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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000000><colbgcolor=#EBF1FA,#970032> 러시아 제국 파벨 1세의 황후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Sophie Dorothea von Württemberg | ||
이름 | 독일어 | 조피 마리 도로테아 아우구스테 루이제 (Sophie Marie Dorothea Auguste Luise) |
러시아어 | 마리야 표도로브나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 |
출생 | 1759년 10월 25일 | |
프로이센 왕국 슈테틴[1] | ||
사망 | 1828년 11월 5일 (향년 69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블롭스크 궁전 | ||
배우자 | 파벨 1세 (1776년 결혼 / 1801년 사망) | |
자녀 |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알렉산드라, 옐레나, 마리야, 예카테리나, 올가, 안나, 니콜라이 1세, 미하일 | |
아버지 |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 |
어머니 |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 |
형제 | 프리드리히, 루트비히[2], 오이겐, 빌헬름, 페르디난트, 프리데리케, 엘리자베트, 빌헬미네, 카를, 알렉산더[3], 하인리히 | |
종교 | 루터교회 → 러시아 정교회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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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벨 1세의 두번째 아내이자 러시아 제국의 황후로,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초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1세의 여동생이다.
당대 왕족들 중에서도 뛰어난 외모에 키까지 훤칠했던 미녀로 유명했다. 때문에 로마노프 왕조에게 "키 크고 잘생긴 뷔르템베르크의 외모''를 물려준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엄밀히 말하면 파블로비치/파블로브나 세대의 경우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의 뛰어난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가 있는가 하면 추남 파벨 1세의 외모를 물려받은 자녀도 있어서 좀 갈렸지만 아들 니콜라이 1세는 어머니의 외모를 물려받은 케이스고, 니콜라이 1세 역시 뛰어난 미녀인 프로이센의 샤를로테[4]와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과 후손들부터는 진짜로 장신에 미남미녀들이 많게 된다.
2. 작위
<colbgcolor=#EBF1FA,#970032> 문장 | <colbgcolor=#EBF1FA,#970032> 모노그램 |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여공작 전하 Her Serene Highness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1759년 10월 25일 ~ 1776년 10월 5일)
- 러시아의 황태자비 마리야 표도로브나 대공비 전하 Her Imperial Highness Grand Duchess Maria Feodorovna, Tsesarevna of Russia (1776년 10월 5일 ~ 1796년 11월 17일)
- 전 러시아의 황후 폐하 Her Imperial Majesty The Empress of All The Russias (1796년 11월 17일 ~ 1801년 3월 23일)
- 러시아의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 폐하 Her Imperial Majesty Empress Dowager Maria Feodorovna of Russia (1801년 3월 23일 ~ 1828년 11월 5일)
3. 생애
3.1. 어린시절
1759년 당시 프로이센 왕국 슈테틴에서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과 브란텐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의 장녀로 태어났다. 조피 도로테아의 뷔르템베르크 가문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깊은 명문가 중 하나였다.[5] 뷔르템베르크는 독일의 남서쪽에 위치해 오랫동안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중요한 요충지 중 하나였다.조피 도로테아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프리드리히 오이겐은 뷔르템베르크의 계승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피 도로테아가 10세가 되던 1769년에 아버지 프리드리히 오이겐이 뷔르템베르크로 돌아가면서, 그녀를 포함한 형제들도 아버지를 따라가서 몽벨리아르에 살았다.[6] 조피 도로테아의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뷔르템베르크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몽벨리아르에 드나들어 문화적인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몽벨리아르의 영향을 받게 된 조피 도로테아는 평생 예술을 사랑했다. 이후 조피 도로테아는 교육을 받으면서 독일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구사하며 의지가 강하고 상냥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3.2. 약혼과 결혼
1776년에 17세였던 조피 도로테아는 당시 러시아의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 황태자비[7]의 오빠 헤센다름슈타트의 루트비히와 약혼했지만 결혼까지 이어지지 않았다.얼마 안 되어 나탈리야 황태자비가 출산 도중 사망하면서 파벨 황태자의 새 황태자비를 뽑아야 했다. 이때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8]는 러시아 황실의 혼사에 관여해 예카테리나 2세에게 조피 도로테아를 파벨 황태자의 신부로 추천했다. 조피는 이미 헤센다름슈타트의 루트비히와 약혼 중이었기 때문에 혼사가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루트비히가 조피 도로테아와의 약혼을 파기하는 대신 돈을 받는 조건으로 잘 마무리 지었다.
