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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6-15 16:12:02

송해/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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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데뷔 이전
2.1. 6.25 전쟁과 월남
3. 데뷔 이후
3.1. 코미디언으로서의 활동3.2. 정극 배우 활동3.3. 가수 활동3.4. MC 활동
3.4.1. 송해, 그리고 전국노래자랑
4. 사망

1. 개요

대한민국의 방송인 송해의 생애에 대해 정리한 문서.

송해는 생전에 방송사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한 덕분에, 그의 생애에 대해 본인이 직접 출연해 이야기한 방송 자료, 인터뷰 자료가 꽤 많이 누적되어 있는 편이다. 예능 포맷의 프로그램 중에서 직접 그가 출연하여 그의 인생을 돌아본 작품으로는 힐링캠프(2014, SBS), 나를 돌아봐(2015, KBS), 대화의 희열(2018, KBS), 라디오스타(2021, MBC) 등이 있고, 다큐멘터리로는 실향민으로서의 아픔을 언급한 송해야 고향가자(2019, MBN)가 있으며,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송해 1927(2021)이 있고, 그의 일생을 전기 형태로 극화한 예로는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2022, KBS)가 있다. 그 외에도 아침마당 출연을 자주 한 편으로, 패널로 출연해서 진솔하게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기사 자료로 전해지는 예가 많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기억력의 한계와 당시 저장매체 등의 부족 등의 이유로 고령자의 기억은 명확하지 않거나 검증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생전 기록을 정리할 때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고, 연예인의 인터뷰 자료는 엄밀한 진실을 요구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추켜세우기 위해, 혹은 예능적 재미를 위해 과장된 진술이 섞여들어가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김두한, 전인권, 김태원 등의 회고기록 중 일부에 신빙성 문제가 제기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때문에 오히려 불분명한 기록과 모순되고 모호한 기록들 때문에 인물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경우가 많은데, 송해의 인생에 대한 회고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히 일관되고 또렷하게 정리한 편이어서 그와 같은 문제가 적은 편이다. 물론, 출생연도에 대한 부분이나 몇몇 에피소드는 그도 기억의 한계가 있거나 인터뷰 당시 잠깐 깜빡해서, 기자 등 인터뷰어가 잘못 받아적어서 시점이 잘못 전달된 사례가 몇몇 차례 있기는 했으나, 검증 가능한 인터뷰 등 기사가 워낙 많아서, 쉽게 오류를 잡아낼 수 있는 편이다.

이하 서술 내용은 위에서 언급한 자료들과 그 외 뉴스 인터뷰 등으로 정리된 일대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2. 데뷔 이전

본인이 직접 언급하던 바에 따르면 송해는 1927년 4월 27일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재령평야를 '나무리벌'이라는[1] 좋은 쌀이 나는 옥토로 기억하였다. 실제로 '나무리'가 '먹고 입고 쓰고도 남는다.'는 뜻이라 할 만큼 송해의 어린 시절에는 김소월이 '나무리벌 노래'라는 시에서 언급할 정도로 한반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다. 어릴 적부터 끼 많은 개구쟁이로 동네에서 꽤 유명했다고 전해지며,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 형, 여동생이 있었다고 한다. 형은 자신이 해주음악전문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갈 길을 가겠다며 집을 나갔다고 한다.

1949년 황해도 해주음악전문학교[2]에 만 22세 나이로 그의 끼를 눈여겨 본 부모님의 영향 하에 입학해서 성악과에 들어가 성악을 공부하였다. 이는 그가 월남 후 남한에서 전공을 살려 방송인의 삶을 산 계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경연대회를 했는데, 그때마다 합창단원으로 평양모란봉극장 무대에 섰다고 한다. 스스로 이념이나 분단 등을 잘 몰랐던 때로 언급하며, 예술이 좋았고, 평생 그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2.1. 6.25 전쟁과 월남

하지만 학업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자 초기에는 고향에 머물렀는데, 당시 구월산 일대에 활동하던 공산당 유격대의 모병을 피하려고 인근 마을에 숨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1.4 후퇴가 벌어지던 때에 다시 나가려는데, 당시 어머니가 "얘야, 이번엔 조심해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걱정 마세요."라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나왔는데,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조선일보의 6.25 관련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저 대화를 하고 어머니께서 주신 가래떡이 마지막으로 집에서 먹은 밥이었다고 한다. 또한 인민군과 중공군의 진주와 포격을 피해 재령에서 남쪽 항구인 해주항으로 피난을 갔다가 보름 정도 걸린 이 길에서 인민군의 포격을 맞고 다리에서 떨어져 숨질 뻔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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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4세 시절의 송해
해주에서 건너편의 섬인 연평도로 피란을 떠나 연평도에서 미 군함에 타면서 부산까지 내려왔다. 이때 실향민으로 바닷길을 건너오면서부터 지금의 이름, 즉, 바다 해(海) 자를 예명이자 아호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3] 그리고 이는 훗날 주민등록 체계가 확립되고 나서 그의 본명이 된다.

