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정치인 이인제의 생애에 관한 문서.2. 정계 입문 이전
1948년 12월 11일에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아버지 이윤식과 어머니 김화영 사이의 4남 2녀 중 삼남으로 태어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특별시로 상경하여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다.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사법시험에 도전하려는 결심을 확고히 한다. 중앙정보부에게 교도소에서의 복역과 군 복무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받자 군 복무를 선택하고 육군에 입대하여 병장으로 전역한다. 31세인 1979년에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1년에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로 임용되어 1983년까지 재직한다.3. 정치 초년기
1983년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김영삼의 소개로 1987년 정계에 입문, 문민정부와 끝까지 같이 갔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지역구는 경기도 안양시 갑, 현재 안양시 만안구 지역이다. 초선의원 시절, 노무현, 이해찬과 더불어 5공 청문회 스타 3인방 중 한 명으로 유명했다. 이후, 통일민주당 → 3당합당 때, 그대로 김영삼을 따라 민주자유당에 남았고,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재선하였다.이듬해 19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만 45세 최연소 노동부 장관으로 기용되는 기록을 세웠다. 노동부 장관 시절 고용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업적을 남겼으며, 과거 변호사 시절부터 실상을 잘 알고 있었던 산업현장을 찾아 다니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등 발로 뛰는 장관의 모범을 보여준 덕분에 당시 국민들에게 상당히 좋은 이미지로 각인되게 된다. 하지만 파업 시 최저임금 지급[1], 전교조 해직교사 조건부 복직 문제를 놓고 이를 결사반대하는 다른 부처 및 공안기관과 불협화음을 내며 불과 10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난다.
4. 경기도지사 시절과 전성기
1995년 6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선거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 노동부 장관 시절의 좋은 이미지 덕분에 여유롭게 당선되면서 민주자유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에서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이런 명성에 힘입어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며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게 된다. 경쟁 후보인 이회창의 압도적 우세[2]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부터 이회창을 압박할 정도로 급부상하며 1차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하고 이회창과의 결선투표까지 갔지만, 결국 결선에서 패했다.그러나 당내 경선과는 상관없이 급속도로 성장세를 타던 자신의 독자적인 지지 기반에 부응 및 이회창이 아들 둘 모두 병역면제를 받은 것이 알려지면서 지지율이 자신의 지지율보다 낮은 상태로 계속 가자, 결국 같은 해 9월 13일에 대선후보 경선 결과 불복을 선언하며 탈당한 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신당 후보로 독자 출마, 19.2%를 받아 3위에 오른다. 사실 이 득표율은 소속 정당의 지역기반 없이 오직 이인제라는 인물 하나만 보고 얻은 득표로서 대한민국 역사상 인물빨로 얻은 득표수로는 최고 기록을 자랑.[3][4]
그런데 이인제의 경선 불복과 대권 행보가 단순히 이인제 개인의 정치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김영삼의 의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실제로 이회창의 최측근인 서상목 전 장관은 당시 이인제를 따라 신한국당을 탈당한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가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지지와 거리가 멀었던 중립인사였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이인제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는 음모론을 펼치기도 했다. 게다가 김영삼의 측근 중 하나였던 서석재가 이인제를 도왔던 점도 이런 의혹을 부채질했다.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국무총리 및 당대표로 있었던 이회창과 껄끄러운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던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과거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서 껄끄러운 관계로 말이 많았던 노태우를 4,000억 원 비자금 조성 및 12.12 군사반란 혐의 등으로 내쳤듯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될 경우 본인 또한 퇴임 후에 정치적으로 크게 다칠 것을 고려하여 이인제를 은연 중에 부추겨 이회창의 대권을 막게 한 것이라는 논지. 사실 이인제의 경우 1997년 당시 나이가 만 49세로 상당히 젊은 축에 속했기 때문에, 앞으로 차기 대권에서도 기회가 많았음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일리있는 논리였다.[5]
1997년 대선당시 이인제는 전두환 노태우 사면 공약을 내세워 논란을 빚었다. 당시 대선에서 이회창과 김대중후보뿐만 아니라 김영삼 정부가 이 전 노 사면을 추진하던 터라 이인제도 그 분위기에 편승해 전 노 두 전직대통령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지만...[6]경향신문 빠른 시일내 전 노 사면 이인제 기자회견 동아일보
여담으로 1997년 대선 당시엔 대선 후보로서는 최초로 독도를 방문하여 독도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 대응을 비판했다. 이인제 대선 후보 독도방문 1997.11.17 경향신문, 이인제 대통령 후보 독도방문
4.1. 결과 분석
이인제의 경선 불복 및 대선 출마 덕분에 보수 진영의 표가 분산되어 어부지리로, 자민련의 김종필, 그리고 박태준과 이른바 DJP 연합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출마 선언 후 상당 기간 여론조사 2위를 달리며[7] 위력을 보였으나, 신생 정당은 기존조직과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고, 이회창 측의 강력한 네거티브 공세로 인해 끝내 지지율이 뒤집히며 3위로 밀려났다. 만약 이인제가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이 아니라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득표 1위 김대중이 40.3%였고 2위 이회창이 38.7%이었으며, 1, 2위 표차는 불과 390,557표 차이었다. 3위 이인제가 19.2%임을 감안하면 본인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김대중 당선과 50년 만의 평화적 정권교체, 2000년 이후 정치판도를 만든 1등 공신인 셈.
