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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0 04:34:30

스진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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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일본 제10대 천황
스진 천황
崇神天皇
파일:external/livedoor.blogimg.jp/19c553e0-s.jpg
출생 기원전 148년
사망 기원전 29년 1월 9일 (향년 119세)
나라현 기성서리궁
(現 일본 나라현 사쿠라이시)
능묘 야마노베노미치노마가리노오카노에릉([ruby(山邊道句岡上陵, ruby=산변도구강산릉)])
재위기간 제10대 천황
기원전 97년 2월 19일 ~ 기원전 29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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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미마키([ruby(美萬貴, ruby=미만귀)], [ruby(御眞木, ruby=어진목)])
부모 부황 가이카 천황
모후 이카가시코메 황후
형제자매 4남 1녀 중 차남
배우자 미마키히메 황후
자녀 7남 6녀
종교 신토
관저 시키노미즈카키노미야([ruby(磯城瑞籬宮, ruby=기성서리궁)])
한풍 시호 스진 천황([ruby(崇神天皇, ruby=숭신천황)])
화풍 시호 {{{#!wiki style="margin: 0 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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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성입언오십경식천황
(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1][2]
어진목입일자인혜명
(御眞木入日子印惠命)[3][4]
소지초국어진목천황
(所知初國御眞木天皇)[5][6]
어조국천황(御肇國天皇)[7][8]
미만귀천황(美萬貴天皇)[9][10] }}}}}}}}} }}}}}}}}}
1. 개요2. 생애
2.1. 일본서기 권제4 가이카 덴노(卷第四 稚日本根子彦大日日天皇 開化天皇)2.2. 일본서기 권제5 스진 덴노(卷第五 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 崇神天皇)2.3. 일본서기 권제6 스이닌 덴노(卷第六 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垂仁天皇)
3. 초대 천황설4. 고분 시대의 성립과 야마토 왕권의 출몰5. 실제 재위기간6. 기타7. 가족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제10대 천황이자 야요이 시대의 첫 번째 천황이다.

2. 생애

2.1. 일본서기 권제4 가이카 덴노(卷第四 稚日本根子彦大日日天皇 開化天皇)

6년(B.C.152) 봄 정월 신축삭 갑인(14일)에 이카가시코메노 미코토(伊香色謎命)를 황후로 삼았다[이는 마마모(庶母)다.[11]]. 황후는 미마키이리비코이니웨노 스메라미코토(御間城入彥五十瓊殖天皇)를 낳았다.

28년(B.C.130) 봄 정월 계사삭 정유(5일)에 미마키이리비코노 미코토(御間城入彥尊)를 황태자로 삼았다. 나이 19세였다.

60년(B.C.98) 여름 4월 병진삭 갑자(9일)에 천황이 죽었다(崩).

겨울 10월 계축삭 을묘(3일)에 카스가노 이자카하노 사카모토노 미사자키(春日率川坂本陵)[12]」라고 적고 있다. 『陵墓要覽』에 의하면 나라현 나라시 油阪町에 소재한다고 적혀 있다. 일본 궁내성은 念佛寺의 경내에 있던 총 길이 약 100m의 전방후원분을 가이카 덴노릉으로 정하였다.]에 장사 지냈다[어떤 책(一)에서는 사카노우헤노 미사자키(坂上陵)라 한다. 나이 115세[13]였다고 하였다.].

2.2. 일본서기 권제5 스진 덴노(卷第五 御間城入彦五十瓊殖天皇 崇神天皇)

미마키이리비코이니웨노 스메라노미코토는 와카야마토네코히코오호히히노 스메라미코토(稚日本根子彦大日日天皇)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이카가시코메노 미코토(伊香色謎命)라고 한다. 모노노베(物部)씨의 먼 조상 오호헤소키(大綜麻杵)의 딸이다. 천황은 19살에 황태자가 되었다. 지혜롭고 총명하고 어려서부터 호방하였다. 장성하자 관대하고 조신하여 신기(神祇)를 높이 받들 줄 알았다. 항상 천하를 잘 다스리려는 마음이 있었다.

60년(B.C.98) 여름 4월에 와카야마토네코히코오호히히노 스메라미코토가 죽었다(崩).

원년(B.C. 97) 봄 정월 임오삭 초하루 갑오(13일)에 황태자가 천황 자리에 올랐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로 삼았다.

2월 신해삭 초하루 병인(16일)에 미마키히메(御間城姬)[14]를 황후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황후가 이쿠메이리비코이사치노 스메라미코토(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와 히코이사치노 미코토(彦五十狹茅命)[15], 쿠니카타히메노 미코토(國方姬命)[16], 치치비츠쿠야마토히메노 미코토(千千衝倭姬命)[17], 야마토히코노 미코토(倭彦命)[18], 이카츠루히코노 미코토(五十日鶴彦命)[19] 등을 낳았다.

또 비(妃) 키노쿠니(紀伊國)의 아라카하토베(荒河戶畔)[20]의 딸 토호츠아유메마쿠하시히메(遠津年魚眼眼妙媛)[21][어떤 책(一)[22]에서는 오호시아마노 스쿠네(大海宿禰)의 딸 야사카후루아마이로베(八坂振天某邊)[23]라고 한다.]와 토요키이리비코노 미코토(豐城入彦命)[24], 토요스키이리비메노 미코토(豐鍬入姬命)[25] 등을 낳았다.

차비 오하리노 오호시아마히메(尾張大海媛)[26]는 야사카노 이리비코노 미코토(八坂入彦命)와 누나키노 이리비메노 미코토(渟名城入姬命)[27], 토오치니이리비메노 미코토(十市瓊入姬命)[28]를 낳았다.

이 해의 간지는 갑신이다.

3년(B.C.95) 가을 9월에 도읍을 시키(磯城)[29]로 옮겼다. 이곳을 미즈카키노미야(瑞籬宮)[30]라 한다.

4년(B.C.94) 겨울 10월 경신삭 임오(23일)에 “나의 조상, 모든 천황들이 천자의 자리에 계셨던 것이 어찌 일신을 위해서였겠는가! 대저 사람과 신(神)을 잘 돌보고 천하를 잘 다스리시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대대로 큰 뜻을 펼치고 때때로 지극한 덕행을 베푸셨다. 이제 짐이 천운(天運)을 받들어서 백성을 사랑하며 보살피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조상의 뒤를 이어 영원무궁토록 조상의 대업을 지켜갈 수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이여, 너희들이 충성을 다하여 함께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5년(B.C.93)에 국내에 유행병이 돌아서 사망하는 백성이 매우 많았다(且大半).

6년(B.C.92)에 백성이 유리하고 혹은 배반하였다. 그 기세가 덕으로 다스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천황이) 새벽부터 일어나 저녁까지 삼가 신기(神祇)에게 죄를 빌었다. 이에 앞서 아마테라스 오호미카미(天照大神)와 야마토노 오호쿠니타마(倭大國魂)[31] 두 신을 천황의 대전(大殿) 안에 모셨다.[32] 그러나 신의 기세가 두려워 함께 사는 것이 편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토요스키이리비메노 미코토에게 야마토(倭)의 카사누히 읍(笠縫邑)[33]에서 아마테라스 오호미카미를 모시도록 하고,[34] 시키 성(磯堅城)에 히모로키(神籬)[神籬는 히모로키(比莽呂岐)라고 읽는다.][35]를 세웠다. 또한 누나키노 이리비메노 미코토에게 야마토노 오호쿠니타마노 카미(日本大國魂神)를 모시도록 하였다. 그러나 누나키노 이리비메노 미코토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야위어 모시는 일을 할 수 없었다.[36]

7년(B.C.91) 봄 2월 정축삭 신묘(15일)에 “옛날에 나의 황조가 대단히 큰 업을 일으키신 후 신성한 업(業)이 더욱 높아지고, 천황의 덕풍도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지금 짐의 치세에 자주 재해가 일어났다. 아마 조정에서 선정을 펼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천신지기가 허물을 물으시는 것은 아닐까? 신령한 거북으로 점을 쳐서[37] 재해가 일어나는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천황이 곧 카무아사지하라(神淺茅原)[38]로 가서 야소요로즈노카미타치(八十萬神)를 불러 모아 점을 쳤다. 이때 신명이 야마토토토비모모노 히메노 미코토(倭迹迹日百襲姬命)[39]의 몸을 빌어 “천황은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을까 걱정하는가? 나를 잘 받들어 제사 지내면 반드시 스스로 평안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이처럼 가르침을 주는 신은 어느 신입니까?”라고 물었다. 신이 “나는 야마토노쿠니(倭國)[40]의 경내에 사는 신으로, 이름은 오호모노 누시노 카미(大物主神)[41]라고 한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신의 말을 듣고 가르침에 따라 제사 지냈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이 없었다.[42] 천황이 이에 목욕재계하고 전내(殿內)를 청결하게 하고 “짐이 신을 예로써 모심이 아직 미진한가요? 왜 이렇게도 받아 주시지 않는지요? 원컨대 한 번 더 꿈속에서 가르쳐주셔서 신의 은혜를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기도하였다. 이 날 밤 꿈에 한 귀인이 나타났다. 대전의 문에 기대어 서서 자기가 오호모노 누시노 카미라고 하면서 “천황은 이제 근심하지 마시오.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내 뜻이오. 내 아들 오호타타네코(大田田根子)[43]를 시켜 나를 제사 지내면 곧 평온해질 것이오. 또한 해외의 나라[44]가 스스로 와서 엎드릴 것이오.”라고 가르쳐주었다.[45]

