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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롱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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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응우옌 왕조 초대 황제
자롱 황제
嘉隆帝 | Gia Long
파일:가륭제(세조).jpg
출생 1762년 2월 8일
대월 후 레 왕조 응우옌씨 정권 광남
(現 베트남 꽝남성)
사망 1820년 2월 3일 (향년 57세)
대월 응우옌 왕조 후에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능묘 천수릉(天授陵)
재위기간 대원수섭국정
1778년 ~ 1780년 1월
완주 국왕
1780년 1월 ~ 1802년 6월 1일
초대 황제
1802년 6월 1일 ~ 1820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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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성씨 응우옌(Nguyễn, 阮/완)
푹아인(Phúc Ánh, 福暎/복영) / 아인(Ánh, 暎/영)
부모 부황 흥조 강황제
모후 효강황후
형제자매 6남 4녀 중 3남
배우자 승천고황후, 순천고황후 외
자녀 13남 18녀
묘호 세조(世祖)
시호 개천홍도입기수통신문성무준덕융공지인대효고황제
(開天弘道立紀垂統神文聖武俊德隆功至仁大孝高皇帝)
연호 자롱(Gia Long, 嘉隆/가륭)], 1802년 ~ 1820년)
}}}}}}}}} ||

1. 개요2. 상세3. 이름 표기4. 생애
4.1. 초기4.2. 나라를 잃고 남하하다4.3. 시암 망명4.4. 시암의 지원4.5. 프랑스와 포르투갈에 원조 요청4.6. 내정 정리4.7. 서산멸망전과 황제 즉위4.8. 황제 즉위 이후
4.8.1. 지방 행정4.8.2. 군사 제도4.8.3. 경제 제도4.8.4. 관료, 법 제도4.8.5. 과거와 학업4.8.6. 종교
4.9. 토사구팽4.10. 말년과 사망
5. 평가
5.1. 현대 베트남에서의 취급
6. 가계도
6.1. 선조6.2. 비빈6.3. 황자6.4. 공주
7. 참고 항목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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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대남국)의 초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사용한 연호가 가륭(嘉隆) 단 하나뿐이므로 자롱 황제, 가륭제라 부른다. 본명은 응우옌푹아인(Nguyễn Phúc Ánh, 阮福暎, 완복영), 또는 응우옌아인(Nguyễn Ánh, 阮暎, 완영).

2. 상세

응우옌푹아인은 구 후 레 왕조가 명목상으로 존속한 시기인 응우옌씨 정권(광남국)의 8대 국왕 응우옌푹코앗의 손자로 광남국의 왕족이다. 응우옌푹아인의 아버지 응우옌푹루언(흥조)은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옥에 갇혀 응우옌푹아인의 나이 3살때 사망한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던 응우옌푹아인은 응우옌푹코앗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 응우옌푹투언과 간신 쯔엉푹로안(Trương Phúc Loan, 張福巒, 장복만)의 횡포로 떠이선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광남국이 멸망, 응우옌푹즈엉을 비롯한 광남 응우옌씨들이 대부분 학살당하는 상황에서 홀로 탈출해 시암라마 1세에게 지원받은 군대를 토대로 정권 재건 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15세였다.

떠이선 일족이 반란을 일으킨 후인 1780년대부턴 이미 떠이선 세력들이 떠이선 왕조를 세우고 황제 노릇을 하던 중이었다. 응우옌푹아인은 간신히 자딘을 포함한 남부를 수복하고 떠이선과 3번 충돌했으나 다 실패했고 한때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참혹한 패배로 다가왔었다. 그러나 미얀마, 마카오, 시암, 베트남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인 선교사 피에르 피뇨 드 베엔을 우연히 만나 친분을 쌓고 나중엔 피뇨가 자신의 사비를 털어 탄약, 무기, 병사들을 징집한 후 응우옌푹아인도 포르투갈, 영국, 캄보디아 병력들을 징병한 결과 다국적군을 구성하고 1802년 꾸이년에서 마지막으로 발악하는 떠이선 황제 깐틴 황제를 격파한 후 도망간 서산 일족을 모조리 잡아들여 탕롱에서 떠이선 일족과 그 신하들을 남김없이 처형해 1802년 베트남을 다시 통일한다.

이후 1804년 국호를 대월에서 대남(大南)으로 바꾸고 1806년엔 칭황식을 올려 외왕내제, 황제가 되고 1815년엔 중국식 유교제도를 모방한 가륭율례(嘉隆律例)를 반포해 구시대적인 유교 제도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캄보디아, 라오스에 내정간섭을 하여 후대 민망 황제 시기의 전성기의 기초를 다졌다. 그러는 한편 국가(國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등단궁(登壇宮)》이라는 국가를 지어 사용했다. 이 국가는 응우옌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아닌 외세의 힘을 빌려 왕조를 개창한 결과 프랑스의 압박이 없을 순 없었고 프랑스의 선교에선 당시 한자문화권 국가중 유일하게 외형적으론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속으론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싫어했기에 아들 민망, 손자 티에우찌, 증손자 뜨득 때에 폭발해 프랑스와의 전투를 벌이고 패배하여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화가 되는 걸 앞당겼다.[1] 한국사의 신라는 처음에 당나라의 힘을 빌렸으나 이후 나당전쟁에서 승리해 당나라를 쫓아내서 스스로 상황을 정리했고 이에 따라 문무왕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반면 자롱 황제가 개창한 응우옌 왕조는 결국 외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훗날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 때문에 오늘날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프랑스와 접촉했다는 점에서, 근대식 무기를 들여왔기에 자롱 황제의 등극은 근대화를 앞당겼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3. 이름 표기

현지 한자 한국 영문 음(현지 및 영어) 음(중국어)
Gia Long Vua 嘉隆王 가륭왕 Vua Gia Long 자 롱 부어 자 롱 왕
Thế Tổ 世祖 세조 The To 테 또 쉬 주
Nguyễn Phúc Ánh 阮福映 완복영 Nguyen Phuc Anh 응우옌푹아인 루안-푸-잉
Nguyễn Ánh 阮映 완영 Nguyen Anh 응우옌아인 루안-잉
Nguyễn Thế Tổ 阮世祖 완세조 Nguyen The To 응우옌 테 또 루안-쉬 주
Nguyễn Phúc Noãn[2] 阮福暖 완복란 Nguyen Phuc Noan 응우옌푹누안 루안-푹-누안
Nguyễn Phúc Chủng[3] 阮福種 완복종 Nguyen Phuc Chung 응우옌푹쭝 루안-푹-쭝
Cao Hoàng đế[4] 高皇帝 고황제 Cao Hoang de 카오 황 데 까오 황 디
Lăng Thiên Thọ[5] 天授陵 천수릉 Lang Thien Tho 랑 티엔 토 티엔 숴 링
Nguyễn Vương 阮王 완왕 Nguyen Vuong 응우옌 브엉 루안-왕

