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무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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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 중화민국 21대 국무총리 중화민국 초대 사법원장 중화민국 10대 외교부장 | |
정체 | 王寵惠 |
간체 | 王宠惠 |
한국식 독음 | 왕총혜 |
영문 | Wang Ch'unghui |
자 | 양주(亮疇) |
출생 | 1881년 10월 10일 영국령 홍콩 |
사망 | 1958년 3월 15일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학력 | 예일 대학교 법학박사 |
직업 | 외교관, 정치가 |
국무총리 재임 기간 | 대행 1922년 7월 31일 ~ 1922년 9월 19일 21대 1922년 9월 19일 ~ 1922년 11월 29일 |
사법원장 재임 기간 | 1대 1948년 6월 24일 ~ 1958년 3월 15일 |
외교부장 재임 기간 | 10대 1937년 3월 4일 ~ 1941년 4월 10일 |
1. 개요
중화민국의 외교관. 중화민국 국무총리, 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북양정부 시기에는 자유주의 지식인으로, 국민정부 시기에는 친영미 계열의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1년, 영국령 홍콩에서 기독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적은 광동성 동완현이다. 홍콩 세인트 폴 대학을 거쳐 1900년 천진북양대학당을 졸업하여 법학사 자격을 취득하고 잠시 상하이의 남양공학 교수로 일했다. 190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일본 유학 시기 장췬과 함께 국민보 편집에 참가하여 중국이 오랫동안 전제정치 아래에 놓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노예상태로 전락하였으며 민권을 향상시켜 중국의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02년, 다시 미국으로 유학하여 예일 대학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쑨원과 만나게 되었으며 1903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상하이 도독 천치메이의 고문을 거쳐 난징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외교총장에 임명되어 영미에 중화민국 승인을 로비하였다. 1912년 중화민국이 정식으로 건국되면서 3월 30일, 탕사오이 내각에서 사법총장에 임명되었으며 국민당에 가입, 황싱, 쑹자오런, 쑨원, 우징롄과 함께 국민당 이사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6월 27일, 탕사오이가 위안스카이와의 갈등 끝에 사임하자 이에 항의하여 7월 14일, 동반사직했다. 1913년 3월, 상하이에서 천치메이, 위유런, 황싱과 함께 중국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쑹자오런을 배웅하던 중 국무총리 자오빙쥔의 사주로 쑹자오런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2.2. 호인정치
이후 푸단 대학 대학 부총장으로 재임했으며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자 이를 크게 비판했다.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1917년 베이징으로 상경하여 법률편찬회 회장에 취임했다. 1918년 12월, 량스이 내각에서 사법총장에 지명되었다. 1919년 2월 16일, 베이징의 각계각층가 설립한 국민외교협회에서 량치차오 등과 함께 이사로 천거되었다. 또한 국제연맹동지회가 결성되면서 역시 이사로 선임되었다. 1919년 5.4운동이 발생하여 32명의 학생이 차오루린(曹汝霖)의 집을 불태운 죄로 체포되자 학생들의 석방운동을 주선하여 정부로부터 학생들 석방을 보장받았다. 1920년 대리원 원장, 형법위원회 회장, 법리위원회 회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8월, 워싱턴 회의에 중국측 대표단으로 주미 중국공사 스자오지, 주영 중국공사 구웨이쥔와 함께 참석하였다. 그 결과로 1922년 2월 구국공약이 체결되었다.1922년 5월, 뤄원간, 차이위안페이, 량수밍, 리다자오, 후스, 뤄원간 등 16명과 함께 <우리의 정치주장>을 발표하여 호인정치를 통해서 정치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1차 직봉전쟁에서 직예군벌이 승리하면서 대총통 쉬스창과 량스이 내각이 모두 퇴진하고 리위안훙이 총통에 옹립되자 법통중광이 이루어지고 구국회와 약법이 회복되었다. 법통중광 이후 첫 내각은 옌후이칭 내각이었으나 옌후이칭 내각이 각원들의 취임 거부로 붕괴되자 뒤이어 탕사오이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탕사오이는 취임을 거부하였고 우페이푸가 탕사오이 임명에 극렬히 반대하면서 공백기가 발생했고 이 기간 동안 왕충후이가 국무총리 대행을 맡았다. 국회와 직예군벌의 동시압박에 왕충후이는 피로를 호소하며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고 결국 탕사오이 내각이 최종적으로 붕괴되자 리위안훙으로부터 정식으로 중화민국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페이푸의 직예군벌 낙양파와 무당파 인사를 중심으로 내각을 꾸려서 낙파 내각, 호인 내각으로 불렸다. 우페이푸가 개명장군으로 불리는 등 군벌 중에서는 많이 배우고 노동권 신장에 관심이 있던 인물이라 왕충후이도 우페이푸에게 상당히 기대를 건 상태였다.
하지만 후스, 차이위안페이가 요구하는 연성회의의 소집, 1922년 경제위기, 국회에서 요구하는 낙파 각원의 축출 요구를 놓고 후원자인 우페이푸와 국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으며 결국 10월에 자신은 정식 국무총리가 아니라면서 사퇴의 의사를 밝혔지만 리위안훙의 만류로 사퇴를 번복했다. 하지만 11월에 발생한 뤄원간 사건으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1월 25일에 내각 총사퇴를 결정한다. 이후 1924년 쑨바오치 내각에서 사법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수정법률관 총재로 재직하였으며 구웨이쥔 내각에서 교육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중국 국민당에 투항하여 2기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고 이후 중앙감찰위원을 지냈다.