가을 8월 계묘삭 기유(7일)에 왜적속신천모원목묘희, 호즈미노 오미(穗積臣)[46]의 먼 조상 오호미구치노 스쿠네(大水口宿禰)[47], 이세노 워미노 키미(伊勢麻績君)[48] 등 세 명이 모두 같은 꿈을 꾸고 “어젯밤 꿈에 한 귀인이 나타났습니다. 가르쳐주기를 ‘오호타타네코노 미코토를 대물주대신을 제사 지내는 제주로 삼고, 이치시노 나가오치(市磯長尾市)[49]를 왜대국혼신을 제사 지내는 제주로 삼으면 반드시 천하가 태평하게 될 것이다’[50]라고 말하였습니다.”라고 주상하였다. 천황이 꿈 얘기를 듣고 마음에 더욱 기뻐하여 널리 천하에 알리고 오호타타네코를 찾았더니, 곧 치누노 아가타(茅渟縣)[51]의 스웨노무라(陶邑)[52]에서 오호타타네코를 찾아내어 바쳤다. 천황이 즉시 친히 신천모원에 가서 여러 경들과 80모로토모노워(諸部)[53]를 모아 놓고 오호타타네코에게 “너는 누구의 아들인가?”라고 물었다. 오호타타네코는 “아버지는 대물주대신이라고 하고, 어머니는 이쿠타마요리비메(活玉依媛)[54]라고 합니다. 수웨츠미미(陶津耳)[55]의 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56] 또한 쿠시히카타아마츠히카타타케치누츠미(奇日方天日方武茅渟祇)[57]의 딸이라고도 한다.[58] 천황이 “짐은 당연히 번영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곧 모노노베노 무라지의 조상 이향색웅(伊香色雄)[59]을 신반물자(神班物者)[60]로 삼아 점을 쳤더니 ‘길하다.’고 나왔다. 또 이어서 다른 신을 제사 지내려고 점을 쳤더니 ‘불길하다.’고 나왔다.

11월 정묘삭 기묘(13일)에 이향색웅에게 명하여 물부의 많은 그릇을 신에게 제사지내는 물건으로 하였다. 그리고 대전전근자를 대물주대신을 제사지내는 제주로 삼고, 또 장미시[61]를 왜의 대국혼신을 제사지내는 제주로 삼았다. 그리고 나서 다른 신을 제사지내는 것을 점치니 길하다고 나왔으므로 많은 신들을 제사지냈다. 그리고 천사(天社), 국사(國社)와 신지(神地)[62], 신호(神戶)[63]를 정하였다.[64] 이로써 역병이 비로소 멈추고 국내가 점차 안정되고 오곡이 모두 잘 익어 백성이 풍요롭게 되었다.

8년(B.C.90) 여름 4월 경자삭 을묘(16일)에 타카하시 읍(高橋邑)[65] 사람 이쿠히(活日)를 대신(大神)[66]에게 바치는 술을 관장하는 사카비토(掌酒)로 삼았다[掌酒는 사카비토(佐介弭苔)라고 읽는다.].

겨울 12월 병신삭 을묘(20일)에 천황이 오호타타네코에게 대신(大神)을 제사 지내게 하였다.

이 날에 활일이 스스로 신주(神酒)를 올려 천황에게 바치고 노래하였다.
이 신주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왜(倭)를 만든 대물주가 빚은 신주입니다. 언제까지나 오래도록 영화를 누리십시오. 영화를 누리십시오.
이와 같이 노래하며 신궁에서 잔치를 하였다. 잔치가 끝나자 대부(大夫)들이 노래하였다.
맛있는 술, (밤새 마시고) 삼륜(三輪)의 사전(社殿)에서 아침에 문을 열고 나가고 싶구나, 이 삼륜의 문을.
이에 천황이 노래하였다.
맛있는 술, (밤새 마시고) 아침에 삼륜의 사전에서 문을 열도록 하시오. 삼륜의 사전의 문을.
그리고 신궁의 사전의 문을 열고 나갔다. 오호타타네코라는 사람은 지금 미와노 키미(三輪君)[67] 등의 시조이다.

9년(B.C.89) 봄 3월 갑자삭 무인(15일)에 천황의 꿈에 카미(神人)가 나타나 “붉은 방패(赤盾) 8매, 붉은 창(赤矛) 8자루를 봉납하여 묵판신(墨坂神)을 제사 지내십시오. 또 검은 방패(黑盾) 8매, 검은 창(黑矛) 8자루를 봉납하여 대판신(大坂神)을 제사 지내십시오.”라고 가르쳐 주었다.

4월 갑오삭 기유(16일)에 꿈에서 가르쳐 준대로 묵판신과 대판신에게 제사지냈다.

10년(B.C.88) 가을 7월 병술삭 기유(24일)에 여러 신하들에게 (천황이) “백성을 이끄는 근본은 교화하는 것에 있다. 지금 이미 천신지기를 예배하여 재해가 모두 없어졌다. 그러나 변경의 사람들은 아직 신종하지 않고 있다. 이는 아직 왕화의 덕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경(群卿)들을 뽑아 사방에 보내어 법을 알리겠다.”고 말하였다.

9월 병술삭 갑오(9일)에 오호히노 미코토(大彦命)를 북쪽 땅에 보내고, 무정천별(武渟川別)[68]을 동해에 보내고, 키비츠히코(吉備津彦)를 서도(西道)에 보내고, 타니하노 치누시노 미코토(丹波道主命)를 타니하(丹波)에 보냈다. 그리고 “만약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곧 병사를 들어 쳐라.”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인수(印綬)를 주어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임자(27일)에 오호히노 미코토가 와니노사카(和珥坂)에 이르렀다.[69] 그때 한 소녀가 노래하였다[어떤 책(一書)에서는 오호히노 미코토가 산배(山背)의 히라사카(平坂)[70]에 이르렀다. 이때 길가에 있던 여자아이가 노래하였다고 적고 있다.].

미마키이리비코[71]는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는 줄도 모르고 젊은 여자와 놀고 있구나[어떤 책(一書)에서 “큰 문에서 엿보고 살해하려는 줄도 모르고 젊은 여자와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러자 오호히노 미코토가 의심하여 계집아이에게 “네가 무슨 말을 하느냐?”라고 묻자 “말하지 않고, 오직 노래만 불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다시 앞의 노래를 읊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오호히노 미코토가 곧 돌아와 모든 상황을 아뢰었다. 이때 천황의 고모할머니 야마토토토비모모소히메노 미코토는 총명하고 지혜로워 자주 일어날 일을 예견하였다. 그래서 그 노래가 불길함을 알고 천황에게 “이는 타케하니야스히코[72]이 모반하려는 징표입니다. 타케하니야스히코의 아내 아타히메(吾田媛)[73]가 몰래 와서 왜의 향산[74]의 흙을 영건(領巾)[75]의 끝으로 싸서 ‘이는 왜국을 대신하는 것(物實)[76]이다.’라고 주문을 걸고 바로 돌아갔다고 들었습니다[物實은 모노시로(望能志呂)라고 읽는다.]. 이로써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다시 여러 장군을 불러 의논하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타케하니야스히코와 아내 아타히메가 모반하여, 군대를 일으켜 갑자기 이르렀다. 각각 길을 나누어 남편은 산배로, 아내는 오호사카로 함께 들어와서 도읍(帝京)을 습격하였다. 천황은 이사세리비코노 미코토(五十狹芹彦命)를 보내 아타히메의 군대를 치게 하였다. 이에 곧 대판에 가서 모두 크게 무찔러 아타히메를 죽이고 그 군졸을 모두 죽였다. 다시 대언과 와니노 오미(和珥臣)의 먼 조상 히코쿠니부쿠(彦國葺)를 보내 산배로 향해가서 하니야스히코를 치도록 하였다. 이때 신성한 항아리( 忌瓮)를 와니의 타케스키노 사카(武鐰坂)[77] 위에 두었다.[78] 곧 정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나라산에 올라 싸웠다. 이때 관군들이 많이 모여 초목을 밟아 평평하게 하였다(蹢跙). 이로 인하여 그 산을 나라산(那羅山)이라고 하였다[蹢跙는 후미나라스(布彌那羅須)라고 읽는다.]. 다시 나라산을 떠나 와카라가하(輪韓河)에 이르러 식안언과 강을 사이에 두고 주둔하면서 서로 전의를 돋우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물을 이도미가하(挑河)라고 고쳐 불렀다. 지금 이즈미가하(泉河)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니야스히코가 히코쿠니부쿠를 향해 “무슨 이유로 너는 군사를 거느리고 왔는가?”라고 묻자, “너는 하늘을 거역하여 무도하게도 왕실을 기울게 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의병을 일으켜 너의 반역을 토벌하고자 하노라. 이는 천황의 명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서로 앞다투어 활을 쏘았다. 타케하니야스히코가 먼저 히코쿠니부쿠를 쏘았지만 맞추지 못하고, 다음에 히코쿠니부쿠가 하니야스히코를 쏘자 가슴에 맞고 죽었다. 그의 군대가 위협을 느껴 도망가므로 곧 쫓아가 강의 북쪽에서 쳐부숴 머리를 벤 것이 절반을 넘었다. 시신이 많아 넘쳤으므로 그곳을 하후리소노(羽振苑)[79]라고 불렀다. 또 그 병졸이 두려워 달아나다 똥을 싸서 바지에 새어나오므로, 이에 갑옷을 벗고 도망하였다. 피할 수 없음을 알고 고두(叩頭)[80]하며 ‘아기(我君)[81]’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갑옷을 벗은 곳을 카와라(伽和羅)[82], 바지에 똥 싼 곳을 쿠소바카마(屎褌)라고 하였다. 지금 쿠스바(樟葉)라고 함은 와전된 것이다. 또 고두(叩頭)한 곳을 ‘아기(我君)’이라고 불렀다[叩頭는 노무(逎務)라고 읽는다.].