4. 생애

4.1. 초기

본명은 완복란 또는 완복종. 후에 흥조로 추존된 응우옌푹루언과 응우옌티호안(Nguyễn Thị Hoàn, 阮氏環, 완씨환)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응우옌푹루언은 당시 광남국의 왕 세종 응우옌푹코앗의 차남으로 후에 대남국(응우옌 왕조)이 세워진 후 편찬된 기록에 따르면 1765년 세종이 사망했을 당시엔 세종의 세자였던 효선왕[6]이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세종은 흥조를 즉위시키라고 유조를 남겼다.

그러나 권신 즈엉푹로안이 유조를 조작해 세종의 16남인 응우옌푹투언(예종)을 즉위시켰다. 단 일부 학자들은 흥조가 후계자로 지정된 건 대남국에 세워진 후에야 나온 관점, 즉 자롱 황제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이미 아버지 때부터 즉위해야 했던 상황' 이란 설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선왕 사후 응우옌푹코앗은 예종을 후사로 정했고 선왕의 장남인 응우옌푹즈엉(목왕)을 지정하는 것도 고려했다고 한다. 참고로 목왕은 응우옌반냑떠이선 농민 봉기를 일으켜 예종을 실각시켰을 때 그를 대신할 괴뢰 왕으로 옹립될만큼 명성이 높았으나 응우옌푹아인은 당시엔 그저 일개 황족이었을 뿐이었다.

세종 사후 응우옌푹아인은 겨우 4살에 불과했고 권력 다툼에 패한 아버지와 함께 궁중에 유폐당했다. 아버지 응우옌푹루언은 얼마 안가 죽었고 즉위한 예종은 당시 11살에 불과한 어린 아이였기에 뭐가 뭔지 몰라 정사에 신경쓰지 않았으며 자연스레 그를 옹립하여 공신이 된 즈엉푹로안이 모든 정권을 장악했고 학정을 일삼아[7] 당시 광남의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다. 결국 1771년 응우옌반냑, 응우옌반르, 응우옌반후에 삼형제가 난을 일으키자 각지의 호응을 얻었고 1774년엔 광남에서 반란이 일어났단 소식을 접한 북쪽의 통치자 찐섬도 호앙응우푹을 내세워 삼형제와 연합하고 광남을 공격했다. 응우옌푹아인은 예종을 보좌해 쟈딘으로 피신했고 그 공으로 관직을 얻고 군부대 하나의 통솔권을 받는다. 대남국 사료엔 이때 응우옌푹아인의 나이가 어렸지만 기략이 좋아 여러 장군들과 예종의 기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어서 1771년 떠이선 왕조의 왕[8]을 칭한 응우옌반냑이 동생인 응우옌반르와 응우옌반후에를 내세워 쟈딘을 공격하자 응우옌푹아인은 태상왕 예종을 지키고 현왕인 목왕은 현재의 빈롱성에서 농성하다 패배해 응우옌반후에에게 항복한 후 처형당했고 태상왕 예종마저 도주하다 많은 응우옌씨 일족과 처형당해 광남 응우옌씨 정권은 멸망했다. 응우옌푹아인은 이 처형식에서 홀로 살아남아 적석으로 도망갔고 천주교 선도자인 파올로(Paul Nghi)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후 하띠엔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꿔주고 최고의 공신이 되는 피뇨 선교사를 만났다. 파올로가 피뇨에게 일련의 사건을 말해줘 피뇨는 망국의 왕손 응우옌푹아인을 도왔다. 자세한 내용은 응우옌푹아인이 자신이 떠이선에게 이겨 전국을 통일하면 전국에 천주교를 제한없이 전파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응우옌푹아인을 돕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이후 그들은 숲으로 들어가 떠이선 군의 추적을 피해 따오토를 기점으로 삼아 부흥운동을 전개한다.

4.2. 나라를 잃고 남하하다

떠이선 삼형제가 구 응우옌씨 정권을 무너뜨린 후 일부 병력만 쟈딘에 남겨두고 꾸이년으로 철수했다는 소식에 응우옌푹아인은 멸망한 완주의 유신들을 이끌고 옛 본토로 돌아와 쟈딘에 주둔하던 서산군을 공격했다. 도타인년(Đỗ Thanh Nhơn, 杜淸仁, 두청인), 레반꾸안(Lê Văn Quân, 黎文勻, 여문균), 완문홍, 송복광, 송복량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그를 도와 완씨 재건을 위한 기반을 만들었고, 또한 서산군에 대항한다는 뜻으로 동산(東山)군을 조직하는 주체가 되었다. 유능한 장수들의 도움으로 쟈딘을 수복한 응우옌푹아인은 이곳에 고토를 강점한 서산에게 항전할 것을 선포하고 대원수섭국정(大元帥攝國政)이 되었으며 이때 그의 나이 17세에 불과했다.

한편 서산의 우두머리인 응우옌반냑은 도타인년이 이끄는 동산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이 틈을 타 응우옌푹아인은 레반꾸안을 보내 자신도 서산에게 반격했고 평순, 연경 일대까지 추가로 수복했다. 응우옌푹아인은 서산에게 대항하기 위해 이전에 멸망한 완주의 인프라를 재건하고 군대들을 양성했는데, 그를 도와준 피뇨의 도움으로 서방의 신식 무기인 수류탄을 포함해 근대화된 군대를 조직했다. 또한 포르투갈로부터 세 척의 서양식 군함을 구입해 프랑스인 마뉴엘(Manuel)을 선장으로 영입했다. 이리하여 응우옌씨 세력이 강해지자 완주는 쟈딘성의 6진을 다시 수복했으며 서산군도 그들을 정벌하려 했으나 매번 실패했고, 이런 성장에 힘입어 완주는 캄보디아의 내전에 개입해 친베트남 성향인 안영(安英)을 왕으로 책봉시키고 부하들을 파견해 캄보디아를 괴뢰화시켰다.