조피 도로테아가 러시아의 황태자비가 될 준비를 시작하자 어머니 프리데리케는 딸의 결혼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군주들은 매우 불행한 최후를 맞은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딸도 그런 운명에 말려들까봐 크게 우려했다고. 하지만 조피 도로테아는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예비 시어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도 조피 도로테아에 대해 아주 흡족해했는데 조피 도로테아가 예카테리나 2세의 고향과 같은 독일 출신인데다 풍부한 교육을 받은 것, 예카테리나 2세가 개종하기 전 본명과 같은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이윽고 여제는 파벨 황태자와 조피 도로테아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고, 프리드리히 2세도 이 혼담을 진행하기 위해 예비 신랑 신부를 베를린으로 초대했다.
베를린에서 예비 신부를 만난 파벨 황태자는 어머니에게 조피 도로테아는 키도 크고 위트 있고 똑똑하다고 호의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조피는 파벨이 까다로운 성품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곧 파벨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갖게 된 조피는 결혼하기 위해 러시아에 도착해 정교회로 개종하고 새로운 러시아식 이름인 마리야 표도로브나로 개명했다. 그리고 1776년 9월 2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파벨 황태자와 결혼했다.
3.3. 황태자비
러시아 황태자비가 된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남편인 파벨에게 한결같은 애정을 가졌다. 마리야에게 파벨의 성격이나 태도는 실망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그녀는 늘 파벨을 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 파벨과 시어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의 사이는 매우 나빴기 때문에 그 사이에 낀 마리야는 매우 난감했다고 한다.이후 1777년에 장남 알렉산드르를 1779년에 차남인 콘스탄틴을 출산했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자신이 옐리자베타 여제에게 아들 파벨을 빼앗겼던 것처럼 손자들을 빼앗아가서 자신이 직접 키웠다. 두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긴 파벨과 마리야 부부는 당연히 매우 좌절했다.[9] 대신 마리야는 장남을 낳고 받았던 파블롭스크 궁전을 꾸미는 것에 집중했다.
파벨-마리야 부부는 여제에게 서유럽으로 여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1781년 '세베르니 백작 부부'라는 가명으로 1년 2개월 동안 폴란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등을 여행했다. 마리야는 이 무렵 다시 임신해 1783년 장녀 알렉산드라를 출산했고, 시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는 파벨-마리야 부부에게 알렉산드라를 키우도록 허락했다. 장녀 알렉산드라 이후 태어난 다섯 딸들과 한참 후에 태어난 늦둥이 아들들인 니콜라이, 미하일은 파벨-마리야 부부 슬하에서 성장했다.
마리야-파벨 부부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지속적으로 견제당했지만 마리야는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하면서 정치적인 일보다 가정 생활에 집중했다. 그러나 마리야는 자신의 시녀 예카테리나 넬리도바와 파벨이 연애 관계인 것을 알고 실망했지만, 그들이 플라토닉한 사이라는 파벨의 말을 믿었다고 한다.[10]
마리야는 공식 행사와 연회들을 좋아하고, 궁정의 작은 음모에 매우 관심이 많았으며 검소한 삶을 즐겼다고 한다. 매일 정장을 갖춰 입고 예법에 따라 행동했고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등의 일도 좋아했다.