그런데 DJP 연합 이후 김대중은 선거일까지 여론조사 1위를 놓친 적이 없는데, 정식 후보 등록 후 여론조사 1위가 항상 대권을 차지했다는 점을 들어 양자 구도로 갔어도 김대중이 이겼을 것이라는 시각도 제법 많다. 특히나 1997년 대선 예측조사에서 이인제가 청년층들에게 많은 표를 얻었고 중장년층에게 표를 적게 받았으니 보수표만 긁어갔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에는 김대중의 이미지가 청년층들에게도 호불호가 갈렸던 탓에[8] 1당도 2당도 싫다는 사람은 지금보다 당시가 더 많았고, 지금이야 당을 나와도 양 진영으로 구분되어버리지만, 당시에는 분명 중간에 위치하는 포지션이 있었기 때문. 또 김종필과 손잡은 것이 싫어서 이탈한 표도 많이 흡수했다.[9] 이를 반증하듯이 1997년 대선 투표자조사결과를 보면 이인제가 20대와 30대로부터 표를 많이 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인제가 흡수한 표는 결속력이 단단한 호남표 보다는 다소 느슨한 그 외 지역의 표로 봐야 한다. 선거운동 당시 '리틀 박정희'를 자처하며 보수층의 지지를 호소했으며, 이회창 후보 측에선 이인제 후보에 대한 투표는 사표(死票)가 된다며 후보 사퇴를 종용해 많은 물의를 낳기도 했다. 이때의 유명한 구호 대결이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와 이에 맞서는 "이인제를 찍으면 이인제가 됩니다"였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조선일보사에서 발간된 김영삼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미 김영삼이 대선 후 자신의 임기 내에 전노의 사면을 기획하고 이 사안을 15대 대통령 당선 뒤에도 문제없이 처리하기 위해 비밀리에 진행하면서도 김대중에게도 허가를 구하는 등 극비리에 사안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이회창이 이인제에게 지지율에서 열세를 달려서였는지 최후의 카드로 추석 전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을 직접 건의하겠단 카드를 들어버린다#. 이회창은 그 뒤에도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대선 전에 사면해 줘야된다고 10월 6일, 인터뷰에서 밝혔으며이회창 후보 집권 땐 권력구조 개편, 전두환, 노태우 대선 전 사면 이인제도 12월 16일, 자신이 당선되면 빠른 시일 내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겠다고 공약으로 내세웠다.이인제후보 전두환, 노태우 사면[10] 사실상 이인제의 흥행이 전노의 사면을 공약을 만들게 된 원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5.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
15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약 8개월간 이만섭과 더불어 국민신당을 지켰으나, 1998년에 치러진 4월 재보선, 2회 지방선거, 7월 재보선 등 연이은 선거에서 국민신당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이인제의 고향인 논산시에서만 시장을 배출하는 데 그쳤을 뿐이었다. 한편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연정 역시 의석 수 부족 및 차기 정치 지도자 부재[11]를 통감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눈에 들어온 정당과 인물이 국민신당과 이인제였다. 1998년 8월 29일, 국민신당이 국민회의와의 합당[12]에 합의하면서, 이인제는 일약 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게 되어 속칭 이인제 대세론을 이루게 되고 다음 대선에서는 이회창vs이인제의 구도가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이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선대위원장을 맡아 비례대표를 마다하고 자민련의 텃밭인 고향 논산에 출마, 현역 김범명 의원을 꺾고 당선되면서 그의 주가는 최정점에 달했다. 1999년 말, DJP연합이 무너지면서 민주당은 충청권에도 모두 독자후보를 내세웠는데, 이인제가 직접 고향에 출마하자 기존 민주당의 약세 지역이었던 충청권 전역에서 민주당 후보들의 득표율이 급상승한 것이다.