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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3283> 제8·10대 일본사회당 집행부서기장 에다 사부로 [ruby(江田, ruby=えだ)][ruby(三, ruby=さぶ)][ruby(郎, ruby=ろう)] | Eda Saburō | |
<colcolor=#fff> 출생 | 1907년 7월 29일 |
일본 오카야마현 구메군[1] | |
사망 | 1977년 5월 22일 (향년 69세) |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지케이카이 의과 대학 부속병원 | |
학력 | 경성 선린상업학교[2] (졸업) 고베고등상업학교[3] → 히토쓰바시대학 (중퇴) |
가족 | 아버지 에다 쇼지로, 장남 에다 사쓰키 |
최종 당적 | |
의원 선수 | 4 (중) 2 (참) |
의원 대수 | 30, 31, 32, 33 (중) 2-3, 4-5 (참) |
약력 | 일본사회당 부위원장 일본사회당 위원장 대리 오카야마현 선거구 일본 참의원 사회시민연합 대표 오카야마현 의회 의원 전국농민조합 오카야마현 연서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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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다 사부로는 일본의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치인이다.2. 생애
1907년 7월 29일, 일본 오카야마현 쿠메군 후쿠와타리초 (현 오카야마시 키타구 다케베정)에서 우동, 소바 등을 제조하는 도매업 가게인 시카야 (志賀屋)를 운영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유년시절 누나와 자형의 도움으로 식민지배 하의 조선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경성부 선린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가 학창시절을 보냈다. 이후 수학 여행으로 일본에 돌아왔을때, 일본인이 조선에서 얼마나 건방지고 오만한 행동을 하는지 깨닫게 되고, 식민지배에 대한 공부를 하기위해 조선을 떠나 고베고등상업학교 (현 고베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에다는 고베고등상업학교 재학 중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흥미를 느껴 사회주의에 심취하게 되었고, 1929년 도쿄상과대학 (현 히토츠바시대학)에 입학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오츠카 긴노스케 (大塚金之助, 1892~1977)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군마현의 타니가와산에서 조난을 당한뒤 늑막염에 걸린것을 계기로 대학 생활에 큰 차질이 생겼고, 결국 대학 재직 2년차 과정에서 중퇴하고 사회주의 계열 정당인 전국대중당에 입당해 농민운동 지도자로서 활동하며 1932년 일농중앙위원, 1934년 전농 오카야마현 서기장에 취임했다.
1937년 오카야마현 현의회 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했지만, 이듬해 인민전선 사건에 연루되면서 약 3년간 복역하였다. 그 뒤 1940년에 출소하여 전쟁의 광풍이 몰아쳤던 고국 일본을 떠나 중국에서 개척 사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전쟁이 끝난 1946년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사회당에 입당하였다. 1950년 제2회 참의원 선거 오카야마현 선거구에 출마해 처음으로 공직선거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사회당이 둘로 나눠지자 좌파사회당에 속했다. 한편 이 당시 좌파 타임스 라는 좌파 성향 일간지를 창간했다 에다를 비롯한 경영진들의 운영 노하우 부족 등으로 얼마못가 경영난에 빠져 회사가 도산한적이 있다.
1958년 에다는 스즈키 모사부로 위원장 아래 조직위원장으로 일하며 당 조직의 근대화와 사회활동가의 처우 개선에도 큰 힘을 쏟아 이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고, 1960년 도쿄 찌르기 사건으로 위원장인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사망하자 사회당 위원장 대행을 맡았고, TV토론에서도 온화한 말투로 좋은 인상을 남겨 큰 인기를 얻었다.
1960년부터 에다는 구조개혁론을 사회당의 노선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고, 1962년 도치기현 닛코시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미국의 평균적 생활수준, 소련의 철저한 생활 보장, 일본의 평화헌법 이 네 가지 원칙들을 종합적으로 조정하여 나아갈 때 대중과 연합한 사회주의가 탄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 에다 비전을 발표하였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어 대중들에게 큰 화제와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당 내부에서는 에다 비전이 보수정당인 민사당과 다를바가 없다며 사회주의 해석을 일탈했다는 비판이 나왔고, 1962년 11월 사회당의 분파당이었던 민사당의 니시오 스에히로 서기장이 에다 비전을 지지하자 당내 좌파 인사들과 사회운동가들에게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 에다는 서기장 직에서 사임하고 조직국장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당내 우파였던 가와카미 조타로와 구조개혁파를 형성하여 당내 권력투쟁을 이어갔다.
