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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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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일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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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94

KBO 보유 기록
최다실점 완투승 9실점[1]
최다실점 승리투수 9실점[2][3]

{{{#ffff00 [[MBC 청룡|MBC 청룡]] 등번호 51번}}}
결번 오영일
(1983~1984)
한동화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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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섭
(1982~1984)
오영일
(1985~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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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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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일
(2002~2007)
팀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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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오영일.jpg
오영일
吳泳日 | Yeong-ll oh
출생 1960년 2월 6일 ([age(1960-02-06)]세)
인천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창영초 - 배명중 - 배명고 - 인하대
신체 185cm, 85kg, O형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3년 1차 지명 (MBC)
소속팀 MBC 청룡 (1983~1989)
태평양 돌핀스 (1990)
지도자 LG 트윈스 루키군 투수코치 (1993)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1994)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1995~1996)[4]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1996)[5]
LG 트윈스 루키군 투수코치 (1997~1998)
LG 트윈스 2군 투수코치 (1999)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00)[6]
LG 트윈스 재활코치 (2000~2001)[7]
현대 유니콘스 2군 투수코치 (2002~2006)
현대 유니콘스 2군 재활코치 (2007)
병역 예술체육요원[8]
가족 아들 오명환[9]

[Clearfix]
1. 개요2. 선수 경력3. 연도별 주요 성적4. 플레이 스타일5. 지도자 경력6. 기타7. 관련 문서

1. 개요

MBC 청룡-태평양 돌핀스 소속 투수, 야구코치.

2. 선수 경력

인천광역시 출신이지만 중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나왔다. 대학 2학년 때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일찍이 기량을 펼치며 1981년 한미 대학야구 친선대회,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선발, 연고구단이었던 MBC 청룡에 1차 지명을 받아 대학 졸업 후 입단한다.[10][11]

국가대표 출신으로서의 명성을 입증하듯, 데뷔 첫해부터 선발진에 진입해 10승을 거두고, 1983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선발로 출전하는 등 주축 투수로 부상했다.[12] 이후 1984년에는 40경기 239.2이닝 15승 14패 3세이브, ERA 3.08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239.2이닝은 최동원-장명부에 이은 3위였고 15승은 팀 동료 하기룡과 함께 공동 4위였으며, 14완투 2완봉을 기록했는데 14완투는 최동원과 함께 공동 2위였다.[13]

이 당시 이색적인 기록을 하나 세웠는데, 바로 최다실점 완투승&승리투수이다. 1984년 5월 1일 해태전에서 그는 9실점을 하고도 타선이 14점을 내며 승리 투수로 기록됐다. 아니 9실점을 할 정도면 중간에 교체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14][15] 재밌게도 이 부문 2위 또한 오영일인데 데뷔경기인 1983년 4월 10일 롯데전에서 8실점 완투승을 기록한 바 있었다. 즉 자신의 기록을 자신이 갈아치운 셈.

이후로도 규정이닝을 채워가며 MBC 선발진의 한 축으로 활약했지만, 1989년 들어 노쇠화 및 후배들의 급부상 등으로 고전하였고, 1990년 1월 고향팀인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된다. 태평양에서는 1년만 뛰고 바로 은퇴하였다.

3.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투수 기록
<rowcolor=#ffff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탈삼진 FIP WHIP WAR
1983 MBC 36 173 10 9 4 2.91 69 3.02 1.19 3.81
1984 40 239⅔(3위) 15(4위) 14(2위) 3 3.08 92 3.37 1.33 3.77
1985 28 127⅓ 8 8 1 3.53 42 3.42 1.41 2.01
1986 33 132 12 8 0 3.00 43 3.61 1.45 1.32
1987 30 143⅓ 9 8 0 4.27 41 4.02 1.44 1.03
1988 28 176(4위) 7 11 2 3.48 64 3.39 1.47 3.36
1989 16 43 1 6 0 6.49 15 3.90 1.79 -0.17
<rowcolor=#ff993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탈삼진 FIP WHIP WAR
1990 태평양 4 8⅔ 0 0 0 14.54 3 4.30 2.77 -0.27
<rowcolor=#373a3c> KBO 통산
(8시즌)
215 1043 62 64 10 3.56 369 3.47 1.40 14.85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3년 7완투 0완봉
1984년 14완투
(공동 2위)
2완봉
(공동 3위)
1985년 3완투 0완봉
1987년 2완투 0완봉
1988년 8완투
(4위)
0완봉
통산 34완투 2완봉

4. 플레이 스타일

성준 이전 성준의 플레이 스타일을 거의 그대로 보여주었던 선수다.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체격을 가진 투수였지만 빠른 직구를 가지지 못했기에 변화구와 제구력으로 승부하였으며, 끊임없는 견제와 긴 인터벌로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플레이를 구사[16]하였다. 이만수에 따르면 KBO에서 처음으로 실전에서 너클볼을 구사한 투수였다고 한다. 물론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보여주기식 정도였을 것이며 주요 레퍼토리는 아니었다.