[13]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이 제1당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자민련과 후보를 따로 냈음에도 수도권 97석 중 56석, 강원에서 9석 중 5석을 차지하여 수도권과 강원도에서는 1당이 되었고, 1석도 없던 충청권에서 단숨에 8석을 획득했다. 당시 영남을 제외한 전국 지역구에서 민주당은 96석, 한나라당은 48석을 얻어 정확히 더블스코어를 기록했다. 한나라당이 영남 65석 중 정몽준의 울산 동구를 제외한 64석을 휩쓰는 초유의 지역주의 광풍을 일으킨 바람에 전체 지역구에서는 한나라당 112석, 민주당 96석으로 밀려버렸고, 비례대표에서도 한나라당 21석에 민주당 19석이 나오면서 한나라당 133석 대 민주당ㆍ자민련 132석으로 총선이 끝이 나긴 했지만 말이다.[14] 그래도 당시 기준으로는 1960년 총선 이후 민주당계 정당으로서 최다 의석을 따냈을 뿐 아니라 민주당을 명실상부하게 전국정당으로 만든 선거결과였기 때문에, 당시 민주당 안에서 이인제의 위상은 그야말로 민주당 내에서 뿐만 아니라 이회창과 대등한 정도의 최강의 대선주자였다.
6.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경선이 시작될 때만 해도 새천년민주당의 16대 대선 후보로 가장 유력했다. 그러나 노무현이 국민참여경선 과정에서 노풍을 일으키자[15], 보이지 않는 손[16] 운운하며 '김심론'[17]을 주장하다가 이것이 먹히지 않자 경기지역 경선을 앞두고 경선을 중도 포기한다.보이지 않는 손은 실제로 평생 김대중을 모셨던 권노갑, 김옥두 등 동교동계 주류가 이인제를 필사적으로 밀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설득력이 없었다.[18] 거기다 탈락한 된 데에는 권노갑이 연루된 불법자금 게이트로 몰락하면서 권노갑 등 구 동교동계 조직의 지원을 받던 이인제의 조직력 역시 약화되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으니.
이인제가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광주광역시 경선이었다. 세 번째 지역이었던 광주광역시 경선이 최대 분수령이었는데, 경선 전의 분위기는 광주가 홈그라운드였던 한화갑과 대세론 이인제가 각각 1, 2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됐었다. 그런데, 광주 경선 직전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vs 이회창 양자 구도에서 모든 여론조사를 통틀어 민주당 후보 중 노무현이 유일하게 이회창을 앞서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뜻밖의 여론조사 결과[19]와 노사모의 지지 운동[20]에 이인제는 2위를 기록한다. 물론 그 다음 경선 지역인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에서는 예상대로 충청권 기반의 이인제가 노무현에 비해 4~5배 많은 득표율(67%, 73.3%)로 1위를 거둠에 따라 누적득표에서도 1위로 노무현을 제치고 크게 앞서나간다. 이로 인해 광주 경선에서 불이 붙었던 노풍이 잠시 주춤하고 이인제 대세론이 다시 탄력을 받게 된다. 이때까지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혼탁한 경선이였다.
여섯 번째 지역 강원도 역시 분수령이었다. 결과적으론 630 : 623, 단 7표 차이로 이인제가 2위를 차지하며, 노풍이 다시 불붙고 이인제 대세론은 사그러든다. 그리고 이인제에겐 하필 강원도를 끝으로 영남 지역들의 경선이 줄줄이 예정되어 있었다. 경상남도에서 약 4배 차, 전라북도에서도 1위, 또한 대구광역시에서 두 배 차로 결국 누적 득표 1위를 빼앗긴다. 인천광역시 경선에서 충청도 출신들이 많이 사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 재역전을 노리며 "노무현 장인은 남로당 선전부장으로서 중형을 언도받아 전향하지 않고 옥사하여..."와 같은 낯뜨거운 색깔론까지 동원해가면서 노무현을 집요하게 물어뜯으며 노풍 차단에 힘썼지만, 인천[21]에서도 8.1%차로 2위. 패색이 짙어진 상황이였다.
12번째 지역 충청북도에서 노무현에게 두 배 차이의 승리를 거뒀지만 전라남도에서 약 3배 차이로 패배하며 승부에 쐐기를 박아버리자 결국 사퇴하게 된 것이다.