남편 파벨도 매우 사랑한 나머지
예술을 사랑했고 그만큼 재능도 있었으며,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장신구를 종종 지인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원예에도 관심이 많아서 평생 꽃과 식물을 키우거나 자선 사업과 교육 기관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마리야는 자신만이 남편을 사랑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고 시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애인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3.4. 황후
1796년 11월에 예카테리나 2세가 승하하면서 남편 파벨 1세가 러시아의 황제로 즉위하여 마리야도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다. 마리야 황후는 예술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황실의 궁전들을 꾸미고 예술과 관련된 기관의 설립에 기여했다. 또한 자신의 친척들을 도와 러시아에서 지내도록 도와줬다고 한다.1798년, 막내이자 4남인 미하일을 낳았지만 남편 파벨 1세가 어린 안나 로프키나를 정부로 삼자 부부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안나 로프키나를 그저 딸처럼 여긴다며 변명했다. 파벨 1세는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정치 파트너들에게 반감을 가져서 어머니 시절 제정된 정책과 관련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대표적으로 여성의 황위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선포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파벨 1세를 향한 음모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줄마저 끊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3.5. 황태후
1801년 3월 23일, 일부 귀족들이 파벨 1세가 있는 성으로 가서 황제를 암살했다. 마리야는 남편의 죽음에 매우 충격을 받은 데다가 파벨 1세의 시신을 확인하는 중에 귀족들에게 위협까지 받았다. 장남 알렉산드르가 러시아의 황제로 즉위하여 황태후가 된 마리야는 러시아 궁정에서 최고로 서열이 높은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종종 장남인 황제와 함께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러시아 궁정의 살림을 총괄하면서 지위에서는 황후보다 황태후가 더 높다는 모습을 보여줬다.마리야 황태후는 자녀들을 매우 사랑했으며, 교육과 혼담같은 여러 면에서 자녀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 곁에서 자란 알렉산드르 1세와 콘스탄틴 대공과의 관계도 좋았고, 어린 딸들과 늦둥이 아들들도 매우 아끼며 좋은 모녀/모자 지간을 유지했다. 딸들에 대한 애정의 예시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태후의 딸들 중 한명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유럽의 폭도떼 두목(?)인 나폴레옹을 극도로 싫어한 마리야 황태후는 딸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시집 보냈다.[11]
1825년에 장남 알렉산드르 1세가 승하하고 차남 콘스탄틴 대공은 계승권을 포기하자, 3남 니콜라이가 러시아의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마리야 황태후는 황실의 큰 어른으로서 말년을 보냈고 특히 니콜라이 1세의 큰 아들인 알렉산드르 황태자의 교육에 매우 신경을 썼다고 한다. 이후 마리야 황태후는 황실 가족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으며 살다가 1828년 11월 5일 사망했다. 마리야 황태후가 승하한 뒤에도 황실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렸다고 한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 <colbgcolor=#fff3e4,#331c00>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 <colbgcolor=#ffffe4,#323300> 뷔르템베르크 공작 카를 알렉산더 (Charles Alexander, Duke of Württemberg) | |
뷔르템베르크비넨탈 공작 프리드리히 카를 (Frederick Charles, Duke of Württemberg-Winnental) | |||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엘레오노레 율리아네 (Princess Eleonore Juliane of Brandenburg-Ansbach) | |||
투른탁시스의 마리 아우구스테 (Princess Marie Auguste of Thurn and Taxis) | |||
투른탁시스 공 안젤름 프란츠 (Anselm Franz, Prince of Thurn and Taxis) | |||
로브코비츠의 마리아 루도비카 (Princess Maria Ludovika of Lobkowicz)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Princess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Margrave of Brandenburg-Schwedt)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필리프 빌헬름 (Philip William, Margrave of Brandenburg-Schwedt) | |||
안할트데사우의 요하나 샤를로테 (Princess Johanna Charlotte of Anhalt-Dessau) | |||
프로이센의 조피 도로테아 공주 (Princess Sophie Dorothea of Prussia) |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Frederick William I) | |||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Princess Sophia Dorothea of Hanover)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알렉산드르 1세 (Alexander I) | 1777년 12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 바덴의 루이제 공녀 슬하 2녀 |
