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각 시대 별 고위 무사용 갑옷. 왼쪽부터 단갑, 괘갑, 오오요로이, 마루도요로이, 당세구족 |
1. 개요
일본갑주(日本甲冑)로 통칭되는, 일본의 전통 갑옷과 투구를 다룬 문서.2. 발달 과정
일본에서도 선사 시대에 해당하는 야요이 시대부터 갑옷이 있었다. 가죽제를 비롯한 다양한 갑옷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유기질이므로 유물은 남은 바가 없다. 다만 나무를 깎아서 만든 목갑이 현존하며, 이 형태가 고분 시대의 단갑(短甲)과 유사하여 단갑의 스타일의 원조로 인정되고 있으며 일본의 전통적인 양식, 또는 한반도와의 활발한 교류에 의한 영향으로 추정된다.야마토 정권이 일본의 주도권을 잡고 세력을 확대해 간 고분 시대에는 단갑(短甲)과 괘갑(掛甲)이라는 갑옷이 주류를 이루었다. 단갑은 일본과 초기 백제, 신라, 가야에서 공유하고 있던 것으로 철판의 연결 방식과 패턴에 따라 종장판갑, 횡장판갑 등으로 구분한다.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반도 국가였던 한반도에서 유래됐다는게 유력하다.[1] 단갑은 철판을 리벳으로 연결하여 몸에 맞게 제조한 철판갑옷, 즉 라미나 아머(Laminar Armour)로써, 기본적으로 몸통만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어깨와 다리를 방어하는 부품들도 등장한다.
헤이안 시대 후기에 이르러 지방에서 사무라이들이 크게 세력을 늘리고, 중앙 정치에도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확인되는 갑옷이 바로 오오요로이(大鎧)이며, 일본 갑옷 하면 바로 떠올리는 바로 그 모양새이다. 투구의 커다란 V자 장식, 얼굴 옆부분의 커다란 판, 사각형의 거대한 어깨 보호구, 형형색색의 화려한 실로 엮은 외장에 이르기까지 이후 1000년간의 일본 갑옷의 기원은 직접적으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무사들이 말을 타고 원거리에서부터 활을 쏘며 접근하여 근거리 저격전으로 들어가는 전투 양상이었고, 오오요로이는 화살에 대비하여 크게 펑퍼짐하고 갑옷과 신체 사이에 넉넉한 공간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하급무사들의 갑옷으로는 도마루(胴丸)가 있었는데, 걷기 편하게 만들어졌고 이때에는 투구 말고는 다른 부속품이 따로 없었다.
가마쿠라 막부시대까지는 오오요로이가 대세를 타고 있었지만 몽골침공 이후 벌어진 사회 혼란속에서 대두된 악당(惡黨)이라는 신흥 무장세력과 그들의 새로운 전투 방식은 더이상 고리타분하고 의식화된 마상 활쏘기 전투가 아닌 산악에서 매복하고 기습하며 지형을 충분히 활용하는 전투 방식이었고, 전쟁의 형태 자체가 바뀌어갔다. 그래서 몸에 딱 붙고 도보전투가 간편한 도마루가 정규 장비로 격상되어 투구를 비롯한 다양한 부속품이 붙어 풀 슈트의 제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전투 양상은 가마쿠라 막부 멸망에서 겐무 신정, 남북조시대에 이르는 수십년간의 내전기간 중 완전히 정착되며, 간이 장비로 여겨졌던 하라마키(腹卷)까지 가볍고 활동이 편하다는 점 때문에 정규 장비로 격상되게 된다. 또 이 내전기간 동안 방어가 부실했던 무릎과 허벅지 부분을 가리는 하이다테(佩盾)가 등장하고, 왼팔에만 차던 팔 보호구인 코테(籠手)를 양팔에 모두 차게 되는 등, 일본갑옷의 방어 범위와 방어력이 크게 향상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는 이러한 갑옷의 강화와 중장화에 따라 백병전용 무기가 크게 흥하였고, 금쇄봉이나 가리봉같은 타격무기, 오오타치, 나가마키, 창 같은 신무기들이 많이 등장하였다.[2]
무로마치 시대 후기와 센고쿠 시대에 당세구족(토오세이구소쿠, 当世具足)이라는 양식이 등장한다. 당세구족이란 요즘 시대의 갑옷이라는 뜻인데, 그 양식이 굉장히 다양해서 그 특징을 한 번에 말하기 어렵다. 이 시대의 주요한 변화는 소찰을 엮어 만들고, 그 실도 굉장히 촘촘하게 엮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큰 철판을 사용해 갑옷을 만들고, 실도 꼭 필요한 만큼만 듬성듬성 엮어서 기존의 갑옷에 비하면 화려함이 덜하지만, 실용성은 매우 좋고 양산하기 편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이 점은 현대 재현 갑옷에서도 동일해서 소찰을 엮어 만드는 고전 갑옷은 그 가격이 수백~수천만 원이지만, 당세구족은 싼 것은 수십만 원 선에도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크게 보급된 총기류에 대한 방어를 신경 썼다는 점도 특징이다. 유럽제 판금 흉갑과 투구(모리용 투구)를 수입해서 일본식으로 개조해서 쓰기도 했으며, 총알을 막을 수 있다고 알려졌다. 이러한 유럽제 판금 흉갑을 남만동(南蠻胴)이라고 불렀고, 차후 일본인의 체형에 맞추어 국산화시키기도 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더 이상 갑옷이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갑옷도 실전용이라기보다는 장식용으로써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당세구족보다는 과거의 오오요로이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3] 물론 에도 시대 초중기까지는 당세구족도 어느 정도 남아있긴 했다. 막부 말의 혼란기에 다시 갑옷이 사용되었는데 이때의 갑옷은 과거의 당세구족이 아니라, 쇠사슬로 짠 쿠사리 카타비라로써, 옷 밑에 받쳐입어 칼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접이식 간이 투구나 가죽제 방어구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갑옷 착용은 유신세력과의 갈등이 내전으로 비화되면서 더 이상 최신예 유럽식 소총과 대포앞에서는 갑옷이 실전에서 의미있는 방어력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서양의 플레이트 아머등 투구에 쓰인 면갑도 쓰였는데 카부토에 달린 가면도 면갑의 일종이라 할 수 있으며 면구라고 불렸다.
