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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5:58:06

정성현(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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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file2.instiz.net/0ffcc721149281167d02fc10cffc7793.jpg
2002년 촬영된 사진
이름 정성현
출생 1969년 7월 14일 ([age(1969-07-14)]세)
충청남도 보령군 (現 보령시)[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가족 2남 1녀 중 장남
신체 170cm, 68kg
학력 대림대학교 (컴퓨터과[2] / 전문학사)
범죄유형 연쇄살인, 강간살인, 아동 성폭행
형량 사형 (형집행 무기한 대기)

1. 소개2. 성장 배경3. 범행4. 또 다른 범행5. 이후6. 기타

[clearfix]

1. 소개

파일:external/thumb.mt.co.kr/2016031515214386653_2.jpg
검거 당시. 인터뷰
2007년 12월 25일에 두 명의 초등학생성폭행 시도하다가 죽여 토막낸 뒤 암매장한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

추가로 3년 전인 2004년에 한 여성을 잔인하게 폭행해 숨지게 한 뒤 수사 과정에서 온갖 거짓말로 위장해 무혐의로 풀려난 전과가 있었다. 후에 진상이 밝혀진 뒤 상해치사로 판결되었다.

2. 성장 배경

1969년 7월 14일 충청남도 보령군(현 보령시)에서 버스 운전기사인 아버지미용사어머니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서울로 상경한 이후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상위권 성적을 기록하며 특별한 문제 없이 잘 컸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가정불화가 시작되었고, 급기야 부모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그 후 어머니는 정성현 곁을 떠나고 아버지는 어린 3남매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는지 새어머니를 들여 재혼한다.

새어머니와 같이 살기 시작한 정성현은 '어머니에게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게다가 아버지와 새어머니 사이에 이복남매 2명이 생기게 되자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이복 형제들을 편애한 것으로 인해 심한 폭력이 더해져 비정상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모양. 정성현은 유년기에도 아버지로부터 폭력과 학대를 당하였으며 초등학교, 중학교 재학 당시 친구들로부터 집단따돌림에 시달리는 바람에 고등학교 생활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87년에는 대림대학교 컴퓨터학과에 합격하였고 이후 군 부사관에 지원해 5년 후 제대한 뒤 대학교도 별 문제 없이 졸업 했다.

이후에는 폭행 등으로 인해 몇 개의 전과가 있었는데 1998년 8월 한 여성에게 만나 줄 것을 요구하며 스토킹했으며 이 여성의 남자친구까지 폭행해 전치 4주의 상해를 입혀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몇 달간 교도소 생활을 했다.

정성현은 3명의 여성과 꽤 깊은 만남을 가졌다. 심지어는 결혼을 전제로 사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 모두에게서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은 후부터는 정상적인 이성 교제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모두 정성현의 일방적인 진술이니 걸러들어야 한다. 정성현의 일방적인 스토킹이었을 수 있다.

2006년에 동거녀[3]사망했다. 사인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질환. 당시 37세였던 정성현은 동거녀가 죽은 뒤 혼자 살면서 야동에 탐닉했다. 결국 정성현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 여자친구에 대한 증오 등을 겪으며 점점 더 여성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다.

검거 당시 집의 컴퓨터에서 발견된 야동 파일만 무려 1,400개였다. 그중에서도 하드코어에 속하는 아동 음란 동영상스너프 필름[4]이 유독 많았다. 아예 따로 아동 포르노 폴더를 만들어 두었는데, 그 속엔 미성년 나체 사진 441개와 (아동) 포르노 780여 편이 들어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아동 포르노 소지 사실이 드러나자 정성현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형사님도 포르노 보면 더 자극적인 거 원하잖아요?'라며 오히려 당당했다고 한다.

검거 이후 측정된 IQ는 121로 살인 범죄자들 중에서 꽤 상위권이었다.#

3. 범행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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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p1_071231035800.jpg
당시 피해 아동 실종 포스터

