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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4 11:13:21

해피 밸리 전투

제궁현 전투에서 넘어옴

파일:대한민국 국기(1949-1997).svg 6.25 전쟁의 전투 및 작전 목록 파일:북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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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투 전 상황3. 전투 경과 (1.3 ~ 1.4)4. 여담

1. 개요

1951년 1월 3일부터 4일까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 및 고양군 고양동 일대에서 영국 제29보병여단과 중공군 116사단이 맞붙은 전투.

해피밸리라는 지명은 노고산좌우 양옆 송추와 일영 일대의 계곡지역을 해피밸리라고 칭한다.

이중 가장 큰 피해를 본 로얄 얼스터라이플스 제1대대의 매복 기습을 당한 전투가 주로 해피밸리 전투라고 알려져있다.

얼스터 대대가 삼상리 일대에 주둔했을 때 그곳의 옛 이름이 은퇴한 내시와 여자 상궁들이 살았다는 뜻의 제궁동이었고 그 주변의 고개가 제궁현이었는데 영국군들이 제궁현을 Chaegunghyon으로 표기하면서 영국군 전사에는 Battle of Chaegunghyon으로 불리고 있고 혹은 대한민국 일부 전사에서는 고양 전투라고도 부른다.

2. 전투 전 상황

얼스터 대대는 1793년 북아일랜드에서 창설된 영국군 부대로, 1950년 11월 5일 한반도에 상륙해 여느 UN군들처럼 평양 이북으로 진격하다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12월 10일 들어 경기도 북방까지 밀려 서울을 다시 포기해야할 상황이 되자 영국연방 부대들은 경기도 북부에 진지공사를 해 군경과 서울 시민들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게 시간을 벌려고 했고, 얼스터 대대 역시 ​양주군 장흥면과 고양군 사이 교외선이 놓여진 쟁고개[1] 일대 능선군에 ​진지들을 구축해 서쪽의 미 35연대 2대대와 동쪽 퓨질리어 대대와 연계해 중공군의 서울 구파발 진입을 막으려 했다.

이 와중에 영국 29보병여단 측에선 글로스터 대대[2]를 후방에 예비로 두고 화력 지원을 위해 전차를 동원하려 했으나 우마차가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도로가 협소하다는 문제점 때문에 주력이었던 센추리온 전차 대신 아담한크롬웰 전차를 배치하게 되었다.

3. 전투 경과 (1.3 ~ 1.4)

파일:해피밸리_얼스대`배치.png
1월 3일 당시 쟁고개 서쪽엔 B, D중대가, 북쪽 정면은 A, 동쪽 능선엔 C중대가 있었으며, 메네미 고개는 6시 pass 부근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오전 7시 중공군이 북쪽 정면이 아닌 서쪽 고양동에서 침투해 들어왔고, 뜬금없이 백기를 들어 얼스터 대대원들의 방심을 노렸다. 그리고는 기습을 가하는 식으로 서쪽 능선군을 하나씩 장악해 나갔고, 이에 토니 블레이크 대대장도 전방의 A중대와 수색소대를 서쪽 능선에 보내 박격포와 전차 지원을 해가며 탈환을 시도했다. 이후 정상 부근 고지에 다다르자 그곳에 있던 중공군들을 목표로 미 공군 요청을 해 네이팜 탄으로 불태워 버려 탈환에 성공했다.

한편 오후에 다다르자 한국군 1사단 1개 대대가 영국군의 철수를 위해 후방 메네미 고개에 배치되었는데, 블레이크 대대장이 혹시 있을지 모를 철수에 방해된다고 철수시켜 메네미 고개가 무주공산이 되고 만다.

그리고 오후 6시 30분, 서울 이남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서쪽의 미 35연대가 오후 4시경 완전히 철수한 데 이어 송추국민학교 앞 삼거리에 주둔하고있던 여단의 다른 대대들도 오후 5시경 철수해버려 얼스터 대대만이 홀로 돌출된 형국이 되었다. 대대원들은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철수 준비를 하였는데 이것저것 다 챙기느라 시간이 지체되었고, 이 와중에 피란민으로 위장한 염탐꾼들이 미군이 빠져나간 고지군들을 염탐하다 얼스터 대대의 상황을 파악했고, 이 정보를 근거로 상당수의 중공군들이 후방 메네미 고개 일대에 침투해 환영 준비를 해놨다.

한편 이 와중에 짐을 다 꾸린 얼스터 대대원들은 교란사격 속에서 전차중대를 후미로 삼아[3] 철수를 시작했는데, 오후 9시경 미 공군이 뜬금없이 일대에 조명탄을 투하하는 악재가 겹쳤고, 게다가 중공군들이 행렬 뒤쪽을 공격해 메네미 고개 쪽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1월 4일 자정 무렵 얼스터 대대가 메네미 고개에 다다르자 매복중인 중공군들이 사방에서 공격했고, 심지어 크롬웰 전차의 궤도에도 방망이 수류탄 여럿을 묶어만든 집속수류탄을 던졌는데 얇은 장갑만큼 궤도도 얇아서 손쉽게 끊겨버렸고, 이 상태에서 저항하거나 밖으로 나온 전차병들은 하나씩 사상당했다. 그렇게 총격은 새벽 3시 40분까지 이어졌고, 일부는 서쪽으로 우회[4]해 탈출하려고도 했다.

이윽고 날이 밝자 고개 곳곳에서 그 참상이 분명해졌다. 일단 중공군에게 약탈당한 영국군 수백이 사상당한 채 널부러져 있었고[5] 크롬웰 전차 14대도 파손된 채 퍼져 있었다.[6] 그나마 극소수인 10여명만이 전투 직후 정찰기를 보고 신호를 보내 헬리콥터로 구조되거나 탈출에 성공하여 빠져나가 이 참상을 증언할 수 있었다. 이후 중공군들은 영국군 시체들을 방치하고 떠났고,[7] 이 날 서울이 중공군에게 함락당했다.

4. 여담


[1] 다만 얼스터 대대 자체적으로는 콤프(Comp)밸리로 부르다 주임상사가 이왕 좋게 부르자며 건의해 해피밸리로 불렀다.[2] 설마리 전투의 그 대대다.[3] 사실 쿠퍼 전차중대장이 제일 먼저 철수하겠다고 했으나 엔진 구동음이 크고, 전차보다 보병들이 취약하다며 거절당했다.[4] 위 지도 메네미 고개 앞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화살표들.[5] 이후 확인된 바에 따르면 대대장을 포함, 157명이 죽었다고 한다.[6] 다만 아직 온전한 전차들은 수리 후 중공군과 북한군이 그대로 썼고, 그 중 한대는 서울 탈환때 한강철교 밑에 어중간하게 숨어있다 영국 센추리온 전차에게 파괴당했다.[7] 다만 주민들은 이대로 놔두기엔 안됐다며 고개 북쪽 부근에 합장시켰으며, 정국이 안정된 1956년 이장을 개시해 부산 재한유엔기념공원이나 영국 본토로 이장했다.[8] 군인, 군무원, 노무자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