치자인 하이란 1세와 함께 암살당하게 되고 이후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제노비아가 아들 바발라투스를 왕위에 올리고 섭정으로서 팔미라를 통치하게 된다.
3. 팔미라 제국
자세한 내용은 팔미라 제국 문서 참고하십시오.4. 팔미라 주요 유적
- 벨 신전
팔미라의 대열주 거리의 오른쪽 끝에 있으며 이 지역에서 숭배되었던 벨(바알 혹은 마르두크)을 중심으로 태양신 야르히볼과 달의 신 아그리볼과 같이 모셔 놓은 신전으로 로마 시대 이전에 세워졌지만, 서기 32년에 와서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아시아와 그리스-로마 양식이 섞인 건물로 메인 신전의 북동쪽에는 황도 12궁이 새겨진 지붕으로 덮인 지성소가 있으며, 이 신전을 중심으로 제물을 바치는 제단과 몸을 씻는 거대한 수조 등의 부속 건물들이 딸려 있다. 동로마 제국 시절에는 교회로 쓰였으며 이후 1132년 이슬람 세력이 들어오면서 약간의 개조를 거쳐 1920년대까지 모스크로 사용되기도 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 때 ISIS에 의해 복원되었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신전의 입구는 무사하게 남아 있는 것을 BBC의 드론 사진을 통해 확인되었다. 팔미라를 탈환한 시리아 정부군이 신전 주변에 계속 머물고 있으며 바알샤민 신전과 같이 남아 있는 잔해로 재복원에 들어갈 예정.
- 개선문과 대열주 거리
팔미라 시가지의 서쪽 끝에 있는 장제전에서 동쪽의 개선문과 밸 신전을 이어주는 약 1.2km 길이의 메인 거리와 거기에서 나온 대열주 거리로 2~3세기에 완성되었다. 팔미라 유적지를 동쪽, 서쪽, 중심가 세 구역으로 나누어 지난다. 동쪽으로는 개선문과 벨 신전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장제전을 비롯해 남쪽인 다마스쿠스의 문으로 이어지는 가로진 길이 있다. 중심에는 '테트라필론'이라 하는 사거리에 세워진 건축물이 있으며 이 중심가에는 나부의 신전을 비롯해 극장, 아고라, 원로원과 목욕탕 등의 공공건물들이 들어선 것이 특징이다. 이 중 극장가에 있는 기둥에서 제노비아와 오데나투스의 봉납문이 팔미라어와 그리스어로 같이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 극장
- 바알 샤민 신전
가나안의 신 바알 샤민을 모신 신전으로 기원전 2세기에 처음 세워지고 제단은 서기 151년에 이르러 완성이 되었다. 고대 시리아와 로마의 건축 양식이 뒤섞인 양식으로, 이 신전에는 로마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했을 때 '아그리파'라는 이 지역의 부유한 공직원이 황제 일행의 경비를 부담했다는 것과 신전 건립의 후원자였다는 사실이 그리스어와 팔미라어로 새겨져 있다. 팔미라의 멸망 후 5세기에는 동로마 제국 아래 들어가 교회로 쓰이다가 이후 이슬람의 모스크로 쓰이기도 했다. 1954년 스위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과 복원이 되었고 1980년대에 팔미라 유적지와 같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리아 내전 때 ISIS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이에 유네스코는 이를 전쟁범죄로 규정, 그리고 재복원을 위해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하버드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주체가 된 디지털 고고학 팀이 파괴 상황과 잔해 탐색을 위해 약 5,000대의 3D 카메라를 현장으로 보낼 계획을 세웠다. 팔미라를 탈환한 현장에 남은 파편들을 중심으로 재복원 작업을 하였으며, 이탈리아에서 복원됐다.
- 시르쿠 요새 (시타델)
관광객들이 잘 찾지 않는 13세기 요새이다.
- 무덤의 계곡
팔미라 서쪽에 존재하는 층별로 나뉜 탑 모양의 팔미라 주민들의 무덤군.이 중에서 엘라벨(Elahbel)이라는 사람의 무덤에서 중국 한나라 시대의 비단이 발견된 것으로 팔미라는 일약 주목을 받게 되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가족 단위의 무덤으로 구성되었고 이에 다량의 초상 조각들도 발견되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른 주민들의 차림새와 생활 양식의 변화 등을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연구 자료로써 쓰이고 있다.
5. 현재
2017년에 찍은 사진
팔미라는 이후 이슬람 시대에 작은 도시가 건설되었으나, 이 역시 1089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고대 도시 팔미라 자체는 이미 유적이 됐지만 유적지와 관련된 관광업 외에 위치적으로도 시리아 중앙에 위치한지라 이라크에서부터 송유관이 지나가며 근처에서 천연가스가 나며 아직도 오아시스를 통한 농업이 가능하는 등 현재에도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하기에, 유적으로부터 500m 떨어진 곳에 옛 지명인 '타드모르'라는 이름의 신도시를 유지하고 있다. 매년 팔미라의 세계문화유산 지정 기념 축제가 열리며, 2004년에는 약 5만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시리아 각 지역과 다른 주변 나라의 난민이 대거 이 도시로 들어오면서 2015년 5월 기준으로 인구가 14만명까지 증가했다. 이는 화산으로 묻혀버린 이후로도 근방에 신도시가 건재한 폼페이와 비슷하다.
5.1. IS 강제점령 이후
이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팔미라의 상징이던 열주가 기둥 몇 개만을 남긴 채로 사라졌다.
팔미라의 유적지는 2015년 5월 IS가 점령하여 조직적인 파괴를 일삼고 있다. 2015년 9월 2일 2,000년이 넘은 팔미라의 고대 신전을 IS가 파괴한 것이 위성 사진으로 확인되었다. # 이에 많은 고고학자들은 시리아 내전이 종식되어 안정을 되찾을 때를 대비하고자 팔미라의 유적을 3D로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2016년 3월 타이거 대령(현재 소장)이 이끄는 시리아군이 진격, 2016년 3월 27일 시리아 정부군이 1년 만에 팔미라를 완전히 탈환했다. 관련 기사. 예상대로 유적지 일부가 크게 파괴되었으나 복구는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드론으로 촬영한 팔미라 유적 상공.
그러나 현지 시각 2016년 12월 10일 IS가 팔미라로 재진입했다. 관련 기사. 정부군이 IS에 밀려 퇴각하는 형세를 취하면서 팔미라가 다시 파괴될 가능성에 직면했다. 2017년 3월 정부군이 팔미라에 재진입했다. #
2021년 기준으로 IS를 사실상 축출했지만 아직도 내전으로 인해 불안정한 상태여서 대규모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시리아 정부와 러시아 정부간에 유적 복원을 위한 협정을 맺어 현재 러시아에서 3D 프린팅 모델로 복원도를 제작 중이고 시리아 내에서도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황금기 시절 옛 팔미라 전체의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서 복원 모형을 만드는 중이다. 링크. 22년 초 기준으로 사실상 치안은 많이 안정되어 레바논, 이탈리아 등 이미 주변국으로 대피했거나 내전으로 파괴되어 복원차 해외로 나갔던 유물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