3. 특징
오랫동안 이어진 사격전의 전통 때문에 궁시에 대한 방어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며, 전반적으로 덥고 습한 기후 때문에 내식성과 정비성을 우선으로 추구하여 각 부위가 따로 나뉘어지는 특징이 있다. 전국시대까지는 사슬은 아예 쓰지 않거나 유연성이 필요한 부분을 가리는데 제한적으로 쓰고 대부분은 판찰이나 통짜철판으로 갑옷을 만들었는데 이는 방수방청을 위한 옻칠을 쉽게 해두고 녹이 슨 부위를 빨리 교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많은 경우 일본의 갑옷은 쇠 느낌이 나지 않게 검은색이나 빨간색으로 되어있는데, 바로 방수방청을 위한 옻칠때문이다. 또한 철포가 전장에서 대규모로 사용되면서 총탄을 막기는 커녕 오히려 총상을 악화시키는 사슬방어구는 인기가 없었다. 일본에서 포형 사슬갑옷은 굉장히 늦게 등장하며, 이마저도 평시에 옷 밑에 받쳐입는 호신용 방검복에 가까웠다.4. 구성요소
다음은 일본 갑옷을 이해하는 데 있어 기본적인 용어이다. 개략적인 설명을 넘어선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후술하는 5.의 내용을 참조. 투구에 관련한 설명은 6.의 내용을 참조.- 카부토(兜) - 장수용 투구.
- 진가사(陣笠) - 삿갓 형태의 사병용 투구. 하지만 에도 시대가 되면 고위 관료나 무사들도 이것을 쓰게 된다.
- 멘구(面具) - 얼굴을 보호하는 면갑. 전체를 덮는 것과 밑만 덮는 것이 있고, 뺨과 턱만 가리는 것도 존재한다. 멘포(面頬)라고도 한다.
- 도(胴) - 몸통 부위를 보호하는 흉갑.
- 소데(柚) - 어깨 보호구 겸 상박 보호구. 흔히 알려진 사각형의 커다란 것은 오오소데(大柚)라고 부른다. 참고로 소데는 일본어에서 옷의 소매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기에, 인터넷상의 일본어 자료에서 일본 갑옷의 소데에 대한 내용을 검색하려면 검색어로 소데 대신 오오소데를 써야 한다.
- 쿠사즈리(草摺) - 흉갑인 도에 연결된, 아랫배와 사타구니를 보호하는 늘어진 부분.
- 하이다테(佩盾) - 허벅지와 무릎을 가리는 보호구. 허리에 둘러 착용하며 쿠사즈리가 가려주는 부분은 그냥 천으로 되어 있고 쿠사즈리가 못 가리는 부분부터 갑찰들이 붙어 있다. 쇠사슬로만 만든 것, 사슬과 철판을 결합시킨 것, 소찰을 엮어 만든 것 등 그 방법과 스타일이 매우 다양하다.
- 전단판, 구미판 - 오오요로이의 도에 부속된 것으로 겨드랑이 노출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 코테(籠手) - 팔 보호구. 팔 전체를 천으로 만든 코테 안에 쑥 집어넣기 때문에 농수라는 한자가 붙었다. 가마쿠라 시대만 하더라도 다 천이고 방어판의 범위가 적었지만, 점차 시대가 갈수록 방어범위가 팔 전체를 다 덮게 되고 철판과 쇠사슬을 사용하여 움직이는 부위까지 철저하게 방호하게 된다.
- 진바오리(陣羽織) - 전국시대 때부터 무장들이 방한용으로서 갑옷 위에 걸쳐 입던 겉옷인 하오리(羽織)의 일종이다.
5. 스타일
5.1. 갑(甲)류(고훈 시대 ~ 헤이안 시대 전기)
이 시기의 초에는 교류가 활발하던 한반도 남부의 백제, 가야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이며 나라 시대에는 독자성을 띄기 시작하였다.- 단갑(短甲, 탄코) - 가야식 판갑.
처음에는 철판에 구멍을 뚫고 끈으로 묶어 고정시켜 몸통부분을 만들었으나 리벳 고정식으로 바뀐다. 투구는 충각부주이다.
- 괘갑(掛甲, 카이코)
처음에는 미비부주형 투구와 함께 사용되는 가야식 찰갑과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후대에 등장하는 요로이와 유사한 일본 갑주 특유의 스타일로 변하여 후키카에시(안면 측방호판), 소데(견갑 겸 상박갑), 쿠사즈리(하체), 도(몸통)의 개념이 생겼다.
5.2. 요로이(鎧)류(텐교의 난 ~ 오닌의 난)[4]
이 시기의 초에는 작은 철찰을 화려한 끈묶음으로 유연성없이 빳빳하게 엮은 열도 특유의 혼코자네(本小札, 본소찰)가 등장하였다. 또한 정강이받이인 스네아테와 방호판이 달린 긴 팔토시인 코테(籠手)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오오요로이(大鎧, 대개)
나라 시대의 괘갑의 연장선으로 헤이안 시대 중기에 등장하여 헤이안 후기에 이르러 이후 수백년 동안 사용될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당대의 기마사격전에 맞게 대궁시 방어에 중점을 두어 끈묶음과 작은 철찰들이 반복되는 혼코자네로 짜인 큰 판 여러개를 몸 이곳 저곳에 동여맨 것. 크게 기마궁시가 전장에서의 보편적인 전투행위일 동안은 큰 변화 없이 무장의 갑주로 사용되었다. 막부 시대에 들어서 카부토의 장식이 점점 크고 화려해진다. 오오요로이 사용자는 보통 활을 쏠때 노출되는 왼팔에만 코테를 착용하였다. 같이 착용되는 투구는 여러 철판을 리벳으로 이어서 본체를 만든 호시카부토(星兜)로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 장식물의 크기가 커지고 리벳의 크기가 작아지는 것 외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소수정예식 기마사격보다는 단체로 백병전을 벌이는 식의 전투가 되어감에 따라 화살을 잘 막는다는 장점보다는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는 단점이 부각돼서 천천히 사라진다. 외형을 보자면 오직 기병 용도로밖에 사용이 안되는 외형으로 저걸 입고 보병전을 하기는 무겁고 불편한 데다가 허벅지 안쪽 방어가 비교적 부실해서 잘못하면 내가 고자라니가 되고 만다.
- 츠츠미/츠즈미 도오
외피가 가죽, 천 등으로 이루어진 갑옷, 형태는 후술할 하라마키같은 형태가 대부분이었던듯.
