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야대전 牧野大戰 | ||
시기 | 기원전 1046년 1월 20일(추정)[1] | |
장소 | 중국 허난성 신샹 시 무예(牧野) 구[2] | |
원인 | 상나라에 대한 주나라의 정벌. | |
교전국 | 상商 | 주周 |
지휘관 | 제신 | 무왕(주) |
병력 | 70만여 명[3] | 40만여 명 |
피해 | 방어군 궤멸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주(周)의 대승, 제신 사망 | |
영향 | 상(商)의 멸망과 주(周)의 천자국 지위 획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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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 우리 우방의 총군(冢君), 어사(御事),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려(亞旅), 사씨(師氏), 천장부(千夫長), 백장부(百夫長)와 용(庸), 촉(蜀), 강(羌), 무(髳), 노(盧), 팽(彭), 복(濮)의 사람들아. 너희들의 과(戈)를 들고, 너희들의 방패를 나란히 하며, 너희들의 모(矛)를 세워라. 내 맹세할지어다.[4]
주 무왕
고대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주왕) 군대가 주나라 무왕 군대와 싸운 전투. 이 전투의 패배로 주왕이 분신자살하면서, 상나라의 멸망도 확정되었다. 혁명이란 단어의 기원이기도 하다.주 무왕
2. 목야대전의 배경
사기에 따르면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주왕)은 흉악한 폭군이었다. 제신은 주지육림과 같은 사치행위를 벌이고 포락지형 등의 혹형을 만들었으며, 주나라의 제후인 희창을 잡아 가두고, 그의 장자 백읍고를 요리해서 먹게 하는 등 잔악한 행동을 벌였다. 또한 각지를 정벌하여 원성이 가득해졌다.희창은 주나라에 돌아온 후, 인근 국가를 병탄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또한 상나라에 원한이 깊은 제후들에게 손을 써서 주나라의 국력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희창은 노령이라 상나라와 제대로 붙기 전 사망하고, 그가 죽은 뒤 아들인 발(發)이 주나라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무왕이었다.
혁명을 선언한 무왕은 제위 직후부터 상나라 정벌을 다짐했고, 여러 제후들이 이에 가세하여 순식간에 대군이 되었다. 허나 1차 회동에서 무왕은 뭔가 불안했던지[5] 아직 때가 아니라며 한 차례 군사를 물렸다.[6]
3. 전개
몇 년 후,[7] 결심이 선 무왕은 다시 제후들을 불러 상나라로 진격했다. 주무왕은 주원(周原, 현 중국 섬서성 푸펑(부풍)현 인근)에서 시작해 풍호(豊鎬, 현 시안 인근)를 통해 관중 분지를 지나고, 이후 중원으로 들어가 낙양을 지나 맹진(孟津)에 도달했다.주나라 군대는 맹진(孟津)에서 황하를 건너려 했으나, 폭풍이 불어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무왕은 분노하여 황하의 신 하백에게 "천명은 이미 내려졌다. 어째서 방해하는가?"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는데 그러자 폭풍우가 멎어(...) 주나라 군대는 강을 거널 수 있었다. 이 때 배 안에 뱅어가 뛰어들어 왔는데, 뱅어는 하얀 물고기이고 백색은 상나라를 상징하므로 지켜보던 이들이 길한 징조로 여겼다. 무왕은 여기서 황하를 건너 이후 쭉 하북 평원을 따라 진군하며 상의 도읍 바로 아래 있는 목야 지역에 이르렀다.