응우옌푹아인은 1780년 대원수섭국정이라는 애매한 직함에서 칭왕식을 올리고 구 응우옌 주의 군주와 동일한 왕(王)에 등극했다. 통칭 완왕(Nguyễn Vương, 阮王)이라 하며, 제후왕이 된 응우옌푹아인은 그에 걸맞게 후 레 왕조 당시 황제인 현종(顯宗)의 경흥(景興) 연호를 채용해 완주의 정식 부활을 선언했으나 이듬해 공신 도타인년의 세력을 염려해 똥푹띠엔(Tống Phúc Thiêm, 宋福添, 송복첨)에게 도타인년을 죽이라 명한 게 빌미가 되어 도타인년 휘하의 동산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틈을 타 서산군의 응우옌반후에가 완주를 공격했고 두 세력은 칠기강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완왕은 시암의 지원군의 도움까지 받았으나 메콩강에서 패배하고 근거지를 모조리 잃은 뒤 시암으로 망명한다.

4.3. 시암 망명

리더가 푸꾸옥으로 도주했음에도 광남 응우옌가 지지자들은 본토에 남아 서산 세력에 저항하고 있었다. 응우옌반냑, 응우옌반후에가 북으로 돌아간 직후 동년 10월 부안에 남아있던 짜우반띠엡(Châu Văn Tiếp, 朱文接, 주문접)과 응우옌푹아인의 형제 응우옌푹하오(Nguyễn Phúc Hạo, 阮福暭, 완복호)도 거병했으며 짜우반띠엡은 가정을 일시적으로 수복했으나 응우옌푹하오는 강 일대에서 서산군에게 대패하고 유능한 장수인 양공등, 응우옌호앙득(Nguyễn Huỳnh Đức, 阮黃德, 완황덕)을 포로로 빼앗기기까지 했다. 결국 응우옌푹아인은 다시 가정에서 푸꼭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승기를 잡은 응우옌반후에는 기세를 타 푸꾸옥을 공격했고 응우옌푹아인은 결국 곤륜(崑崙)까지 밀려버린다. 응우옌반후에가 이참에 결판을 내려 하는데 갑자기 폭풍이 서산군을 덮쳤고 응우옌반후에는 어쩔수 없이 철군한다. 응우옌푹아인은 다시 푸꾸옥로 올 수 있었으나 큰 타격을 입은 그의 세력은 식량이 없어 풀데기를 뜯어먹으며 연명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대월과 가까이 붙어있는 당시 시암엔 프랑스 사람 피뇨 드 베엔이란 자가 가톨릭을 선교하는 중이였다. 응우옌푹아인은 사람을 보내 피뇨에게 프랑스의 지원을 요구했고 범문인 등에게 장자 응우옌푹까인(Nguyễn Phúc Cảnh, 阮福景, 완복경)을 호송하게 하여 피뇨와 함께 프랑스로 가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응우옌푹아인은 짜우반띠엡을 시암에 보내 도움을 요청하게 했다. 방콕에 도착한 그는 당시 시암왕 라마 1세를 알현했고 라마 1세는 부하 쩟씨다에게 수군을 붙여 응우옌푹아인과 접촉하게 했다. 둘은 하선진에 도착해 시암과 완가가 힘을 합쳐 서산을 공격할 것을 계획했다. 시암의 입장에서도 바로 옆의 서산이 대월을 완전히 접수하면 자신들도 위험해질 걸 알았기에 완가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응우옌푹아인은 시암군을 따라 방콕으로 피난했다.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고토 수복뿐이었으며 광남 응우옌 일족이 처형당한 그날의 참극을 잊지 않았다. 라마 1세는 완가의 마지막 후예를 환영했고 더불어 지원을 약속했다.

4.4. 시암의 지원

1784년 응우옌푹아인은 짜우반띠엡, 응우옌반타인(Nguyễn Văn Thành, 阮文誠, 완문성), 막뜨사인(Mạc Tử Sanh,鄚子泩, 막자생), 완문함을 이끌고 가정을 공격했다. 라마 1세는 육곤과 사원을 보내 시암이 임명한 캄보디아 총독에게 응우옌푹아인을 지원하도록 했고 이후 라마 1세의 조카 소증과 2만의 병사, 배 300척을 방콕에서 출발시켜 가정을 공격했다.

시암군은 견강성의 적석시[9], 삭장성 삭장시[10], 영륭시 차온현[11]에서 군세를 이어갔고 레반꾸안 등이 응우옌푹아인에게 호응했고 짜우반띠엡이 전사하자 레반꾸안을 그의 후임으로 임명했다. 서산군수직 장문다는 응우옌푹아인의 공세에 가정을 잃고 등문진을 보내 응우옌반냑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떠이선 왕조응우옌반냑은 동생 응우옌반후에를 파견했고, 그들은 시암의 주요 진격지인 미추시에 복병을 두었다.

시암군은 가정 일대에서 약탈을 저지르고 금은보화와 노비들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러 응우옌푹아인은 그들을 귀국시켰다. 그 결과 응우옌푹아인은 시암국 내에서 홀대받았지만 시암이 가정에서 멋대로 구는 모습에 실망했고 곧 패할 것이라 생각해 막뜨사인에게 미리 퇴로를 열라 하여 도망갈 준비까지 해놨다. 이후 서산군과 시암군 간 충돌이 있은 후, 응우옌반후에가 소증에게 예물을 건네 대월 내전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소증은 요구를 받아들였는데, 시암은 서산을 경멸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론 시암군이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에 연합군이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1785년 4월 응우옌반후에의 복병에 당한 소증은 시암군 2~3천명만을 이끌고 캄보디아 총독의 도움으로 시암으로 도망갔고, 응우옌푹아인 역시 대부분의 기반을 잃은 채 가족과 시암으로 도망간다.

4.5. 프랑스와 포르투갈에 원조 요청

완조(朝)가 방콕으로 피신한 후에도 본토엔 완조 지지자들이 남아있었으나 떠이선 왕조에 상대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완왕이 피신하자 응우옌호앙득, 레반꾸안도 그를 따라 방콕으로 도주했고, 그렇게 방콕으로 이주한 완조 신하들은 라마 1세의 자비로 마을[12]을 이루게 되어 그곳에서 세력을 회복하였다.