피난선이 도착한 부산항에서 그는 앞 사람만 따라다니다가 군에 입대해서 통신병으로 복무하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 메시지를 직접 타전하기도 하였다.[4] 그때 당시 쓰던 모스 부호를 말년에도 기억해내었다.[5] 그리고 당시 군대 선임이 혼자였던 그에게 여동생을 소개해줬는데, 그녀가 바로 그의 부인인 석옥이였다.[6] 데뷔 이전의 내용이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송해 역시 6.25 전쟁 참전용사였으므로 국가유공자이며, 그의 사후 장례식장에 국가유공자증이 영정과 함께 진열되면서 대중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3. 데뷔 이후

3.1. 코미디언으로서의 활동

군 제대 이후 1955년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서 연예 활동을 시작했으며, 일인다역을 해야 하는 악극단의 특성상 가수 활동 외에 연기도 하고 무대 MC도 보며 활약했다. 라디오 전성시대이던 1960년대엔 선배 코미디언 박시명과 콤비를 이뤄 동아방송 '스무고개' 등에서 청취자들의 웃음을 책임졌다. TV 방송이 시작한 후에는 여러 방송사를 넘나들면서[7] 조연급 코미디언으로 대활약하였다. 선배 코미디언 박시명이나 후배인 여성 코미디언 이순주와 콤비로 코미디를 했고, 콤비를 하지 않을 때엔 똑똑한 고학력자를 풍자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다. 포지션은 만자이 용어로 츳코미다. 배삼룡, 구봉서와 같이 출연한 '그 시절 그 쑈'의 영상, 해당 영상은 2002년에 연기하였다. 여러 방송사들 중에서 특히, KBS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듯하다. 다만,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MC로서의 활동에 집중하여[8] 코미디언으로서의 활약은 뜸해지게 된다. 이후 가끔씩 연기하던 코미디 콩트마저도 콤비를 이루었던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박시명, 이순주 등이 모두 활동을 중단하거나 고인이 됨에 따라 자연히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가 코미디계에서 왕성히 현역으로 활동한 기간은 짧게 잡아도 20~30년은 되었고 전국노래자랑 진행이 성공적이었던 가장 큰 요인은 그의 이러한 코미디 연기 경력이 탄탄한 기반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코미디 연기 당시 가장 잘 하였던 가벼운 딴죽 걸기, 리액션을 하며 판을 깔아 주는 빌드업 역할은 그의 진행 스타일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활용되었다[9]. 그의 진행에서 나오는 익살과 해학은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3.2. 정극 배우 활동

1980년대 당시까지 그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직업은 코미디언이었으나, 그는 이미 1960년대부터 다수의 영화 및 TV 드라마에도 출연하였고, 드라마 주제곡도 부르는 등 (당시 가창 앨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멀티 엔터테이너의 원형(原型)이라 할 수 있었다. 오랜 연예활동에 비해 정극연기 경력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나 1980년대까지 약 1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어느 정도 중견 연기자 수준의 필모그래피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1990년대 이후로는 전국노래자랑이 소재로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에 특별출연한 예가 몇 차례 있는데 이를 모두 더하면 20여 편 정도의 정극연기를 하였다.

3.3. 가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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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3세 시절의 송해
전국노래자랑 MC로서의 명성이 워낙 높아서 다소 조명이 잘 되지 않기는 했으나, 송해의 가수로서의 활동도 대중문화, 특히 중장년층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공로로 고평가를 받는다. 송해는 가요무대에 자주 출연하여 과거 악극단 시절의 창법과 발성을 고스란히 보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나이가 들며 활동이 미약해진 다른 동료 가수들과는 달리 말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함으로써 그 자체로 인간문화재에 준하는 수준의 과거 문화 전승자 역할을 하였다. 또한 80세를 훌쩍 넘기고도 단독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는가 하면, 2018년 <딴따라>라는 제목의 정규앨범을 발표하는 등 나이를 잊은 활약을 하였다. 그가 취입한 앨범은 '홍도야 우지마라'와 같은 과거 전통 히트송들을 커버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후에는 본인의 오리지널 곡도 다수 발표하게 되었는데 <나팔꽃인생>, <유랑청춘>, <내 인생 딩동댕>, <내 고향 갈 때까지> 등의 대표곡을 남겼다. 2022년 사망 직전까지도 무대에서 아무런 흐트러짐 없이 여러 곡의 노래를 부르고 무대에도 직접 오르는 등 왕성하게 활약했다.

