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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23:43:21

콘라드 헬프리히

<colbgcolor=#2f378c><colcolor=#fff> ABDA 함대 사령관
콘라드 에밀 람베르트 헬프리히
Conrad Emil Lambert Helfrich
파일:conrad helfrich.jpg
출생 1886년 10월 11일
네덜란드령 동인도 세마랑 (現 인도네시아 스마랑)
사망 1962년 9월 20일 (향년 75세)
네덜란드 자위트홀란트주 헤이그
국적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학력 왕립해군학교
직업 군인
계급 대장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별명 하루에 한 척 헬프리히[1][2]
서명 파일:Conrad_Helfrich_sign.svg.png

1. 개요2. 전쟁 전3. 제2차 세계대전
3.1. 전쟁 초반3.2. ABDA 함대의 창설과 몰락3.3. 일본의 항복
4. 동인도로의 귀환5. 전역 및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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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 해군에서 활약했다.

2. 전쟁 전

1886년 10월 11일에 네덜란드령 동인도 세마랑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군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후 1903년[3]에 해군 장교가 되기 위해 네덜란드 덴 헬더[4]에 위치한 왕립해군학교[5]로 향한다.

그는 1907년에 공식적으로 왕립 해군의 장교로 임관한다. 1년 후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돌아와 발리 원정에 참가하였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본국으로 돌아가 다양한 참모직을 맡게 된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헤이그의 해군 총사령부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 해군 함대 증설 계획에 기여하였다. 이후 1922년에 고등 해군학교에 입학하였으며 2년간 교육을 받은 뒤 교사로 임명된다.1928년에는 다시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돌아가 구축함함장을 맡는다.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에서 다양한 직책을 맡다가 다시 1938년네덜란드로 돌아가 고등 해군학교의 교장으로 1년간 근무한 뒤, 또 다시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돌아가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 해군 사령관이 된다.

3. 제2차 세계대전

3.1. 전쟁 초반

1940년 5월 10일, 독일네덜란드를 침공한다. 네덜란드단 5일만에 항복하였지만, 네덜란드령 동인도는 아직 전쟁으로부터 무사했다. 그는 1940년 8월 31일에 중장으로 진급하며 네덜란드령 동인도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독일과의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중립이 무너지자, 일본과의 전쟁은 불가피해졌으며, 헬프리히는 이를 대비하기 시작한다. 네덜란드 본토가 독일의 수중에 넘어가며 네덜란드령 동인도 해군 증원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그는 계획을 바꿔 소량의 함정, 특히 잠수함을 중심으로 잽싼 공격을 여러번 감행하기로 한다. 또한, 그는 네덜란드 해군만으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사수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연합국 해군과의 협동에 전력을 쏟는다.

3.2. ABDA 함대의 창설과 몰락

파일:Vice_Adm._Conrad_E.L._Helfrich_and_Admiral_Thomas_C._Hart .jpg
헬프리히(좌)와 하트(우) 제독.
결국 1942년 1월에 그가 그토록 고대하던 ABDA 연합 함대[6]가 창설되지만, 총사령관의 자리에는 헬프리히 대신 미 해군의 토마스 C. 하트[7] 제독이 앉게된다. 자바 섬을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사수하려던 그와 연합국 함대를 최대한 보존하려던 하트 제독 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헬프리히는 계획대로 소량의 네덜란드 잠수함만을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다소 공격적인 전략은 초반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는데, 개전 후 몇 주만에 영국미국 해군을 합친 수 보다 더 많은 일본군 함정을 잡아내어 미군에게 하루에 한 척 헬프리히[1]라는 별명을 얻는다. 이에 같은 해 2월 12일에 하트의 후임으로 부임하자마자 헬프리히는 연합 타격 함대[9]를 창설, 공세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용기만으로는 부족했는지, ABDA 연합 타격 함대는 일본 해군의 압도적인 전력차를 이기지 못하고 거의 전멸하기에 이른다[10]. 이에 더해 사령관 카렐 도어만 소장마저 전사[11]하자, ABDA 연합 함대는 1942년 2월에 폐지된다.

이에 헬프리히는 울며 겨자 먹기실론 섬 콜롬보에 참모진과 함께 대피한다. 그곳에서 그는 동부군 사령관[12]이라는 직책이 주어지는데, 이는 사실상 전후 인도네시아네덜란드 행정부 복귀를 준비하는 행정직에 불과한 직책이었다. 네덜란드 정부네덜란드령 동인도군일본군에 항복시킬 계획이었기에, 헬프리히가 적을 상대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을 막기위해 내린 조치였다. 이는 당연히 헬프리히를 상당히 화나게 했으며, 이는 시기상조라며 오히려 전쟁에 차질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 그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훕 판 무크[13]와도 갈등을 겪었다[14].

3.3. 일본의 항복

파일:Helfrich_NETHERLANDS_1945.jpg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헬프리히.
뒤로는 더글라스 맥아더가 보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이어 8월 25일, 헬프리히는 네덜란드 해군 총사령관이 되며 대장으로 진급한다. 9월 2일, 일본 정부 사절이 USS 미주리항복하러 오자, 네덜란드 왕국의 대표로 서명했다.

4. 동인도로의 귀환

헬프리히는 1945년 10월 1일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복귀했다. 그곳에서 그는 동부군 사령관으로서 네덜란드령 동인도군1946년 1월 24일에 직책이 폐지될 때 까지 감독하였다. 이 때 즈음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는 점점 인도네시아 독립을 향한 갈망이 짙어지는 중이었다. 이를 인식한 루이 베일[15] 총리가 1946년 12월 5일에 링가자티 협정[16]을 체결하자, 이를 네덜란드군 총사령관 헨드릭 쿠를스와 거세게 항의하지만, 무시되었다[17].

5. 전역 및 말로

헬프리히는 네덜란드 해군을 재건한다는 명목 하에 1949년 1월 1일[18]까지 네덜란드 해군 총사령관으로 복무한 뒤 전역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을 집필하여 1950년에 출판하였다. 1962년 9월 20일에 헤이그에서 사망한다.

[1] Ship-a-Day Helfrich[2] 개전 몇 주만에 작은 잠수함 부대로 영국미국 해군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일본 선박을 침몰시켜 얻은 별명이라고 한다.[3] 당시 17세[4] Den Helder[5] Koninklijk Instituut voor de Marine[6] 미국 (American), 영국 (Britaish), 네덜란드 (Dutch) 및 호주 (Australian)로 구성되었다.[7] Thomas C. Heart[1] [9] Combined Strike Force[10] 자세한 사항은 이 문서 참고.[11] 이 때 보인 용기와 투지 덕에, 후에 카렐 도어만급 호위함이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으며, 현대 네덜란드 해군의 상징과도 같은 영웅이 되었다.[12] Bevelhebber van de Strijdkrachten in het Oosten[13] Huib van Mook[14] 판 무크의 관료들은 대부분 네덜란드 육군에서 모집되었다.[15] Louis Beel[16] 네덜란드자바 섬수마트라 섬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사실상의 정부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협정[17] 이 때, 전 총리인 피터 슈어드 그라브란디는 헬프리히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까지 일으킬 생각이었으나, 일어나지 않았다.[18] 어떠한 자료는 1948년 10월 1일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