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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1 20:38:20

존 갈리아노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존 갈리아노
John Galliano
파일:John Galliano.jpg
출생 1960년 11월 28일 ([age(1960-11-28)]세)
영국 지브롤터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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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패션 디자이너
학력 센트럴 세인트 마틴
경력 1995년 -1996년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
1996년 - 2011년 디올 수석 디자이너
2015년 - 현재 메종 마르지엘라 수석 디자이너
브랜드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유년기3. 활동
3.1. 첫 번째 컬렉션3.2. 파리 시절3.3. 지방시3.4. 디올3.5. 몰락3.6. 복귀
4.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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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근 디자인 (2019년)
파일:johngalliano-runway2019ss01.jpg
파일:johngalliano-runway2019ss02.jpg

영국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디자이너 레이블의 이름. 디올의 전 수석 디자이너로도 유명하다. 반유대주의 발언으로 디올에서 쫓겨난 이후 현재는 메종 마르지엘라의 수석 디자이너로 자리하고 있다.

2. 유년기

1960년 11월 28일 지브롤터에서 지브롤터 출신 아버지 '후안 갈리아노'와 스페인 출신 어머니 '아니타 기옌' 사이에서 태어났다.갈리아노에게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고 아버지는 배관공으로 일했다. 갈리아노가 여섯 살 때 그의 가족들은 일을 좇아 영국으로 건너가 남런던의 스트릿햄에 정착한 뒤 덜위치를 거쳐, 이후 브로클리로 이주했다. 또한 갈리아노의 가족은 엄격한 로마 가톨릭 집안이었다고 한다.

3. 활동

3.1. 첫 번째 컬렉션

갈리아노는 영국 런던에 위치한 St. Anthony's School과 Wilson's Grammar School을 졸업하고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입학하게 된다. 1984년에 이르러 패션 디자인 분야에서 1등급(First-Class Honours Degree)을 받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그의 첫 번째 컬렉션은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받아 Les Incroyables[1]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제목에 걸맞게 컬렉션이 대중들에게 대단한 호평을 받게되고 런던의 유명한 패션 부티크 Browns에서 재판매를 위해 전량 구매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이끌어내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첫 번째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후 갈리아노는 앞으로 오랜 협력자가 될 아만다 할레치[2]와 여성 모자 디자이너인 스티븐 존스 등과 함께 자신만의 패션 레이블을 시작하기로 한다.

첫 번째 컬렉션의 성공에 힘입어 갈리아노는 런던에 스튜디오까지 차리게 되지만, 그가 가진 천재적인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에 비해서 사업가적인 기질은 턱없이 부족했다. 초기에는 요한 브런이 재정적인 후원을 해주었고 이 후원이 끝나자 패션 브랜드 '캐서린 햄넷'을 후원하고 있던 덴마크 출신 사업가 올레 페더 베르텔슨이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계약도 얼마 못 가 1988년에 끝을 맺게 되고 1990년에 이르러서 갈리아노는 파산하게 된다. 런던에 본사를 둔 자신의 레이블을 되살리기 어렵다고 느낀 갈리아노는 재정을 지원해 줄 사람과 고객들을 더 많이 끌어들이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게 된다. 갈리아노는 파리를 소재로 하고 있는 모로코 출신 디자이너 페이칼 아모르[3]의 후원을 얻어 Plein Sud 본사에 초대받게 되고, 1989년 파리 패션위크에서 자신의 첫 번째 파리에서의 쇼를 선보이게 된다.

3.2. 파리 시절

1993년에 갈리아노와 아모르가 맺은 재정협정이 종료되며 당시 10월부터 컬렉션을 발표하지 못하면서 한동안 일이 없다가,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와 당시 Vanity Fair 매거진의 유럽 특파원 안드레 레온 탈리의 도움으로 갈리아노는 포르투갈의 사교계 인사 및 패션 후원자 사오 슐럼버거와 벤처기업 아르벨라 주식회사, 존 벌트, 마크 라이스 등과 같은 재정적 후원자들에게 소개를 받게 된다. 갈리아노가 파리에서의 발돋움을 위해 꼭 필요한 재정 지원과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된 계기는 바로 이 파트너십 덕분이었다. 이 만남은 갈리아노의 패션 하우스를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지금까지도 패션계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Fashion Moment)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만남이 없었더라면 갈리아노의 천재적인 재능이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을 것이다.

3.3. 지방시

존 갈리아노는 1995년 7월 명품 대기업 LVMH의 소유주인 베르나르 아르노에 의해 지방시의 디자이너로 임명되었다. 1996년 1월 21일 갈리아노는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지방시의 지휘봉을 잡고 첫 오트쿠튀르쇼를 선보였다. 이 컬렉션은 패션 매체 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방시에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LVMH는 갈리아노를 크리스챤 디올의 디자이너로 재임명하게 된다. 존 갈리아노가 지방시를 떠난 후 지방시는 알렉산더 맥퀸이 맡게 된다.