3.4. MC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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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개국특집쇼 'KBS 새가족'의 진행을 맡은 송해[10]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연예계에서 큰 유명세를 얻고 전연령층을 아우르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게 된 시점은 본격적으로 방송 MC로 활동범위를 넓힌 이후였다.

능수능란한 화술과 진행능력, 그리고 정확한 발음을 가진 그는 1975년 동양방송이 매일 아침 AM 라디오 채널을 통해 방송하던 생활정보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11]의 진행을 맡으면서 운전자들 사이에서 '송 기사'라는 애칭을 받기도 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이때 운전자들이 교통 통신원을 조직하여 그 제보를 활용한 시스템은 현재도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교통방송에서 쓰이고 있다. '가로수를 누비며'는 매주 일요일 라디오 공개홀에서 공개방송을 열기도 했는데 전국노래자랑과 같이 노래경연을 했었고 훗날 전국노래자랑 진행의 밑거름이 되었다. 다만, 1986년 아들의 오토바이 교통사고 이후 그 충격으로 한동안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면서 3년 후 1989년에 14년[12]동안 맡아온 진행자 자리에서 완전히 내려오게 된다.[13] 그리고 이후 그는 그의 인생을 대표하는 전국노래자랑으로 한국 방송사에 남을 전설적 활약을 하게 된다.

3.4.1. 송해, 그리고 전국노래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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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 진행 초창기 시절이던 1988년의 송해[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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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8세 시절의 송해[15]
아들을 먼저 보낸 충격을 잊기 위해서 참여한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1988년 5월 8일부터 2022년 6월 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16] MC로 활약[17]전국노래자랑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역대 한국 현역 방송인 역사상 가장 장수한 최연장자[18] 기록이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또한 전국노래자랑을 34년 동안 진행하여 국내 단일 TV 프로그램 최장수 진행자를 기록했다. 1994년 5월에 잠시 하차했다가 같은 해 10월 16일에 복귀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전국노래자랑 진행 기간을 이 복귀 시점부터 계산하더라도 이미 30년을 훌쩍 넘겼으므로 국내 단일 TV 프로그램 '연속 진행' 최장수 기록까지 보유하고 있다.[19]

앞 문단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송해는 아들을 일찍 잃은 슬픔에 방송을 쉬고 있었지만, 당시 전국노래자랑의 PD였던 안인기[20]는 송해의 진행 능력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직접 그를 찾아가 "송 선생님, 이렇게 쉬고 계실 때가 아니올시다. 우리 바람이나 쐬러 다닙시다."라고 하며 그의 방송 복귀를 설득했다고 한다. 송해가 진행을 맡기 전 MC는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최선규[21]로, 최 아나운서는 당시 전문 MC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돌발 상황이 잦은 현장 녹화에서 매끄러운 리액션이 부족했고,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지도 못해서 출연자들이 가창하는 곡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던 탓에 적절한 멘트를 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송해 1927 내 인터뷰 중 발췌). 안인기 PD의 설득 끝에 송해는 전국 노래자랑을 통해 방송에 복귀하였고, 가수 출신으로 다져진 가창력으로 때때로 분위기를 띄워주고, 서민적이고 푸근한 이미지와 재치 있는 멘트로 방송의 재미를 살렸으며, 오랜 진행 경력에서 오는 매끄러운 진행능력은 방송의 컨셉과 완전하게 맞아들어갔다. 이를 바탕으로 그의 진행은 오래지 않아 전국민을 매료시켰다. 그 때부터 시작된 전국노래자랑과 그의 30년이 넘는 동행은 한국 방송사의 전설로 남게 되었고, 첫 방송 때 이미 환갑을 넘겼던 송해는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기점으로 비로소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말 그대로 전국 노래자랑이다 보니 괴짜 참가자들도 한두 번씩 출연하기 마련인데, 가장 유명한 사례로 2010년에 온 몸에 벌들을 붙이고 나온 양봉업자[22]가 있었다.[23][24] 이때 송해가 보여준 대처 능력은 관록의 극치임과 동시에 대인배 인증이라고 할 수 있다. 저 방송 직후에 KBS 시청자 게시판은 송해를 찬양하는 글과 저런 사람을 왜 내보냈냐는 글이 반반이었다.