구조 자체는 두정갑과 비슷한 구조라고 생각하면 되지만, 성능 자체는 여타 다른 일본 갑옷들과 비슷했던것으로 보인다.
- 도마루(胴丸, 동환)
몸에 딱붙도록 완만하게 혼코자네로 짜여진 몸체 부분인 도(胴, 동)에 다수의 유연성 있는 쿠사즈리가 딸린 갑옷. 헤이안 시대 중기에 등장하였으며, 후대에 등장한 모든 주류 일본 갑옷의 기본형이자 조상이라고 할 수있다. 오오요로이가 갑옷이라기보다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상류층 무장이 전신에 차는 대궁시 방탄판의 모듬이라면, 도마루는 걸어다니며 백병전을 하는 하급 무사가 입는 한 벌의 갑옷이었다. 오오요로이와는 달리 처음에는 오오소데와 같은 정규 갑주의 부속물이 원래는 붙지 않았으며, 도마루 착용자에게는 카부토와 코테, 스네아테도 없었다. 착용법이 겁나게 복잡한 오오요로이에 비해 와키다테를 따로 착용할 필요가 없이 그냥 입고 두르고, 어깨끈과 옆쪽 끈을 묶는 것(히키아와세)만으로 간편하게 착용이 가능했다. 게다가 통짜 철찰판을 무식하게 갖다붙여서 화살은 잘 막지만 굉장히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오오요로이에 비해서 몸통에 밀착하는 본체에 여러 갈래로 나뉜 쿠사즈리를 썼기에 착용 시의 활동성이 크게 개선되었다. 다만 벗고 입을 때마다 다시 매어야 하는 어깨끈의 고리가 약점으로, 이를 가리기 위해 교오요라는 나뭇잎 모양의 철판을 달았다.
- 하라아테(腹当, 복당)
혼코자네로 짜되 배와 가슴만 가리는 최하급 무사들의 갑옷. 헤이안 시대 후기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전근대의 갑주는 굉장히 비싼 물건이었고 좋은 철이 귀한 고대 일본에서는 더더욱 그러했기에 모든 무사들이 정식 갑옷을 사서 쓰지는 못하였다. 허나 주머니 사정이 허용하는대로 신체에서 제일 취약한 부위인 복부라도 창검으로부터 방어해서 장기 손상이나 복막염으로 인한 사상률이라도 줄여보자는 차원에서 고안된 것이 하라아테이다. 그래서 등쪽은 완전히 텅 비어있으며 쿠사즈리도 형식적으로 아주 짧게 붙어있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최하급 무사의 장비로만 여겨졌으며, 정면승부만 하는게 아니라 기습 후 고속이탈 또는 유인 목적의 거짓후퇴 등 이기기 위해 일부러 뒤를 보이는 시대가 되자 전장에서는 거의 사라졌다.[5]
- 하라마키(腹巻, 복권)
도마루처럼 몸에 붙는 도가 수술가운처럼 등에서 열리는 방식의 갑옷. 가마쿠라 후기에 등장하였다. 도마루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갑옷 착용을 도울 시종들을 거느리지 못한 하급 무사들이나 착용하는 물건으로 여겨졌다. 몸에 두른 다음 어깨끈을 일일이 매고 교오요를 달고나서 틈을 여밀 수있는 도마루와 달리, 그냥 어깨끈이 달린 상태에서 몸에 걸치고 허리 뒤쪽에 연결된 끈을 당겨 배 쪽에서 매듭을 지으면 되기 때문에 착용하기가 더 간편하였다. 다만 등쪽의 틈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살짝 벌어진다는 약점이 있어서 이를 가리는 후판이 따로 존재했다. 난보쿠초 시대까지의 상류층은 무사는 일전불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뒤돌아섰을 때에야 의미가 있는 후판을 겁쟁이판이라고 부르며 멸시하고 외면했지만, 무로마치 시대에 기습 후 고속이탈 또는 유인 목적의 거짓 후퇴 등 온갖 기동전술과 책략이 난무하기 시작하자 너 나 할것 없이 후판을 착용하게 되었다. 후방 기습을 예사로 당하는 시대에는 후판이 있느냐 없느냐로도 생사가 갈렸기 때문이다.
- 마루도요로이(丸胴鎧, 환동개)
중세 열도의 전투 트렌드가 개인마상궁시에서 집단도보백병전으로 바뀌어가는 과도기의 고위 무사용 중갑으로, 도마루나 하라마키에 오오요로이처럼 카부토와 오오소데 등의 부속을 갖춘것. 코테와 스네아테 또한 함께 착용하였다. 주로 같이 쓰인 투구는 스지카부토(筋兜)로, 리벳을 노출시키지 않고 여러장의 철판을 이어붙여 본체를 만든 것이었다. 가마쿠라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영주급이라면 오오요로이를 입는 게 당연시되었고 마루도요로이는 가신급의 갑옷이었으나 결국 전투 트렌드가 변하면서 영주급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서는 오른팔 코테, 멩요로이(얼굴가리개), 노도와(멱가리개), 하이다테(다리가리개) 등의 세세한 부속구가 추가되면서 요로이가 전신화/중장화의 정점에 달한 시점에서 이러한 중장화를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오오요로이는 도태되었다. 물론 오오요로이가 약해서는 아니었고 난보쿠초 시대까지만 해도 오오요로이를 입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최신형 도마루나 하라마키를 입은 닛타 요시사다나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격파하고 최후의 승자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오오요로이는 착용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배신과 기습에 극히 취약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더 심한 난세가 되자 오오요로이를 착용한 최상위 명문 기득권층이 부하에게 하극상을 당해 모조리 죽거나 몰락하면서 오오요로이는 도태되고 부하들이 입던 갑주가 대세가 되는 것이다. 이 추세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전국 3효웅이나 모리 모토나리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 같은 네임드 센고쿠 다이묘들도 한동안 하라마키나 도마루를 애용하였다.