이후 야마토토토비모모소히메노미코토가 오호모노 누시노 카미의 아내가 되었다.[83] 그러나 그 신은 항상 낮에는 보이지 않고 밤에만 왔다. 왜적적희명이 남편에게 “그대를 항상 낮에 볼 수 없다면 그 존안을 분명하게 볼 수 없습니다. 원컨대 잠시 머물러 주십시오. 내일 아침에 아름다운 모습을 뵙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대신이 “맞는 말이다. 내가 내일 아침에 그대의 경대에 들어가 있으리다. 부디 내 모습에 놀라지 마시오.”라고 답하였다. 이에 왜적적희명이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이튿날 아침 경대를 보니, 아주 아름다운 작은 뱀이 있었다. 그 길이와 굵기가 허리띠와 같았다. 놀라 소리치자 대신이 부끄럽게 여겨 갑자기 사람 모습으로 변해 그 아내에게 “그대가 참지 않아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소. 이제는 내가 돌아가 그대를 부끄럽게 하리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허공을 밟고 미모로야마(御諸山)[84]로 올라갔다.[85] 이에 왜적적희명이 올려다보며 후회하면서 주저앉았다(急居)[急居는 츠키우(菟岐于)[86]라고 읽는다.]. 곧 젓가락에 음부를 찔려 죽었으므로, 대시(大市)에 장사 지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그 묘를 ‘하시하카(著墓)[87]’라고 하였다.[88] 이 묘는 낮에는 사람이 만들고, 밤에는 신이 만들었다. 오호사카 산(大坂山)[89]의 돌을 날라 만들었는데, 산에서 묘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이 손에서 손으로 날랐다. 당시 사람이 노래 불렀다.

오호사카에 가득 쌓인 돌을 손에서 손으로 나를 수 있을까!

겨울 10월 을묘삭(1일)에 신하들에게 “지금 거역하는 자는 모두 베어버리리라. 기내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오직 해외[90]의 거친 백성들만 소동을 아직 멈추지 않고 있구나. 사도(四道)장군 등은 지금 급히 출발하라.”고 명령하였다.

병자(22일)에 장군 등이 함께 출병하였다.

11년(B.C.87) 여름 4월 임자삭 기묘(28일)에 사도장군이 융이(戎夷)[91]를 평정한 상황을 아뢰었다.

이 해에 다른 풍속을 가진 외국인들(異俗)이 많이 귀의하고 국내가 평안해졌다.

12년(B.C.86) 봄 3월 정축삭 정해(11일)에 천황이 “짐이 처음 황위를 계승하여 종묘(宗廟)를 지킬 수 있었으나, 광명을 덮는 일도 있고 덕으로도 편안하게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음양이 잘못되고 날씨가 불순하게 되어 역병이 퍼지고 백성은 재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제 죄를 용서하고 잘못을 고치고 신기를 열심히 예배하고 있다. 또 가르침으로 황속(荒俗)을 편안하게 하고 병사를 일으켜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쳤다. 그래서 위로는 관리가 일을 폐하지 않고 밑으로는 일민(逸民)[92]이 없게 되었다. 교화(敎化)가 잘 미쳐서 백성들(衆庶)은 생업을 즐긴다. 외국도 여러 나라를 거쳐 찾아오고(異俗重譯來) 해외는 이미 귀화하였다. 이러한 때에 나아가 인민의 호구를 조사하여 장유(長幼)의 순서나 과역의 선후를 알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가을 9월 갑술삭 기축(16일)에 처음으로 인민을 조사하여 조역(調役)을 부과하였다. 이를 남자의 유하즈노 미츠키(弭調)[93], 여자의 타나스웨노 미츠키(手末調)[94]라고 한다. 이리하여 천신지기는 모두 온화해지고 풍우는 때맞추어 내려 모든 곡물은 잘 익어 집집마다 물건이 풍부하여 천하는 크게 평온하였다. 따라서 하츠쿠니 시라스 스메라미코토(御肇國天皇)라고 불렀다.[95]
17년(B.C.81) 가을 7월 병오삭(1일)에 “배는 천하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지금 해변의 백성이 배가 없어 운반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그래서 제국에 명하여 선박을 만들게 하라.”고 명하였다.

겨울 10월에 처음으로 선박을 만들었다.

48년 봄 정월 기묘삭 무자(10일)에 천황이 토요키노 미코토와 이쿠메노 미코토에게 “나는 너희 두 황자를 똑같이 사랑한다. 누구를 후사로 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 각자 꿈을 꾸면, 내가 그 꿈으로 점치겠다.”고 말하였다. 두 황자는 명을 받고 목욕재계하고 기도한 후 잠에 들어 각각 꿈을 꾸었다. 해 뜨기 시작할 무렵 형 토요키노 미코토와 꿈 이야기를 하기를 “제가 어제 산에 올라가 동쪽을 향해 8번 창을 찌르고 8번 칼을 휘둘렀습니다.”라고 천황에게 아뢰었다. 동생 이쿠메노 미코토는 “제가 어제 산의 봉우리에 올라 그물을 사방에 펼쳐 좁쌀을 먹는 참새를 쫓았습니다.”라고 꿈 이야기를 아뢰었다. 그러자 천황은 꿈을 해석하여 두 황자에게 “형은 동쪽만 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동국을 다스리는 것이 좋겠다. 동생은 사방 모두에 임하였다. 내 자리를 이을 만하다.”라고 말하였다.

4월 무신삭 병인(19일)에 이쿠메노 미코토를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토요키노 미코토에게는 아즈마국(東國)을 다스리도록 하였다.[96] 이는 카미츠케노노 오미(上毛野臣)[97], 시모츠케노노 오미(下毛野臣)[98]의 시조다.[99]

60년(B.C.38) 가을 7월 병인삭 기유(14일)에 군신에게 “타케히나테루노 미코토(武日照命)[100][어떤 책(一)에서는 타케히나토리(武夷鳥)라고 한다. 또 아메히나토리(天夷鳥)라고 한다.]이 하늘에서 가지고 온 신보(神寶)가 이즈모 대신(出雲大神)의 궁[101]에 보관되어 있다. 이것을 보고 싶다.”고 명하였다. 그래서 야타베노 미야츠코(矢田部造)[102]의 먼 조상 무제우(武諸隅)를 파견하여 [어떤 책(一書)에서는 이름을 오호모로스미(大母隅)[103]라고 하였다.] 바치게 하였다.

62년(B.C.36) 가을 7월 을묘삭 병진(2일)에 “농업은 천하의 대본이다. 백성이 살아가는 근거가 된다. 지금 카와치의 사야마(狹山)[104]의 하니타(埴田)[105]는 물이 적다. 그래서 그 나라 백성은 농사를 게을리 하고 있다. 그러므로 관개용 저수지와 도랑을 많이 파서 백성의 농업을 넓혀라.”라고 명령하였다.

겨울 10월에 요사미노 이케(依網池)[106]를 만들었다.

11월에 카리사카노 이케(苅坂池)[107]와 사카워리노 이케(反折池)[108]를 만들었다[어떤 책(一書)에서는 천황이 쿠하마노미야(桑間宮)에 있으면서 이 세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65년(B.C.33) 가을 7월에 미마나노쿠니(任那國)[109]가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110]를 파견하여 조공하였다.[111] 임나는 츠쿠시국을 떠나 2천여 리,[112] 북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계림[113]의 서남에 있다.

천황이 즉위하여(踐祚) 68년 되던 해 겨울 12월 무신삭 임자(5일)에 죽었다(崩). 그때 나이가 120세였다.

고사기》에 따르면 168세, 《일본서기》에 따르면 120세에 붕어했다.[114][115]

다음 해 가을 8월 갑진삭 갑인(11일)에 야마노헤노 미치노헤노 미사자키(山邊道上陵)에 장사 지냈다.[116]

2.3. 일본서기 권제6 스이닌 덴노(卷第六 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垂仁天皇)

68년 겨울 12월에 미마키이리비코이니웨노 스메라노 미코토가 죽었다(崩).

원년(B.C.29) 봄 정월 정축삭 무인(2일)에 황태자가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겨울 10월 계묘삭 계축(11일)에 야마노헤노 미치(山邊道) 산릉[117]에 장사 지냈다.

이 해의 간지는 임진이다.

3. 초대 천황설

스진 천황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포괄적인 역사가 소개되었다. 특이한 것은 스진 천황의 화풍 시호[118]는 일본서기는 모두 본명인 '미마키'로 시작하며, 고사기는 모두 '하츠쿠니'로 시작한다. 이중 하츠쿠니(肇國, 初國)는 아무리 봐도 '태조'를 지칭하는 호칭이고, 《고사기》에서는 한술 더 떠 대놓고
"천하를 통일하고 처음으로 나라를 다스린 왕"
이라고 기술하므로 진무 천황이 곧 스진 천황이였거나, 아예 스진 천황이 첫 천황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진무 천황은 하다못해 제123대 다이쇼 천황의 황자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조차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라고 인정할 정도로 신화적인 존재로,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가공의 조상을 만들어 가문의 연대를 끌어올리는 것은 흔했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성이 거의 확실시되는 스진 천황으로부터 만들어 낸 가공의 존재라는 것이다.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전해지는 사실과 결사팔대에 연결되는 계보 기사 등에는 의문도 있지만, 1세기에 걸쳐 실재한 천황이라고 파악하는 견해가 적지 않다. 《고사기》는 스진 천황의 붕어 연도를 간지를 이용해서 무인년이라고 기록했고, 이 기록을 신용하면 92년에 사망했다고 추측하는 설도 있다.

