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전주시/관광
, 덕진구/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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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의 관광에 대한 문서.전주시의 유명 관광지 대부분이 이곳에 있다.
2. 전주 한옥마을 + 경기전
전주 한옥마을과 경기전 문서를 참조. 경기전은 한옥마을 바로 옆에 있고, 전동성당은 경기전 맞은 편에 있어 보통 한 번에 세 곳을 동시에 구경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 '관광지 전주' 하면 가장 유명한 곳.[1]3. 전동성당
천주교 전주교구의 성당. 바로 옆에 전주교구에서 운영하는 천주교 미션스쿨인 전주성심여자중학교와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가 있다. 한옥마을 바로 건너편이라 유교와 가톨릭의 공존이라는 역사적[2] 및 지리적 특징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이를 노려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많다.[3] 자세한 것은 전동성당 항목 참조.3.1. 남부시장 + 청년몰
완산구 전동에 있으며 한옥마을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시장이다. 콩나물국밥[4]과 피순대국밥이 유명하다. 모범시장으로 선정될 정도로 볼거리가 많다. 특히 금요일, 토요일 밤에 열리는 야시장에는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풍성하다.
이 시장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2층에 청년몰이 있다는 것이다.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면 아래 재래시장과는 완전히 다른 청년몰이 나타난다. 청년들이 창업한 가게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고 시장의 디자인 또한 멋지고 예술성이 돋보인다. 공예품, 골동품, 문방구, 식당들이 모여 있는 훌륭한 청년시장. 공연도 자주 있으며 냥보도 있는 고양이들이 유유자적 돌아다니고 있어 냥덕들에게는 천국같은 곳이다. 꼭 가보길.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청년몰과 연결된 하늘정원에는 탁자벤치가 있어 전주시내 재래시장들 중 유일하게 시장에서 사 온 음식들을 편히 앉아서 먹을 수 있다. 덕분에 남부시장은 우수 시장으로 선정됐고 청년몰은 모범사례로 뽑혀 전북 내 다른 도시들은 물론 다른 지방에도 도입되고 있다.
다만 2024년 기준으로는 중·장년층이 주요 고객인 전통시장과 청년몰의 정체성 충돌, 유통인구 부족, 특색 없는 콘셉트, 창업역량 부족, 외식업 공급과잉, 홍보 부족 등의 문제로 인해 청년몰은 있어도 제대로 된 점포는 없다는 문제 및 비판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주된 원인은 전주시가 관광사업 외엔 뚜렷한 일자리가 없어 청년인구 유출 및 고령화가 매우 빠르고, 청년몰 지원사업으로 인해 창업의 문턱이 낮아 창업도 폐업도 빠르다는 것이다. #1 #2 원조(?)가 이런 상황인데 다른 지방의 청년몰은 더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3 영업률 및 이용 만족도가 높아서 실패했다고 보기는 힘들기에 전통시장 활성화보다는 청년창업 성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반론이 있기는 하나(#4), 미숙한 창업을 부추길 뿐이라는 재반론도 적지 않다.
4. 풍남문
문서 참고.5. 전주 향교
사적 제 379호. 위치는 전주시 교동으로 한옥마을과 지근거리에 있다. YMCA 야구단, 성균관 스캔들, 구르미 그린 달빛 등의 영화나 드라마 일부 장면을 이곳에서 찍기도 하였다.특히 가을날 저녁에 가면 곳곳에 있는 은행나무에 빼곡하게 달린 노란 은행잎이 햇살에 비쳐 향교 전체가 노랗게 빛나는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
5.1. 자만벽화마을
한옥마을 뒤쪽 도로로 나오면 산이 있는데, 그 산 오르막길에 마을이 하나 있다. 평범한 오르막길 주택가가 아니라 벽에 멋진 그림들이 그려진 아름다운 마을.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83400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열차를 그려놓은 벽이 유명하다. 이곳 역시 게스트하우스나 멋진 공예품 가게가 아기자기 모인 곳으로 한옥마을과 함께 꼭 돌아봐야 할 코스.
