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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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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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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 초대 국왕
武王 | 무왕
파일:周武王像(宋·馬麟).jpg
시호 <colbgcolor=#fff,#222>무왕(武王)
희(姬)
발(發)
부친 문왕
생몰 기간 ? ~ 기원전 1043년
재위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1043년

1. 개요2. 생애
2.1. 당대 기록에서의 무왕과 이후 시대
3. 여담4. 대중 매체에서
4.1. 후지사키 류의 만화 봉신연의의 등장인물

[clearfix]

1. 개요

주나라(서주)의 초대 왕. 고대 중국사에서 상나라 마지막 왕 제신(주왕)을 처단하고 서주시대를 열었다. 성(姓)은 (姬), 이름은 발(發)인데, 둘째였으므로 중발(仲發)이라고 불렀다. 仲은 항렬에서 둘째를 나타내는 접두사이다.

2. 생애

부친은 문왕(서백 희창)이고,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다. 동복형제로서 형 백읍고, 동생으로는 관숙선, 주공단, 채숙도, 곽숙처, 강숙봉, 필공고 등이 있다. 아들은 성왕, 당숙려, 우숙, 응숙, 한숙 등. 형제와 아들들은 주나라가 창건된 후 제후로 봉해졌다.

장남 백읍고가 왜 세자가 안 되고 차남이 무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는지 사유는 불분명하다. 일설에 의하면 문왕이 무왕을 과하게 편애했다고도 하나, 사기에 주석을 놓은 "사기집해"에 의하면 백읍고는 상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주왕에게 죽임을 당했고, 죽으로 요리되었는데, 문왕이 오자 주왕은 문왕을 유폐시키고 백읍고로 만든 죽을 문왕에게 먹였다고... 주왕은 "성인은 사람 고기를 먹지 않으니 너는 성인이 아니로구나!"라고 놀렸다고 한다. 물론 일화의 사실 여부와 별개로 실제로도 상나라는 타국을 침략하고 제사 등에 바친다고 많은 포로를 인신공양한 잔혹한 왕조였다.

무왕 희발은 그 존재감만큼 다양한 문헌이 그의 죽음을 인용했는데, 나이는 여러 곳들에서 다르게 나오며, 사망시 나이도 93세, 54세 또는 43세 때였다고 다양하게 기록되어있다. 다만 93세는 신뢰도가 떨어지는게, 주무왕의 아버지 주문왕도 90세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이조차 과장이라고 여겨진다. 정말로 주문왕이 90세에 사망했다고 쳐도 주무왕은 또 그로부터 13~3(?)년밖에 못 살아서 현실적으로 93세는 나올 수가 없다. 게다가 주무왕의 뒤를 이은 주성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 무왕의 동생 주공단이 섭정을 맡았는데, 섭정한지 6~7년 만에 성인이 되었다는 걸 고려해 보면 주성왕은 즉위 당시 10대 초반이었을 확률이 높고, 그 점을 생각해 보면 무왕의 나이는 54세나 43세라면 모를까 93세는 현실적으로 말이 좀 안 된다.

유교에서는 그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생각해, 특히 맹자상나라를 멸한 그를 들어 천명이 떠났을 때 역성혁명은 찬탈이 아니라 정당한 것이라고 옹호하기도 했다. 다만 사실 이때의 주는 역성혁명이라기보다는 이민족의 침략에 가까운 측면도 있는데, 이 아예 뿌리부터 달랐는지, 최소한의 근연관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적어도 상나라는 주나라를 서쪽에서 온 이민족 집단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무왕의 증조할아버지인 고공단보 시절부터 상나라 제후국으로 편입되긴 했다만.[1]

사기에 따르면 원래 주나라상나라속국이었으나, 상나라 주왕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문왕과 무왕 시절 강태공문공의 보좌를 받아 국력을 길렀다. 이후 상나라에 원한을 품은 주변 민족(대표적으로 상나라의 인신공양에 자주 끌려와 죽음을 당한 강족)들을 아울러서 기원전 1048년에 병력 4만 5천 명을 이끌고[2] 상나라를 쳤다. 이에 상나라는 70만 대군으로 맞섰다고 하지만, 당시 상나라의 영역이 황하 중류 지역에 한정되었으므로 70만 운운은 과장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맞붙은 회전목야대전에서 상나라 군대는 어찌된 일인지 허무하게 패하고 만다.[3]

목야대전에서 패한 상의 주왕은 수도로 도망쳤고, 수도까지 함락되자 궁궐을 불태우며 자결했다. 이에 무왕은 하늘을 대신해 주왕을 벌한다는 명분으로 주왕의 시신과 요부 달기의 시신에 활쏘기를 하고 군기에 그 목을 효수하였다. 이후 상의 혈통은 잇게 해달라는 협력 세력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상나라 잔존 세력들은 제신의 아들 무경에게 맡기고, 훗날 삼감이라 불리는 동생 3명(관숙선,채숙도,곽숙처)에게 감시를 맡겼다. 그 외 영토도 여러 개로 나누어서 협력국이나 공신, 형제들에게 모두 분봉했다.