결사팔대를 사실이라고 보는 자들은 《일본서기》의 기술에 의거해, 진무 천황이 기내에서 즉위한 후에는 기내 주변의 좁은 영역밖에 나오지 않지만, 스진 천황의 대가 되고 처음으로 일본 지역의 광범위한 사건의 기록이 나오므로, 1대 진무 천황으로부터 9대 가이카 천황까지는 기내의 지방 정권이었고, 10대 스진 천황의 즉위 이후, 일본 열도에서 강력한 정권이 되었다는 설을 내세우고 있다. 또한 소수이기는 하나 결사팔대의 카츠라기 왕조(葛城王朝)에서 스진 천황에서 시작하는 미와 왕조(三輪王朝)로 교체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느 설도 스진 천황을 실존인물로 본다는 점은 공통이다.

4. 고분 시대의 성립과 야마토 왕권의 출몰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 연관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그가 (기년 조정을 감안해서) 실제 정권을 형성한 시기로 추정되는 1세기는 거리상 가장 가까운 가야에서 이주한 도래인이 일본에서 가장 힘이 강했던 시절이었는데, 일단 '천손강림'이라는 신화는 대부분 북방에서 내려온 지배층을 은유하는 표현이라는 점과 '미마키 천황'(御眞木天皇,《고사기》)/(御間城天皇,《일본서기》)라는 이명은 가야의 고대 일본어인 '미마나'(仼那, 임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야요이인들이 한반도 남부에서 건너온 이주민으로써 문명을 형성하고, 고분 시대에도 도래인이 여전히 대거 이주하던 당대 일본에서 도래인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스진 천황이 도래인이든 토착민이든 스진 천황의 정권이 가야 도래인과 토착민의 연합으로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에는 진무 천황의 동정(東征)을 비롯한 야마토 왕권의 성립 시기가 3세기이며 야마토 왕권의 정복기가 4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스진 천황이 진무 천황과 동일인물이며 야마토 왕권의 초대 대왕이 맞다면 스진 천황의 시대는 고분 시대 초기인 3세기까지 내려간다. 고고학적으로 백제임진강 일대(하북위례성) 2세기 후반, 한강 이남(하남위례성) 한성백제 3세기 중반 성립되며 신라는 2세기 후반에 성립되므로 야마토 왕권의 성립 시기는 백제, 신라와 몇십 년 차이밖에 안 되기 때문에 크게 늦은 것도 아니다.

야마토 왕권 출몰의 중요한 원인은 백제의 남정(南征)이다. 백제는 3세기 중반 성립되자마자 남하를 시작하여 3세기 후반 마한 수장 목지국을 꺾고 충청남도 일대를 석권하고, 4세기 초 전라북도 김제시 일대까지 치고 내려가고 목지국의 편을 든 충청북도 잔여 세력들을 소멸시키며,[119] 4세기 중반 근초고왕을 중심으로 침미다례를 비롯한 전라남도 마한가야 세력들을 제압한다. 야마토 왕권이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120] 이때 3~4세기 무렵 백제의 남정을 피해 엄청난 숫자의 마한, 가야인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하게 되는데 2024년 DNA 연구에 따르면 고분인들이 이 시기 한반도 중남부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한 한반도인들이며 유전적으로도 고고학적 물질문화로도 백제, 마한계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121][122] 4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백제와 야마토 왕권이 긴밀해지면서 백제로부터 많은 이주민과 문명을 받아들이며 야마토 왕권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된 건 덤이었다.

이는 신라도 마찬가지였는데, 신라도 3~4세기 사로국 시절부터 진한 일대의 맹주로 떠오르면서 진한 일대를 병합해나가고 3세기부터 금관국을 비롯한 변한의 후신 가야 문화권과 충돌하며, 4~6세기에 걸쳐 진한과 가야를 정복한다. 마한의 수장국이 건마국[123], 목지국, 백제로 여러 차례 바뀌었고 백제는 특히 목지국의 도움을 받아 한강 이남에 자리잡았으면서 얼마 안 가 목지국을 하극상한 게 문제가 된 반면 신라는 처음부터 진한의 맹주였기 때문에 그런 문제 없이 진한 전체를 신라의 아래로 병합시켜 나간다.[124]

가야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라 금관국반파국처럼 세가 강한 가야제국(諸國)들이 출몰하며, 특히 반파국은 5세기 전성기를 향유해 대가야, 가라로도 불리며 일시적으로 호남 동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변한의 후신인 가야제국은 하나를 중심으로 합쳐지지 못하고 비슷한 여러 세력을 중심으로 소국들이 병존하는 양상을 끝내 벗어나지 못해 5~6세기에 걸쳐 백제와 신라에게 각각 병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5~6세기 엄청난 숫자의 가야인들이 야마토 왕권으로 이주한 것이 사서와 고고학 유물로 확인된다.

3~6세기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백제, 마한계 못지않게 진한-신라, 변한-가야계도 엄청난 숫자가 일본 열도로 이주하는 것이 확인되며, 하타 씨족이 이런 진한-신라계 도래인의 대표적인 씨족이다. 그 숫자가 얼마나 엄청났는지 현대 일본인들의 DNA는 대략 80!90% 정도가 한반도에서 이주한 도래인들의 DNA다. 일본 열도의 선주민이며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한반도에서도 많이 거주하던 조몬인들의 DNA를 10%까지 희석시켰을 정도.[125] 야마토 왕권은 백제, 가야와 친하고 3~4세기부터 신라와 사이가 나쁜 모습을 일관적으로 보여주지만 그와 별개로 신라가 진한을 병합한 이후에도 신라에서 많은 도래인이 이주하며 성장했으며, 아메노히보코 설화를 비롯해[126] 고고학적으로도 근초고왕 이전까지 야마토 왕권은 (사이가 나쁜 것과 별개로) 신라 도래인의 영향도 많이 받은 것이 확인된다.

반대로 선사시대부터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조몬인들이 한반도에 대거 거주하거나, 6세기까지 일본 열도에서 마한, 가야 등으로 이주한 사례도 고고학적으로 여럿 확인되고[127] 일본서기에서 야마토 왕권 귀족들(시나노, 모노노베, 키, 코세 등)이 백제로 귀화하는 등 반대로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다.[128] 고고학적으로 3세기 야마토 왕권의 성립에는 이러한 한반도에서 이주한 엄청난 숫자의 한반도 도래인들의 영향이 물질적으로도 DNA적으로도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만큼, 야마토 왕권의 시조인 진무 덴노=스진 덴노의 천손강림 신화 또한 이런 야마토 왕권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준 고분인으로 대표되는 한반도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일화라 볼 수 있다.

고분 시대의 성립이 고분인의 영향이 큰 것과 일본 왕조의 천손강림 신화를 고려하면 스진 덴노는 일본 열도 토착 조몬인보다는 한반도에서 이주한 세력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현대 일본 왕조는 게이타이 덴노를 기점으로 한 3왕조지만 스진 덴노의 1왕조와 왜5왕으로 대표되는 오진 덴노의 2왕조와 모계로 이어져 만세일계를 구축했고[129] 1왕조와 2왕조는 명백하게 백제, 신라, 가야 도래인들과 내내 깊은 관련을 갖고 있던 것이 사서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오우미(현 시가현) 출신인 게이타이 덴노가 불확실하다.[130]

다만 스진 덴노가 조몬인인지, 야요이 시대 때 한반도에서 건너간 야요이인인지, 고분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고분인인지는 불명이다. 조몬인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지만 조몬인들도 원삼국시대 초기까지 한반도에 많이 거주하다 일본 열도로 넘어간 사례가 확인되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131] 그래도 건국에서 천손강림 신화를 강조한 걸 보아 고분인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 보인다.

스진의 정권과 동시기에 성립한 금관국을 비롯한 많은 가야 소국들이 3세기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출몰하고, 거리도 가까우며, 조몬계로 추정힌 수도 있는 허황옥을 비롯해 가야와 왜가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이 사서와 고고학적으로 매우 강조되는 점을 고려하면 스진 일족은 가야와 깊은 관련이 있었을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 금관국김해 대성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군장 사회를 넘어서 본격적인 국가로 발돋움한 시기가 3세기 중후반으로 야마토 왕권의 성립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데, 스진 덴노의 미마나 관련 기사와 허황옥의 출신을 고려하면 양국은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윗 서술들은 어조 자체가 매우 확정적인 느낌인데 우선 허황옥이라는 외국에서 온 왕비 자체가 허구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외의 것들도 추측은 가능해도 속단은 불가하다. 확실하면 통설이겠지만 위 추측들이 교과서에 없는, 아직 가설 수준인 데에는 이유가 있는것이다.

5. 실제 재위기간

고고학적으로 야마토 왕권의 성립이 3세기 중후반에 등장하는데, 스진 덴노의 재위기간은 2갑자(120년) 인하해도 기원후 37년에 지나지 않으므로 가능성이 낮다.