본래 이곳은 자만동(滋滿洞)이라고 하여 고려 및 조선시대부터 전주에 사는 백성들이 많이 모여 사는 거주촌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간납대[5] 등등 선비들이 모여 살며 후학 앙성 및 학문을 닦던 곳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선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살던 곳으로, 자만동 금표(滋滿洞 禁標)라고 하여 구한말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국권피탈시기에 쓰라린 마음을 부여잡고 조상들의 흔적과 나라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념하고자 잡인들이나 유래없이 떠돌던 백성들이 함부로 들어와 살지 못하게 옆의 이목대와 함께 비표를 세워 성역 비슷하게 취급되던 곳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런 역사가 서린 곳을 페인트 벽화만 그려 놓고, 벽화마을이라 하며 마을의 유래나 역사적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재 이곳은 상업화가 진행되어 주택들이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카페 및 유행가만 들려오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는 지적도 있다. 방문해서 주변 경관을 둘러보면 알겠지만, 근처에 완산팔경 중 2개나 있을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곳인데... 근처 마개조된 건물들과의 조화가 상당히 부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공간을 이렇게 페인트 벽화만 그릴게 아니라, 낙후된 주거지역은 적절한 보수 및 개선을 하고, 구한말 국권피탈시기의 역사적상징물로서 근처의 경기전과 오목대와 연계하여 관광객들이나 학생들에게 역사인식이나 역사학습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고 ,구한말 고종황제가 어떤 마음이었을지와 나라 잃은 마음이 어떨지 생각하며 자만동 금표를 찾아보자. 더 뜻 깊은 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 전라감영
전주완산경찰서 앞 옛 전라북도청 부지에 옛 전라감영을 복원하였다.
7. 전주 차이나거리
전동성당을 건설한 중국인 노동자들이 형성한 곳. 2003년에 중국 쑤저우시(장쑤성)와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근처에 소주가(蘇州街)라고 쓰인 패루가 있다. 다만 패루와 용 장식의 가로등 외에는 중국적인 특색은 별로 없다. 근대건축물 정도의 볼거리가 있다.8. 전주 객사
대한민국의 보물 | ||||
582호 | ← | 583호 | → | 584호 |
월인석보 목판 | 전주 풍패지관 | 구례 윤문효공 신도비 |
전주객사(全州客舍). 전주시내 번화가에 있는 문화재. 보물 제 583호. |
조선 초기 전주부성이 지어질 때 같이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때 조정의 칙사나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여기 묵었다. 전주가 태조 이성계 가문의 고향이라 하여 '풍패지관'이라는 현판[6]이 붙어 있는데, 풍패(정확히는 패현의 풍읍)는 중국 전한 고조의 고향이다. 곧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전주를 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전주시내 중심에 가깝고 실제로 전주 시내에서 가장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거리가 바로 이 쪽에 있어서 영화제 기간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객사 주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가 된다. 도심속에 나홀로 전통 건축물이 있는 모양새.
이름이 객사라 잘 모르는 타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죽는다는 의미의 客死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이쪽으로 난 길이름이 객사길이라 처음 본 이들은 식겁하기도.
전주에서 시내라면 대개 객사 부근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세이브존(舊 코아백화점)에서 경기전 부근까지를 시내로 치지만 '시내에서 만나자'라면 열에 아홉은 객사길을 말한다. 신시가지는 그냥 신시가지라고 하기 때문.
시내 한가운데 있는 상징적 문화재이나 전주시 시내버스에 '객사'라 써놓은 버스는 별로 없다. 객사라는 이름을 가진 정류장은 풍패지관 바로 앞 충경로상에 위치한 '충경로.객사' 뿐이고, 팔달로상에 위치한 정류장들은 외환은행, KB국민은행, 전북은행경원지점, CTS전북방송, 흥국화재 등으로 제각각이다. 다행히 전주시 시내버스가 여러 차례 개편되면서 내려야 할 정류장이 충경로/객사, 외환은행, 북문, 팔달로 예술회관 4군데로 간소화됐기 때문에 옛날만큼 헷갈리는 일은 줄어들었다.[7] 이 외에도 과거에도 애용됐던 동부시장과 전동(한옥마을) 등의 다른 버스정류장에서 내려도 상관이 없는데, 전주시가 생각보다 좁다보니 저 정류장들에서 횡단보도 한두개만 건너면 바로 객사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걷기에 자신 있는 사람이라면 남부시장(&청년몰)-풍남문-한옥마을-동부시장-객사 순으로 하루만에 돌 수 있을 정도의 거리이기도 하다.