특히 어르신들에게 인기가 높으며, 80살이 돼도 90살이 돼도 여전히 "송해 오빠"[25]로 불리는 자타가 인정하는 "일요일의 남자"이면서, 이 외에 앨범도 내고 개인 콘서트를 연 적도 있을 만큼 노래 실력도 수준급이다. 전국 노래자랑에서 초대 가수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 를 열창하는 송해

이러한 꾸준함은 송해에 대한 후대의 평가도 높였다. 원래 송해는 비슷한 연배의 구봉서, 배삼룡, 서영춘, 곽규석 등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년배 다른 스타들이 하나둘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은퇴하는 동안 그는 전국노래자랑에서 사람들과 직접 살을 맞대며 90세를 넘기면서까지 활약했었고 별다른 잡음도 없이 생활한 덕에 이제는 어엿한 1인자로서 사람들에게 기억되게 되었다.

KBS 대화의 희열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마다 밝히기를, 생애 마지막 전국노래자랑을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이나 학업을 했던 해주시에서 하고 싶다고 하였으며, 이젠 고인이 되었을 자신의 어머니를 초상화로 만나기도 하였다. MBN에서 방영된 특집 프로그램인 '송해야 고향가자'에서,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 쪽으로 가기 위해 남북체육교류협회의 남북 응원단으로 합류하면 북한으로 갈 수 있다고 했지만, 방송 당시(2019년) 또 다시 남북관계가 틀어지면서 남북체육교류협회 경기도 9월 말로 연기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창궐로 방북이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다.

2010년대 이후부터 그의 건강과 관련되어 보도가 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른바 이순재와 함께 실검에 이름만 떠도 전국민 가슴이 철렁 하는 방송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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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3세 시절의 송해
2012년 9월 22일 전국노래자랑 녹화 촬영 때 돌연 불참을 하였다. 이유는 바로 피로 누적. 그것도 녹화 때 리허설을 하다가 피로 누적과 통증 호소 등으로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80대의 최고령인 점 때문에 와병설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다행히 건강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85세라는 고령의 나이 때문에 건강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주목받을 일. 해당 녹화 진행은 전국노래자랑의 단골 심사위원인 작곡가 이호섭이 하였다. 그리고 추석 특집 외국인 노래자랑에도 불참하여 허참이 진행하였다. 2012년 11월 18일에도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고, 이호섭이 녹화를 진행하였으나, 다음 주 진행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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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호 맥심 표지[26]
2018년 1월 20일에 아내를 지병으로 떠나보냈다. 부부가 같이 입원했는데, 아내가 먼저 가 버린 것이다.[27] 발인식에서 "붙잡으면 무슨 소용 있나. 조금 먼저 갈 따름이야. 열심히 애들 보살필 테니까 마음 놓고"라며 비통한 심경을 전했고, 이에 네티즌들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2019년 12월 31일 다시 입원했는데, 처음에는 폐렴으로 알려졌지만, 이후 감기몸살로 보도되었다. 연합뉴스 이 때문에 전국노래자랑 측은 2020년 1월 12일 설 특집 녹화는 다른 MC가 대신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 이를 두고 네티즌들은 올해 전국노래자랑의 32년을 맞는 송해의 빠른 쾌차를 바라는 댓글을 올리고 있다. 이후 무사히 회복하여 퇴원했다고 한다. 다만, 전국노래자랑 지역 녹화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아직도 시작하지 못한 상태로, 2020년 3월 1일~2020년 6월 28일까지는 스페셜 방송 다시보기 형식으로 대체되었으며, 2020년 7월 5일부터 다시 하고 있는 녹화는 지방 촬영 대신 스튜디오에서 연령별 노래자랑과 특별판으로 대체 중이다.[28]

2021년 9월 13일, 유튜브 근황올림픽에 출연해 근황을 알렸다. 7kg 야윈 모습으로 등장하여 영화 송해 1927을 홍보하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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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4세 시절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송해
2022년 1월 31일에는 KBS 2TV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인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가 방영되었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2월 1일에 평소 송해가 본인 다음으로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맡으면 좋겠다고 밝히던 허참간암으로 7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22년에는 백신을 3차까지 접종했으나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 이에 많은 네티즌이 걱정하는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 걱정이 무색하다는 듯 4월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전국노래자랑을 녹화하며 MC 활동을 재개한다는 소식이 떴다. 송해, ‘전국노래자랑’ MC 복귀 “9일 녹화 참여”

2022년 5월 14일 오후에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했다.