진무 덴노는 스진 덴노와 동일인물설이 꾸준히 제기되는 인물인데, 가이카와 스진의 즉위 간지가 같다고 기록된 점을 고려하면 스진의 즉위 간지가 실제로는 진무와 같은 신유년일 수도 있다. 다만 스진의 근거지인 시키磯城(현 나라현 시키군)는 사서에서 진무의 근거지라 기록된 카시하라(현 나라현 가시하라시)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아 진무가 신화적 존재임을 고려하면 진무의 모티브에 스진과 동시대 가시하라의 왕도 같이 포함되었을 수도 있으며 신유년 즉위는 <신유혁명설>이라는 도참설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꼭 241년이라 장담할 수 없다.[132]

스진 덴노가 죽은 동년 스이닌 원년 11월 2일자 기사에 '이 해의 간지는 임진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스이닌 덴노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이리비코'라는 시호를 공유하기 때문에 같은 씨족 출신이 맞다 가정하고 3세기 후반~4세기 초반에 재위했다 가정하면 스이닌 덴노의 즉위년은 272년 또는 332년이 된다. 단 스이닌의 근거지가 스진과 다른 마키무쿠(纒向) 일대인 점[133]을 고려하면 스이닌 덴노가 '이리비코'의 이름을 공유하기는 하나 친아들이 아닐 수도 있으며, 아들이 맞더라도 스진의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게 아니라 마키무쿠에 나라를 세우거나 마키무쿠 선왕의 자리를 물려받았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스진 덴노가 정말로 272/332년에 죽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고사기에서는 스진 덴노가 무인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는데, 3세기 중후반~4세기 초반의 무인년은 258/318년이다. 다만 고사기는 일본서기와 초기 왕들의 재위기간에 큰 오차를 보이는 경우가 허다해서 고사기의 기록을 마냥 신용할 수는 없다. 스진 덴노와 동일시되는 진무 덴노는 일본서기에서 병자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316년에 사망했을 수도 있다.

스진 덴노의 정확한 재위기간을 상고하기는 어려우나, 스진 덴노가 3세기 중후반에 재위한 것은 확실하다.

6. 기타

가이카 덴노의 차남이라는 기록과 달리 학계에서는 결사팔대의 실존성에 대해 회의적이며 설령 부족장으로 실존했다 하더라도 정말 스진의 친아버지가 맞는지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게이타이 덴노 이전까지 왕들의 족보를 보면 부자지간이 아닌데 부자지간으로 조작된 듯한 정황이 있는 인물이 한둘이 아니다. 만세일계 자체가 게이타이 이전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며, 가이카 덴노는 시호부터 '야마토네코'다 보니[134] 스이제이, 안네이, 고쇼와 달리 실존 가능성이 더욱 떨어진다는 평을 듣는다. 정말로 가이카 덴노의 모티브가 되는 갑신년에 즉위해 가스카노 이자카와노미야(春日率川宮)(나라현 나라시)에 군림한 왕이 있었다면 204/264년에 즉위한 것이 되므로 아버지가 아니라 동시대인일 수도 있다.

야마토 제1왕조는 3세기 중후반 성립되어 4세기 초반~중반까지 이어졌다. 비록 스진 덴노 이후의 덴노인 스이닌 덴노, 게이코 덴노, 세이무 덴노, 주아이 덴노의 실존 여부에 논란이 있고, 특히 주아이의 실존에 논란이 있지만, 6세기 초 게이타이 덴노가 제3왕조를 성립할 때까지만 해도 야마토는 중앙집권화가 신라보다 느려 야마토 대왕이란 야마토에 속한 호족(왕)들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말이 같은 왕조지 실제 혈족이 달라도 얼마든지 추대될 수 있었다.

스이닌은 '이리비코'라는 시호를 공유하기 때문에 같은 씨족이 맞을 수도 있으며, 설령 게이코-세이무-주아이가 스진과 다른 씨족 출신이고 정말 가공인물이 맞더라도 4세기 초반까지 왜와 신라가 전쟁하던 당시의 기록을 보면 대왕(대표)이 있기는 했을 것이므로 사서에 나온 3명과 전혀 다른 인물이 대왕이었을 수도 있다.[135]

오진 덴노~부레쓰 덴노까지 이어지는 제2왕조도 가족관계 조작이 일어난 정황이 꽤 되기 때문에 스진 덴노의 처자식이라 기록된 인물들이 전부 처자식이 맞을 가능성은 떨어지며, 적어도 후손을 자처한 가문 상당수가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학계에서는 신찬성씨록에 기록된 황별씨족조차 한반도 도래인이 황별씨족으로 위조된 정황이 있는 등 황별씨족은 게이타이 덴노를 기점으로 갈라진 황별씨족만 신뢰할 수 있다 본다.