응우옌푹아인과 그 일파는 용구에서 농사를 지으며 재기를 노렸다. 라마 1세도 응우옌푹아인의 군사력을 높게 사 외곽 수비를 맡겼으며, 시암과 미얀마와의 전투 때 응우옌푹아인도 참전하여 승리를 거둔데다 말레이의 해적들도 막아내어 응우옌푹아인의 입지는 기존보다 올라갔고 시암으로부터 받은 돈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정비하여 본토 회복을 노림과 동시에 프랑스부르봉 왕조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응우옌푹아인은 피뇨에게 청하여 옥새와 자신의 아들 경(景)을 데리고 루이 16세에게 보낼 편지를 갖춘 후 프랑스로 떠났으며 돌아온다면 베트남에서 천주교를 선교하는걸 보장하였다. 사실 프랑스 말고도 필리핀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피뇨가 보낸 사절들은 서산군에 붙잡혀 살해당했다.

1785년 2월 경, 응우옌푹아인과 피뇨 일행은 프랑스령 인도의 치리(治理)에 도착하였으나 프랑스는 베트남의 정세에 관심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일행은 다시 포르투갈령 마카오에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이번에는 성사되어 포르투갈인들은 응우옌푹아인에게 군사를 빌려줄것을 약속했다. 이듬해 포르투갈인 안토니오가 약속대로 방콕으로 와 서양식 군대를 보여주었으나 시암의 라마 1세는 응우옌푹아인의 월권 행위에 반발하여 응우옌푹아인은 포르투갈의 지원을 취소하였고 이 일이 있고부터 시암인의 응우옌푹아인에 대한 신임은 떨어져갔다.

1786년 6월 피뇨 일행은 프랑스로 향했고 1787년 2월 파리에 도착하여 루이 16세를 만나 조약을 체결했고 프랑스는 군함 4척, 병사 1900명을 파견해 응우옌푹아인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응우옌푹아인은 프랑스에 타낭(沱㶞)섬을 넘겼고 프랑스에게 무역 특권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해 12월 피뇨 일행은 귀국하려고 했으나 27일 프랑스 본토에서 심각한 재정위기가 발생해 프랑스 정부가 파산 직전까지 몰리자 프랑스령 인도총독 토마스 콘웨이에 의해 상호 지원 조약은 파기되었다. 결국 피뇨는 자신의 인맥에만 의존해 프랑스 장교들을 모집하고 프랑스산 무기를 구입했다.

한편 베트남의 옛 완가 지지자들은 응우옌푹아인에게 편지를 보내 서산조가 내전에 빠진 상황이고 타이득꽝쭝이 대치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또한 가정을 맡은 도독 등문진이 주력 부대를 이끌고 귀인[13]으로 진격했다는 소식도 전해들었다. 1787년 7월 응우옌푹아인은 신하들과 방콕을 떠났려고 했으나 이들은 떠나려는 순간 인근 원주민들에게 발각되었고 재정대신 고소정피아 박강(告訴了披耶·拍康)이 라마 1세와 이왕(二王) 마합 소랍신합나(玛哈·素拉辛哈那)에게 탈출 사실을 전달하여 마합이 격분한 상태로 그들을 쫒아갔다. 새벽에 소랍신합나가 해안 어귀에 있는 배를 보자 응우옌푹아인은 생명이 보장되지 않는다며 자살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말렸고 결과적으로 탈출은 성공하였다. 응우옌푹아인은 부국도에 도착했고, 하희문(何喜文)[14]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지금의 금구성(金甌省)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서산의 장군 완문장이 병사 300명, 군함 15척을 이끌고 응우옌푹아인에게 귀순했고, 완문인 등도 자신의 관할지를 응우옌푹아인에게 바치자 가정을 진수한 동정왕이 두려워해 팜반탐(Phạm Văn Tham, 范文參, 범문삼)만을 남기고 도망가버렸다. 응우옌푹아인은 타이득이 동정왕에게 보낸 편지를 위조하여 팜반탐이 간첩이라는 내용으로 꾸몄고, 의도적으로 팜반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게 하였다. 그 편지를 받은 팜반탐은 군대를 이끌고 백기를 들어 억울함을 풀려고 했는데, 동정왕을 비롯한 군대들이 그 모습을 보고 팜반탐이 항복한 것으로 여겨 귀인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여러번의 교전 끝에 팜반탐을 처리하고 가정을 점령하여 광남국을 부활시켰다.

4.6. 내정 정리

응우옌푹아인은 광남을 부활시킨 뒤 응우옌반히엔(Nguyễn Văn Hiển, 阮文閑, 완문한)을 시암에 보내 승리를 알리며 그동안의 원조에 감사를 표했다. 응우옌푹아인은 가정에서 내정을 정비하고 도박과 굿을 금지하면서 행정구역을 재구성하여 세금, 농사 부분을 정비하였다. 응우옌푹아인은 농병정책을 시행하면서 12명을 새로 전준관(田畯官)으로 임명하고 농업, 상업을 우선하고 대외무역을 발전시켜 외국의 신식 무기를 받아들여 근대화된 군대를 조직하였다. 동시에 관세를 내려 외국 상선들의 유입을 허락했고 이로부터 1년이 지나자 광남국은 전보다 강해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사료에 따르면 프랑스 장교가 베트남 현지 군인들의 훈련을 맡았다고 하며, 1790년까지 군대가 서구화되어 영국식 제복을 입은 5만 명의 군대, 유럽식 군례, 선진 무기, 기술을 가진 광남국 군대가 조직되었다고 한다. 1792년엔 광남 해군이 유럽식 군함 2척과 호위함 15척을 보유했다고 한다. 이로써 광남군은 육해군 모두 서산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해졌다.

이 외에, 응우옌푹아인은 서양의 건축법을 받아들여 1790년 팔괘성(쟈딘성)을 세우기도 했다.

4.7. 서산멸망전과 황제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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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0년부터 시작한 서산조와 광남의 최후의 전쟁은 부춘 조정의 꽝쭝과 자주 교전하였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광남군은 전투에서 유리하게 싸워갔으며, 반면에 귀인의 타이득꽝쭝의 뒤를 이은[15] 깐틴 시기 서산조는 내분으로 쇠퇴해 쩐꽝디에우의 활약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깐틴의 제후인 응우옌반바오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적군인 응우옌푹아인과 내통하는 사건까지 벌어지는 등 서산의 내분은 심화되기 시작했다. 이 소조의 변으로 서산조엔 많은 인재들이 처형당하였고, 이러한 혼란을 틈타 광남군이 재차 공격해 1802년 서산조의 수도 탕롱을 함락하여 떠이선 왕조가 멸망하였다. 이후 1802년 6월 1일 응우옌푹아인은 후 레 왕조의 연호 경흥(景興)을 폐지하고 가륭(嘉隆)이라는 새 연호로 개원하여 베트남 역사상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가 탄생하였다. 한편 서산의 잔당은 청나라가경제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당했고, 포로로 붙잡힌 깐틴과 서산 일족은 조리돌림을 당한 후 사형당했고, 응우옌반냑과 응우옌반후에의 시신은 부관참시되었다.

