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무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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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14대 국무총리 | ||
정체 | 錢能訓 | |
간체 | 钱能训 | |
한국식 독음 | 전능훈 | |
영문 | Qian Nengxun | |
자 | 간신(幹臣) | |
출생 | 1869년 청나라 절강성 가선현[1] | |
사망 | 1924년 6월 5일 중화민국 베이징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
학력 | 청나라 과거 | |
직업 | 정치가 | |
국무총리 재임 기간 | 14대 1918년 12월 20일 ~ 1919년 6월 13일 |
1. 개요
북양정부의 정치인. 국무총리, 내정총장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으나 5.4운동으로 사임했다.2. 생애
1869년 청나라 절강성 가선현에서 출생했다. 1898년 무술과(戊戌科)를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고 호북향시고관, 광동향시고관, 광서학정, 원외향(員外郎)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3년 감찰어사(監察御史)의 벼슬을 받았으며 1906년 순경부 상서 쉬스창의 밑에서 순경부 우참의, 우승을 지냈다. 이후 순경부가 민정부로 개편되면서 민정부 우승으로 옮겼으며 1907년 쉬스창이 초대 동삼성 총독에 임명되자 쉬스창을 따라 만주로 임지를 옮겨 봉천성 우참찬(右參贊)을 지냈다. 이로서 확실히 쉬스창의 사람이 되었고 훗날 쉬스창이 군기대신에 이르자 그의 추천을 받아 1908년 순천부윤, 1910년 섬서시정사를 거쳐 1911년 7월 섬서순무에 이르렀다. 10월에 무창봉기가 발생하고 섬서성에서도 혁명군이 봉기하여 서안을 점령하자 도주하였다.중화민국 건국 후 쉬스창, 그리고 그의 맹우인 위안스카이의 북양군벌이 공화국을 확고히 장악하자 1913년 10월, 내무차장에 임명되었다. 1914년 3월 약법회의 의원에 선출되어 약법을 기초하였고 5월에 대총통부 정사당 우승에 임명되었다. 7월에 위안스카이의 명으로 예제관(禮制館) 총재 쉬스창 밑에서 부총재를 겸하였다. 계축전쟁을 거치면서 중화민국 국회 해산이 행해지고 더 이상 위안스카이를 방해할 세력이 없어지자 계속 중용되어 1915년 1월 중경(中卿)에, 1915년 10월 평정원 원장 서리에 임명되었다가 1916년 4월에 정식으로 평정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의 배후였던 위안스카이가 무리하게 홍헌제제를 시도하다가 호국전쟁으로 궁지에 몰려 퇴위하고 죽자 뒤를 이은 리위안훙-돤치루이 정부는 7월에 첸넝쉰을 평정원 원장에서 해임하였다.
하지만 1917년 12월, 왕스전 내각에서 내무총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요직에 올랐고 1918년 2월, 왕스전이 국무총리에서 퇴임하면서 국무총리 대행을 맡았다. 이후 3차 돤치루이 내각이 출범하면서 돤치루이 밑의 국무총리에 머물렀다가 펑궈장 대총통이 하야하고 쉬스창이 정식으로 대총통에 당선되면서 펑궈장과 돤치루이의 약조에 따라 돤치루이가 총리에서 하야하면서 대리 국무총리를 맡게 되었다. 이때는 호국전쟁으로 나라가 매우 혼란한 때였으므로 첸넝쉰은 남북화의를 주장하였고 이 때문에 돤치루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인물로 국무총리를 교체하려 했으나 열강이 첸넝쉰을 지지하고 쉬스창도 강력하게 첸넝쉰을 밀어주어서 12월에 정식 국무총리 겸 내무총장에 임명되어 내각을 조직하였다. 흔히 돤치루이의 꼭두각시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돤치루이는 첸넝쉰의 임명에 반대했으며, 첸넝쉰도 돤치루이의 최측근인 쉬수정이 안복구락부를 결성하여 전횡을 부리자 진윈펑과 함께 기미구락부를 조직하여 대항하는 등 안휘계의 독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안복계로부터 제대로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첸넝쉰이 내각을 조직한 직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산동반도의 권익을 일본에 양도하기로 최종결정이 내려지자 이에 분노한 중국 민중이 5.4운동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쉬스창 등도 열강의 눈치를 보아 베르사유 조약을 승인할 방침이었으나 상상을 초월하는 민중의 분노와 더불어 지식인들과 돤치루이의 안복구락부를 비롯한 국회의원들 대다수도 민중에게 동조하자 쉬스창은 방침을 바꾸어 조약을 승인하지 않기로 하고 시위대에 대한 문명적 대우를 지시하였다. 돤치루이는 쉬스창의 행동이 자신을 몰아내려는 음모로 여겨 거세게 반발했고 중간에 끼인 첸넝쉰은 돤치루이와 쉬스창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제대로 총리 노릇을 하지 못하고 1919년 6월에 국무총리에서 하야했다.
국무총리 하야 후 11월부터 태호의 수리공정독판(水利工程督辦)을 맡았으며 이듬해인 1920년 8월까지 재직했다. 이후 외교부 고문으로 옮겨갔으며 1921년 8월 중국후원회를 조직하여 주석을 맡았다. 1924년 6월 5일, 베이징에서 향년 55세를 일기로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 곽정이, 『中華民國史事日誌』 1권(대북: 中央硏究院近代史硏究所, 1979).
- 서우춘, 『民國人物大辭典』(석가장: 하북인민출판사, 1991).
- 신승하, 『중화민국과 공산혁명』(서울: 대명출판사, 2004).
- 장옥법, 『중국현대정치사론』(서울: 고려원, 1991).
- 진지양, 『군신정권』(서울: 고려원, 1993).
- 박준수, 「「臨時約法」體制와 段祺瑞軍閥政權(1916-1920)」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