7.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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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마키이리비코이니에스메라미코토[2] 《일본서기》(日本書記)[3] 미마키이리히코이니에노미코토[4] 《고사기》(古事記)[5] 하츠쿠니시라시시미마키노스메라미코토[6] 《고사기》(古事記)[7] 하츠쿠니시라스스메라미코토[8] 《고사기》(古事記)[9] 미마키노스메라미코토[10] 《히타치국풍토기》(常陸国風土記)[11] 『일본서기』 고겐 7년 2월조에 의하면 이카가시코메노미코토는 고겐 덴노의 비라고 하므로 가이카 덴노에게는 서모가 된다.[12] 『연희식(延喜式)』 제릉식(諸陵式)에 「春日率川陵[春日率川宮]御宇開化天皇. 在大和國添上郡. 兆域東西五段. 南北五段. 以在京戶十烟. 每年差充令守.[13] 『고사기』에는 63세로 나와 있다.[14] 스이닌 즉위 전기에 大彦命의 딸로 나온다. 『고사기』에서는 大毘古命의 딸 御眞津比賣命이라고 하였다. 미마키히메는 미마키이리비코(스진)와 한 쌍을 이룬다. 이른바 姬彦制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15] 『고사기』에서는 이자노 마와카노 미코토(伊邪能眞若命)라고 적고 있다.[16] 『고사기』에서는 쿠니카타히메노 미코토(國片比賣命)라고 적고 있다.[17] 『고사기』에서는 치치츠쿠와히메노 미코토(千千都久和比賣命)라고 적고 있다.[18] 『일본서기』 스이닌 28년 10월조에 사망 기사가 보인다.[19] 『고사기』에서는 倭日子命의 앞에 伊賀比賣命의 이름을 적고 여성이라고 하였다.[20] 『고사기』에서는 木國造로 이름은 荒河刀辨이라고 하였으며, 『선대구사본기(先代舊事本紀)』 천손본기(天孫本紀)에서는 大新河命은 紀伊荒川戶俾의 딸 中日女를 처로 삼았다고 하였다.[21] 『고사기』에서는 遠津年魚目目微比賣라고 적고 있다.[22] 『서기주해(書紀集解)』에서는 이 분주를 尾張大海媛에 붙은 것으로 보고 있다.[23] 야사카와 후루는 미상, 아마는 海, 이로베는 여자의 애칭이다.[24] 『고사기』에서는 豐木入日子命이라고 표기하였다. 『고사기』와 『일본서기』 스진 48년 4월 무신삭 병인조에서는 上毛野君氏와 下毛野君의 시조로 나오고 있다. 『속일본기』 延曆 10년 4월 5일조에서는 池原綱主 등이 「其入彦命子孫, 東國六腹朝臣, 各因居地, 賜姓命氏. 」라고 하였다. 『신찬성씨록』에는 더 많은 씨가 동족으로 나오고 있다.[25] 『고사기』에서는 豐鉏入日賣命으로 표기되고 있다. 『일본서기』 스진 6년조에는 아마테라스를 야마토(大和)의 笠縫邑에서 모셨다.[26] 『고사기』에서는 尾張連之祖意富阿麻比賣라고 하였다. 워하리노 무라지(尾張連)는 워하리(尾張)(현 아이치현 서부 및 나고야시) 지방을 본거로 하는 호족이다. 『선대구사본기』 천손본기에서는 饒速日命의 6세손 建宇那比命의 딸 大海姬命, 또는 葛木高名姬命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和名類聚抄」에 尾張國 海部郡 海部鄕(현 아이치현 아마군)이 보인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오와리노 무라지는 간사이에서도 여럿 분포했는데, 카와치국(河內國) 아스카군(安宿郡) 오와리향(尾張鄕)이나 후지와라쿄(藤原京)(현 나라현 가시하라시)의 좌경 오하리(小治)도 있었다고 한다.[27] 『고사기』에서는 沼名木之入日賣命이라고 표기하였다.[28] 『고사기』에서는 十市之入日賣命이라고 표기하였다. 十市는 야마토국(大和國) 十市郡을 가리킨다.[29] 야마토국(大和國) 城上郡과 城下郡으로 현재 나라현 시키군이다. 시키 지역의 호족이 스이제이 덴노 이하 6대에 걸쳐 황비를 배출하였다.[30] 『고사기』에서는 師木水垣宮이라고 적고 있다. 미즈는 美稱이다. 지금의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 金屋 부근이다.[31] 왜국옥신은 왜 지역의 경영에 공이 있는 신을 말한다. 國玉神은 일반적으로 그 나라의 경영에 공이 있는 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서기』 신대 上 제8단 제6의 일서에 「大國主神, 亦名大物主神…亦曰大國玉神, 亦曰顯國玉神. 」이라 적고 있다. 大國玉神을 대국주신이나 대물주신과 같은 존재로 보는 견해도 있었음을 말해준다. 원래 국옥신이 점차 대국주신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大倭神社 注進狀에서도 「傳聞大國魂神者, 大己貴神之荒魂. 」이라고 적고 있다.[32] 스진 덴노가 직접 두 신을 제사 지냈다는 뜻이다.[33]나라현 시키군 田原本町 秦庄이다. 현재 사쿠라이시의 笠의 笠山荒神 境內나 三輪의 檜原神社 境內로 보는 설도 있다.[34] 『고사기』 스진 덴노 단「豐鉏比賣命者[拜祭伊勢大神之宮也.]」라고 적고 있고, 풍서비매명이 이세대신궁에서 제사를 담당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테라스 오호미카미를 이세에 모신 후에 이세대신으로 부르게 되었으므로, 『고사기』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을 것이다. 『일본서기』 스이닌 25년 3월조에서는 풍서비매명이 천조대신을 모시는 것을 그만두고 이를 스이닌의 딸 倭姬命이 이어받은 후 천조대신의 뜻을 받들어 이세로 가서 거기서 천조대신을 모셨다고 적고 있다. 『고사기』 스이닌 덴노 단에서는 「倭比賣命者[拜祭伊勢大神宮也.]」라고 적고 있다. 풍서비매명과 왜비매명이 천조대신을 모신 것은 『일본서기』의 기사와 일치한다. 日神을 제사하는 齋場이 삼륜산에서 이세로 옮겨진 것은 5세기 후반의 유랴쿠 조나 6세기 전반의 게이타이 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5] 신의 강림을 맞이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장소이다.[36] 『일본서기』 스이닌 25년 3월조에도 一云을 인용하여 누나키노 이리비베노 미코토가 이미 신체가 수척해져 제사를 할 수 없었으므로 大倭直의 조상 長尾市宿禰가 제사지냈다고 적고 있다. 대왜직은 『일본서기』 진무 즉위전기에 보인다. 신무의 동정 초기부터 합류하여 바닷길 안내를 맡은 후 여러 가지로 활약하여, 진무 2년의 논공행상에서 倭國造로 임명되었다. 『고사기』에서는 왜대국혼신의 제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37] 龜卜은 중국 예로부터의 점법으로, 『양로령』 직원령에 神祇伯의 職掌으로 卜兆가 있다. 『영의해(令義解)』에서는 「卜者, 灼龜也. 兆者, 灼龜縱橫之文也. 凡灼龜占吉凶者, 是卜部之執業. 」이라고 주를 달았다.[38] 카무는 신성하다 또는 신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아사지하라는 드문드문 띠가 난 들판을 가리킨다. 현재 사쿠라이시의 笠의 淺茅原이다. 사쿠라이시 茅原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39] 『고사기』, 『일본서기』에서는 제7대 고레이 덴노의 황녀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이외에 제8대 고겐 덴노의 황녀라는 설도 제시하고 있다. 스진 덴노의 할머니나 고모뻘이 된다. 스진 조에서 차지하였던 그녀의 지위와 무녀적 성격 때문에 그녀를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보이는 여왕 히미코에 비정하고, 스진 덴노를 히미코의 남동생으로 비정하는 설도 있다.[40] 여기서 왜국은 협의의 야마토로, 初瀨川 유역의 天香具山과 三輪山을 연결하는 범위 정도였다.[41] 오호모노 누시노 카미는 일국의 모든 신을 거느리고, 그 땅을 수호하는 신이다. 야마토(大和)의 오호모노 누시노 카미는 大國主命의 和魂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대화의 三輪山에 진좌하는 신이며 현재 나라현 大神神社의 제신(祭神)이다. 大國主神(大己貴神)이라고도 한다. 오오모노大의 모노(物)는 물질이라는 의미보다 귀신, 마물(魔物), 두려운 신의 위세 등을 가리킨다. 삼륜산은 야마토(大和)를 대표하는 수려한 산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신은 뱀의 모습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고대부터 뱀신은 술의 신이며 농업의 수호신이었다. 풍작을 보장하는 신으로 받들어졌다. 大神神社의 제신은 三輪山 그 자체이므로 이 신사는 신체(神體)를 모시는 본전(本殿)이 없다.[42] 이 이야기는 스진 덴노의 일족인 왕녀가 탁선을 담당한 결과 삼륜신을 제대로 제사지낼 수 없었음을 시사한다.[43] 『고사기』에서는 意富多多泥古로 표기되었다. 田田은 지명일 것으로 추측되며, 네코(根子)는 존칭이다.[44] 『일본서기』 스진 65년조의 임나 조공 기사의 복선이다.[45] 『고사기』에서는 역병이 유행하고 사람들이 죽자 스진이 신탁을 바라게 되었는데, 꿈에 오호모노 누시노 카미가 나타나 자신의 아들 意富多多泥古를 찾아내 자신을 제사 지내도록 하면 신의 재앙이 없어지고 나라가 편안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스진이 사방에 사람을 보내 카와치의 미노촌에서 意富多多泥古를 찾아내게 되었다고 한다.[46] 가이카 기에서는 가이카 덴노의 어머니가 호즈미노 오미의 먼 조상 울색웅명의 여동생이라고 하였다.[47] 『신찬성씨록』 우경신별 采女朝臣條에서 饒速日命의 6세손이라고 적고 있다.[48] 이세(伊勢)의 麻績氏로 이름은 알 수 없다.[49] 이치시는 율령제의 야마토국(大和國) 十市郡의 지명이다. 『일본서기』 리추 3년조에 磐余市磯池가 보인다. 나가오치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스이닌 3년 3월조의 一云과 스이닌 7년 7월조에 倭直의 조상인 長尾市가 보인다.[50] 渟名城入姬를 쇠약하게 만들고 역병을 가져온 대물주신이 자신의 아들 대전전근자명과 함께 장미시가 자신을 제사 지내주기를 바랐다고 말하고 있다. 長尾市는 『古事記』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으로, 『고시기』 편찬 이후 『고사기』의 이 부분의 편찬 과정에서 나가오치의 후손인 왜국조가 개입하였음을 말해준다. 스진 기에서는 오호모노 누시노 키미가 재앙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스진 조에 이러한 재앙신 관련 이야기가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왕조 교체론에서는 제사자를 잃게 된 전 왕조의 봉재신이 재앙을 가져왔다고 보고 있다. 역병이나 재앙은 왕권에 의한 무질서의 극복과 신대의 나라 만들기가 미완성이었으나, 스진의 제사에 의해 나라 만들기와 국권 양도가 완성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고사기』 중권에 묘사된 왕권발달사는 다음과 같다. 신무의 中州 평정 후 스진 대에 키나이(畿內) 제사 체제가 정비되고 畿外에 四道將軍을 파견한다. 스이닌 덴노는 이세 신궁 및 출운대사를 창시하여 기외의 제사 체제를 정비한다. 이어서 게이코 조에는 황자들을 지방에 분봉하고 세이무 조에서는 國造·顯州 등의 지방 제도를 정비한다. 