(히라도 성에 있는 마츠라 가문의 마루도요로이. 이성계가 황산 대첩에서 상대한 아기발도도 이런 식의 전신갑주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3. 구소쿠(具足)류(호조 소운 거병 ~ 오사카 전투)[6]
당시 갑옷의 테스트 영상
이 시기의 초에는 중장화된 요로이의 최종진화형으로서의 구소쿠(具足, 구족)가 등장하였다. 구소쿠란 용어 자체는 본래 발(足)끝까지 갖췄다(具)는 뜻으로 무로마치 시대에 등장했는데 이때에 카부토, 도, 코테 이외에 전신방호를 위해 착용하는 갖가지 부속구를 코구소쿠(小具足, 소구족)라 하였다. 본격적인 구소쿠는 코테(소매)와 하이다테(다리가리개)의 발달로 인해 소데와 쿠사즈리가 축소되었으며, 노도와(멱가리개)가 요다레카케(목가리개)로 멘구(얼굴/턱가리개)에 통합되었고 얼굴을 가리는 멘구가 보편화되면서 후키카에시도 생략수준으로 극소화되었다. 즉 전신방호력을 높게 유지하면서도 제작비용과 중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 마루도구소쿠(丸胴具足, 환동구족)
요로이에서 구소쿠로 변화하는 과도기의 갑옷. 사실 초창기형은 마루도요로이와의 명확한 구분이 어려워서 요로이로 간주되기도 한다.
- 토세이구소쿠(当世具足, 당세구족)
뜻은 현 시대의 갑옷 세트. 센고쿠 시대에 출현하였다. 넓은 의미의 당세구족은 끈과 쇠로 만든 거의 모든 구족을 포함하지만, 보편적인 당세구족은 가격 대 성능비 상 도(몸통부분)를 요코하기도(横矧胴, 횡신동)이라고 하는 긴 철판을 가로로 이어붙여 만들었고 소데(어깨받이)와 시코로(투구 드림), 요다레카케(목가리개), 쿠사즈리(하체보호대)도 다수의 긴 철판을 몸에 맞도록 둥글게 휘어 끈으로 연결하는 히시누이(菱縫, 능봉)식으로 만들었다. 즉 제작하기도 수선하기도 번거로운 혼코자네에서 벗어난 것이다. 또한 본래 통짜 철판을 대었던 코테와 스네아테 또한 철심과 사슬을 조합한 시노코테와 시노스네아테로 변화하였다. 주로 같이 착용되는 투구로는 본체에 조합되는 철판의 수가 한자릿수로 대폭 줄어든 형태의 스지카부토(筋兜)와 3~5장의 철판을 이어서 둥근 본체를 만든 즈나리카부토(頭形兜), 2~4장의 철판을 이어서 끝이 뾰족한 본체를 만든 모모나리카부토(桃形兜)가 있었다. 또한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무사라면 저렴하게나마 당세구족의 모든 부속을 갖춰 입었지만, 하급 도보무사들은 하이다테와 멘구 등의 부속을 빼고 간소화시킨 갑주를 입었다.
다만 현재 에도 시대를 거쳐 잘 보존된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높으신 분들의 당세구족은 개성이 중시되었기에 갖가지 방식을 동원해서 만들었다. 이러한 고위층용 당세구족의 도는 제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되었다. - 모가미도(最上胴, 최상동): 다수의 긴 철판을 교차매듭으로 연결하여 만듬
(타치바나 무네시게의 최상동구족) - 오케가와도(桶側胴, 통측동): 다수의 긴 철판을 이어붙여 만듬. 특히 가로로 이은 것은 요코하기도(横矧胴, 횡신동).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통측동구족) - 호토케도(仏胴, 불동): 통짜 철판으로 만듬
(사나다 마사유키의 불동구족) - 고마이도(五枚胴, 오매동): 전후좌우로 나눠만들고 경첩으로 이은 도.
(쿠로다 칸베에의 오매동구족) - 타타미도(畳胴, 첩동): 판찰을 쇠고리로 연결하여 만든 도.
이름 그대로 몸통부분(胴)을 접어서(畳) 갤 수있다.사각형 판찰로 만들었으면 카루타(カルタ, carta)가네, 육각형 판찰로 만들었으면 킷코오(亀甲, 귀갑)가네라 하였다. 다른 도보다 유연하고 가벼웠으나 화기나 둔기에 취약한 특성 때문에 정작 당세구족의 전성기에는 별 인기가 없었다. - 오카시구소쿠(御貸具足, 어대구족)
영주가 병졸에게 빌려주는 간이 당세구족. 센고쿠 시대에 들어 집단전을 위해 하급 전투원인 아시가루(足輕)를 대규모로 운용하게 되었고, 또한 아시가루도 창검/궁시/철포 등의 운용에 숙달된 정예전력이 된 이상 하급 무사 수준으로 중무장시켜 보호할 필요가 생겨 등장하였다. 당시 하급 무사의 (오케가와)도, 쿠사즈리, 코테, 뎃코오, 스네아테로 구성되었고 카부토(투구)가 없는 대신 쇠나 경화가죽으로 만든 방호용 삿갓인 진가사가 포함되었다.[7]
- 난반도구소쿠(南蛮胴具足, 남만동구족)
센고쿠 시대에 대만의 포르투갈인들로부터 수입한 서양식 판금흉갑을 난반도(南蛮胴, 남만동), 서양식 판금투구를 난반카부토(南蛮兜)라 하였는데 이를 당세구족으로 개조한 것. 난반도는 철포도 막아낸다고 하여 명성이 대단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하등한 일본의 저질 철갑과 비교가 되지 않는 최신 우량 강재와 열처리 기법으로 만들어졌고 화승총탄을 막을 만큼 두께를 늘렸으니 방어력이 월등한 것이 당연하였다. 다만 남만동 자체가 전량 수입이라 비싼데다 무거웠기 때문에 그다지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8]
5.4. 카타비라(帷子)류(겐나엔부 ~ 세이난 전쟁)[9]