서산멸망전의 자세한 내용은 깐틴 항목 참조.

4.8. 황제 즉위 이후

4.8.1. 지방 행정

자롱 황제는 베트남 전역을 북성(北城), 쟈딘성, 그리고 조정 직할인 총 3구역으로 나누었고 그 다음으론 23진 4영(營)이였다.

북성은 새로 편입된 구역인데, 이곳은 후여조와 찐씨 정권을 지지하는 장당이 남아 있었고 토호들의 세력도 강해 조정의 통제권 진입이 어려운 구간이였다. 자롱 황제는 북성은 통치하기 어렵다 판단해 하노이를 수도로 전한 역대 왕조의 전례를 따르지 않고 16세기부터 지속된 광남국의 수도였던 후에를 응우옌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1803년 중국 자금성을 참조하여 후에황궁을 건립해 조정의 행정 중심지로 삼았다. 이 외에 북성 세력이 새로 관직을 임명하여 일종의 자치권을 주었지만 이는 민망 황제 때 폐지되었다.

또한 자롱 황제는 프랑스의 건축 양식을 참조해 베트남 전역에 9개의 성을 새웠다. 이 성들을 세울 때 할거 시기 세운 팔괘성의 설계도를 참조했다고 하며, 성 외에도 관도, 역참, 하천 통로, 댐 등 잦은 건축을 벌였는데 이러한 행위의 이유는 나라가 안정될 때 건축을 벌이면 백성들이 안일해져 나태해지고 불만을 사기 쉽다는 이유로 전쟁이 끝난 직후 바로 건축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4.8.2. 군사 제도

자롱 황제는 서산조를 멸망시킨 후, 장병에게 상을 주고 노약자는 귀농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또한 사당을 세워 전사한 군인들의 제사를 지냈다.

또한 병정법을 제정하여 광평에서 평순까지 각 진은 3정, 변(邊)과 남(南)은 각각 5정(丁), 하정(河靜) 이북, 북성내 진은 7정, 북성 외의 진은 10정을 두었다. 경기(京畿) 일대는 각 삼병(三兵)을 두어 수비를 맡게 하였다. 각 진은 기병(奇兵), 모병을 두어 세 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근무하게 하였다.

응우옌 왕조는 5군 도통부를 설치했고 최고통솔권자는 황제의 측근이 맡았으며 군대를 동원하면 오군도 통솔하여 출정하도록 했다. 병기에선 서양식 병기를 채용했으나 50명 중 5명만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많이 구비되지 못하였고 일정 횟수를 넘겨 사용한 자는 벌금을 내야 했다.

1802년 전쟁이 끝나지 얼마 되지 않아 청나라의 해적 정칠(鄭七)이 약탈을 벌이자 관군으로 진압한 다음 그를 참수시키기도 했다. 이후 해적의 침입은 더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4.8.3. 경제 제도

자롱 황제는 전국의 땅을 3급으로 구분하여 땅의 질에 따라 납세의 정도를 다르게 했다. 지방에 자연재해가 있거나, 국가가 장정들을 징용하여 길을 닦고, 강을 파고, 성을 쌓으면 세금을 깎아주는 점 등등을 다 참작하였다.

지방에서 5년마다 장정을 대상으로 밭을 조사하는 정부(丁部), 전부(田部) 제도를 제정하였으며 후여조때 성생한 공전(公田)의 매매를 금지하였고 대신 비상시에 공전을 3년간 빌려 쓸 수 있는 법을 제정하여 기한을 넘기면 처벌받게 하였다. 그리고 광석의 종류에 따라 세금을 다르게 하였고 선박의 무역에도 선박의 크기에 따라 징수하게끔 하였다.

직할령지, 북성외진, 북성내진이 정한 세수의 기준이 달랐으나 모두 조정에서 정한 부분들이다. 그리고 자딘성의 세수는 자딘총진에서 정하였다. 1803년 자롱 황제는 가륭통보를 주조하였고 1810년엔 토지를 측량하는 표준인 동척(銅尺)을 제정하여 지방에 보급하였고 1813년엔 평천형(平天衡)을 만들어 각 영에 보냈다.

4.8.4. 관료, 법 제도

1811년 자롱 황제는 후여조의 홍덕률(洪德律)을 폐지하고 응우옌반타인을 총재에 임명하여 새 율서 편찬을 주관하게 하였다. 응우옌반타인 등은 중국의 대청률을 참조해 가륭율서 22권, 총 398조를 편찬했고 1815년 이 율서를 각지에 배포하였다.

관료 제도는 후여조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각 부에선 상서를 장관으로 두고, 그 아래에 참지, 시랑, 낭중, 원외랑, 주사 등을 두었다. 또한 감사를 설치해 황제에게 간언, 부패한 대신을 탄핵하게끔 하였다.

궁중의 일에 대해선 황제 생전에 황후를 세우지 않는 규칙을 정했고 황제가 승하한 후에 태자가 새 황제로 즉위해야만 모후를 황태후로 추대할 수 있었다. 또한 성이 다른 대신을 왕으로 봉할 수 없게 정하였다.

4.8.5. 과거와 학업

무력으로 집권한 자롱 황제 정권의 구성원들 대부분은 무장이었다. 그래서 자롱 황제는 문관의 필요성을 느껴 서산조에 의해 폐지된 과거제를 부활시켰고 전국 각지에 문묘를 건립하여 타인호아에 국자감을 설립하고 유학을 시행하여 사서오경을 가르쳤다. 자롱 황제 자신도 베트남의 지리와 국사 편찬에 관심을 가져 여러 서적을 편찬하는 사업을 벌였다.

다음은 자롱 황제 시기 편찬된 서적들이다.

4.8.6. 종교

자롱 황제의 장남 응우옌푹까인은 가톨릭을 믿었기에 유교 신봉자였던 자롱 황제는 장남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다만 피뇨와의 약속은 지켜 생전 서양 선교사의 선교를 허용했으며 프랑스, 스페인 출신 선교사가 6명이나 와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북성 관내에는 30만 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는데, 자딘성 안에는 6만 명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확산을 원하지 않은 자롱 황제는 기독교 전파를 위축시키기 위해 유가사상을 추앙하였다.