이렇게 大八州의 통치가 완성된 후 주아이·진구 황후 때 삼한 정벌이 이루어졌고, 그 아들 대인 오진 조에는 도래인이 귀화하고 제국으로서의 천하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스진 조에는 키나이 제사를 제도화하는 것에 주안을 두어 재앙신의 진무, 봉재 씨족의 기원을 전하고 있다.[51] 율령제의 이즈미국(和泉國) 일대를 가리키는 옛 명칭이다.[52] 율령제의 이즈미국(和泉國) 大島郡 陶器莊(지금의 오사카부 사카이시 동남부)이다. 『고사기』에서는 카와치의 미노촌에서 意富多多泥古를 찾아내었다고 적고 있다. 陶邑은 초기 수혜기의 최대 생산지다. 이 도읍에서 생산된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후반경까지의 수혜기가 삼륜산에서 출토되고 있다.[53] 조정의 여러 토모(伴)의 수장이다.[54] 活은 이키로 읽는데 이것은 ‘살다’라는 뜻으로, 살아있는 타마요리비메라는 의미이다. 타마요리비메는 진무 기에서 진무 덴노의 어머니로 등장하고 있다. 타마요리히메는 타마(혼)가 빙의하는 여자라는 뜻으로, 무녀를 가리킨다.[55] 陶는 지명이며 耳는 남자의 존칭일 것으로 여겨진다.[56] 『고사기』에서는 陶津耳命의 딸 活玉依毘賣가 오호모노 누시노 카미와의 사이에서 낳은 建甕槌命의 아들로 나오고 있다.[57] 奇日方, 天日方, 武는 미칭이다. 茅渟는 지명이고 祇는 남자의 존칭이다.[58] ‘또한~라고도 한다.’는 앞 문장의 細註로 들어갈 내용이다.[59] 『고사기』에서는 伊迦賀色許男命으로 표기하였다. 『선대구사본기』 천손본기에서는 饒速日命의 5세손 大綜杵命의 아들로, 숭신천황의 어머니 伊香色謎命의 남동생이라고 적고 있다.[60] 신에게 바칠 물건을 준비하는 사람.[61] 『고사기』에서는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62] 신사의 비용에 사용하기 위한 땅으로 주로 神田, 즉 신에게 바칠 곡식을 거두는 밭이다.[63] 神戶는 율령제에서 神社에 배정된 民戶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호가 바치는 조용조는 신궁을 조영할 때나 신사의 여러 가지 비용을 충당하는 데 쓰였다. 숭신천황조의 神戶는 이 신호의 전신으로 神社에 속하는 집이나 백성이다.[64] 『고사기』 스진 단에서는 「定奉天神地祇之社. 」라고 적고 있다.[65] 『연희식(延喜式)』 신명장(神名帳)에 야마토국(大和國) 添上郡(현 나라현 텐리시) 타카하시 신사(高橋神社)가 보인다.[66] 오호모노 누시노 카미[67] 『고사기』 스진 단에서는 미와노 키미(神君)와 카모노 키미(鴨君)의 조상이라고 나와 있다. 三輪山 신화는 三輪山의 제사를 삼륜씨가 담당하게 된 과정을 말하고 있다. 삼륜산의 서남쪽 기슭에 미생시대의 토기가 많이 나와 이 시대부터 제사가 거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삼륜산 남북과 서쪽에 다량의 무기류를 부장한 거대한 고분시대 고분이 나타나 삼륜산 주변에 큰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륜씨는 삼륜산을 제사지내는 집단으로 카와치의 陶邑을 거점으로 하다가 5세기 이후 대화에 옮겨 살게 되었다. 이는 카와치 세력에 의한 삼륜산 제사권의 장악을 반영하는 이야기다. 『大神神社史料』 제1권에 수록된 「三輪高宮家系圖」에 의하면 실재했을 가능성이 큰 긴메이 조의 特牛 이후 逆-小鷦鷯-文屋-高市麿로 이어진다. 긴메이 조의 중신씨와 함께 제사를 담당하였을 것이다.[68] 『고사기』 고겐 단에 「其兄大毗古命之子建沼河別命者(阿倍臣等之祖.)」라고 하였듯이, 가이카 덴노의 형인 오호히노 미코토의 아들이다.[69] 이하는 武埴顔彦의 모반 이야기이다.[70] 율령제의 야마토국(大和國) 添上郡에 있던 고개 이름이다.[71] 스진 덴노[72] 고겐 덴노의 아들이다.[73] 『고사기』에는 아타히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74] 나라의 천지신명에게 제사 지내는 장소이다.[75] 여자들이 목에서 어깨로 걸치는 천을 말한다. 『일본서기』 덴무 11년 3월 28일조에서는 肩布를 히레(比例)라고 하였다.[76] 物實은 ‘모노시로’라고 읽는다. ‘시로’는 대표, 대신하는 물건이라는 의미로 왜를 대표하는 흙이라는 의미이다.[77] 현재 나라현 텐리시 북단의 櫟本 언덕[78] 땅의 경계에 항아리의 하부를 땅에 묻고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地堺 祭儀로서, 신들에게 보호를 빎과 동시에 타 집단에게 재앙을 입히려는 의례적 행위로 해석된다.[79] 하후루는 ‘넘치다’라는 뜻이므로, 하후리소노는 ‘넘치는 동산’을 뜻한다.[80] 머리를 땅에 대고 잘못을 비는 행위를 말한다.[81] 나의 임금으로 삼겠다는 항복의 표현이다.[82] ‘갑옷을 벗는 소리’ 또는 ‘갑옷’을 ‘가와라’라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3] 『고사기』에서는 오호모노 누시노 카미의 아내의 이름이 스웨츠미미노 미코토(陶津耳命)의 딸 이쿠타마요리비메(活玉依毘賣)로 나온다.[84] 미와 산[85] 이는 신과 인간이 이별하는 神人隔絶型 神婚譚이며, 삼륜산 제사권을 둘러싼 세력 갈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한다.[86] '주저앉음'을 가리키는 말[87] ‘젓가락으로 음부를 찔려 죽다.’로 표현하고 ‘젓가락’ 무덤이라 이름 붙였다. 지금 현재 나라현 사쿠라이시 箸中의 纏向유적에 箸墓古墳이 있다. 이 고분을 邪馬臺國의 여왕 히미코의 무덤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지만, 궁내청이 관리하는 능묘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발굴 조사를 할 수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1995년 이후 고분 주변 조사를 통해 이 고분이 전체 길이 280m, 높이 30m이고 전방부는 4단이며 후원부는 5단으로 쌓고 내호와 외호를 둘렀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는 분구에서 吉備지방에서 출토되는 특수기대라는 토기가 채집되었다. 정형화한 대형 전방후원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고분으로, 중국경과 토기 편년을 통해 3세기 후엽부터 3세기 말경의 고분으로 여겨지고 있다. 寺澤薰은 이 고분의 피장자를 狗奴國의 왕으로 추정하였다.[88] 『고사기』에서는 意富多多泥古의 어머니 活玉依毘賣가 아름다운 여자로 장성하자 밤에 매우 잘생기고 품위 있는 남자가 갑자기 찾아와 동침했는데, 얼마 안 가 임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부모가 남편도 없는데 어떻게 임신했는지 묻자 그녀는 이름 모르는 잘생긴 남자가 밤마다 와서 자는 사이에 자연히 임신하게 되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부모가 그녀에게 붉은 흙을 방 앞에 뿌리고 베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자락에 꽂아놓도록 하였다. 그녀가 그대로 하고 다음날 아침에 보니 바늘에 꿴 실은 집의 자물쇠 구멍을 통과하여 가버리고 남은 실은 세 가닥뿐이었다. 그래서 자물쇠 구멍으로 나간 것을 알고 실이 간대로 찾아가 보았더니 美和山에 이르러 신사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베실이 세 가닥 남았으므로 그 땅을 미와(美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베실도 뱀의 몸의 상징으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의 著墓傳說이 신인격절형 신혼담이라면, 『고사기』의 삼륜산신화는 신의 아들의 출생을 말하는 신인교류(神人交流)형 신혼담이라고 할 수 있다. 『고사기』에서는 意富多多泥古를 미와노 키미(神君)와 카모노 키미(鴨君)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카모노 키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미와노키미(三輪君), 즉 神君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일본서기』의 특징으로 여러 씨족을 나열하는 『고사기』에 비해 대표 씨족만 표기한 것이다. 이는 본래 오호모노 누시노 키미의 제사권은 미와노 키미(三輪君)가 가지고 있었으나 황실이 이를 대신하게 되었고, 왜적적희는 뛰어난 수완으로 이 신을 배경으로 일본의 통일을 꾀했다고 해석되고 있다. 스진 덴노가 아마테라스를 笠縫邑에서 제사 지냈으나 그것이 중단된 것은 오호모노 누시노 키미의 신위가 강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테라스가 대두하기 이전에는 오호모노 누시노 키미가 야마토(大和)의 주신이었을 것이다.[89]나라현 키타카츠라기군(北葛城郡) 二上山의 북쪽 산[90] 원문은 海外이지만, 키나이(畿內)에 대한 畿外를 뜻한다.[91] 군주의 교화에 따르지 않는 미개한 족속이라는 뜻. 융은 중국 서쪽의 이민족인 서융, 이는 중국 동쪽의 이민족인 동이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기나이의 서쪽과 동쪽을 확장했다는 뜻으로 추정된다.[92] 『한서』 성제 기의 顔師古 주에서는 「逸, 遁也」라고 하였으며, 同書 律歷志의 안사고 주에서는 덕이 있지만 은둔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였다.[93] 弭는 활의 끝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조는 獸肉, 피혁과 같은 수렵 생산물을 가리킨다.[94] 수말은 손끝이라는 말로, 수말조는 絹, 布와 같은 수공업 생산물을 가리킨다.[95] 국토의 최초의 지배자라는 뜻이다. ‘하츠쿠니 시라스 스메라미코토’로 불렸던 천황은 진무와 스진이 있다. 그런데 진무는 御肇治天下天皇으로 표기된 반면, 스진은 御肇國天皇으로 표기되었다. 진무가 천하를 다스리는 천황이라는 율령제 시대의 천황관에 의해 윤색된 것인 반면에 스진의 御肇國天皇은 초대 천황다운 칭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야마토 정권의 초대 대왕은 스진으로 추측된다.[96] 토요키노 미코토가 아즈마국을 직접 다스린 이야기는 보이지 않지만, 『일본서기』 게이코 55년 2월조와 56년 8월조에서 그의 손자 彦狹島王家와 그 아들 御諸別王이 동국을 경영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97] 上野(현 군마현)를 본거로 하는 호족이다.[98] 下毛野(현재의 도치기현)를 본거로 하는 호족이다.[99] 『고사기』에서도 豐木入日子命이 上毛野, 下毛野君 등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100] 이즈모노 오미(出雲臣)의 조신(祖神)이다. 『고사기』 신대기에 天菩比命의 아들 建比良鳥命이 出雲國造들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出雲國造 神賀詞에 이즈모 신의 먼 조상 天穗比命의 아들 天夷鳥命이라고 하였다.[101] 大己貴神을 모시는 이즈모(出雲)의 杵築宮(出雲大社)이다. 出雲臣이 있었던 意宇郡의 熊野大社설이 있다.[102] 모노노베씨와 동족으로 덴무 12년 9월에 무라지(連) 카바네(姓)를 사성 받았다. 矢田部는 닌토쿠 황후 야타 황녀(八田皇女)의 어명대부(御名代部)이다. 