전북대학교 대학로와 함께 전주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 객사 주변은 전주에서 가장 땅값 비싸기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타지인들의 관점에서는 전북대 근처나 서부신도심 등에 비해 상당히 낙후되어 보이는 편이다.[8] 특히 동문예술거리, 영화거리 쪽은 완전히 침체되어 있으므로 막상 가면 실망할 확률이 높으니 전주시를 여행하려는 관광객들은 참고하길 바란다.
또한 객사 안으로 들어가서 사진도 찍을 수 있으며 여름철이면 전주 시민들이 객사 건물 안에 앉거나 누워서 햇빛을 피하고는 한다. 최근 전주의 여름은 대단히 무더워 한낮이면 학생이고 어른이고 다들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간간히 그 앞마당에서 공연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전주 객사길 문서를 참조.
객사 인근 충경로사거리에는 수제초코파이로 유명한 PNB풍년제과 본점이 있다.
9. 다가공원
전주신흥고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공원. 예로부터 유서깊은 활터가 있어 사람들이 훈련 장소로 많이 사용했다. 숙종 28년에 전주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정자를 세우고 천양정이라 이름붙였으나 9년 뒤 대홍수로 떠내려가버린 뒤 근처에 정자를 다시 세우고 이번에는 이름을 다가정이라 붙였다. 정조 2년에는 정원을 만들고 활터를 넓히는 등 정비가 이뤄졌고, 순조 30년에 다가정 구내에 일사정을 세우고 남쪽에 과녁판을 설치한 뒤 이름을 다시 천양정으로 바꿨다. 일제강점기에는 전주신사가 세워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에는 신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신사가 있었다는 팻말을 세워놓았다.천양정에서는 1995년부터 풍남제 행사의 일환으로 무과 급제 재현이 이뤄지고 있으며, 공원 정상에는 이병기 시인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10. 치명자산
링크
교동에 있는 해발 306m 높이의 산으로 가톨릭의 치명자산 성지로 꾸며진 곳이다. 원래 이름은 우리말로는 중바우이고, 한자(이자 공식 명칭)으로는 승암산이라고 불리운다. '치명자'란 천주교 전래 초기 순교자를 가리키던 옛 말이다. 쉽게 말해 '천주교 순교자가 묻혀 있는 산'이라는 뜻.
이곳에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동정부부[9]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부부를 포함해 유중철의 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가족의 무덤이 있다.[10]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가족의 무덤 아래에는 성당이 있으며, 치명자산 입구에는 주차장 및 기도,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산에 올라가는 길목에 십자가를 세워 만든 십자가의 길이 있어서 매년 사순 시기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기 위해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많이 온다. 산의 중턱에는 사목 활동을 하다 사망한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님들을 모신 '사제들을 위한 묘지'가 있다.
후삼국 시대 견훤의 거점이었던 옛 전주성의 흔적인 동고산성이 남아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1. 국립전주박물관
전주시 삼천동에 있으며, 전주 역사박물관이 같이 있다. 김제 금구로 가는 방향에 있다. 자세한 것은 국립전주박물관 문서 참조.
