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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바티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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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바티칸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고대2.2. 중세2.3. 근세2.4. 19세기2.5. 20세기 전반2.6. 20세기 후반2.7. 21세기
3. 소속감4. 대사관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이 문서는 이탈리아바티칸의 관계를 서술해놓은 문서다.

이탈리아바티칸은 서로 공생관계이다. 전임 교황들인 요한 바오로 2세베네딕토 16세 선종 때도 이탈리아에서 모든 경기나 유희거리 등을 중단하고 추모와 애도 분위기로 바뀌었을 정도로 두 나라는 공생 관계를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이탈리아 반도본토로 삼은 로마 제국기독교 박해로 인해 초대 교황 베드로[1]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기에, 이탈리아의 세속 권력과 교황청의 관계는 매우 험악했다.

그러나 313년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로마 제국과 교황청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고, 교황은 기독교 세계의 주교 서열 1위[2] 지위를 로마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380년테살로니카 칙령을 통해 기독교는 명실상부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는데, 동서 로마 분열 이후의 서로마 제국에서는 교황 레오 1세아틸라와의 협상을 통해 훈족으로부터 로마 시를 구원하기도 했다.

2.2. 중세

서로마 제국멸망시키고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가 된 오도아케르교황청이단으로 간주하는 아리우스파 신도였으나,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교황을 보호했고, 이는 마찬가지로 아리우스파였던 동고트 왕국에서도 지속되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벨리사리우스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동고트 왕국을 정벌하고 이탈리아 반도수복하면서, 교황청은 다시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휩쓴 이후에도 교황의 도시 로마를 보호하는 세력은 동로마였기에, 당시 교황들은 선출 이후에 그들의 주군인 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751년랑고바르드 왕국이 동로마의 이탈리아 통치 거점인 라벤나 총독부를 함락시키자, 교황청은 더이상 동로마의 보호를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프랑크 왕국피핀을 새로운 보호자로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피핀은 교황에게 세속의 영지를 기증하여 로마를 비롯한 중부 이탈리아 일대를 통치하는 군주로 만들어줬고, 800년에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가 교황에 의해 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면서, 교황을 보호하는 이탈리아의 세속 권력은 프랑크 왕국이라는 것이 더욱 확고해졌고, 프랑크 왕국의 3분할 이후에는 중프랑크 왕국과 그 뒤를 이은 중세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이 그 역할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점차 교황청은 가톨릭 교회의 모든 성직자에 대한 서임권을 독점하는 동시에 세속 권력까지 확보함으로써 세속 군주의 보호를 받는 지위에서 벗어나려 했고, 이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신성 로마 황제이탈리아 국왕 하인리히 4세를 무릎 꿇게 만드는 카노사의 굴욕으로 이어졌다.

이후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반격을 가하여 폐위시킴으로써 다시 황제가 우위를 점하는 듯 했으나,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자 교황권이 다시 강화되었고, 보름스 협약을 통해 교황이 서임권 투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둠으로써, 세속 권력에 대한 교황의 우위가 굳어졌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교황권이 다시 약화되기 시작했고, 14세기아비뇽 유수서방 교회 대분열을 겪으며 교황은 더이상 세속 권력을 압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2.3. 근세

서방 교회 대분열이 종식된 이후 교황권은 어느 정도 회복되는 듯 했으나, 1527년신성 로마 황제이탈리아 국왕 카를 5세가 고용한 독일 용병들이 교황의 도시 로마를 약탈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가까스로 목숨만 건져서 도망치는 초유의 사태가 터지면서, 교황청은 또다시 세속 권력과의 싸움에서 판정패를 당해야 했다.

또한 종교 개혁이 절정에 치달은 결과 일어난 30년 전쟁은 더이상 교황청이 유럽 대륙의 강국들이 벌이는 패권 경쟁에 유의미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줬고,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이탈리아에 국한되었다.

다만 교황령은 여전히 이탈리아 중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였기에, 이탈리아의 일개 도시국가들한테도 무시당할만한 나라는 결코 아니었고, 오스트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 이탈리아 내에 영지를 보유한 외부 세력도 이탈리아의 정세에 있어서는 교황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2.4. 19세기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이탈리아자유주의내셔널리즘이 확산되자,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이 등장했는데, 이탈리아 중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북부와 남부 세력의 통합을 가록막는 교황령은 통일운동가들에게 있어서 적폐나 다름 없었고, 실제로 1849년 로마에서는 통일운동가들이 일시적으로 교황을 축출하고 로마 공화국을 수립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861년에 수립된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령을 합병함으로써 통일을 완수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나폴레옹 3세가 파병한 프랑스 제국군로마에 주둔한 상태였기에 당장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제국군이 로마에서 철수하자 같은 해에 이탈리아 왕국군이 로마를 점령하여 교황령을 합병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을 완수했고, 교황 비오 9세는 이에 반발하여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총리 카밀로 카보우르파문하고[3], 스스로를 바티칸 포로라 칭하며 사도 궁전에서 칩거했다.

또한 검은 귀족이라 불리는 로마의 전통 귀족들과 가톨릭 성직자들은 역사적 극우파라는 파벌을 형성하여 이탈리아 왕국에 반대하고 교황령의 복원을 추구하는 활동을 지속했기에,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청의 험악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2.5. 20세기 전반

1919년에 창당된 가톨릭 정당이탈리아 인민당은 같은 해에 열린 총선에서 100석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이탈리아 왕국 하원에 입성했다.