정성현의 경찰 진술에 따르면 2007년 12월 25일(크리스마스) 새벽대리운전을 마치고 아침부터 대학교 선배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것으론 부족했는지 몰라도 자리를 옮겨 생맥주를 2,000cc 마셨다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급기야 비닐봉지에 본드 흡입까지 했다고 한다. 정성현은 경찰 수사 과정에서 "환각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성인 여성은 상대하기 벅차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어리고 약한 초등학생을 택했다. 때마침 동네에서 놀고 있던 두 여자아이인 이혜진 양(1997년생, 당시 만 10세)과 우예슬 양(1999년생, 당시 만 8세)을 발견하고 정성현은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성폭행을 시도했는데 아이들이 반항하자 제압하고 모두 처참하게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냈다.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정성현은 시신훼손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는 시신의 발목부터 무릎, 허벅지 순으로 잘라냈다. 정성현은 이혜진 양의 시신을 빨간색 플라스틱 통에 담아 렌트해 온 차량(뉴 EF 쏘나타)의 트렁크에 싣고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인근의 야산과 근처 하천에 암매장하였다. 다음날 12월 26일 새벽 4시 쯤에는 똑같은 방법으로 우예슬 양의 시신을 아까와는 달리 시흥시 군자천에 버렸다. 그리고 정성현은 아침이 밝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배가 운영하는 회사를 찾아가 태연히 컴퓨터를 고쳐줬고 오후 3시 쯤에는 렌터카를 반납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78일 후인 2008년 3월 11일,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에서 훈련 중이던 예비군이 여아의 시신 머리부분이 밖으로 노출된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시신은 30cm 깊이로 암매장되어 있었고 무려 10토막으로 잘려 있었으며 일부 신체 부위에서 자국이 발견되었다.

국과수DNA 검사 결과 시신은 이혜진 양으로 확인되었고 이혜진 양의 생환을 기다리던 가족들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시신 상태로 미뤄 실종 직후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었고 정확한 사인과 사망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혜진 양은 1남 2녀 중 막내딸로 온 가족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는지라 충격이 더욱 컸다고 한다. 결국 7년 후 2014년, 애교 많은 막내딸을 유독 예뻐하던 혜진 양의 부친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관련 뉴스 관련 뉴스2 이혜진 양의 집은 범인 정성현의 집과 매우 가까웠던 데다 소문이 나서 팔지도 못하고 그대로 살고 있다고 한다. 혜진 양의 남은 가족들에겐 범죄 피해는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혜진 양의 모친 또한 상당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성한 치아가 없고, 사건 이후 제대로 생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경찰은 이혜진 양의 집에서 약 130m 떨어진 곳에 혼자 살고 있는 정성현이 사건 당일인 2007년 12월 25일 렌트카 회사에서 차량을 빌린 후 다음 날인 26일에 반납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경찰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정성현은 12월 25일 사건 당일에 집 안에만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은 해당 렌트 차량의 트렁크에서 혈흔을 확보해 혈흔의 DNA 감식을 의뢰했고 두 어린이와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2008년 3월 16일, 정성현은 그의 고향 충청남도 보령시에 위치한 그의 어머니 집에 있던 도중 경찰에 검거되었다.

정성현은 체포 후 수사 과정에도 계속된 거짓말과 허위 진술로 수사당국의 혼선을 유발했다. 그 중 대표적인 거짓말이 두 어린이들을 차로 치어 죽게 만들었다는 말이었다.

정성현은 두 아이를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후 당황하여 시신을 유기하였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경찰이 교통사고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고 거기다 혈흔 및 렌터카 대여 기록을 증거로 대면서 압박을 주자 3월 17일 낮 12시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자백 후에도 진술이 오락가락해 수사가 원활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사망이 확인되었지만 시신이 없어 실종상태였던 우예슬 양을 시화호에 묻었다고 하다가 다시 경기도 시흥시오이도에 묻었다고 하는 등 진술에 일관성이 없었다.

3월 18일, 정성현이 시신을 유기하였다고 지목한 장소 중 하나인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군자천을 수색하던 해병대 전우회 회원이 오후 4시 43분경 군자천 군자7교에서 군자8교 사이 제2간선 수로에서 돌에 걸린 어린이의 토막 시신을 발견했고, 오후 6시경 상류쪽으로 1㎞쯤 떨어진 군자6교와 군자7교 사이에서 시신 일부를 추가로 발견했으며 오후 6시 30경에는 군자5교 인근에서도 찾아냈다.

3월 19일 국과수는 이 토막 사체들이 우 양이 맞다고 발표하면서 우 양의 사망도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당일 수원지법은 정성현을 구속한 뒤 3월 22일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시신을 인도받은 우 양의 유족들은 장례를 치렀다. 예슬 양의 가족들은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 이후 종적을 완전히 감추고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현재까지 생활상 및 근황을 알 수 없다.