또한 궁중의 후비들은 불교를 신봉하는 비율이 높았으나 자롱 황제는 불교도 제한하였고 민간에서의 신불 제사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였다.

4.9. 토사구팽

사료에 따르면 자롱 황제는 말년에 의심이 많고 신하를 시기했다고 한다.

당탄쓰엉(Đặng Thần Xương, 鄧陳常, 등진상)의 경우 응우옌푹아인이 가정을 막 회복했을 때부터 그를 보좌해온 공신인데, 병부상서로까지 승진했으나 멸망한 정씨 정권의 장군 호앙보푹(Hoàng Vô Phúc, 黃五福, 황오복)을 신격화한 죄로 실각했다가 재차 리치(Lý Chí, 黎質, 여질)가 다른 죄로 고발하여 옥에 갇히고 만다. 옥에 갇힌 당탄쓰엉은 자신을 한신으로 비유하여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자롱 황제는 이에 자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당탄쓰엉은 자결을 거부하여 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응우옌반타인의 경우, 자롱 황제의 공신으로 서산멸망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대남 건국 후 북성총진을 거쳐 법전 편찬을 맡았는데 또다른 공신인 레반주옛과 사이가 안 좋았고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레반주옛은 이 일에 복수하고자 1817년 응우옌반타인의 아들 응우옌반꾸엔(Nguyễn Văn Quyền, 阮文詮, 완문전)이 자만심이 강한 시를 썼다는 이유로 고발하여 응우옌반타인과 그 아들은 옥에 갇히고 만다. 그들의 심문은 자롱 황제의 명에 따라 레반주옛이 맡았고 레반주옛은 응우옌반타인을 사사시켰고 그의 아들 응우옌반꾸엔은 따로 처형하였다.

4.10. 말년과 사망

1801년 장남 응우옌푹까인이 사망했음에도 자롱 황제는 따로 태자를 두지 않았다. 1815년에 되어서야 응우옌푹담을 태자로 봉했고 응우옌푹까인의 자손들을 계승권에서 제외하였다.

생전 자롱 황제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왕조를 부활시켰지만 서방 세력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장남과 달리 태자 응우옌푹담은 자롱과 반 기독교적 성향이 일치하여 마찰이 없었고 유럽인과 특히 프랑스인을 겉으로는 존중하되 어떤 우대도 하지 말고 땅을 내주지 말라는 등 반기독교 성향을 유지할 것을 당부하였다.

1820년 2월 1일 자롱 황제는 태자와 많은 황자와 대신, 레반주옛, 범등흥(范登興) 등을 입궁시켜 유서를 미리 전했으며 레반주옛과 범등흥을 보정대신으로 임명하였고 그로부터 2일 후인 1820년 2월 3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총 재위 18년, 향년 58세였다. 태자는 응우옌푹끼에우로 개명하고 제위에 올라 가륭 연호를 폐지하고 명명(明命)으로 개원하였다.

자롱 황제의 유해는 승천고황후(承天高皇后)로 추존된 통티란(Tống Thị Lan, 宋氏蘭, 송씨란)의 봉분 왼쪽에 매장되었는데 두 능을 통틀어 천수릉(天受陵)이라고 한다.

5. 평가

인생 역경 자체는 드라마틱하고, 기적적으로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프랑스와 손잡았기 때문에 현대 베트남인들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우선 자롱 황제는 막당중이 반란을 일으킨 이래로 2~300년간 분단된 베트남을 통일한 왕조를 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16]

응우옌푹아인의 사정은 어떻게 보면 명나라가 막 망했을 당시의 오삼계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오삼계는 이자성 때문에 모시던 군주가 죽고 나라가 망했고, 응우옌푹아인은 응우옌 3형제에게 가족이 몰살당하고 거지꼴로 쫓겨났다. 즉 이들은 '가족(혹은 전 주군)의 원수를 적대하기 위해 자기 민족을 배신한다'와 '민족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원수에 대한 복수심을 접어둔다'에서 전자를 고른 인물들인 것이다. 민족 개념이 강해진 현대에 와서 좋은 소리 들을 행보는 절대로 아니지만, 이들 입장에선 결코 납득이 안 가는 선택은 아니었다.[17]

당시 18~19세기 베트남은 유교이념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나라였다. 본래 자신이 섬기던 나라인 응우옌씨 정권이 망해버렸고 가족까지 죽임당했으니 복수를 통해 어쩔수 없이 같은 민족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충효를 지키는 행위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필 그 손을 잡은 외세가 나중에 베트남을 식민통치하게 되는 프랑스였고, 그 때문에 자신의 사정과는 별개로 현대 베트남인들의 평가가 안 좋기도 하다.

알렉산더 우드사이드, 리엄 켈리 등 서구권 학자들에 의하면 이런 현대의 박한 평가는 응우옌푹아인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한 평가이다. 어쨌든 정권 장악을 위한 물리적 투쟁이 끝난 이후 황제로서 응우옌푹아인은 립서비스를 하는 조언가 초청이나 가톨릭 선교의 부분적 허용 같이 전례와 크게 벗어나는 범주에서 딱히 프랑스에게 더 큰 이익이나 특혜를 준 바는 없으며, 완조 월남이 프랑스의 본격적인 침공 대상으로 전락한 건 응우옌푹아인의 탕롱 정복 이후 50년 뒤의 일이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아 그쪽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고, 실제로 베트남으로 본격적으로 손을 뻗칠 때 응우옌푹아인이 프랑스에 넘겨주었던 이권이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으므로,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다. 물론 자롱 황제 자신은 서양인들을 경계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기본으로 해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응우옌푹아인이 진짜로 군주로서 저평가받아야 할 이유는 외세와 손을 잡은 것이라기보다도, 자신이 권좌에 오른 뒤에 펼친 통치 때문일 것이다. 숙적인 응우옌반후에가 (중앙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더라도) 사실상 기득권을 가지고 태어나서 유복한 삶을 살았음에도 농민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선정을 폈던 데 비해, 응우옌푹아인은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쫓겨나서 시련을 겪으며 응우옌반후에보다 훨씬 곤궁한 삶을 겪어봤을 개연성이 높음에도, 오히려 황제가 된 다음에는 옛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장하고 군대유지를 위해 세금을 무겁게 매기며[18] 불합리한 옛 법전을 그대로 계승하는 등 베트남 옛 왕조들의 악습을 그대로 반복했다.[19]