『선대구사본기』 천손본기에 武諸隅公의 손자 大別連公이 닌토쿠 조에 矢田部連公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103] 『선대구사본기』 천손본기에서 武諸隅連公의 동생 物部大母隅連公이 矢集連等의 조상이라고 하였다.[104]오사카부 미나미카와치군(南河內郡) 狹山町 부근이다.[105] 점토질 흙밭[106] 『고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요사미노 이케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으며, 『고사기』 스이코 15년 시세조에서도 요사미노 이케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요사미노 이케는 사야마노 이케(狹山池)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西除川 서쪽의 물을 가두어 놓기 위해 만든 저수지다.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庭井町에 依網池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107] 『고사기전(古事記傳)』에서는 이를 카루사카(輕坂)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108] 『고사기』에서는 輕之酒折池라고 적고 있다. 輕은 나라현 카시하라시 大輕町 부근이므로 이 지역의 저수지이다.[109] 『일본서기』에 처음 ‘임나任那’가 보이는 곳이다. 『일본서기』에는 임나라는 국명이 스진 65년(기원전 33년) 7월에서 646년 9월까지 230회 보이고 있는데, 그 가운데 134회가 조메이 대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任那는 첫째, 가야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지리적 명칭, 둘째, 협의의 일국(一國), 셋째, 멸망 시의 백제왕의 통치 지역 등을 가리킨다. 크게 반파국, 금관국이라고 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110] 소나갈질지에 대해 『일본서기』 스이닌 2년 시세조의 분주에서는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라고 적고 있다. 즉 대가라국(大加羅國)의 왕자로 보고 있는데, 이는 임나국(任那國)을 대가라국으로 보는 『일본서기』 편찬자의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소나를 금관, 갈질지는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소나갈질지를 금관국왕이라고 보는 설과 소는 金이며, 那는 國으로 소나는 金國이라는 뜻이고, 갈은 郡, 邑의 古訓인 골이며, 질지는 臣智, 斯等과 같이 대읍장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소나갈질지를 금국의 읍장으로 보는 설이 있다. 또한 3세기 초에 금관국이 갑자기 약해졌는데, 그 이유를 김해 가야의 지배집단이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으로 보는 설이 있다.[111] 『고사기』에는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를 진구 황후의 외정 이야기에 추가하여 조작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112]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는 狗邪韓國에서 對馬, 壹岐, 북구주 末廬國까지 3천여 리라고 하였으므로, 이곳의 임나국을 대마로 보는 견해도 있다.[113] 신라를 가리키는 말로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탈해왕 이사금 9년에 숲에 닭이 나타나서 계림(鷄林)이라고 국명을 칭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114] 《고사기》에 따르면 168세, 《일본서기》에 따르면 120세에 붕어했다.[115] 『일본서기』 진무 원년(기원전 660년)부터 계산하면 기원전 30년이 된다. 한편 『고사기』 스진 단의 分註에는 무인년 12월에 죽었다고 하였다. 『고사기』에서 崩年을 표기한 천황은 스진, 세이무, 주아이, 오진, 닌토쿠, 리추, 한제이, 인교, 유랴쿠, 게이타이, 안칸, 비다쓰, 요메이, 스슌, 스이코 등 모두 15명이다. 세이무 을묘년, 주아이 임술년, 오진 갑오년, 닌토쿠 정묘년, 리추 임신년, 한제이 갑오년, 유랴쿠 기사년, 게이타이 정미년, 안칸 을묘년, 비다쓰 갑진년, 요메이 정미년, 스슌 임자년이다. 이들 사망년을 『일본서기』와 비교하면 스이코, 스슌, 요메이는 연월까지 일치하고, 안칸은 연대가 일치한다. 비다쓰는 1년 차이가 나고 유랴쿠는 10년 차, 인교는 1년 차이가 난다. 인교 덴노 이후 일치하는 경향이 보이는데, 이는 원가력에 의해 역대 천황이 사망한 연월을 간단하게 기록한 왕력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고사기』에서는 그것을 분주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세이무나 주아이와 같이 실제성이 의문시되는 천황의 사망년 간지가 기록된 점에서 원가력을 이용한 왕력에 계보상 만들어낸 천황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116] 『고사기』에서는 山邊道勾之岡上에 있다고 적고 있다. 『陵墓要覽』에서는 山邊道勾岡上陵을 나라현 텐리시 柳本町으로 정하였다.[117] 『일본서기』 스진 65년 12월 5일조에 보이고, ‘가을 8월 갑진삭 갑인’이라 한다.[118] 중국식 시호가 아닌 일본 전통 방식 시호[119] 충복 친목지국 마한 소국들은 진한의 도움을 받아 수십 년간 버틴 걸로 추정되는데(3세기 진한과의 밀접한 교류가 확인된다) 이중 충주시 금릉동 일대의 마한 소국은 멸망 이후 사로국으로 도망쳐 신라 김씨 족단을 이룬 걸로 추정된다.[120] 현대 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진구 황후의 남방 정복의 정체는 근초고왕의 마한과 가야 정복일 가능성이 높다.[121] 다만 당시 마한은 예맥-삼한 문화만 있던 건 아니고 중국 중부, 북부, 일본과 연관이 깊은 다른 문화권을 향유하던 여러 집단들과 병존했다. 하지만 당시 마한 문화권은 대체로 예맥-한(韓) 문화권이 주류였고, 일본 열도로 이주한 마한인, 가야(변한)인들도 자연히 예맥-한 문화권이 주류였다.[122] 더 이전 시대의 야요이인도 한반도 이주민들이지만 이들은 고분 시대 이전에 이주한 이들이라 예맥-삼한인들뿐만 아니라 한반도 중남부 선주민들과 한반도 조몬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123] 기원전 2세기 고조선 준왕전라북도 익산시 일대로 남하해 세운 마한 최초의 맹주국이다. 기원후 1~2세기는 유물의 부족으로 자세한 과정은 알 수 없으나 3세기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준왕의 직계는 단절되었고 목지국에게 맹주 자리가 넘어갔다고 하며 고고학적으로도 준왕 세력이 건마국의 주도권을 주구묘제 및 토돈분구묘제 집단에게 빼앗긴 것이 확인된다.[124] 사족으로 527~528년 당시 이와이의 난을 비롯한 여러 정황을 보면 신라는 6세기 초까지 야마토 왕권과 별개로 존재하던 북규슈 토착 세력과 더 친했던 걸로 보인다.[125] 다만 조몬인들도 그리 순순히 야마토 왕권에 복속된 건 아니라 DNA 비율이 10%까지 내려간 현대에도 간토~도호쿠인들의 조몬인 하플로그룹 부계 DNA는 50%까지 나타난다. 야마토 왕권이 헤이안 시대 에미시로 불리던 간토~도호쿠 조몬인들을 쉽게 정복하지 못해 사무라이로 많이 받아들인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126] 아메노히보코는 왜로 이주한 신라 왕자로 전해지며 진구 황후의 조상이라는 신화가 있다. 일성 이사금과의 연관성이 지적된다.[127] 금관국 건국 신화에 나오는 허황옥은 금관국 DNA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도인이 아니라 조몬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다만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살아온 조몬인인지, 원삼국시대 초기에 바다를 건너온 조몬인인지는 불명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현대 한반도 남부에서 조몬인 유전자가 10%도 안 되는 반면 금관국 유골에서는 조몬인 유전자가 30% 정도 나타난다.[128] 다만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한 비율이 워낙 압도적이기도 하고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사람들은 숫자가 당시 인구 비율에서 유의미하게 많지는 않아 주류 세력이 되지 못하고 늦게 잡아도 남북국시대 때 완전히 현지에 동화되어 사라진다. 왜계 백제인 가문들이 남북국시대 때 변성했다 전부 실전(失傳)된 것이 대표적이다.[129] 신라 왕조의 박-석-김 왕조 일계와 비슷하다.[130] 그래도 오우미도 엄연히 간사이에 속하는 지역이고 3왕조가 2왕조의 친백제 기조를 이어나간 것과 5세기 간사이 전역에서 백제, 신라, 가야 도래인들이 엄청나게 숫자를 불리며 농지 개척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6세기 초반 재위한 게이타이 덴노 또한 도래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이타이 덴노의 생년은 다소 논란이 있으나 즉위기간(507~531)은 대체로 사실로 보기 때문이다.[131] 한반도에서 넘어간 조몬인들은 한반도 시절 예맥인, 야요이인들을 포함한 한반도인들과 혼혈한 채 넘어간 경우가 많아 더 복잡하다.[132] 신화에 나오는 진무 덴노의 휘는 히코호호데미(彦火火出見), 사누(狭野)로 둘이며 스진 덴노의 휘 미마키(美萬貴, 御眞木)와 다르다. 진무 덴노의 관저라는 우네비와 카시하라는 모두 현 나라현 가시하라시 일대에 속해 있지만, 진무 덴노의 동정 신화를 고려하면 현 미야자키현 일대에서 기나이 일대로 이주한 일족의 왕까지 섞인 모양이다.[133] 결사팔대를 포함한 제1왕조기에 마키무쿠에 도읍했다 기록된 왕은 스이닌과 가공인물설이 강하게 제기되는 게이코 덴노뿐이다. 마키무쿠는 나라현 사쿠라이시에 소재하며 스진의 본거지인 시키군 일대의 동쪽에 위치한다.[134] 7~8세기 대왕-천황들의 시호에 사용하던 명칭으로, 제1왕조-제2왕조에서 '타라시'나 '야마토네코'가 나타나는 인물들은 실존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지적된다.[135] 3~4세기 야마토 정권은 외국 사서에서나 다 같은 왜로 묶여서 기록될 뿐, 실제로는 당대 마한, 진한, 가야 제국(諸國) 비슷한 상태였으며 마한과 가야가 그 안에서도 여러 연합 세력으로 나뉘듯이 왜도 마찬가지였다.[136]고사기》에는 이카히메노 미코토(伊賀比賣命)라는 이름의 4녀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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