1967년 사회당 부위원장직을 맡은 에다는 1968년 사회당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근소한 표 차이로 사사키 고조에게 패했고, 같은해 서기장직에 다시 복귀했지만 계속되는 좌우파 파벌싸움으로 인한 당 조직의 약화, 민간기업의 노사협조 확대 정책과 전공투 등의 과격 혁명 노선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 등으로 인해 사회당의 지지층은 갈수록 무너지고 있었고, 결국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 기존 140석에서 90석으로 의석수가 줄어드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후에도 에다는 사회당 부서기장 재직 시절 민사당, 공명당 등 타 야당과 연합해 자민당 정권을 타도하는 사공민 연합 정책을 내세웠지만, 나리타 도모미 등 당내 좌파 인사들은 일본공산당을 더한 야당 공투 노선을 채택하면서, 사회당 내에서 그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집권당인 자민당이 큰 위기를 맞게 되자 당시 민사당 부위원장 사사키 료사쿠 등 민사-공명 양당의 고위 공직자들과 함께 관련 모임 단체인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모임 을 결성한 것이 사회당 간부들과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역린을 건드렸고, 이에 절망한 에다는 사회당을 탈당하려 시도했으나 오히려 탈당계가 수리되지 않고 제명처분을 받고 만다.
그러자 에다는 계속되는 사회당의 좌경화에 반발하며 1977년 3월 사회당 탈당파 출신 덴 히데오, 간 나오토 변리사 등과 함께 사회민주연합의 전신이 되는 사회시민연합을 창당하게 된다.
에다는 그해 7월에 예정된 제11회 참의원 선거에 전국구 후보로 입후보 하겠다고 선언하였으나, 폐암 선고를 받고 투병 중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1977년 5월 22일 오후 8시 3분, 도쿄 미나토구의 병원에서 향년 6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
3. 성향
1951년 사회당이 좌파와 우파로 분열되자 좌파사회당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좌우의 사회당 통합 이후로는 점점 성향이 온건파로 바뀌어갔다. 초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로 인해 반제국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같은 급진 좌파 사상에 심취했었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는 당 조직의 근대화, 혁명적 사회주의와 거리두기 등 온건적이고 사회민주주의적인 성격이 나타난다.3.1. 구조개혁론
자세한 내용은 구조개혁론 문서 참고하십시오.1960년 일본 총선 시기부터 에다는 사회당 우파 진영의 대표 인물로써 구조개혁론(構造改革論)을 사회당의 주된 정책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주의 협회 등을 비롯한 사회당 좌파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
4.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 전국대중당 ''' | 1930 - 1938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38 - 1946 | 당적 상실[5] |
| 1946 - 1951 | 입당 |
| 1951 - 1955 | 분당 |
| 1955 - 1977 | 합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77 | 제명 |
| 1977 | 창당 작고 |
5.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37 | 오카야마현 현의회 선거 | 죠토군 선거구 | ''' 전국대중당 ''' | - | 당선 | 초선 |
1947 | 오카야마현 현의회 선거 | | - | 당선 | 재선 | |
1950 | 제2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 오카야마현 | 193,409 (28.84%) | 당선 (1위) | 초선 | |
1956 | 제4회 일본 참의원 통상선거 | 207,375 (31.72%) | 재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오카야마현 2구 | 86,626 (21.94%) | 초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77,061 (19.38%) | 재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54,743 (12.49%) | 당선 (5위) | 3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72,414 (15.66%) | 당선 (2위) | 4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56,216 (11.42%) | 낙선 (6위) |
6. 기타
- 일본의 혁신계 정치인 중에서도 서민적인 이미지와 중도좌파적 성향으로 일본 국민들에게 폭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총리를 지냈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사회당이 에다를 당수로 했을 경우의 총선거가 제일 무섭다. 사회당은 (의석수가)크게 늘어날 것이다." 라고 기자회견에서 발언해, 에다가 사회당의 위원장으로 취임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 살아생전 일본 국회 내 애연가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