3.4. 디올

1996년 10월 갈리아노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지안프랑코 페레를 대신해 디올의 디자이너를 맡게 된다. 디올에서의 갈리아노는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 1996년부터 2010년까지의 오트쿠튀르와 기성복 컬렉션을 모두 성공적으로 완성해나가며 대다수의 비평가들에게 뜨거운 찬사와 칭송을 받았다.

이렇게 디올에서의 환상적인 행보는 계속될 것 같았으나...

3.5. 몰락

때는 2011년 2월 25일, 파리에 위치한 한 술집에서 갈리아노가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이후 그는 디올의 디자이너 자리에서 가차없이 쫒겨나게 된다. 같은 날 시민 저널리즘 사이트인 Citizenside는 지난 12월 같은 술집에서 일어난 비슷한 내용의 갈리아노 영상을 받게 되고 공개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영상 속에서 갈리아노는 카페 테이블에 앉아있는 이탈리아 여성들을 모욕하며 "나는 히틀러를 사랑한다"고 선언하고, "너 같은 사람들은 죽어야만 해. 너희 어머니들, 너희 조상들은 모두 빌어먹을 가스에 중독이 될 거야."[4]라며 망언을 서슴없이 쏟아냈다. 이 사건은 크리스챤 디올의 2011~2012년 파리 패션위크 직전에 발생했던 일이었다.

쇼비즈니스 업계는 존 갈리아노의 반유대주의적 발언에 대해 엇갈린 감정들을 드러냈었다. 당시 디올의 뮤즈였던 나탈리 포트만은 갈리아노의 발언에 대해 "깊은 충격을 받았다"면서 그를 추하다고 평가했다.[5] 한편 디올의 또 다른 모델이었던 프랑스 여배우 에바 그린은 이 사건에 대해 "때로는 실수를 할 수 있다. 나는 그가 반유대주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대인이다. 나는 그가 유대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아마 약간 에 취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존 갈리아노를 옹호하는 발언을 남겼다.

갈리아노는 변호사를 통해 혐의를 부인했고, 자신을 반유대주의자로 고발한 커플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에 나섰었다. 2011년 3월 1일, 디올최고경영자 시드니 톨레다노는 "존 갈리아노가 한 말을 매우 단호하게 규탄한다"고 말하면서, 갈리아노에 대한 해임 절차를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디올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라이선스 때문에 갈리아노 브랜드를 재정적으로 계속 지원을 했어야 했으며, 이후 빌 게이튼이 디올과 갈리아노 브랜드의 지휘봉을 잡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존 갈리아노를 대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갈리아노는 '카페에서 고객들에게 인종차별 발언을 한 혐의'로 파리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이 재판은 2011년 6월 22일에 시작되었다. 갈리아노의 변호사는 "파리 카페에서 인종차별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모욕을 내뱉었던 것은 업무와 관련된 스트레스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2011년 9월 8일, 갈리아노는 인종 때문에 대중에게 모욕적인 발언을 한 혐의와 반유대적 발언을 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총 6,000유로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3.6. 복귀

2013년 초, 갈리아노는 안나 윈투어의 요청[6]으로 '오스카 드 라 렌타'의 2013년 2월 뉴욕 패션위크 기간 동안 가을 기성복 컬렉션을 준비하기 위해 '오스카 드 라 렌타'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잠시동안 일을 도우라는 초대를 수락했다. 갈리아노는 '오스카 드 라 렌타' 쇼의 백스테이지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 때문에 오스카 드 라 렌타의 후계자로서 갈리아노가 될 가능성이 있고, 파슨스 디자인 스쿨의 교직을 맡을 수도 있다는 등, 그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추측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후 2013년 6월 12일 존 갈리아노가 디올에서 해임된 이후 첫 인터뷰가 미국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었다. 그는 "나는 창조할 수 있다. 나는 창조할 준비가 되어있다... 속죄를 통해 나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라며 패션계로의 복귀를 원하는 듯한 발언을 표현했었다.

2014년 10월 6일, 이탈리아의 패션 그룹 OTB는 존 갈리아노가 메종 마르지엘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는다고 발표하며 갈리아노의 복귀를 선언했다.

4. 수상



[1] Incredible의 프랑스어[2] 당시 Harpers & Queen 매거진의 스타일리스트였다.[3] 패션 레이블 Plein Sud의 소유주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4] "I love Hitler... People like you would be dead. Your mothers, your forefathers would all be fucking gassed."[5] 정확히는 "아름다운 것들과는 정반대다."라고 언급했다.[6] 요청이라고 써두었지만 사실상 도움의 손길에 가깝다. 반유대주의 발언 사건 이후 갈리아노는 패션계에서 영원히 퇴출될 뻔했으니 말이다...[7] 2012년 8월 20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 의해 수훈이 박탈되었다.[8] Royal Designers for Industry[9] 1997년에는 자신이 떠난 지방시 수석 디자이너 자리의 후임자인 알렉산더 맥퀸과 함께 이 상을 공동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