정리하자면 당시, 주무왕은 최소 900 km에서 최대 1000 km 혹은 그 이상을 대군을 이끌고 행군했다. 기원전 1000년 무렵 상고시대에 잘 해봐야 청동기 무기를 들고 당시 숲과 습지로 가득했던 북중국의 자연조건을 행군해야 했다. 사서에 따르면 도중에 상나라의 요새나 저항군을 만나면 깨뜨리고, 중간중간에 합류하는 제후들도 다독여야 했다. 그렇게 고생한 끝에 주나라와 상나라 군대는 상나라의 수도 조가(朝歌)에 가까운 목야(牧野)에서 마주친다. 또 다시 폭풍우가 불었지만, 무왕은 '상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무찌른 명조(鳴条) 전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니 이것은 상서로운 일'이라고 격려하였다. 이 전쟁에서 패하는 측은 최후가 불보듯 뻔했기에 양쪽 다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사기 주본기에 따르면 상나라는 준비에 만전을 기하여 70만 대군을 동원했다. 물론 당시 인구 구조상 저만큼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건 불가능해 보이기에, 실제 동원된 병력은 훨씬 적었을 것이다.[8] 주나라는 동맹국의 군대를 더해도 40만, 사기에 따르면 전차는 4천 대였는데, 이 역시 실제로는 훨씬 적었을 확률이 높다. 실제 당시 국력상 주군은 상군보다 군사적 열세에 있었을거라는 추정이 더 많다.
하지만 전투 결과 주 동맹군은 승리했다. 이에 대해선 몇몇 설들이 있는데, 일단 상군에는 전장에서 길흉을 점치는 점술사가 포함되었고, 복속된 작은 나라들의 군대까지 섞여 질이 나빴다. 허나 이건 여러 제후국이 섞인 주군도 오십보백보였기 때문에, 비교적 합리적인 설은 상군 내부에서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탈하거나 배신한 사람들이 속출했지 않겠냐는 추론이다. 실제 사기 주본기에도 무왕은 강태공과 용사 백 명으로 싸움을 걸게 하고[9], 주력 부대를 주왕 제신의 상군에 돌진하게 하였는데, 주왕의 군대가 비록 많았지만 싸울 마음이 없어서 무기를 자기편으로 돌려 싸우며 무왕을 인도하였다고 적혀있다. 현대 연구에 따르면 상이 주변과 느슨한 속국 관계를 이뤘는데, 이 연결성이 상당히 취약했을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20세기 중국의 문학가 궈모뤄(郭沫若)는 상군들 가운데 노예들까지 섞였으리라 추측하곤[10], 제신은 이런 병사들을 앞에 세우고 자신이 믿는 상나라의 정예병은 뒤에 배치했으리라고 보았다. 당연히 평소 불만이 많았을 노예나 항병(降兵)들은 주나라 군대가 몰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상나라 군대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문헌에 따르면 상족 고위층은 이미 잔혹한 형벌 등으로 내분 징조가 보이고 있었고, 그렇다는건 문헌에 기록되진 않았지만 이 전투에서도 주나라에 협력한 상나라 귀족 세력이 있었을 거라는 합리적 추론을 가능케 한다.[11]
아무튼 전투는 상나라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고, 이 싸움 한 번으로 상나라는 멸망한다.[12]
4. 결과
주나라 군대는 제신을 쫓아 상의 도읍 조가(朝歌)까지 쳐들어 갔다. 이에 제신은 왕궁에 불을 질러 죽었으며, 무왕은 제신의 시신을 찾아 세 개의 화살을 쏘고 도끼로 목을 쳐서 잘라 벌했다. 이로써 상나라는 멸하고, 혁명군의 맹주였던 주나라가 천자국이 되어 제후들을 거느렸다.일주서(逸周書)에 의한 결과
- 99개 국이 멸망했다.
- 652개 국이 정복당했다.[13]
- 18만 명이 죽었다.
- 33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5. 날짜
목야대전이 일어난 연대를 두고 기원전 1130년부터 기원전 1018년까지 가설만 약 45개가 있다고 한다.- 주로 기원전 1046년이라고 본다.
- 하상주단대공정에서는 기원전 1046년 1월 20일이라고 결론지었다.
- 하병체(何炳棣)는 죽서기년에 근거해 기원전 1027년이라고 주장했다.
- 명대의 학자 황도주(黃道周)는 기원전 1053년(무자년)이라고 주장했다.
- 명말청초의 학자 황종희(黄宗羲)는 기원전 1062년(기묘년)이라고 주장했다.
- 서주기년연구(西周纪年研究)에서는 기원전 1106년이라고 주장했다.
- 1998년 12월 20일 강효원(江晓原)은 단대공정회의에서 기원전 1044년 1월 9일이라고 결론지었다.
6. 여담
- 상나라의 간신이자 천하장사로 이름을 날린 악래(惡來) 역시 이 싸움에 출진했으나 죽었다고 한다.