이 시기의 초에는 도쿠가와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무력의 보유와 행사를 전국적으로 통제하여 번국간의 전쟁이 없어졌으며 수많은 무사들이 일자리를 잃고 낭인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구소쿠 대부분이 더 이상의 필요를 상실하여 대부분이 망실되었고 그나마 만들어지는 무겁고 두꺼운 구소쿠나 요로이는 주로 크고 화려한 실내 인테리어용으로 쓰였을 따름이고, 일선에서는 적재공간을 적게 차지하여 운반이 편리한 타타미 계열 갑옷이 널리 쓰였다. 또한 호신과 치안활동을 위해서 평복 밑에 쉽게 받쳐 입을 수 있는 갑옷으로서 앞면이 열리는 옷의 형태인 카타비라가 등장하였다. 그러다 19세기에 흑선내항 사건 이래 수차례 발발한 대대적인 내전에서 갑옷이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전투 양상이 근대화되는 과도기에서 화기의 관통력, 사거리와 명중률이 크게 증가하면서 돌입하기까지의 행동을 크게 제약하는 중갑주의 의미가 없어졌으므로 가볍고 유연하면서도 총검과 군도의 공격 정도만 막아주는 쇄자갑과 경번갑이 흥하였다.[10] 다만 이 또한 볼트액션 소총과 개틀링 건과 암스트롱 포의 화력 앞에서는 의미를 잃었고 결국 서양식 근대 군복에 밀려 사라지게 된다.* 타타미구소쿠(畳具足, 첩구족)
모든 타타미구소쿠는 당세구족의 일종으로서 이미 전란기에 존재하였었던 타타미도구소쿠란 용어의 지칭범위 안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에도 시대의 타타미구소쿠는 이전과 달리 판찰을 잇는 '사슬' 부분의 비율이 증가했으며 도뿐만 아니라 쿠사즈리는 물론 연결부위까지 모두 사슬화되었고 접이식 투구와 같이 쓰였다는 점이 다르다. 에도 시대에는 겐나 엔부 선포에 따라 대규모 전란을 상시대비할 필요가 없는 대신 지방영주들이 반기를 들지 않는지 막부가 어사를 보내 감찰할 필요가 생겼고, 또한 참근교대 제도의 시행으로 인해 매년 영주의 호위무사들도 같이 고향을 떠나 수도인 에도로 이사를 가야 했으므로 티나지 않게 옷 밑에 받쳐입을 수있고 도검으로 가해지는 불의의 일격 정도는 막을 수 있으면서 벗고 나서는 접어서 자루에 넣고 다니기 편한 갑옷이 필요하게 되어 몸체부분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부위까지 접어서 갤 수있는 타타미구소쿠가 흥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부속구의 구성 면에서 볼때는 어디까지나 당세구족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에도 시대의 타타미구소쿠는 센고쿠 시대에 존재하였던 하이다테가 없는 오카시구소쿠(아시가루의 갑옷)의 연장선으로도 존재하였다.[11] 여기에는 보통 개어서 수납할 수 있는 사진의 즈킨(두건형 투구)이나 고정대를 풀고 접어넣을 수 있는 다단 투구인 쵸친나리카부토(提灯形兜)가 조합되었다. 타타미즈킨+타타미구소쿠의 조합은 어째선지 현재 일본 현지에서 닌자 갑옷(...)으로 밀고 있다.
- 타타미카타비라(畳帷子, 첩유자)
사각형 판찰을 사슬로 엮어 만든 웃옷. 본래 타타미는 유연하기에 옆면으로는 잘 여며지지 않고 도 전체의 하중이 집중되는 어깨끈 근처만 빨리 삭는다는 단점이 있어 기존의 도마루식 구조와는 맞지 않았다. 이에 하중이 분산되도록 어깨 주변 전체를 판찰과 사슬로 덮고 정면에서 여미는 홑옷형으로 만들어 진 것이 타타미카타비라이다. 이후에는 구식 당세구족도 마음껏 입을 수 있는 일부 부유한 고위무사들과는 별개로 근무 일선에서는 구소쿠 형식이 도태되고 카타비라가 주류가 된다.
- 쿠사리카타비라(鎖帷子, 쇄유자)
얇은 사슬을 소매달린 웃옷인 카타비라 모양으로 엮고 안감을 댄 갑옷이다. 일본에서도 사슬 방어구의 개념은 일찌감치 등장했었지만, 코테와 스네아테를 보강하는데 주로 쓰였을 뿐이고 본격적인 사슬갑옷이 등장하는 것은 에도 시대이다, 역시나 전반적으로 호신용 방검복에 가까운 물건으로 평상복 밑에 받쳐입고 다니며 암습에 대비하다가 두건인 즈킨과 팔목장갑인 한코테를 걸치면 전투용이 되는 식이다. 다만 쿠사리즈킨은 카부토에 비해 머리를 내려치는 공격을 잘 막지 못하였으므로 하치가네라고 불리는 별도의 방호판을 이마에 착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배 부분에 판찰을 삽입하여 방어력을 올린 경번갑 타입도 사용되었다.
닌자와 쿠노이치가 방어용으로 사용했다고도 하는데, 매체에서 묘사될 때에는 망사 스타킹/그물처럼 묘사된다.
- 킷코카타비라(亀甲帷子, 귀갑유자)
육각형 판찰에 구멍을 뚫어 쇠고리로 연결하고 두 장의 천이나 가죽 사이에 누벼서 만든 카타비라. 킷코오는 본래 그저 육각형 판찰을 사슬로 연결한 타타미 방식 전반을 일컫는 것이었으나 후대에는 판찰 간의 간격이 최소화되고 카타비라 형태로 옷 속에 누벼져서 정말로 거북이 등딱지 모양의 문양이 겉으로 드러나는 갑옷이 되었다.
6. 투구
6.1. 도래기
- 충각부주
미비부주와 함께 고분시대 일본 투구의 대표적인 양식. 철판을 가로로 늘여뜨려서 둥근 투구 형태를 만든 뒤 이마 중간부터 뒤로 이어지는 철판을 덧대고 볼과 뒤통수를 가리는 철판을 층층이 이어붙인 형태이다. 가야, 백제 지역에서도 소수 발굴되고 있다.
- 미비부주(차양주)
역시나 고분시대 일본 투구의 대표 양식. 한반도의 종장판주처럼 철판을 세로로 이어붙여 형태를 만든 뒤 차양을 달았다. 역시 가야, 백제 지역에서도 소수 발굴되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 학계에서는 한·일간 교류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도래한 장인들이 일본에서 만든 것이 백제와 가야로 역수입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냈으며 국내에서도 대체로 그런 견해를 따르고 있다. (주류 학설은 아니지만 한반도에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긴 하다.) 근초고왕(드라마)와 계백(드라마)의 백제 병사들은 차양투구를 쓰고 있다. - 몽고발형미비부주(종장판차양주)
종장판주 자체는 한반도에서 유행한 양식으로 일본에서는 출토 예가 매우 적다. 차양투구와 혼합된 특이한 형태는 한반도와의 교류과정에서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다.