12. 한국전통문화전당
전주시청 인근 경원동에 있는 건물로 국비와 시비를 들여 건립하고 2015년 4월에 개관한 문화전당이다. 전통문화산업의 발전과 거점 센터로서의 역할을 하며 규모가 상당히 크다. 전주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주문화관과 한지나 국악 등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는데 상당히 잘 되어 있다. 또한 문화행사와 축제가 자주 열리고 있으며 최근 전주에 새로 생긴 새로운 문화 시설로 자리잡고 있다. 한지산업지원센터 등 전통산업을 육성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 건물 터에는 전북대학교병원이 있었으나 1987년 병원이 금암동 현 위치로 옮겨졌다. 옛 병원 건물은 철거됐고 남쪽의 치과대학 건물은 평생교육원으로 쓰이고 있다.
13. 전주영화종합촬영소
전주시 상림동에 있으며 기생충, 나랏말싸미, 사도, 남산의 부장들 등 많은 영화를 촬영한 곳이다. 내부에서 영화와 관련된 전시물들을 볼 수 있다. 세트장도 있으나 찍은 후 촬영 바로 철거하여 안타깝게도 이 영화들의 세트는 볼 수 없다. 단, 영화 기생충 세트의 경우 복원한다고 한다.#14. 전주역사박물관
자세한 내용은 전주역사박물관 문서 참고하십시오.15. 모악산
자세한 내용은 모악산 문서 참고하십시오.[1] 실제로 방문해보면 '남부시장-풍남문 로터리-전동성당/경기전-한옥마을-전주향교'로 이어지는 코스로 전주향교 인근에 한옥 숙소가 다수 포진해있기 때문에 관광하기 아주 좋은 지역이다.[2] 조선 후기의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말한다. 국가유산청 블로그의 간략한 소개를 참고.[3] 풍남문 로터리에서 찍으면 왼쪽에 한옥마을, 오른쪽에 전동성당을 담을 수 있어서 좋다. 한옥마을 안에서 반대 구도로 찍어도 좋고.[4] 현대옥의 남부시장식 콩나물국밥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5] 現 천주교 전주교구청 자리. 舊 전주공전 및 전주영생고등학교, 舊 영생여상(현 전주대사대부고) 자리다. 한산 이씨 이기발, 이흥발, 이생발 3형제가 살았다고 한다. 한산 이씨는 고려 말 삼은 중 하나였던 목은 이색의 집안으로, 이기발이 사간원 헌납이라는 벼슬에 올랐는데, 병자호란 이후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이곳에 내려와 살았다 하여 사간(司諫)의 간(諫) 자와 헌납(獻納)의 납(納) 자를 따서 (諫納臺)라 했다고 한다. 원래는 정자형식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 현재는 오래전에 소실되고 없다.[6] 현판에 글씨를 쓴 사람은 1606년에 명나라에서 파견한 사절단의 정사인 주지번(朱之蕃)인데, 이 사람이 1593년 조선 사신단의 서장관으로 명에 간 표옹 송영구의 도움을 받아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다. 정사로 파견된 후 전주(현 익산 왕궁면)에 기거하던 스승의 행방을 찾으러 내려오면서 객사에서 하룻밤을 잔 김에 써 준 것. 당시 주지번은 명나라 3대 문장가로 손꼽혔다고 한다. 참고로 주지번은 평양에 왔을 때 회고시 100수를 하룻밤만에 써달라고 한 적이 있는데, 시간이 촉박해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이항복의 추천에 따라 차천로가 취기와 한석봉의 붓글씨의 도움을 받아 정말로 완성했다고 한다. 참고1 참고2[7] 실제로 Daum 지도 기준으로 전주고속버스터미널, 전주시외버스공용터미널, 전주역 3군데를 출발로 삼고 풍패지관으로 가는 대중교통 경로를 검색해보면 저 넷이 겹친다.[8] 아닌게아니라 당장 전주시 현지인들이나 학계 및 언론도 이 일대를 (서부신도심과 비교하긴 하지만) '구도심'이라 칭한다.[9] 말 그대로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서로가 동정을 유지했다는 뜻.[10]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호남지역 최초의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를 비롯해 그의 아들들인 유중철 요한-유문석 요한 형제, 유중철의 아내 이순이 루갈다, 유항검의 조카인 유중성 마태오 등이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한민국을 방문했을 때 일제히 복자로 시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