여담으로, 여기서 주왕삼촌이자, 무왕이 선정의 방안을 묻자 우왕이 만든 홍범구주를 교시해줬다는, 성인 기자가 조선 지역으로 갔고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했다는 기자조선설이 나오면서[4] 수천년 떡밥이 발생한다. 현재 남북학계에서는 이를 정설로 보지 않는데[5], 만일 기자를 비롯한 상나라 유민들이 조선에 왔다면 갑골문이나 황하 문명의 청동기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야 정상인데, 만주나 한반도에서는 갑골문이 출토된 바가 없고 청동기 자체도 황하계와는 다른 북방계이기 때문이다. 즉, 고고학적으로 부정된다는 것.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기에 따르면 무왕은 기원전 1046년에 중원을 통일한 이후 얼마 안가 기원전 1043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후대는 아들 성왕이 잇게 된다.

2.1. 당대 기록에서의 무왕과 이후 시대

이상이 바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주무왕대전에 대한 서술이다. 하지만 최신 연구 결과와 당대의 청동기 기록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은 또 다른 면도 있다. 상의 주왕이 당대 기준 실제 폭군이었는지에 대해선 설왕설래가 있지만, 주나라가 위치했던 서쪽의 정세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동쪽 방면으로만 확장 정책을 펴는 실책을 저지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주무왕의 선대왕이었던 주문왕은 이를 이용해 관중산서 지방에 있던 친상나라 국가들과 부족들을 정복해 급격하게 세력을 불리는 것은 물론 상나라 본토와 가까운 지점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무왕이 기원전 1049년에 즉위했는데 연이은 성공으로 자신감에 차있었던 주나라의 수뇌부는 상나라를 공격할 적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문왕의 삼년상이 끝나자마자 상나라 본토를 전격 침공했다. 기원전 1046년 12월 중순, 주나라와 많은 동맹 부족 및 국가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상나라의 수도 안양 바로 남쪽에 위치한 목야 평원에 진을 쳤다. 한편 주왕은 이때 산동 반도에서 이민족들을 정복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기습 소식을 듣고 주력을 서쪽으로 회군시켰다. 다음해 1월 20일, 주나라 연합군과 수적으로 우세했던 상의 주력이 목야에서 맞붙었고 격렬한 전투 끝에 주나라가 승리했다. 패배한 주왕은 수도로 도망쳤고, 다음날 새벽에 궁궐에 불을 질러 애첩들과 함께 자살했다.

수백 년간 중원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상나라가 이렇게 허망하게 몰락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무왕은, 상 주왕의 아들 무경을 상의 새로운 지배자로 임명하고 자신의 세 동생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가 옆에서 감시하게 하는 정도로 전후처리를 간단하게 끝냈다. 즉, 이 시점에서 상나라는 패권과 약간의 영토만을 잃었을 뿐 세력 자체는 제법 팔팔하게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상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채 무왕은 몇년 안가 기원전 1043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상술했듯이 안전장치로 자신의 형제들에게 하여금 무경을 감시하도록 했기에 의 패권은 당분간 안전해 보였다. 하지만 무왕 사후 정세가 이상하게 돌아갔는데, 주공단주성왕의 섭정을 자처해[6] 동생 소공석과 함께 힘을 합쳐 다른 형제들을 배제하고 주나라 조정을 장악했다. 이에 상당수 주나라 제후들은 당연히 반발한 것으로 보이는데, 상나라를 견제하는 임무를 맡았던 삼감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이에 삼감은[7] 무경(!)과 힘을 합쳐 아직 남아 있었던 친 상나라 부족들과 제후들을 모아 주공단 섭정 비판과 상나라 부활을 명분으로 이른바 삼감의 난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이때 주공단에게 반발한 주나라 제후들 + 아직까지는 막강했던 상나라의 국력 + 상나라를 따르던 제후국들이 더해진 반란군의 위세는 결코 무시할 것이 못돼서, 처음 1년 동안은 주나라 조정을 따르던 제후국들을 맘껏 두들겨 팰 정도였다.[8] 하지만 반란 둘째 해부터 주성왕이 직접 친정, 외조부이기도 한 희대의 지략가 강태공의 도움 등으로 끝내 무경, 관숙을 죽이고 난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