6.2. 초기
- 호시카부토(星兜)
호시카부토는 철판을 리벳으로 연결한 헤이안~가마쿠라 시대에 등장한 투구를 일컫는다. 이른바 몽고발형 투구처럼 위로 뻗은 긴 철판을 여러개 나열하여 하나의 돔을 만들었는데, 과거에는 끈으로 묶어서 연결했지만 이 호시카부토는 리벳으로 연결했다. 투구를 하나의 천구(天球)로 보았기 때문에 리벳을 별(星)이라고 불렀고 따라서 호시카부토라고 부르는 것이다. 호시카부토는 2개로 나뉘는데 다음과 같다. - 이가보시카부토(厳星兜)
호시카부토의 한 종류. 여러 판을 고정하는 리벳이 커다란 것이 특징이다. 헤이안~가마쿠라 시대까지 애용되었고 오오요로이와 한 세트로 각광받았으나 가마쿠라 시대부터는 리벳이 작은 코보시카부토가 애용되면서 사장되었다. 일본갑옷 하면 떠올리는 바로 그 형태로 후키카에시(吹き返し)[12]가 매우 큰 것이 특징. - 코보시카부토(小星兜)
가마쿠라 시대부터 등장하고 에도 시대까지 선호된 투구. 이가보시카부토와의 가장 큰 차이는 투구의 돔 부분을 구성하는 철판을 연결하는 리벳(星)이 매우 작고 많은 숫자가 박혀 있다는 것이다. 리벳이 작으므로 작은 별이라는 뜻의 코보시(小星)이라 부르는 것. 스타일은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 핫푸리(半首)
최초의 일본식 면갑이자 사무라이가 아직 기마 궁사였던 시절, 도보 전투원인 가병의 이마와 뺨을 방호하던 보호구, 보통 에보시와 같이 착용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후 무로마치, 전국시대에도 투구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6.3. 전기
- 스지카부토(筋兜)
가마쿠라 시대부터 등장한 투구. 기존의 호시카부토가 리벳을 돌출시킨 데 비해, 리벳을 박은 다음 겉을 연마하여 평평하게 만들어서 겉으로는 철판 가장자리 말아놓은 부분만 보이기 때문에 마치 줄기같다고 하여 스지카부토라고 불리는 것이다. 기존의 호시카부토가 오오요로이와 한 세트로 인식된 데 비해, 스지카부토는 도마루나 하라마키와 어울리는 새로운 스타일로써 사용되었다.[13] - 아고타나리스지카부토(阿古陀形筋兜)
스지카부토의 한 종류. 무로마치 시대에 수입된 식물인 아고타우리(阿古陀瓜)의 형태를 본떠서 디자인한 것이다. 그때까지의 투구가 반구형의 디자인이었던 것에 비해, 이 아고타나리부터는 위가 움푹 눌린 듯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 톳파이나리카부토(突盔形兜)
6.4. 중기
- 즈나리카부토(頭形兜)
전국시대를 상징하는 양산형 투구. 기존의 투구가 철판을 옆으로 이어가며 돔을 형성하는 방식인 데 비해, 이것은 커다란 철판을 여러장 이어 접합해서 만들기 때문에 제작기간이 짧고 쉽게 만들 수 있으며 튼튼하고 가격이 쌌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다이묘부터 하급병사에 이르기까지 많이 보급되었다. 즈나리카부토에는 3개의 종류가 있으며 사용되는 철판의 숫자와 방식에 따라 3판식과 5판식이 있다. 다음은 3종의 즈나리카부토 양식이다. - 코즈나리카부토(古頭形兜)
즈나리카부토 최초의 디자인. 무로마치 말기(이미 전국시대)에 등장했다. - 엣츄즈나리카부토(越中頭形兜)
부젠노쿠니(豊前國) 코쿠라번주(小倉藩主)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직접 디자인하고 스스로도 전쟁터에서 착용했던 즈나리카부토의 한 종류. 다른 즈나리카부토와는 달리 머리부분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더불어 모자의 챙에 해당하는 마비사시의 라인이 일직선으로, 마치 독일군 철모의 앞부분처럼 생겼다는 점도 특징. - 히네노카부토(日根野兜)
사나다 유키무라가 썼던 투구로 알려지며, 즈나리카부토에 사슴뿔 장식이 달린 것이 특징.
- 모모나리카부토(桃形兜)
구로다 나가마사가 임진왜란 당시 쓰다가 세키가하라 전 우호의 목적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투구를 교환하여 마사노리의 투구가 되었다.
- 시이노미나리카부토(椎の実形兜)
- 난반나리카부토(南蛮形兜)
유럽의 투구를 수입하여 일본식으로 개조한 투구. 주로 16세기 당시 많이 쓰이던 모리용 투구가 사용되었다.
- 카와리카부토(変わり兜)
장식이 매우 화려하고 큰 투구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여러개가 존재하는데
윗줄 왼쪽부터 마츠다이라 사다모토, 가토 요시아키, 도도 다카토라(중앙 상단), 마에다 토시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용하던 투구이며
아랫줄 왼쪽부터는 구로다 간베에, 아케치 히데미츠, 가모 우지사토, 유키 히데야스, 우에스기 겐신의 투구이다.
- 하리카케카부토(張懸兜)
가토 기요마사가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 진가사(陣笠)
사극에서 군졸들이 흔히 쓰고 다니는 삿갓 모양의 투구이다. 본래는 아시가루들만 착용하고 사무라이 이상은 착용하지 않았었으나 평화로워진 에도 시대부터 무사계급도 착용하여 모양과 크기의 바리에이션이 많았다. 모양이 모양인지라 얼굴과 머리 옆, 뒷부분은 방어가 안된다. 종류에 따라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종류도 있다. 튜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일부 진가사는 옆면을 충각부추처럼 철판을 가로로 늘여뜨려서 덧대거나 진가사 2개를 이어붙여서 주판알 처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아시가루가 쓰는 진가사는 취사용 냄비나 방패로 사용할 수 있는 기능도 있었다. 전국시대 다테 가문 아시가루의 경우 굉장히 독특한 외형을 가진 금색의 라바콘 모양의 진가사를 착용했던 걸로 유명하다.
위는 에도 시대 무사계급이 착용한 진가사이다. 전국시대의 아시가루들이 쓰던 진가사와 모양도 다르고 훨씬 화려하다.
6.5. 후기
- 쵸친나리카부토(提灯形兜)
접이식 투구. 보통 투구에서는 접히지 않는 돔 부분까지 끈으로 엮어 접히도록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고정핀을 풀고 내려놓기만 하면 좌라라락 접혀서 마치 원판처럼 휴대할 수 있다.