사실 권력자의 성장 환경이 그가 누구를 위한 정책을 펼치느냐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건 아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복지정책을 편 사람[20]도 있는 한편 가난하게 성장해서 자수성가했음에도 권력을 잡은 뒤엔 기득권과 유착하는 인간도 있으며, 오히려 그의 출신이 미약했기에 구 세력의 지지를 받기 위해 이런 정책을 펼쳤을 가능성이 높다. 출신이나 기반이 미미하기 때문에 기존 세력을 뒤엎을 정도의 힘이 없다면 오히려 기존 세력과 결탁해서 세력을 키우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현대적인 기준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기득권만 위하고 농민들을 탄압해서 농민반란을 양산해내는 왕은 전근대 기준으로 봐도 암군, 폭군이다. 자기 조상들처럼 고생 한번 안 해본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삶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만큼 알 인간이 이런 짓을 했으니 그 평가가 더더욱 나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세와 손을 잡았더라도, 과거 자신의 숙적이었던 응우옌 3형제의 통치 방식을 참고라도 했다면 평가가 조금은 더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5.1. 현대 베트남에서의 취급

그래서 응우옌 왕조1954년에 폐지된 된 후 현대 베트남에서는 응우옌반후에가 위인으로 추앙받는 데 반해서[21], 자롱 황제는 인생역경 자체는 대단하지만 황제로 복위한 다음에는 자기 어려운 시절은 싹 잊어버리고 자기 조상들과 똑같이 행동했다는 평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외세의 도움을 받았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사실상 식민지화하는데 명분상으로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매국노로, 심지어 만악의 근원으로까지 평가하는 사람도 다수 있다. 또한 이러한 박한 평가는 베트남이 식민지화되고 북쪽에서 사회주의 확립, 남쪽에서 응우엔 왕조가 폐지되면서 강해졌지만 이미 자롱 황제 당대에도 세금 문제로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만약 다음대인 아들 명명제 때 세금개혁이나 군비축소와 같은 일들이 없었으면 응우옌 왕조는 100년도 못 갔거나 진작에 나라가 혼란에 빠져 미얀마처럼 공식적인 왕실유지도 못하고 열강의 노리개가 됐을 것이다.[22]

베트남 학계에서는 이 사람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국외로 망명한 베트남계 학자들[23]만이 연구할 따름이다. 게다가 이런 학문적 해석을 두고도 서양 학계는 아무래도 베트남 내부 학계의 민족주의적 관점과 자국 중심적 관점에 반론하는 입장이다 보니 자롱 황제를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인물로 재조명하는 과정에서 전임 중흥 레 왕조의 취약함과 서산 왕조에 대한 환상을 시정하는데 치중하다 보니 베트남 내부에선 더욱 더 반발이 클 수밖에 없다.[24][25]

애초에 떠이선 왕조를 북베트남, 광남 응우옌 왕조를 남베트남으로 치환하려는 시각 자체가 현대사의 정치 논리를 전근대사에 무리하게 대입하려는 시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시각의 주체가 서방이든 현대 베트남 정권이든 말이다. 떠이선 응우옌 3형제는 하층민 농민이 아니라 지방의 세습직 관리 가문에서 태어나서 못해도 최소 하급귀족으로는 쳐 줄 수 있는 신분이었다.[26] 떠이선 왕조의 두 수도였던 푸쑤언과 꾸이년 모두 분단 당시에는 남베트남의 영토였으며, 현재의 하노이인 탕롱은 왕조가 망하기 직전의 임시수도였을 뿐 대부분의 기간 동안은 응우옌 왕조와의 대립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조차도 아니었다. 이렇게 현대의 베트남 전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던 떠이선 왕조 통치기를 동일시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의도가 짙은 시각일 뿐이다.

더욱이 자롱은 드라마틱한 인생역정과는 별개로 옛 제도의 부활과 지주들의 이권 회복, 농민 박해에만 힘쓴 전형적인 전제군주에 불과했고 딱히 혁신적이거나 진취적인 정책을 내놓은 적은 없기에, 현대 베트남인 입장에서 보면 도무지 좋게 보려고 해도 볼 구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것도 그를 재조명하는 것에 아무도 관심이 없는 이유이다. 물론 현대 통일 베트남이 공산국가인 북베트남의 주도로 베트남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형성된 나라이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뒤에도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라서 옛 제도의 부활, 지주들의 이권 지지, 농민 박해에 대해 더더욱 박하게 평가하는 것도 있지만, 설령 북베트남이 아닌 남베트남이 베트남 통일을 이룩했다고 해도 자롱에 대한 평가는 박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자롱의 이러한 실책들은 천민자본주의 국가를 제외한 자본주의 국가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비판이 가능한 것들이었을뿐더러, 남베트남이라는 국가 자체가 말만 응우옌 왕조의 후신이지 사실은 1955년도에 응우옌 왕조를 뒤엎고 공화정을 만든 나라고, 떠이선 왕조의 군주인 응우옌반후에를 화폐 도안인물(200동)로 넣을 만큼 떠이선의 난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기조가 대세였기 때문이다.[27]

후에에는 응우옌 왕조의 여러 황제들의 무덤이 있는데[28], 거기서 멀리 떨어져 관광코스에서 소외된 가륭릉은 관리를 포기하여 낙서와 오물로 가득차 있다. 후에시 어디에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나 기념물이 없고, 현지 베트남인들은 그의 존재와 그가 묻힌 무덤이 있는 것도 잘 모르는 듯하며, 서양인들만 가끔 모험삼아서 이곳을 찾는데 이것이 베트남인들이 이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베트남인들에겐 잊혀진 군주인데, 외국인들만 기억하는 군주라고 이해하면 된다. 현대 중국에서 조조사마의를 재평가하는 것과는 달리 자롱 황제는 상술한 역사적 관점의 무게 때문에 베트남 국내에서는 흑역사가 문제가 아니고 아예 사실상 금기로 간주하거나, 무관심으로 치부되고 평가해주는 측도 잘해봐야 프랑스의 루이 18세, 못하면 샤를 10세 정도에 가까운 인물로 취급되고 있다. 다만 이상하게도 베트남과 별 관계가 없는 일본에서는 그나마 인기가 있는데, 디엔비엔푸 만화나 여러 시대소설 등에 베트남의 황제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가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일본인들이 베트남사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아무튼 이러한 관계로 자롱 황제 자신은 개국군주임에도 인기가 없고 대신 민망 황제, 함응이 황제, 타인타이 황제, 주이떤 황제 등이 더 인기가 많다. 그나마도 민망 황제는 명군이라는 평도 받지만 폭군 혹은 암군이라는 평도 받고, 뒤의 세 황제들은 황제로서의 업적보다는 프랑스에 항거했다는 점으로 호평을 듣는 만큼 응우옌 왕조에서 업적으로만 호평듣는 황제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할 듯하다.