2.3. 중화민국 사법원장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난징 국민정부 사법부장에 선출되었다. 1928년 10월 8일, 국민정부 조직법이 통과되면서 사법원장 겸 국민정부 위원에 지명되었다. 1928년 11월 16일, 사법원이 구성되면서 정식으로 사법원장에 취임했다. 1931년 3월 2일, 중앙집행위원회의 건의에 따라 훈정 시기 약법이 제정되었는데 우징헝, 소력자, 소원충 등 12명과 함께 약법 제정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 5월 헤이그 국제법정 재판관에 임명되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법정 사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헤이그로 부임하기 전 6월 1일, 장제스, 입법원장 대리 소원충, 고시원장 다이지타오, 감찰원장 위유런과 함께 중화민국훈정시기약법을 공포했다. 이후 국민당 3기 5중전회에서 사법원장에 재선출되었다. 1929년, 중국의 미래에 대해 취재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한 조선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가지기도 하였다.1931년 1차 양광사변이 발생하자 장제스를 비판하며 철도부장 쑨커와 함께 상하이로 외유하여 난징으로 복귀하기를 거부했고 결국 광저우 국민정부 설립에 참여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중앙정치회의 외교조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학생들의 외교부 건물 난입 사건 때 일본인들에게 친일외교의 배후로 몰려서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934년 12월,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1935년 2월, 히로타 고키 일본 외무대신이 대중 친선을 표명하자 일본을 방문하여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 하야시 센주로 육군대신, 히로타 외무대신, 외무차관 시게미쓰 마모루와 회담했다.
2.4. 중화민국 외교부장
1937년 중화민국 국민정부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서안 사건으로 장제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4월부터 5월까지 한달간 행정원장 대행을 지내기도 했다. 7월에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기찰정무위원장 쑹저위안의 독자 협상을 비판하며 쑹저위안이 체결한 모든 협정은 중앙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무효로 천명했다. 이후 트라우트만 공작 과정에서 일본외상 히로타 고키와 협상하였으나 일본 측이 터무니 없는 요구를 강요하여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1938년 1월,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은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1938년, 하노이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왕징웨이 공작의 결과로 왕징웨이가 베트남으로 도주하자 장제스의 지시를 받고 왕징웨이를 설득하여 충칭으로 복귀시키고자 했지만 왕징웨이는 이를 무시하고 난징으로 가서 왕징웨이 정권의 수장이 되었다. 1938년 3월 29일부터 4월 1일까지 충칭에서 개최된 임시전국대표대회에서 외교보고를 맡았다. 이후 국방최고위원회 비서청장에 임명되었다.1942년 7월 조직된 전문소위원회에서 주자화, 우톄청, 천궈푸, 허잉친, 다이지타오와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어 한국 독립 문제를 담당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교섭했다. 1943년 12월, 카이로 회담에 장제스의 비서장 자격으로 참여하였으며 회담 선언의 문구 작성을 맡았다. 이때 윈스턴 처칠, 루이 마운트배튼 등과 회견했다. 장제스와 함께 한국의 독립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2.5. 말년
1945년 중일전쟁이 종결된 후 구성된 정치협상회의 헌법심의위원회의 전문가로 초빙되었다. 1947년 1기 국민대표대회에서 광동성 동완현 대표로 선출되었다. 1948년 중앙연구원 원사로 임명되었다.1948년 6월 23일, 헌정이 실시되면서 사법원장에 임명되었다. 국부천대 이후 1952년 국민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우톄청, 위유런, 쩌우루, 옌시산, 쑹메이링과 함께 국민당 중앙평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대만 동오대학의 이사장으로 재임하며 교육활동에 전념하다가 1958년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3. 가족
아내가 둘이었으나 아들 하나만 두었다.외아들 왕다홍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기계공학과 건축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1952년 타이베이에 건축사무소를 설립했다. 대만의 유명 건축가로서 주요작품으로는 국부기념관이 있다.
4. 주요경력
4.1. 북양정부 시기
중화민국 역대 사법총장 | ||||
중화민국 건국 | → | 1대 | → | 2대 |
왕충후이 (1912년 3월 30일 ~ 1912년 7월 14일) | → | 왕무통 |
4.2. 국민정부 시기
중화민국 역대 사법원장 | ||||
헌정실시 | → | 1대 | → | 2대 |
왕충후이 (1948년 6월 24일 ~ 1958년 3월 15일) | → | 사관생 |
난징 국민정부 역대 사법원장 | ||||
난징 국민정부 수립 | → | 1대 | → | 대행 |
왕충후이 (1928년 10월 10일 ~ 1932년 1월 6일) | → | 우차오수 |
난징 국민정부 역대 외교부장 | ||||
9대 | → | 10대 | → | 11대 |
장췬 | → | 왕충후이 (1937년 3월 4일 ~ 1941년 4월 10일) | → | 궈타이치 |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의 공화혁명, 민두기, 지식산업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중국당대40년사, 신승하, 고려원.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도서출판선인.
- 량치차오 평전, 셰시장, 글항아리.
- 제1차 직봉전쟁후 자유주의지식인의 북경정부관 - 호인정부론과 나문간사건을 중심으로, 윤혜영, 동양사학연구 26호, 동양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