2022년 5월 15일 방영된 전국 노래자랑(충남 당진시 스페셜로 스튜디오 녹화로 대체)에서 다음과 같은 클로징 멘트를 하였고, 이것이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전국노래자랑에서 한 클로징 멘트가 되었다.
요즘 철도 좋고, 여러분들 뭐 오랫동안 시달리고, 답답했습니다. 사실 이 화창한 계절이 돌아왔으니까, 여러분들 활짝 열린 세상 나오셔서 금수강산의 맛을 실컷 보시기 바랍니다. 아, 시간이 다 되었죠? 네, 자 저희들은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한 박자 쉬고)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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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해의 마지막 전국 노래자랑 출연[D]
이날 보조 MC로 같이 스튜디오 녹화에 참여하였고 클로징 멘트도 함께 한 임수민은 송해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인 6월 8일 KBS 뉴스 패널로 참석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날 녹화일에 송해가 부쩍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고 멘트 반응도 조금씩 늦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금방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2022년 5월 17일 이데일리 보도에 따르면 송해 스스로 “더 이상 ‘전국노래자랑’ 진행을 맡는 게 어렵지 않겠느냐”라는 뜻을 프로그램 제작진에 밝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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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 인증서 전달식에 참석한 송해[D][31]
2022년 5월 23일 기네스북의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 등재를 기념하는 인증서 전달식에 참석하여 직접 소감을 밝혔고, 이 날까지도 투병 전에 비해서는 부쩍 수척해졌지만 또렷한 발성으로 소감을 밝히는 등 건강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전국노래자랑 제작진 또한 송해의 건강 상태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지방 현장녹화는 어렵더라도 스튜디오 녹화라도 진행하는 식으로 송해의 방송 복귀를 고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2022년 6월, 그가 모델로 출연한 야놀자 앱의 광고가 송출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그가 광고 촬영을 하기에는 건강상 여의치 않아서, 방송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AI 합성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주변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종로구에 그의 이름을 따 조성된 '송해길'을 거닐고 식사를 하였으며[32], 그 곳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도 정상 출근하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대중들은 그가 머지 않아 방송에 복귀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4. 사망

파일:송해 영정 고화질.jpg
공식 영정[33]
하지만 2022년 6월 8일 오전, 자택에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향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침식사를 하러 올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자, 인근에 사는 딸이 자택으로 찾아갔으며, 이후 자택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송해를 발견해 119에 신고하였다. # 소방당국은 오전 8시 19분쯤 유족의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나, 송해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고 한다. # 병원에서의 공식적인 사망 판정은 오전 8시 45분에 내려졌고 약 1시간 뒤인 오전 9시 39분부터 사망 소식을 여러 언론들에서 기사화하기 시작했으며, 뉴스에서도 일제히 속보로 보도하였다. #1 #2 #3

이미 지난 5월에 건강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마지막 공식 석상이 된 5월 23일 기네스 세계 기록 등재 당시 인터뷰에서 이미 많이 수척해진 상태였다. 사망 4일 전인 6월 4일 전국노래자랑이 2년 만에 야외 녹화가 재개됐는데, 장거리 이동[34] 등의 이유로 불참했을 정도로 이미 건강이 매우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5월 입원 당시에는 건강에 큰 이상이 없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국민들이 걱정할 것을 우려해 간암을 앓았던 허참처럼 건강 이상을 숨겼을 가능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며, 장례 형식은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장으로 3일간 치렀다.[35] 장례위원장은 코미디언협회장 엄영수가 맡았으며, 코미디언 석현, 김학래, 이용식, 최양락, 유재석, 강호동, 이수근, 김구라, 김성규, 고명환, 정삼식[36]이 장례위원을 맡았다. 이외에도 조세호, 유동근, 이순재, 이미자, 임성훈, 김흥국, 전현무, 김숙, 양상국 등 많은 연예인들이 조문했으며, 대통령 윤석열, 가수 나훈아, KBS 예능센터장 조현아 등의 인물들이 조화를 보냈다.