7. 계속되는 탈당
이후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 후보 낙선운동에 나섰으나, 각종 공작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승승장구하자 결국 16대 대선 직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충청권 지역정당인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다. 이후 여러 정당들을 떠돌면서 선거 때마다 매번 아슬아슬한 격차로 당선되며 결국 피닉제라는 애칭 겸 멸칭을 얻게 된다..2005년 말 심대평 충남지사를 따라 자민련을 탈당하고 새로 창당된 충청권 지역정당인 국민중심당에 합류했으나 2007년 5월 심대평과의 갈등으로 다시 탈당한다. 이후 한때 몸담았던 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인 민주당에 약 5년만에 복당하여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본선에서는 0.7%라는 미미한 득표율을 기록했고,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허경영에게도 뒤지는 처참한 결과를 얻었으며, 그 직후 민주당이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해 통합민주당으로 출범한 뒤 열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천에서 탈락했고,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다.
실제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의 연속되는 세 선거가 모두 압권인 게,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출마한 17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의 역풍으로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 양승숙 후보에게 계속 밀리다가 정작 개표에서는 승리했으며,[22] 18대에서는 당시 통합민주당 공천 탈락에 불복하여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했는데 무소속인 본인을 포함해 한나라당,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후보가 출마하는 5파전 선거구도가 벌어지면서 27.7%라는 말도 안 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대에서도 17대처럼 김종민 후보에게 출구조사에서는 밀렸지만 개표에서는 금산군의 몰표로 뒤집고 당선되었다.
8. 15년 만의 보수정당 복귀
18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에는 3년 동안 무소속으로 의정 활동을 하다 2011년 말 자유선진당에 입당하며 이회창과 해후하게 된다. 자유선진당은 19대 총선에서 참패했지만 이인제는 새누리당 이창원 후보, 민주통합당 김종민 후보와의 3파전에서 승리하여 의원직을 유지해서 비상대책위원장, 대표까지 올라섰고 당명을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바꾸며 나름대로 제3지대로 자리잡으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은 철저한 양강구도로 흘러갔고 이인제는 새누리당과 선진통일당의 통합을 주도하면서 15년 만에 보수정당으로 복당하게 된다.2014년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는 최고위원직에 당선되었고 친박계와 행동을 같이 하며 신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9. 저물어가는 정치 인생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후보와 다시 맞붙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역전패를 당했다. 개표가 일찍 진행된 계룡시와 금산군에서 앞서 가고 국민의당 후보와 김종민 후보의 표가 분산된 것으로 나타나면서 이번에도 또 살아남나 싶었지만 지난 19대 선거에 이어 또 계룡시에서 김종민에게 진 데다, 개표가 늦게 시작된 논산시에서마저 김종민 후보의 표가 더 많이 나오면서 논산 지역만 개표가 15% 정도 남은 상황에서 결국 역전당하면서 최종적으로 1%p(1,038표)차로 낙선했다. 이 지역의 선거는 사실상 이인제와 충남도지사 안희정의 대리전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안희정과 김종민의 고향 역시 논산이고 김종민 후보는 안희정과 매우 가까운 측근 인사였기 때문이다.2016년 12월,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친박 정치인 50여 명이 혁신과통합연합이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인제는 김관용 경상북도도지사와 함께 공동대표로 선임되었다.
'불사조 이인제, 불사조 대한민국' (합성이 아닌 경선 실제 슬로건이다.)
2016년 12월 12일 19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결과는 자유한국당 19대 대선 후보 경선 결과 당원투표 4위(5.1%), 여론조사 2위(24.6%)로 합계 3위(14.85%)를 기록하면서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탈당하지 않고 잔류하여 자유한국당 공동 중앙선대위원장으로 홍준표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자신을 경선에서 이긴 후보자의 선거 운동을 도운 것은 이인제의 30여 년 정치 인생에서 처음이다.
자유한국당의 대선 패배 이후에는 2018년 안희정의 불출마 선언으로 공백지가 된 충청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하였다. 사실 20여년 전에 이미 경기도지사를 지낸 경력이 있는 그에게는 별 메리트가 없는 것이 사실이고, 본인도 천안시 갑 보궐선거에 출마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던 듯 하나, 결국 당의 충남지사 출마 요구를 받아들였다. #
홍준표 대표와 마찰을 일으켜 탈당한 의원이 홍준표로부터 철새 소리를 듣자 "네가 공천시킨 17번의 당적변경 철새는 뭐냐?"고 반격하면서 졸지에 까이기도 했다.