2남 |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Grand Duke Constantine Pavlovich) | 1779년 4월 27일 | 1831년 6월 27일 | |
자네타 그루진스카야 | ||||
1녀 |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Alexandra Pavlovna, Archduchess of Austria) | 1783년 8월 9일 | 1801년 3월 16일 |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슬하 1녀 |
2녀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비 헬레나 파블로브나 (Helena Pavlovna, Hereditary Princess of Mecklenburg-Schwerin) | 1784년 12월 24일 | 1803년 9월 24일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슬하 1남 1녀 |
3녀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비 마리아 파블로브나 (Maria Pavlovna, Grand Duchess of Saxe-Weimar-Eisenach) | 1786년 2월 16일 | 1859년 6월 23일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슬하 2남 2녀[13] |
4녀 | 뷔르템베르크의 왕비 카타리나 파블로브나 (Catherine Pavlovna, Queen of Württemberg) | 1788년 5월 21일 | 1819년 1월 9일 | 올덴부르크 대공 게오르크 슬하 2남 |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1세 슬하 2녀[14] | ||||
5녀 | 올가 파블로브나 여대공 (Duchess Olga Pavlona) | 1792년 7월 22일 | 1795년 1월 26일 | |
6녀 | 네덜란드의 왕비 아나 파울로브나 (Anna Pavlovna, Queen of Netherlands) | 1795년 1월 18일 | 1865년 3월 1일 | 빌럼 2세 슬하 4남 1녀[15] |
3남 |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 1796년 7월 6일 | 1855년 3월 2일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슬하 4남 4녀[16] |
4남 |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Pavlovich) | 1798년 2월 8일 | 1849년 9월 9일 | 뷔르템베르크의 샤를로테 슬하 5녀 |
5. 여담
- 아름답고 생기있는 외모에 키까지 큰 미녀로 유명했다. 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근시가 심해지고 살이 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미인 유전자만큼은 로마노프 왕조에게 제대로 물려줬다. 남편 파벨 1세는 키가 작고 볼품없는 추남이었지만 조피의 유전자가 이겼는지 니콜라이 1세를 비롯한 그 아들들은 모두 장신의 미남으로 이는 전적으로 조피 도로테아의 외모 덕이라는 평이 대다수.
- 러시아 황족으로서 드물게 검소한 절약가로 알려져 있어 남편 파벨 1세의 전처인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 황태자비의 옷을 물려 받아 입었다고 한다.
[1] 현 폴란드 자호드니오포모르스키에 주 슈체친.[2] 조지 5세의 왕비 테크의 메리의 증조부이다.[3] 1921년 뷔르템베르크 왕가 직계가 단절된 후 명목상의 뷔르템베르크 왕위를 이은 알트하우젠 분가의 시조이다.[4] 샤를로테의 어머니이자 니콜라이 1세의 장모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가 아름답고 뛰어난 외모의 미녀였다.[5] 11세기에 시작되어 15세기에는 공작령이 되었으며, 이후 19세기까지 이어지다가 마침내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왕국으로 승격되었다.[6] 프랑스에 있었던 몽벨리아르는 뷔르템베르크 가문의 영지였다.[7] 본명은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8] 어머니 프리데리케의 외삼촌이다. 외할머니 프로이센의 조피 도로테아의 오빠.[9] 부부는 아들들을 일주일 중 한 번씩 밖에 방문하지 못하는 등, 부모 역할을 못했기 때문에 좌절감을 느꼈다고 한다.[10] 넬리도바는 마리야가 가장 친밀하게 지낸 시녀였지만 이 일이 있고서는 서로 멀어졌다고 한다.[11] 각각 장녀 알렉산드라는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차녀 옐레나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비, 3녀 마리야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비, 4녀 예카테리나는 올덴부르크의 대공비가 되었다가 재혼으로 뷔르템베르크의 왕비가 되었다. 이중 나폴레옹이 청혼한 사람은 마리야 황태후의 4녀 예카테리나였지만 황태후가 재빨리 올덴부르크로 시집 보내면서 무산되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이번엔 막내딸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과의 결혼을 제안했으나 황태후는 안나의 나이가 어리니 다 크면 시집 보내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결국 한시라도 빨리 결혼해 후계자를 봐야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 황실과의 혼담을 포기했다. 막내딸 안나는 네덜란드의 빌럼 2세에게 시집가서 네덜란드의 왕비가 되었다. 왕가 혈통에 아들 낳아줄 '자궁'만 있으면 아무 여자든 상관 없다고 떠들던 나폴레옹은 곧장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2세의 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12] 1796년 결혼/1820년 이혼.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와 자매지간.[13] 독일 제국의 황후이자 프로이센의 왕비 아우구스타 등.[14] 네덜란드의 소피 왕비 등.[15] 빌럼 3세 등.[16] 알렉산드르 2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마리야,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 헤센카셀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공자비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