한편 KBS 측에서는 송해가 건강을 회복하는 대로 전국노래자랑 녹화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본인이 의사를 밝힌다면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하여서 이에 대한 검토와 계획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끝내 고인이 됨에 따라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37] 그리고 6월 8일 긴급 편성으로 생로병사의 비밀더 라이브 방송은 결방하고 22시에 추모 특집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를 편성하기로 하였다. 또한 9일 19시 40분에는 한국인의 밥상을 결방하고 국민 MC 송해 추모 다큐 '내 인생 딩동댕'을 편성했다.[38][39] 12일에 방송될 전국노래자랑도 추모 특집 생방송으로 편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 또한 MBN에서도 22시 30분부터 송해야 고향 가자를, TV CHOSUN에서는 22시에 추모 특선 영화로 송해 1927을 편성해 방영하였고, 12일 방송도 예정대로 이호섭과 임수민의 진행과 신재동을 위시한 악단의 연주로 생방송으로 진행했고, 패널로는 현숙, 엄영수, 설운도, 배일호, 박서진이 나왔으며, 방송 말미에는 장윤정도 나왔다.

iHQ는 6월 12일 은밀한 뉴스룸 송해 특집편인 30회를 재방송했다.

오랜 세월 동안 송해는 국민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 왔고, 또 고령 방송 진행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그의 사망 소식에 많은 동료 연예인들도 네티즌들도 하나같이 큰 충격이라는 반응과 함께 그를 추모했다. 정치권에서도 그의 죽음에 여야를 불문하고 애도를 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후 깊은 애도를 표하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박보균을 통해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

생전에 "죽을 때까지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비록 정규 회차는 아니지만 그가 녹화에 참여한 마지막 방송이 2022년 5월 15일 방송분이며, 그의 사망일과 방송일이 불과 24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2020년대 초반의 국내외 상황과 그의 건강 상태를 고려했을 때, 송해는 정말로 그가 한 말을 지킨 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인의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에서 전국노래자랑을 하고 싶다는 소원은 생전 끝내 이루지 못했다.

다큐멘터리 내 인생 딩동댕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작고 한주 전, 평소 자주 찾던 양복점에 새로이 양복 제작을 의뢰했다고 한다. 양복은 작고 바로 전날에 완성되었는데, 양복점 사장은 “내일이면 선생님 입혀드려야지"라고 생각했지만 다음날 부고 소식이 떴다. 송해는 그 양복을 입고 시청자들 앞에서 정식으로 프로그램 하차를 알리는 감사 인사를 하고자 생각했었다고 한다. #



장례식의 사회자는 김학래가 맡았으며, "전국!"이라는 송해의 오프닝 멘트가 나오자 조문객들이 단체로 "노래자랑!"을 외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발인 후 운구 행렬은[40] 고인의 사무실이 있던 종로구 낙원동 상록회와 송해길을 거쳐 KBS 본관에서 노제를 치렀다. 전국노래자랑 악단이 느린 버전으로 편곡한 전국노래자랑 오프닝 음악과 올드 랭 사인[41]을 조곡으로 연주하며 엄수되었다. 송해 본인의 곡 '나팔꽃 인생'도 연주되었다.

시신은 김천화장장에서 화장되고, 생전에 "석 여사(아내)의 묘지 곁에 영면하겠다는[42] 송해의 뜻을 따라 아내의 고향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송해공원에 안장되었다.