이 선수의 진가는 내구성에서 찾을 수 있다. 1984년 커리어하이 시즌의 239.2이닝 14완투의 활약 외로, 통산 8시즌 동안 1043.0이닝을 기록했고 1988년까진 꾸준히 규정이닝을 채웠던 이닝이터였다.

이닝이터의 면모가 있음에도 통산 평균자책점이 3.56으로 특출났다고 보긴 어려웠다. 더군다나 그가 뛰었던 1980년대는 ERA 1점대를 기록해야 방어율왕을 수성할 수 있던 투고타저의 시대임을 생각하면... 실제로 MBC의 에이스는 오영일보다는 하기룡으로 받아들여졌기도 하고. 이 때문인지 존재감이 꽤나 희미했던 투수다.

그러나 ERA+가 노쇠화 이전인 1988년까지만 해도 90~100 언저리를 기록했고 통산이 95.1인 것을 보면 최소한 못 한다기보다는, 평균치는 했던 투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요약하면 시즌 초 전력구상 시 한 시즌을 믿고 맡길 수 있을 정도의 투수였다. 규정이닝과 10승 언저리, 리그 평균 정도의 ERA를 기대할 수 있던 무난히 좋은 투수.

5. 지도자 경력

1993년부터 2001년까지 LG 트윈스에서 코치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는 LG 감독의 상당히 자주 교체되었던 시기라서 이광환-천보성-이광은-김성근 감독 등이 부임할 때, 오영일은 감독 성향에 따른 보직 이동 혹은 감독과의 갈등 때문에 보직을 여러 차례 옮겨다녔다.

LG 트윈스 코치 이후 현대 유니콘스 2군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으며 현대의 해체 직전에는 재활코치를 역임했다.

6. 기타

입단 당시 등번호를 자기 이름과 비슷한 501을 하고싶어 했는데, 당시 KBO에서는 세 자리수 등번호를 할 수 없도록 했던 관계로 51번을 달게 되었다. 51번은 두 시즌만 썼고 1985시즌부터 5년 동안은 18번을 달았다.

김성한의 연속 출장 기록을 의도치 않게 저지시킨 바 있다. 김성한은 원년 첫 경기부터 연속 출장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1983년 8월 20일 경기에서 오영일의 긴 인터벌에 타격 리듬이 꼬인 김성한이 타임을 외쳤으나 김광철 주심이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스트라이크 삼진아웃을 선언하자 이에 김성한은 빠던 후 주심하고 싸우다가 퇴장 및 출장정지를 당하면서 기록이 저지당한 것.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술회하길 정부 內 모 기관에서 김성한의 퇴장 장면을 TV로 보고 '저 사람은 야구하기 싫은가보네?'하고 경고를 날렸다고 한다.

상술한 1983년 한국시리즈 선발 등판 경기에서 4번타자 김봉연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첫 타석에서 오영일에게 삼진을 당했다. 김성한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오영일도 너무 긴장해서 다리를 떨고 있는 모습이 해태 덕아웃에서 보였는데 김봉연도 같이 긴장했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MBC-LG 역사상최초로 포스트시즌에 등판한 선수이자 최초의 한국시리즈에 등판한 선수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아들 오명환은 1989년생으로 배명고 3학년 때인 2008년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LG 트윈스에 6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하지 않고 연세대로 진학했으며 대학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남기지 못하고 졸업 후 야구를 접었다.

은근히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배명고와는 유난히도 인연이 없던 MBC-LG 구단에서 몇 안 되는 배명고 출신 선수로, 그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17]

팬 서비스가 좋았다고 한다. 실제로 커뮤니티에서 야구선수의 팬 서비스 관련 글이 올라올 때마다 미담이 꽤나 많이 나오기도 했다.

7. 관련 문서


[1] 1984.5.1. 전주 해태전[2] 1984.5.1 전주 해태전[3] 이재곤이 2010년 타이기록을 세웠다.[4] ~7월 23일[5] 7월 24일~[6] ~7월 25일[7] 7월 26일~[8]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9] 2008시즌 드래프트에 참가해서 LG 트윈스의 지명을 받았지만 지명 거부 후 연세대 진학을 갔으나 이후 프로 진출은 하지 못했다.[10] 오영일의 출신이 인천이었기에 삼미 슈퍼스타즈가 눈독을 들이기도 했다고.[11] 그래도 1990년에 삼미의 후신인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한다. 같이 들어온 선수가 김경문, 이길환이었다.[12] 다만, 1983년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 투수 출장의 경우, 당시에는 의외의 선발이라고 평가받았다. 당대의 MBC의 에이스 투수인 하기룡이 한국시리즈 1선발이어야 한다는 예측이 많은데다가, 심지어 원래 1선발로는 이광권이 예고되었기 때문이다.[13] 1위는 15완투의 장명부.[14] 이 경기만 제외하면 그해 오영일의 평균자책점은 2점대였다.[15] 최다실점 승리 기록은 2010년 이재곤이 5이닝 9실점(8자책)을 기록하고도 승리투수가 되면서 타이기록을 세웠다.[16] 실제로 성준 이전에 인터벌이 긴 투수의 대명사가 오영일이었다. 모든 면에서 성준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17] 그 다음은 심수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