- 사기 주본기에 따르면 이 싸움에서 주와 함께한 제후군은 용(庸)·촉(蜀)·강(羌)·모(髳)·미(微)·노(纑)·팽(彭)·복(濮) 등이다. 주로 관중, 한중 일대 등 상 도읍 기준 서부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 상서에 따르면 주왕을 제거한 날의 간지는 갑자(甲子)였다고 하는데, 이는 청동기 명문에서도 확인된다.
- 상서 목서에 따르면 주무왕은 제후들과 동맹을 선언하면서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집안이 망한다. 지금 상나라의 군주는 여자 말만 듣고 현명한 사람의 말을 멀리하고.."라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여자는 달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은 여기서 기원한 것이다.
[1] 하상주단대공정에 의한 것이다. 아마 사기에 의한 것일듯. 사기 주본기에서 2월 갑자일이라 했으며, 청동기 유물에서도 갑자일이란 것이 확인되었다. 이 외에도 연도와 날짜에 대한 가설이 후술되어있듯 수십개나 된다.[2] 목야를 중국어로 읽으면 무예가 된다.[3]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4] 嗟!我友邦冢君、御事、司徒、司馬、司空,亞旅、師氏,千夫長、百夫長,及庸,蜀、羌、髳、微、盧、彭、濮人。稱爾戈,比爾干,立爾矛。予其誓。- 書經 周書 牧誓 -[5] 일주서(逸周書)에 따르면 무왕은 이시기 전후 무렵 상이 눈치채고 주를 멸망시키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동생 주공단이 덕 등을 언급하며 형을 안심시키는 일화가 나온다. 물론 일주서 자체가 신뢰성 논란이 있는건 감안해야 된다.[6] 오늘날 학자들은 이렇게 서쪽에서 제후국들 병탄하고 회동하고 요란법석을 떠는데도 상나라 주왕은 도대체 뭐하고 있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그나마 합리적인 추론은 갑골문에서 보이듯 제신이 너무 동쪽 지역 정벌에만 몰두해 서쪽을 간과했다는 것 + 상 왕조 내부가 이미 귀족까지 잔인하게 처벌할 정도로 갈라섬이 심해져서 외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컨트롤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의견도 있다. 일단 사기에는 주왕이 경고하는 신하에게 "나에겐 천명이 있지 않는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무시했다고 기록되었다. 또 낙수 서쪽 땅을 바친 문왕(희창)에게 주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서백으로 삼았다고 적혔으나, 갑골문엔 이보다 격이 낮은 방백으로만 기록되었으므로 후대에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7] 사기엔 주왕이 비간을 죽이고 기자를 가둬 이에 상나라 신하들이 주나라로 투항한 2년 후라고 되어있다.[8] 갑골문 기록을 참조해 상나라가 실제로 보유했던 최대 병력은 6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9] 내통설과 연관지어 보면, 계략가로 유명한 강태공이기에 미리 군사를 보내 상 내통 세력들에게 신호를 준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도 있다.[10] 갑골문 연구에 따르면, 제신은 상나라의 주력 군대를 동방으로 출진시켰다. 따라서 목야의 싸움에서 노예나 항복한 병사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냔 주장이 있다.[11] 목야대전은 아니더라도 실제 문헌에 기록된 주에 협력한 상족들이 있는데, 주의 제후국 송의 초대 국군이 되는 미자계가 대표적이다. 심지어 일각에선 제신의 사망 이후 주나라가 상의 후계자로 제신의 아들 무경(武庚)을 순순히 임명했음을 두고 무경도 이때 배신하지 않았겠느냐 추론하기도 한다. 물론 무경은 이후 자신을 감시하던 삼감들과 함께 주에 '삼감의난'을 일으켰다 죽긴 하지만..[12] 물론 상이 천자국에선 내려왔지만 무경이 제신의 뒤를 이은 것에서 보이듯, 이땐 상보단 제신 세력의 몰락으로 보아야 적절하고, 진짜 상의 멸망은 무왕 사후 벌어지는 삼감의난 진압 이후로 보는 학자도 있다.[13] 신뢰성 여부를 떠나, 이때 국들은 부족 수준 정도의 나라들도 많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