송해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대한민국 1세대 코미디언[43]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악극단과 극장의 전성기를 거쳐 안방극장을 울고 웃게 만들었던 이들은 대한민국 연예계의 역사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1] 2015년 그가 발표한 노래 〈유랑청춘〉에서 등장하는 지명으로, 황해도의 다른 유명한 '연백평야'와 헷갈린 인터뷰도 있지만 그곳은 인천 교동도 건너편의 재령에서 남동쪽으로 60~70 km 떨어진 곳이다.[2] 1946년에 설립된 3년제 학교로 북한 최초의 음악전문학교로 성악과, 기악과, 작곡과 등의 전공자가 1948년까지 백여 명에 이르는 규모였다. 정율성이 설립자였고, 김순남이 교수로 재직하였다. 1952년에 국립음악학원과 통합한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으로 흡수되었다.[3] 공교롭게도 고향인 황도(黃道)에도 주(州)에도 이 '바다 해'가 들어간다. 연예인들의 예명도 넓은 의미에서 호의 일종에 해당한다.[4] [황규인의 잡학사전] 6.25 전쟁 휴전 소식 처음 알린 건 '송해' 송해 본인의 생전 언급으로는 고향에 돌아갈 길을 끊는 메세지를 그가 직접 타전했다고 한다.[5] 송해가 말년에 예능에 출연했을 때가 기아 K5의 초창기 광고가 나오던 대였는데, 당시 광고에 삽입된 "돈 쓰돈 쓰쓰쓰쓰쓰" 시그널을 그대로 K 5 라고 복호해 주는 장면도 나왔었다. 다만 송해가 휴전소식을 "처음 알렸다"는 물증은 없으며 송해 본인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정황을 보면 실제로 제일 처음 알렸거나, 그 일대에서 처음 알린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전투 중지 명령은 정전 협정 발효를 기해 동시다발적으로 내려졌으므로 소식을 처음 알렸다는 말 자체가 애매한 면도 있다.[6] 다만, 본인이 혈혈단신이었던 터라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지내다가 63년 만인 2015년 나를 돌아봐 출연 당시에 처음으로 결혼식을 진행했다.[7] 당시엔 정극 배우든 희극 배우든 방송국 전속으로 활동하는 것이 대세라서 이적이 쉽지 않았으나 송해는 비교적 방송사들을 많이 옮겨가며 활동한 편이었다.[8] 이미 1989년 기사를 보면 송해는 MC에 전념하고 코미디를 그만둔 지 오래됐다는 기사가 검색되기도 한다.[9] 지금의 개그맨들도 그 자체로 웃음의 핵심이 되는 역할보다는 웃음의 판을 깔아주는 역할이 MC에 더 유리하다는 평이 있다.[10] 1980년, 53세 시절.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미용 기술과 메이크업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40대 초반 수준의 외모로 꽤나 동안인 편에 속한다. 다만 반대로 젊었던 시절 사진을 보면 오히려 노안으로 보인다. 즉, 노안이었던 인물이 나이를 먹으면서 제 나이에 맞는 얼굴로 찾아간 케이스인데, 송해는 어느 순간부터 얼굴의 인상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동안이었던 것.[11] 언론통폐합 후 KBS 라디오서울로 옮겨 계속 방송되었고 1990년 라디오서울이 폐국된 뒤에는 KBS 제2라디오에서 방송되었다.[12] 17년 동안 진행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1975년부터 진행하여 14년 간 진행했다. #[13] 교통사고 이후 하차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교통사고 3년 후 1989년에 하차하였다. 전국노래자랑에 전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14] 61세 시절.[15] 대중들이 가장 잘 기억하는 송해의 활동 모습으로, 같은 연배의 연예인들이 조금씩 현역에서 물러나던 시기였지만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으로 왕성한 활동을 했었다.[16] 마지막 스튜디오 녹화 출연분은 2022년 5월 15일 스튜디오 녹화(스페셜 방송)이지만, 정식 하차가 최종 확정되기 전인 2022년 6월 8일 세상을 떠남에 따라 방송일을 기준으로 볼지 하차일을 기준으로 볼지에 따라 최종 방송일에 대한 의견은 갈린다. 특히 이후 2회분도 현장녹화 재개 전 스페셜 방송으로 과거의 송해가 출연하는 영상이 재방송되는 형태인지라 간접적으로 출연 자체는 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17] 도중에 있었던 개편으로 첫 담당일로부터 딱 6년만인 1994년 5월 8일까지 담당하고 물러났으며, 다음주인 5월 15일부터 김선동 아나운서가 후임 MC를 담당했지만, 무미건조한 진행으로 시청자들의 비난이 거셌던 데다 김선동도 곧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5개월만인 10월 16일에 송해가 다시 복귀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전국노래자랑 문서의 3번 문단 참조.[18] 만 95세, 세는 나이96세이다. 2022년 기준 전 세계 군주들 중 최고령자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보다 1살 아래다. 