6.6. 말기
- 하치가네(鉢金)
막부 말에 등장한 간이형 방호구. 막말의 암살과 결투 등의 상황에서는 중장비 갑옷이 나올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로 이마 정도만 보호하는 접이식의 간이 투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하치가네였다. 이후 내전으로 비화되고 나서도 역시 신형 소총 앞에서 갑옷이 쓸모없었기 때문에 하치가네가 일부 사용되었다. 주로 이마와 앞부분 머리 정도만 가리는 것이 많지만, 접히지 않는 것이나 야구의 포수 헬멧과 비슷하게 생겨 얼굴까지 보호해주는 것도 있었다.
7. 이야깃거리
- 현존하는 대부분의 일본 갑옷 유물은 굉장히 화려하고 개성이 강한데, 귀족마상궁사나 고위지휘관이 입는 용도 내지는 에도시대 때 옛날갑옷을 재현하여 만든 장식품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다이묘나 하타모토들은 전장에서도 위엄과 체면을 세워야 했기 때문에 갑옷에 공을 들였다. 또한 그 아래에서 여러 무사를 거느리는 가신급 사무라이들도 갑옷에 개성을 주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공을 세울 때 주군의 눈에 띄어 출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전선에서 칼을 맞대는 중하급무사들은 장식을 할 여유가 없었고, 어차피 거추장스러울 뿐이기에 가성비가 좋은 실전갑옷을 입고 다녔다. 사실 집단전이 확립된 무로마치 후기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까지 대부분의 갑옷은 실전용이었다. 그러나 에도시대에 들어서면서 수백년동안큰 변란 없이 평화가 이어지자 실전용 갑옷은 대부분 망실되었고, 귀족가문에서 가보로 귀중하게 보존된 화려한 갑옷이 많이 남게 되었다.
- 일본 갑옷의 투구에 달린 장식은 탈부착이 가능해서 장수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장식을 바꿀 수 있었다.
- 일본 갑옷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안면갑인데 개중에는 수염이 달린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젊은 나이에 쇼군이 되거나 승계받은 영주같은 경우 상대방이 그의 얼굴을 보면서 경험이 없을 것이라며 깔보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조 수염을 단 것이다. 물론 그전에 얼굴을 가리게 위해 안면갑을 만들었지만. 이 안면갑 턱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얼굴에서 흘러내린 땀을 배출하기 위한 일종의 배출구 역할을 한다.
- 근대에 유럽의 사진가들이 찍은 사무라이 사진 속 모델들은 진짜 사무라이가 아니라 대부분 가부키 배우들인데 갑옷이 신체에 딱 맞기보다는 조금 품이 넓은 것을 입게 되어있고 A자형으로 떨어지는 실루엣 때문에 당시 일본인의 작은 키가 더 작아보이는 효과가 있다. 투구 중에는 머리 위로 뿔이 엄청 크게 장식 된 것도 있는데 당시에도 키가 더 작은 영주나 갑옷 주인들은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러한 큰 장식을 사용했다.
- 후쿠오카 지역의 갑옷이 상대적으로 크기가 더 크다. 그 이유는 후쿠오카에서는 앞바다에서 잡히는 생선을 통해 단백질과 칼슘 섭취를 본토(오사카, 교토 등 간사이 지역과 도쿄, 나가노 등 간토 지역) 사람들보다 많이 할 수 있다보니 키가 컸다고 한다. 본토사람들이 평균적으로 150 정도였다면 후쿠오카 사람들은 160 정도. 따라서 상대적으로 큰 갑옷의 경우 후쿠오카 지역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투구를 자세히 보면 머리를 보호하는 부위에 세로로 줄이 쳐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줄이 많을 수록 비싸고 튼튼해서 줄이 많으면 많을 수록 지위가 높은 사람의 것이라고 한다.
- 오오요로이~마루도요로이와 같은 찰갑계 일본갑옷의 경우 형형색색의 실을 잘 배치해 엮어 겉으로 보면 철판은 안보이고 실만 보일 지경. 실이라고는 해도 실을 엮어 만든 두꺼운 끈 같은 것이다. 덕택에 모르는 사람들은 털가죽 갑옷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다만 칼에 한번 베이면 베인 자국대로 실이 연달아 끊어져 수리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원래 끈을 잔뜩 엮어놓는 것은 몇군데 실이 끊어진다고 갑옷 전체가 붕괴하는 걸 막기 위한 방법이며 찰갑류의 특징이지만 오오요로이나 마루도요로이와 같은 갑옷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지나칠 만큼 끈을 많이 엮어놓았기 때문에 그런 감이 더 심했다.
- 하라마키까지는 철판의 색보다도 엮는 실의 색상과 적절한 색깔 배치로 패턴을 만드는 방식으로 화려하게 했지만, 당세구족부터는 실을 과도하게 엮지 않아 듬성듬성한 대신 철판에 색칠하는 방법으로 스타일을 살렸다.
- 현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이나 영화 등의 미디어에서 주로 서양의 재벌 혹은 부자들이 일본도와 함께 장식용으로 소장하는 경우가 있다.
- 국내에서 방영된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오는 일본 갑옷은 임진왜란 당시인 아즈치-모모야마 말기의 당세구족이 아니라 무로마치 시대의 마루도요로이에 가깝다. 투구도 즈나리카부토가 아닌 수백년전의 코시카부토가 나왔다. 그래서 고증에 안 맞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다만 아시가루들은 제대로 오카시구소쿠를 입었다. 정도전에서는 이와 반대로 아기발도 휘하의 졸병들이 아즈치-모모야마 말기의 어대구족을 입고 있는 고증 오류를 보여주었다. 사실 이는 정도전을 촬영할 때 불멸의 이순신의 일본 갑옷을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 국내 미디어에서 독보적으로 일본 갑옷을 잘 고증하고 있는 것이 네이버 웹툰 칼부림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중하급 무사들이 쓰던 당세구족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김충선 장군의 당세구족 항왜 서아지[14], 고효내, 사쇄문의 갑주
- 타타미 계열 구족이 센고쿠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것은 일본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고증 오류이다. 단지 접어서 갤 수있기 때문에 촬영 간의 보관과 운반이 편리하다고 한국 사극의 당파창 마냥 미리 만들어두고 전투신 찍을 때마다 소품으로 쓰는 것이다.