삼감의 난을 완전히 진압하기까지 목야대전보다 훨씬 긴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덕분에 여전히 강했던 상나라를 완전히 몰락시키고 중원 일부에만 그쳤던 주나라의 영향력을 화북과 회수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학자들은 주나라가 진정으로 패권을 잡은 시기를 목야대전 직후가 아닌 삼감의 난 이후부터라고 여기는 기류가 있다.[9] 참고로 주공단은 이후 섭정을 마치고 성왕에게 권력을 넘겨준 후 본인의 영지로 돌아간다.[10]

3. 여담

발굴되는 갑골문을 보면 주왕 제신이 동방으로의 팽창 정책을 취한 것이 확인된다. 여기서의 동방이란 것은 고조선과 관련된 요동, 만주쪽이 아니라 중국의 황해 연안 지방으로 지금의 산둥성 남부와 장쑤성 일대에 해당한다. 동이 문서도 참조. 그리하여 상기되어있듯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시점에 대해, 이러한 상황을 기습적으로 이용한거 아니냐는 설도 있다.

고려 시대에 쓰여진 삼국유사에서는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왕(虎王)이라고 적었고 문무왕 역시 문호왕이라 표기되었다. 또한 요(堯)도 정종의 휘를 피하기 위해 고(高)로 적었는데, '여요동시'를 '여고동시'라 적은 것이 그 예.

4. 대중 매체에서

2019년 드라마 봉신연의에 등장한다. 양전과 의형제를 맺는다. 강태공의 제자이자 사위가 된다.

4.1. 후지사키 류의 만화 봉신연의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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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상으론 주족의 시조 후직이 요순 시절과 하 우왕 시절 벼슬살이하다 그의 아들대에 관중을 떠나 북쪽 오랑캐들이 사는 산악지대에서 일종의 유목 생활을 했고, 오랜 세월이 흘러 고공단보 때에 다시 내려왔다고 되어있지만, 미화가 있었다고 가정하면 애초에 주족이 정주민이 아닌 유목민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다.[2] 40만이라는 기록도 있다. 물론 40만은 커녕 4만 5천도 뻥카일 확률이 있다.[3] 일각에선 상나라 군이 노예병이 많아서 이들이 탈영하여 주나라에 가담했기에 패한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어찌됐든 상나라 내부의 분열상이 없었다면 규모상 주나라군이 쉽게 이길만한 전투는 아니었다.[4] 다만 선진시대부터 전해져오던 기자 일화와 달리 기자조선설은 한나라대 가서야 처음 기록이 나타난다.[5] 즉, 기자가 조선에 오지 않았다 or 왔어도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6] 후술된 친정과도 엮여 이미 이때 주성왕은 성인 혹은 성인에 가까운 나이 아니었냐는 주장도 나온다. 다만 주공단이 그렇다고 정권을 완전히 혼자서 장악했냐면 그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게, 동생 소공석, 성왕의 어머니 읍강(+읍강의 부친 강태공까지)과 함께 섭정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소공석도 주공단이 흑심이 있는 거 아닌가 의심해 주공단이 글까지 보내 그런거 아니라고 해명할 정도였다.[7] 다만 곽숙 처는 참여 여부에 논란이 있는 모양. 그래서인지 진압당하고 나서 유배갔다 반성의 기미를 보이자 3년 후 복귀한다. 채숙 도도 유배지에서 죽긴 하지만, 훗날 아들이 채나라를 잇는다. 관숙 선은 얄짤없이 처형.[8] 이때 주나라를 따라서 같이 두들겨 맞은 제후들 중에는 다른 상나라 유민들이 모여 만든 형제국 송나라도 있었다(...). 이때 송은 주나라를 도운 댓가로 이후 무경의 세력까지 흡수한다.[9]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 및 Feng, Li. “The Inscribed History: the Western Zhou State and Its Bronze Vessels.” Chapter. In Early China: A Social and Cultural History, 117–23. New Approaches to Asian Hist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10] 속내야 어떻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지 않고 말끔히 물러났기에 훗날 공자는 주공단을 성인이라고 호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