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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5183b><colcolor=#ffffff> 출생 | 1897년 5월 10일 |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령 노르웨이 아스케르 | |
사망 | 1987년 9월 19일 (향년 90세) |
노르웨이 오슬로 | |
국적 | 노르웨이 |
재임기간 | 제22대 총리 집권 1기 |
1945년 6월 25일 ~ 1951년 11월 19일 | |
제22대 총리 집권 2기 | |
1955년 1월 22일 ~ 1963년 8월 28일 | |
제22대 총리 집권 3기 | |
1963년 9월 25일 ~ 1965년 10월 12일 | |
학력 | |
정당 | [[노르웨이 노동당| 노동당 ]] |
직업 | 정치인, 도로노동자 |
가족 | 배우자 베르나르 게르하르센 슬하 자녀 3명 |
약력 | 스토르팅에트의원 북유럽이사회 의장 노동당 대표 스토르팅에트의장 제22대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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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의 정치인이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역사적인 첫 총리다.많은 노르웨이인들에게 국부(Landsfaderen)로 불릴만큼 압도적인 칭송을 받고 있으며, 3회에 걸쳐 도합 17년간 총리로 재임하면서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난 노르웨이를 현대적으로 재건하였다.
2. 생애
원래 도로 노동자로 힘겹게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던 게르하르센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노동 운동가로 활동했다. 이때는 공산주의에 가까운 급진좌파로서 여러차례 체제 전복 활동에 가담했고 수차례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1924년 좌익공산주의청년동맹의 군사행동에 참여했다가 방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75일간 복역한 케이스가 있다.하지만 1930년대가 되면서 점진적으로 온건한 민주사회주의 성향으로 변모, 본격적으로 제도권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오슬로 시의원 및 노동당 부대표 등을 맡으면서 정치적으로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오게 되는데 1940년,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 점령한 것. 이를 막지 못한 요한 뉘고르스볼 총리와 오스카르 토르프 대표가 노르웨이 왕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자 당 대표 대행으로 노르웨이에 잔류한 노동당원들을 총괄하게 된다. 1940년 8월 15일, 오슬로 시장이 되었지만 결국 독일군에 의해 26일 사임해야했고, 9월에는 나치 독일이 세운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에 의하여 아예 정당 활동을 금지당하고 만다.
이후 반나치 활동에 나섰다가 1941년 9월 11일 체포되어 31차례나 되는 구금과 강제신문 끝에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만다. 강제수용소 수감 이후에도 저항 활동을 이어가다 게슈타포에 의해 적발되어 고문당하는 등 여러차례 수모를 당해야 했다. 게슈타포는 게르하르센에게 노르웨이 내 레지스탕스 정보를 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노르웨이가 해방될 때까지 강제수용소에서 나오지 못한 채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데 만족해야했다.
1945년 5월, 노르웨이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자 노동당 대표로 복귀해 다른 정당들과 10월 총선까지 국가를 이끌 임시 거국내각을 구성하면서 전후 첫 노르웨이의 총리가 되었고[1] 이어진 10월 총선에서 게르하르센이 이끄는 노동당이 단독 과반(76석)을 차지하면서 승리해 공식적으로 노동당 단독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2.1. 총리 시절
재임 기간 동안 폭넓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심지어는 게르하르센 총리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총리로서의 게르하르센은 매우 높게 평가했다.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도 강력한 정부 규제를 유지하고 적극적인 부의 재분배에 주력하는 전형적인 수정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했는데, 현대 북유럽을 대표하는 포괄적인 사회보장제도가 이때 만들어진다. 대표적으로 의무교육 및 국가 주도의 보편적 의료보험 체계를 도입해 정착시키고 실업급여 제도를 빠르게 도입했다.
그 외에도 국영 주택 은행법(Norwegian State Housing Bank Law)을 제정해 주택협동조합 및 개인 건축업자들에게 저리로 자금을 대출해줘 주택 공급을 크게 늘리고 동시에 주택 수당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급함으로써 전후 시름에 빠진 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덕분에 노르웨이는 전후 극심한 빈곤과 대량 실업에서 빠르게 탈출할 수 있게 됐다.#
내치에서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게르하르센이 이끄는 노동당 정권은 무려 20년이 넘게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노동당 내 노선 갈등에도 불구하고 NATO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는 등 다른 서방 선진국들과 행보를 함께했다.[2] 이 과정에서 피요르드 협만 안쪽으로 NATO 항모 기동 부대가 훈련을 하면서 소련을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히 이어질것 같았던 게르하르센과 노동당의 천하는 1963년에 무너지고 마는데 스발바르 제도에 있는 킹스 만 탄광에서 광부 2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사회주의인민당[3]이 보수 정당들과 손잡고 게르하르센 총리에 대한 내각불신임결의를 통과시켜버린 것. 노르웨이 총리에게는 의회해산 권한이 없기 때문에 게르하르센 총리로서는 손쓸 방도가 없었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 결과로 노동당 내각이 전후 처음으로 붕괴되고 욘 륑 총리의 보수 내각이 성립되었지만 이 일종의 정치적 쿠데타에 반발한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결국 3주만에 게르하르센이 다시 총리로 복귀한다. 하지만 노동당은 이전과 같은 압도적인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고 게르하르센 총리도 이전과 같은 리더십을 보이지 못하면서 1965년 열린 총선에서 단독 과반확보에 실패했다. 결국 중앙당 소속 페르 보르텐 대표에게 총리직을 넘겨주고 내려와야 했다.
결국 1969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완전히 자리를 떠나게 된다.
[1] 노르웨이가 해방된 후 오스카르 토르프 전 대표를 비롯한 망명 정부가 복귀했지만 노르웨이에 남아 저항 활동을 이어간 게르하르센 대표의 입지를 넘어설 순 없었고 결국 이를 포기한다.[2]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연하기도 한데 겨울전쟁 때도 노르웨이 의용대가 참전하여 소련과 대적한 경험도 있고, 지금도 러시아가 스발바르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노르웨이를 자극하는 등 노르웨이와 러시아의 사이도 스웨덴-러시아 못지 않게 앙숙에 가깝다.[3] 노동당의 온건화에 반발한 좌파 성향 정치인들이 분당해 만든 정당으로 사회주의좌파당의 전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