- 고증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림에서 굉장이 많이 틀리는 편인데, 혼코자네로 짜인 요로이의 구조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며, 구조적으로 놓칠수 있는 부분도 많다. 주렁주렁 매달린 하이다테, 쿠사즈리, 소데를 그리는 것에 대한 어려움 등 여러가지 이유로 잘못 그려진다. 또한 조금만 형태가 왜곡되거나 잘못 그려지면 위화감이 든다.
7.1. 중일전쟁 에피소드
특이하게도 몇몇 일본군 장교들이 중일전쟁 기간에 집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골동품 갑옷을 껴입고 나온 바가 있었다.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 맹신과 부족한 총기를 항일대도 같은 냉병기로 커버하려는 중화민국군의 궁여지책이 충돌하면서, 2차 대전의 여러 전장 중에서 유독 백병전이 잦았던 중일전쟁이었기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은근 무시하면 안되는 것이, 어느 문화권이든 갑옷이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백병전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때문에 총탄이나 포탄 파편은 못 막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유효했던 총검 돌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유럽도 1차 대전 시기에 몇몇 장병들이 옛 기사들의 판금 갑옷을 입고 참호 전투를 치른 바가 있다.
중국에선 이 때문에 사무라이 명문가 출신의 장군이나 장교가 일본 전국시대부터 쓰이던 말 그대로 진짜 귀중한 유물 갑옷을 입고 와서 싸우다 전사하고, 그걸 노획한 중국군 병사나 그 후손이 나중에 같이 딸려온 전가의 보도와 함께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혹은 비싼 값에 팔아 치웠단 사례가 종종 나온다.
8. 번외
8.1. 류큐 갑옷
류큐 왕국 갑옷의 경우 전통적으로 중국 갑옷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일본 갑옷의 영향도 받게 되었다. 이를 보여주듯 제 2 쇼씨 왕조 시대의 고위 장수들은 당세구족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갑주를 입었고, 부장급들은 조선과 명나라에서 영향을 받은 두정갑이나 찰갑 계열 갑주를 입었다.
8.2. 아이누 갑옷
이미지아이누인 전사들은 원피스 형태의 찰갑을 입었다. 아이누인들의 전성기였던 조몬 시대부터 성립된 형식이며, 냉대 기후인 아오모리현과 홋카이도 그리고 사할린 지역에 거주하던 후대 아이누인들은 여기에 모피나 털가죽 등을 추가해서 방한성을 높이기도 했다.
[1] 야마토 정권 이후인 아스카 시대를 연 쇼토쿠 태자는 백제의 혜총과 고구려의 혜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다.[2] 창은 헤이안시대까지 모(矛)라는 이름으로 쓰였으나, 이때에는 방패를 들고 한손으로 잡고 찌르는 무기였다. 이런 무기는 검이자 폴암인 나기나타에 비해 전투의 융통성과 다양성이 매우 부족하여 쉽게 제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차 모는 쓰이지 않게 되었고, 헤이안 후기부터 남북조시대까지 도보 백병전 무기의 1번은 단연 검과 검이자 폴암인 나기나타였다. 일본에서 창(야리:槍)이란 두손으로 잡고 쓰는 것을 호칭하며, 이 시대의 군키모노가타리(軍記物語:논픽션 군대소설. 황당한 소설에 가까운 것이 있는가 하면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들도 많아 연구의 주요 자료가 된다.)에 창이라는 단어가 등장함으로써 난보쿠초 시대 전쯤에 재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3] 이것은 훗날 초기의 일본 사극에서 배경이 전국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오요로이가 나오는 고증오류가 잦아지는 것에 영향을 주었으며, 더 나아가 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사극에서조차 일본군의 갑옷이 오오요로이로 나오는 고증오류가 잦아지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다. 마치 조선 후기에 의장용 갑옷으로 두석린갑이 생겨난 영향으로 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사극에서 조선군 갑옷이 두석린갑으로 나오는 고증오류가 잦아진 것과도 비슷하다.[4] 헤이안 중후기, 가마쿠라, 겐무 신정, 난보쿠초, 무로마치[5] 나중에 생긴 평민 징집병인 아시가루들에게 빌려줄 원가절감형 간이 갑옷으로 잠깐 부활한 적은 있으나, 당시의 전장이 철포와 궁시의 집단운용으로 인해 너무나 험악해져있다보니 그 정도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서 도마루식 중갑으로 대체당하고 최종 도태되었다.[6] 센고쿠 시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15세기 중반 ~ 17세기 초반[7] 소속 가문에 따라 간혹 값싼 즈나리카부토나 모모나리카부토를 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8] 실제 박물관에 전시된 난반도들 중에는 총에 맞은 자국이 있는게 상당히 많다.[9] 에도 시대, 메이지 초기[10] 동시대의 한국(조선)과 중국(청나라)에서 쇄자갑과 경번갑이 사실상 씨가 말랐던 것과는 대조적이다.[11] 그래서인지 한때 전국시대 배경 창작물(임진왜란을 다룬 한국 사극 포함)에서 아시가루가 오카시구소쿠가 아니라 타타미구소쿠를 입는 고증 오류가 많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남원시의 황산대첩축제에서도 왜구 역할을 맡는 사람은 가마쿠라 시대~무로마치 시대 스타일 갑옷이 아니라 타타미구소쿠를 입으며, 그러면서 병사급 왜구의 투구는 삿갓형 투구인 진가사로 나온다. 타타미구소쿠와 진가사는 남북조시대 일본에서는 아직 생겨나기 한참 전이었는데도 말이다.[12] 일본 투구 하면 연상하는, 얼굴 옆부분의 확 젖혀지는 바로 그 부분. 당초에는 화살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지지만 시대가 갈수록 간소화되며, 당세구족 시대로 가면 아예 생략되기까지 한다.[13] 위의 투구에서 보면 면구를 쓰고 있다.[14] 챙 부분이 떨어져 나간 투구를 착용하고 있다.[15] 가마쿠라 ~ 무로마치 시기를 묘사한 그림들도 보면 대부분 고위 무사가 아닌 이상 머리띠에 철판을 이어붙인 간이 보호대나 합푸리라고 불리는 면갑을 쓰고 거기에 일부는 추가로 에보시라고 불리는 모자를 쓰고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16] 또한 일본의 더운 날씨와 여느 중세 국가들이 그러하듯 거의 통일되지 않았던 병사들의 장비차이도 한 몫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