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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1:57:24

우징롄

파일:오경렴.jpg
중화민국 중의원 의장
정체 吳景濂
간체 吴景濂
한국식 독음 오경렴
영문 Wú Jǐnglián
연백(蓮伯)
출생 1873년
청나라 봉천성 흥성현
사망 1944년 1월 24일 (향년 70~71세)
왕징웨이 정권 톈진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경사대학당
직업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호법운동2.3. 말년
3.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중화민국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3년 청나라 봉천성 흥성현에서 태어났다. 원적은 산동성 봉래현이다. 21세에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거인이 되었고 경사대학당을 졸업한 후 봉천 양급 사범학당의 감독을 거쳐 봉천교육회 회장을 지냈다. 이후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귀국 후 학생들을 가르치며 신학문 보급에 힘썼다. 1909년 봉천 자의국 의원에 당선된 후 자의국 의장에 선출되었다.

1911년, 무창봉기가 발생하자 이에 호응하여 12월 12일, 보안회의를 소집하여 봉천군벌 위안진카이의 지지를 받았고 남천위 등과 함께 동삼성 총독 조이손을 축출하고 봉천성 민정장에 앉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자 했으나 장쭤린이 조이손 지지를 천명하면서 독립안은 부결되고 봉천 국민 보안공회 설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우징롄은 보안공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위안진카이도 조이손 지지로 선회하였고 이 때문에 남천위가 실각하고 장용 등이 암살되었다.

이후 난징으로 남하하여 임시참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12년 중화민국이 설립된 후 황싱, 쑹자오런, 왕충후이, 쑨원과 함께 국민당 이사에 선출되었다. 중화민국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여성 참정권 부여에 반대하여 당군영, 심패정 등 여성 참정론자들과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2.2. 호법운동

위안스카이가 독재를 강화해나가자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리례쥔 등의 무력토벌 주장에는 반대했다.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이 일어나면서 중의원 자리를 상실했다. 1916년 홍헌제제를 일으켰던 위안스카이가 급서한 후 후임 총통 리위안훙이 국회를 복구하면서 다시 중의원이 되었으며 중의원 의장 탕화룽(湯化龍)이 퇴임함에 따라 중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때 구 국민당 온건파 왕정팅, 장쥐, 구중슈(谷鍾秀), 장요증 등과 함께 객려파를 구성하였다. 1917년 부원지쟁 중에 객려파는 강경하게 참전을 주장하는 구중슈, 장요증의 정학회와 장쥐, 우징롄의 익우사로 분당되었다. 우징롄은 참전에 소극적으로 찬성하였고 이에 반발한 왕정팅저보성이 익우사를 탈당하여 정여구락부를 조직하였다.

1917년, 장훈복벽을 진압한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민국 재조설을 주장하면서 국회 재건을 거부하자 쑨원과 함께 광저우로 남하하여 광동 군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때 정여구락부와 익우사가 재합당하였다. 8월 25일 구성된 비상국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이 때문에 8월 29일, 돤치루이로부터 체포령이 하달되어 호법전쟁이 발발하였다. 1918년 6월, 군정부 개조가 이루어지면서 6월 12일, 중의원 의장이 되었다. 군정부 개조 초기엔 초기엔 탕사오이, 탕지야오와 연합했으나 이어 천춘쉬안루룽팅와 연합했다. 하지만 천춘쉬안이 지도하는 정학계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린썬, 쥐정 등 쑨원을 강경하게 옹호하는 민우사와 함께 정학계와 대립했다.

1919년 호법국회 선거에서도 중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20년 3월, 계계군벌의 위협이 노골적이 되자 우팅팡, 린썬과 함께 광동 군정부를 보이콧하고 군정부에서 이탈하여 상하이에 거주하였다. 5.4운동 이후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합작하여 반제운동을 벌였으며 돤치루이에게 구국회 회복을 놓고 협상을 벌였으나 쉬수정 등 돤치루이의 측근 문제가 걸리면서 별 성과는 보이지 못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에서 봉천군벌이 패퇴하고 차오쿤, 우페이푸가 정권을 잡자 국회 회복에 기대를 걸고 모친상을 구실로 봉천을 방문, 장쭤린을 만나 국회 회복을 타진했으나 큰 소득을 얻지 못하자 4월 27일,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전 참의원 의장 왕가양과 함께 대대적인 국회 회복 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 5월 10일, 차오쿤과 우페이푸가 소집한 바오딩 회의에 참석하여 국회 회복을 주장했고 회의 결과에 따라 각성에 국회 회복을 묻는 통전이 행해지자 쑨촨팡을 비롯한 각 군벌들이 국회 회복에 찬성하였다. 량치차오, 왕충후이, 차이위안페이 등 베이징의 학계가 국회 회복을 요구하자 차오쿤은 이를 수용하여 국회를 복구하였다. 우징롄은 과거의 경력을 그대로 인정받아 중의원 의장에 선출되었고 참의원 의장 왕가양과 함께 대총통 쉬스창을 핍박하여 하야시키고 리위안훙을 다시 총통에 복직시켰다. 1922년 11월, 재정총장 뤄원간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뇌물을 받아 불법차관 상환 조약을 체결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를 체포하는 뤄원간 사건을 일으켰다.

1923년 대총통 선거에서 막대한 양의 뇌물을 뿌리고 정족수에 대한 허위사실까지 발표하면서 차오쿤을 대총통에 당선시켰으나 직예군벌 직속의 헌정당의 핍박으로 차오쿤 헌법 통과, 쑨바오치 내각 붕괴를 보고 좌절하여 톈진으로 은거했으며 1924년 1월 선거에서 중의원 자리도 잃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장쭤린이 베이징에 입성하자 봉천군벌 왕승빈을 통해 장쭤린과 결탁하였다. 돤치루이가 임시집정에 취임한 후 국회의원 자리를 되찾고자 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2.3. 말년

이후 톈진에 은거하였으며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일본 측으로부터 동북으로 돌아와 만주국 건국에 참여하라는 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베이핑-톈진 전투가 벌어져 평진 지역이 일본군에게 점령되자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의 수장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계속 톈진에 은거했다. 1944년 1월, 사망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