외부자들 72회에서 출연했다. 정계의 노익장답게 이름 날리는 논객들의 맹공을 가뿐하게 받아치는 여유로움을 보였다. 홍준표 대표에 대해서는 옹호를 하면서도 그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철새 행보에 대해서 하는 말이, 이념정당이 아닌 지역정당에만 다녀봤으며 조국 안에서 영남, 호남, 충청의 국토 대장정을 다녔다고 한다. 사실 참여정부 시기까지 한국의 거대 양당은 대북 노선을 빼고는 정책·이념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 정치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이므로 아주 터무니없는 변명은 아닌 셈이다. 또 옮길 일이 있으면 정의당도 고려한다고 한다. 충남지사 선거에 대해서는 본인 감이 꽤 여유로운 특성상 잘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2018년 6월 치러진 충남지사 선거에서 35.1%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후보(62.6%)에게 큰 차이로 낙선했다.
2019년 5월, 21대 총선 총선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 # 그러나 공천에서 배제되고 박우석[23]전 지역위원장[24]이 공천되었다. 그러자 또 탈당 및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가, 이번에는 입장을 바꾸어 불출마 및 백의종군하기로 했다. 여론조사 결과가 계속 좋지 않았었기 때문에 무소속 출마 시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2021년 9월,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홍준표 후보를 지지하며 jp희망캠프에 고문으로 합류했다.
10.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컷오프
2023년 12월, 논산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고 22대 총선 출마를 선언했다. # 하지만 2월 19일 박찬주 전 육군 대장과 함께 컷오프당했고, 이를 수용하여 몇몇 언론에서는 이인제가 정계 은퇴했다는 기사가 나왔으나 # 다음날 20일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은퇴는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후 2024년 9월 SNL Korea에 출연해 현재 이승재 변호사와 같이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는 근황을 알렸다.#
11. 당적 변경사(피닉제)
자세한 내용은 이인제/일생/당적 변경사 문서 참고하십시오.[1] 정확히 말하면 파업으로 인해 결근하더라도 이를 공가로 인정하여 임금을 일부 지급하는 방안이다. 이인제는 노동3권이 헌법에 적시되어 있긴 하지만 이를 제대로 보장하려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견해 하에 이를 추진했다.[2] 당시 당내 민주계는 김덕룡, 이회창, 이인제 지지로 나뉘었는데 결국 다른 세력들이 전부 이회창 지지로 돌아선 상황에서 민주계 일부만 이인제를 지지하면서 패하고 만다.[3] 지역 기반 없이 정주영 돌풍으로 제14대 총선에서 31석, 제14대 대선에서 16.31%를 거둔 통일국민당,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무소속으로 이름 석자만 가지고 제17대 대선에서 15.07%를 득표한 이인제의 라이벌 이회창, 제20대 총선에서 38석, 제19대 대선에서 21.41%를 기록한 국민의당의 안철수를 버금가는 기록이다.[4] 이인제만큼은 아니지만 인물빨로 100만표 넘긴게 14대 대선 박찬종, 17대 대선에서 문국현 후보가 100만표를 넘겼다.[5] 김대중이 집권해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꼬장꼬장한 법관 출신으로 김영삼과 사사건건 대립한 이회창에 비하면 김대중은 그래도 과거 군부 독재 시절에 투쟁 동지였다는 인연이 있었던지라 최소한의 소통은 가능했다. 실제로 김대중이 집권한 이후 김영삼과 딱히 화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김영삼이 직접적으로 다친 일은 없었다. 더군다나 양김은 서로를 너무 빠삭하게 알고 있어 저 쪽에서 털면 이 쪽에서 폭로해버리는 식으로 반격이 가능했다라는 해석도 있다. 이런 형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바보도 아닌데 선빵을 먼저 날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6] 이인제 pk다지기[7] 1위는 김대중.[8] 1992년 대선 여론조사에서도 김대중은 청년층 표 상당수가 정주영과 나눠먹었던 탓에 청년층들에게 특출나게 많은 표를 얻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1997년 대선에서는 청년층들에게 지지를 상대적으로 많이 얻기는 했지만 각각 40% 중반 정도(한국갤럽 기준 20대 43.2%. 