그러나 1922년 로마 진군이라는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 파시스트당이 이탈리아 우파 진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자 인민당의 당세는 위축되었고, 1926년에 다른 야당들과 함께 강제 해산되었다.

다만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을 이끄는 베니토 무솔리니교황청에게 옛 교황령의 일부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진행했고, 1929년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왕국교황청바티칸 시국을 수립하는 것을 승인하고 가톨릭국교로 삼았으며, 교황청은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하며 화답했다.

2.6. 20세기 후반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는 격변이 일어났으나, 바티칸의 독립을 보장하고 가톨릭을 이탈리아의 국교로 하는 조항을 비롯한 라테라노 조약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가톨릭 정당기독교민주당[4]이 꾸준히 이탈리아 의회에서 원내1당을 차지했기에, 바티칸은 간접적으로나마 이탈리아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신자가 반드시 가톨릭 정당에 투표해야 할 의무[5]가 없어지면서 바티칸과 이탈리아 기민당의 연계가 약해졌고, 1983년 총선을 통해 집권한 이탈리아 사회당[6] 출신 베티노 크락시 총리1984년에 라테라노 조약을 수정함으로써 이탈리아를 세속 국가로 만들었다.

2.7. 21세기

2012년 2월, 막대한 국가 부채에 허덕이고 있는 이탈리아 정부가 교황청 소유 부동산 및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해 논란이 일고 있다. 바티칸을 위시한 가톨릭 교회가 보유한 부동산은 이탈리아 전체의 20%로, 성당은 물론이고 부속 학교(9천 개), 박물관 및 도서관(2300개), 병원(4700개) 같은 공공시설이 모두 포함되고 3분의 1은 호텔, 여행사, 상점 같은 상업용 설비라고 한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청이 소유한 '종교 기능' 부동산에는 과세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지만, 2012년 이탈리아 부동산세법 개정안에 따라 좀 더 엄격한 과세를 하기로 한 것이다. 교황청은 현재 실제 과세에 따른 세금이 연간 1억 유로(약 1480억 원)로 추정하지만, 이탈리아 세무당국은 최대 20억 유로(2조 7639억 원)은 될 것이라고 추정하는 모양이다.

3. 소속감

이탈리아 영토에 둘러싸여 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바티칸이 이탈리아에 속해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이고, 바티칸 자체가 국가라는 의식이 매우 강하다. 맞는 말이다. 한 일화로 성 베드로 대성당에 행사가 있어서 일찍 출입이 통제된 일이 있었는데, 관광왔던 일행의 가이드가 어떻게든 들어가보려고 설득해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흥, 역시 이탈리아는…"이라고 말했더니 통제하던 사람이 "여긴 이탈리아가 아니라 바티칸이거든?"이라 맞받아쳤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바티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성직자수도자인 것은 아니다. 단순 평신도인 사람들도 많이 있으며, 바티칸 국적자 외에도 이탈리아 국적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

사실 이탈리아인들도 바티칸에서 근무하는 것을 천국으로 여긴다. 통상적인 이탈리아 월급쟁이는 자기 소득의 40%가량을 세금으로 뜯기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탈리아 정부 입장에서 바티칸은 외국이므로, 이탈리아 국민으로서 바티칸에 취직한다면 이 사람은 그날부로 "돈 벌러 외국 나간 해외파견 노동자" 신분이 되어 이탈리아 공화국에 내야 할 세금 액수가 팍 줄어든다. 즉 바티칸 취업자는 다른 이탈리아인들은 못 누리는 사실상의 비과세 혜택을 받고 사는 것이다. 거기다 종신직(!!)이라 일단 한 번 고용되면 정말 중대한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절대 잘리지 않는다. 덕분에 바티칸의 관광객용 구내식당의 음식맛은 정말 심하게 맛이 없다. 따라서 바티칸 투어를 할 경우 웬만하면 미리 음식을 싸가도록 하자. 잘못하면 비싼 가격에 맛없는 음식으로 때울 수 있다.

4. 대사관

주 교황청 이탈리아 대사관은 로마에 있다. 즉 타국 주재 자국 대사관을 자국에 두는 것이다.

바티칸과 수교를 맺은 다른 나라도 이탈리아 영토에 대사관을 두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티칸의 면적이 너무 좁아서 대사관을 수용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5. 관련 문서


[1]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 다른 주교제 교회들도 베드로가 초대 로마 교황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개신교 등 주교제를 인정하지 않는 종파에서 이를 부정하고 있다.[2]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동방교회의 총대주교들은 어디까지나 명예상의 서열만 인정할 뿐, 로마 교황교회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교황수위권은 부정했다.[3] 다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 대한 파문은 해당 인물이 사망하기 직전에 취소되었다.[4] 이탈리아 인민당의 후신이다.[5] 물론 가톨릭 정당이 있는 나라 한정이었다.[6] 의석 자체는 기민당, 공산당에 이은 제3당이었지만, 기민당과 공산당이 둘다 이전에 비해 부진한 상태라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연정 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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