6. 가계도

6.1. 선조

6.2. 비빈

6.3. 황자

6.4. 공주

7. 참고 항목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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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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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월의 역대 황제
78대 경성제 완광찬 (임시) 완왕 완복영 국호 변경/칭제건원

[1] 아들 민망에게 죽기 전 유럽, 프랑스에게 어떠한 호의도 베풀지 말라고 했다.[2] 원래 이름.[3] 다른 이름.[4] 약칭 시호. 전문은 Khai thiên Hoằng đạo Lập kỷ Thùy thống Thần văn Thánh vũ Tuấn đức Long công Chí nhân Đại hiếu Cao Hoàng đế / 開天弘道立紀垂統神文聖武峻德隆功至仁大孝高皇帝.[5] 능호.[6] 효선왕(孝宣王)은 사후에 추존된 시호로 본명은 응우옌푹하오(Nguyễn Phúc Hạo, 阮福昊, 완복호).[7] 그 농도가 매우 심해 장진회라 부를 정도였다. 즈엉푹로안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으면 장복만이다.[8] 응우옌반냑은 당시 서산왕(西山王)을 칭했고 1788년에 황제로 즉위한다.[9] 堅江省 迪石市[10] 朔莊省 朔莊市.[11] 永隆省 茶溫縣[12] 당대엔 용구(龍邱)라 했다. 이 마을의 터는 지금까지 남아있어 응우옌푹아인의 연호를 따 가륭촌(嘉隆村)이라 불린다.[13] 타이득의 영역권.[14] 천지회(天地會) 일원.[15] 정확히는, 타이득의 경우 깐틴이 무력 합병한 것이다. 이것은 응우옌반바오가 응우옌푹아인과 내통하는 배경이 되었다.[16]응우옌반후에도 가장 세력이 강했을 뿐 베트남을 통일하지는 못했다.[17] 물론 당대에도 이를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없지는 않았다. 오삼계 역시도 결국 저거에 발목잡혀 삼번의 난이 실패로 돌아갔다.[18] 사실 이 부분은 경제사학적 관점에서 실드의 여지가 있기도 하다. 오히려 조세를 안 걷는 조선이나 중국은 결국 열강의 침입에 제대로 노출되었지만, 전쟁을 많이 한 여파로 세금을 무겁게 걷었던 유럽이나 일본은 세금을 걷어 이것을 재원삼아 여러가지 방식으로 나라를 발전시키는데 썼기 때문이다.[19] 이게 더 문제가 된 이유는 본인 집안을 박살낸 서산당의 난은 바로 본인 가문이 세금을 과중하게 매겨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20] 정치 명문가 출신으로서 영국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해 나라를 복지국가로 탈바꿈시킨 클레멘트 애틀리가 그 예인데, 영국 역사상 최고의 수상으로서 반드시 윈스턴 처칠과 함께 1,2위를 다투는 사람으로 평가받는다.[21] 인기요소가 엄청나게 많을 수밖에 없다. '농민 출신으로 사회의 밑바닥을 경험하며 구체제에 회의를 느낌' + '농민들을 위해 사회 개혁정책을 폄' + '청나라의 대군을 격파하고 옛 남월의 땅이었던 곳까지 영토를 확장할 계획까지 세움' + '그러나 뜻을 완전히 이루지 못하고 39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사망'.[22] 결론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긴 하지만 왕실은 유지되고 베트남 중부지역 일부는 왕실직할령으로 남아 그나마 프랑스의 치하에서 자유로운 지역이 되었다.[23] 주로 남베트남계라 응우옌 왕조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24] 안 그래도 전근대 역사의 해석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냐에 따라 베트남 자국 출신 학자들과 서구권 학자들의 온도, 시각 차이의 충돌은 큰 편이다. 베트남 학자들 본인들은 일단 한자 문화권의 유교 국가로서 정체성을 확실하게 재확인하고 조선, 사와 같은 사관을 중심으로 역사 연구를 시작하나, 서양 학자들은 베트남의 동남아적 정체성을 더 강조하며 16-17세기 남북조 시대에 당시 조정이 지방을 통치하는 능력이 상실되었던 것과 이에 대비된 남중국해 상업 네트워크나 참파, 크메르와의 관계같은 다극화된 역사적 변경으로서 초점을 둔다. 이러한 관점과 초점의 차이를 두고 서양 학계는 베트남 학계를 전쟁과 혁명 시기의 민족주의적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집착으로 치부하고, 베트남 학계는 서구 학자들의 접근법을 반대로 정치적 목적이 함유된, 베트남 민족성을 희석시키려는 유사학문적 의도로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25] 참고로 20세기에 발흥한 신흥종교 까오다이교가 범세계적 포용론 교리를 갖춘 점은 이러한 베트남의 동아시아 vs 동남아시아의 완충지로서의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다.[26] 3형제가 빈민층이었다는 믿음이 북베트남 정권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원래 공산주의 정권들은 사상 때문에 하층민 출신들을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인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는 3형제가 최소 중산층 이상이었다는 사실은 분단 당시의 북베트남 정권에게도 그닥 달갑지 않은 사실이었을 개연성이 있다.[27] 마치 기존 독일 우익의 정치적 영향력은 적극적으로 써먹었지만 막상 이들의 사상적 핵심이었던 호엔촐레른 왕조와 군주정에 대해선 의외로 민주적(?!) 관점에서 지극히 나쁘게 봤던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하게 남베트남의 창업국부이자 실질적으로 마지막으로 강력한 권력을 발휘했던 응오딘지엠 또한 완조 황실이 명목상 군주였던 전임 프랑스령 베트남국의 인프라는 적극 활용했지만 막상 완조 황실은 오히려 나쁘게 보면 봤지 애착도 없었다. 그리고 지엠 또한 베트민 공산주의자들과 방법은 달라도 나름 민족주의적 대중주의 정치인이었던 만큼 서산당에 대한 대중의 역사적 낭만 같은 요소는 오히려 적극 활용, 권장했다.[28] 특히 현대 건축 공법을 사용한 카이딘 황제의 황릉이 화려하다.[29] 레 현종(顯宗)의 딸이다.[30] 서치(序齒) 형제간의 순서를 나타내는 단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