30대 43.7%) 수준으로 중장년층들에게 얻은 비율 자체도 34~37%는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난 것은 아니었다. 1987년 대선 때부터 1997년 대선 때까지의 김대중은 보수 정당 후보들보다도 오히려 세대별 득표차이가 적은 인물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9] 또한 2007년 열린 17대 대선에서 똑같이 보수 진영 표가 이명박과 이회창으로 분산되었지만, 이명박이 큰 표차로 이겼다. 김대중의 당선이 단순히 보수표 분열 탓은 아닌 셈.[10] 위키백과 15대 대통령선거, 대선후보들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공약 대결 논란[11] 당시만 해도 동교동계가 당을 꽉 잡고 있었다. 천신정이야 당시 겨우 초선의원들이었으니 대권 운운하기에는 체급이 너무 약했고, 김근태도 초선인데다가 당시만 해도 민평련 인사들 상당수가 원외였기 때문에 세력이 약했다. 재선 의원인 노무현 부총재야 스타성은 있지만 영남 기반인지라 세력자체가 없었던 상황.[12] 국민신당이 새정치국민회의로 흡수통합되는 방식. 국민신당 의원 8명 중 김학원은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했고 6명은 곧바로 국민회의 소속이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경제수석이었던 한이헌은 경제청문회 이후 국민회의에 입당하기로 하고 국민회의와 국민신당의 통합 당시에는 불참했다.[13] 영남 vs 호남의 지역대결 구도가 명확한 상황에서 민주당 입장에선 캐스팅보트를 쥔 충청권을 잡아야 그나마 승부가 가능했다. 그래서 DJ는 충청권의 맹주였던 JP와 손을 잡은 것이었는데, DJP 연합이 무너졌는데도 이인제가 충청도에서 바람을 일으켰으니 민주당은 엄청나게 환호했다.[14] 나중에 민주당에서 탈당한 4명이 복당하여 119석으로 늘어났다.[15] 당시 노무현은 이인제의 대선 출마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선에 나섰다고 밝힌 바 있다. 이인제에 대해서 "재주는 있어 보이는데 성실해 보이지 않고 철학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88년부터 89년까지 이인제 씨와 함께 국회 노동위를 같이 했다. 그때 이인제 씨는 불성실의 극치였다." 등의 말로 비난을 하기도 했다. 당적을 옮긴 정치인이 정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게 할 수는 없다는 그의 확고한 논리는 이후 한나라당에서 넘어온 손학규를 비토할 때에도 그대로 쓰였다.[16] 보이지 않는 손이란 퇴임 이후를 걱정한 김대중 대통령이 물밑에서 은밀하게 노무현을 지원해서 후보로 만들었다는 음모론이다. 혹은 애초에 보수우파에 가까웠던 이인제가 민주당 후보가 되는 것을 청와대가 부담스러워 했다는 버전도 있다. 하지만 둘다 아무런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유력 대선후보가 인물경쟁, 정책경쟁이 아니라 음모론과 네거티브만 한다면서 역풍만 맞았다.[17] 金心論, 본인의 계파에서 대통령이 나오길 바란 김대중, 혹은 이인제를 고깝게 여긴 김영삼 등 전직 대통령이 허수아비 노무현을 내세워서 본인을 골탕먹인다는 주장이었다.[18] 다만 권노갑 등이 이인제를 밀었던 것은 김대중의 의중이 아니라, 독자적인 판단이었다. 이미 2001년말 시점에서 김대중은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 파동으로 인한 DJP연합 와해로 레임덕에 빠져서 민주당과 동교동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실제로 2002년 민주당 후보 경선과 대선전략에 김대중이 직접 개입한 흔적은 그뒤에도 나오지 않았다. 박지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후단협 활동을 하던 동교동계 인사들을 은밀하게 만나서 그러지 말라고 설득했었다고 훗날 고백했지만, 노무현이 후보로 선출된지 한참 후의 일이다.[19] 이게 문화일보에서 나왔다.[20] 이때는 광주에 문화일보가 안 들어왔기 때문에 노사모가 광주로 내려가서 직접 시민들에게 신문을 나눠주었다.[21] 이 지역 경선에서 "그럼 제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라는 명언이 나왔다.[22] 이 당시 자유민주연합은 이인제의 지역구를 포함해 충청남도 지역구 4석만 겨우 건져냈고, 비례대표에서는 단 한 석도 얻어내지 못하며 철저히 몰락해버렸다. 이 당시 자민련 총재였던 김종필은 노욕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본인 스스로 비례대표 1번에 공천해 10선에 도전했으나 득표율 미달로 당선에 실패,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23]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해당지역에 출마해 낙선한 전력이 있었다.[24] 공천을 앞두고 전국 모든 지역위원장들을 사퇴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