여기에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주 언급되듯이 체 게바라, 안네 프랑크, 마틴 루터 킹 같은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인물들보다도 출생이 빠르다.[19] 기록 달성일: 2019년 11월 3일. 종전 기록은 25년 15일간 KBS 가족오락관을 진행한 허참이다. 라디오 프로그램까지 확장할 경우, 각각 36년과 33년 간 싱글벙글쇼를 진행한 강석(코미디언)김혜영(코미디언), 그리고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30년 이상 진행하고 있는 배철수가 있다. 그러나 가족오락관 허참의 기록도 2023년 6월 초쯤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임성훈, 박소현이 경신할 가능성이 높다.[20] 안성기의 친형이다.[21] 전국노래자랑 하차 후 열전! 달리는 일요일 돌격대장을 맡았다가 1991년 개국한 SBS로 이직하여 생방송 행복찾기를 10년 넘게 진행했다.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된 현재는 개신교계 방송에서 자주 모습을 보인다.[22] 당시 55세(1955년생)의 김영호라는 남성이다. 하지만 시상 현장에서는 몸에 벌들을 다 떼고 나왔다.[23] 이로 인해 송해 또한 얼굴에 망사를 쓰고 나왔지만 벌이 마이크에 자꾸 붙는 등으로 진행에 방해가 되어 벌에 7방을 쏘였고, 송해: 아 왜 자꾸 마이크에 붙어! 바로 다음에 나온 마을 이장인 당시 68세(1942년생)의 김갑수라는 남성이 3번이나 땡을 맞는 피해를 보았고, 벌 때문에 틀렸다는 이유로 송해가 3번이나 기회를 줬다. 그리고 나서 한 말이 압권인데, 벌들을 향해 "빨리 가서 꿀 따!"라고 했다.[24] 이후 굿모닝 대한민국에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영호 씨가 자신의 바로 다음에 나온 김갑수 씨에게 자신의 농장에서 나온 벌꿀을 선물하고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친 것에 대해 사과했다고 한다.[25] 나를 돌아봐에서 조우종은 "해"이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일부 남자들도 송해형이라고 부르는데 주로 남자 어린이나 남중고생들이 그렇게 부르며 가끔 청년들도 그렇게 부른다.[26] 88세 시절. 데뷔 61년 만에 첫 패션 화보로 맥심 최고령 표지 모델로 기록되었다.[27] 위에 63년만에 결혼식을 치렀던 바로 그 석옥이이다.[28] 스페셜 방송부터 송해의 마지막 녹화까지 임수민 아나운서가 파트너로서 함께 했다. 그 와중에 다시 병원 입원도 한 적이 있어서 7월 12일 방영분은 송해 대신 작곡가 이호섭이 진행한 적도 있었다. 참고로, 이호섭은 작곡계의 내로라하는 유명인사 중 하나이며,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으로도 여러 번 나왔다. 또한 임수민과는 KBS 해피FM에서 지금은 종영된 '희망가요'라는 프로그램을 같이 한 적도 있을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이다.[D] 95세.[D] 95세.[31] 생전 공식석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32] 당시 식당 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날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먹었는데 평소 같았으면 공기밥을 다 비우던 송해가 그날은 반공기밖에 먹지 않았다고 하였다.[33] 패용한 훈장은 2001년 수여받은 화관문화훈장과 생전 두 차례 수여받은 대통령표창이다.[34] 당시 촬영 장소는 전라남도 영광군이었다.[35] 원래 5일장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유족의 뜻에 따라 3일장으로 축소되었다. 유족들은 원래 가족장을 희망했다고 하나, 합의 하에 협회장으로 치러졌다.[36] 이상 위 3명은 각각 KBS, MBC, SBS 희극인실장을 맡고 있다.[37] 워낙 고령에다가 건강도 좋지 않아 머나먼 지방 원정은 무리일 수도 있고, 대신 자택과 가까운 KBS 본관 스튜디오에서의 녹화 방송 등을 계획하였다고 한다.[38] 내레이션은 전국노래자랑 스페셜을 함께 진행한 임수민이 담당했다.[39] KBS 1TV의 19시 40분 시간대는 지역방송 시간대이지만, 월요일과 목요일은 전국 방송으로 진행되어 전국에 방송되었다.[40] 관의 운구는 유재석, 강호동, 조세호, 최양락, 임하룡, 양상국이 맡았다. 장의차쉐보레 트래버스가 이용됐다.[41] '올드 랭 사인'이란 노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우라나라에서 이별할 때 주로 불리는 석별의 정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애국가도 이 곡조를 사용했다. 실제로 송해는 일제강점기 시기인 1927년생이다. 전국노래자랑 악단이 이를 염두에 두고 조곡으로 연주했을 것이다.[42] 송해는 아내의 장례식 당시 고인이 된 아내의 무덤 옆에 따로 가묘를 한 개 더 만들었는데, 그것이 다름아닌 송해 본인의 묏자리라고 한다.[43]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서영춘, 이주일 등이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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