정성현은 사망한 두 초등학생과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평소에 잘 알던 이웃집 아저씨였으며, 꽤나 안면이 있었다고.[5] 이 점을 악용해서 아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2년 뒤인 2009년, 대법원에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 확정되었다. 처음부터 살해 의도를 가졌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피해자들을 유인해 살해하고 시체를 훼손해 숨기는 과정을 종합하면 피고인의 범행이 결코 우발적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피해자들이 나이가 어린 초등학생인 점, 성폭행을 시도한 점, 이전에 군포 도우미 여인 상해치사로 전과 기록이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정성현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었다.[6]

4. 또 다른 범행

이 사건이 발생하기 4년 전인 2004년 7월 17일 새벽 1시 경 경기도 군포시의 한 전화방을 찾은 정성현은 도우미인 정모(43, 1961년생)씨와 전화로 음담패설을 나누면서 성적 흥분을 느꼈다. 당시 36살이었던 정성현은 자신보다 8살 많은 정씨에게 성매매를 제안했다. 정씨가 동의하자 두 사람은 금정동 금정역 인근 W 모텔에서 만나 성관계를 시도했는데, 그녀가 대가를 너무 많이 요구한다는 이유를 들어 정성현이 거절하자 정씨는 그를 모욕했고 분노한 정성현은 수차례 폭행했다. 결국 정 모씨는 사망했고 정성현은 사망한 정 씨의 시신을 집 근처 야산 등에 유기했다. 물론 이 경위와 원인도 정성현의 일방적인 진술에 의거한 것이므로, 걸러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7]

정씨의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정성현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은 정씨가 방바닥으로 넘어지면서 발생한 뇌출혈이었다. 정성현은 7월 17일 새벽 2시쯤 시신을 모텔에서 끌고 나왔으며, 모텔 주인은 그저 에 만취한 그녀가 정씨의 등에 업혀 나갔나 보다 여겼지만 사실 정씨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정성현은 모텔 근처 골목에 숨진 정씨를 잠시 앉혀 놓은 다음 를 가져와 시신을 집으로 옮겼다. 이로부터 4년 뒤 그가 두 어린이들에게 저지른 범행방식과 같은 방식이다. 시신을 토막낸 정씨는 시신을 검은색 비닐봉지에 나눠 넣고 집 근처 야산에 묻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다시 그는 야산으로 가 묻혀 있던 그것들을 꺼내어 군포시에 있는 다른 야산에 옮겨 암매장했다.

정씨가 실종된 바로 다음 정씨가 정성현과의 마지막 통화 이후 종적을 감췄음을 확인한 경찰은 정성현을 소환했다. 경찰은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통해 거짓 반응까지 얻어냈지만, 정성현은 "대리운전 때문에 통화한 것"이라고 진술하며 완강히 부인했다. 또 휴대전화 위치확인 시스템 등을 근거로 알리바이를 입증하자 하는 수 없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 사건은 살인이 아니라 상해치사로 결론지어졌다.

5. 이후

사형수로 수감 중에 자기에 대해 보도한 언론을 비롯하여 담당 형사, 교정직 공무원까지 꼬투리만 잡히면 무차별적으로 고소와 민사상 소 제기, 심지어 행정소송까지 온갖 사법구제절차 남발(남소)하고 있다고 한다. 전혀 반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 이런 소송은 모두 기각되었다.#

2010년 3월, 전 국민적인 사형집행 요구와 당시 법무부의 강력한 사형 집행 의지로 유영철 등과 함께 사형 집행이 검토되어 사형당할 뻔 했지만 당시 청와대가 반대해 무산되었다. 만일 청와대의 반대가 없었다면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2023년, 유영철, 정두영 등 이미 사형 대기 중인 연쇄살인범들이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었을 때도 정성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 이미 정성현은 서울구치소에서 쭉 수감 중이었기 때문. 만약에 이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다면 그 때쯤에 정성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언급될 것으로 보인다.

6. 기타



[1] 어릴 적 서울특별시로 상경했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보령에 거주 중이다.[2] 호적상 1969년 7월생이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87학번이다. 아마 복잡한 사연이 있는 듯하다. 다만 그 당시 읍, 면 단위에서는 3월 이후 출생하였어도 별다른 조치도 없이 빠르게 입학했기에 별다른 사연이 없을 수도 있다.[3] 결혼할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4] 사람에 대한 학대, 강간 등의 내용을 담는 동영상이다.[5] 범인이 잘 알던 이웃집 아저씨였다는 점이 사건 진행 당시 더 큰 충격을 주었던 요소였다.[6] 이로서 대한민국의 사형수는 모두 59명이 되었다.[7] 정성현이 자극적이고 가학적인 포르노를 즐겨 온 것으로 볼 때 아마 정씨에게 가학적인 성행위를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폭력적으로 돌변했을 가능성이 크다.[A] 원 기사 삭제로 다른 링크 첨부[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