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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국 동맹 전쟁 | 파라과이 전쟁 스페인어: Guerra de la Triple Alianza | Guerra del Paraguay[1] 포르투갈어: Guerra da Tríplice Aliança | Guerra do Paraguai 영어: War of the Triple Alliance | Paraguayan War | |
날짜 | |
1864년 10월 12일 ~ 1870년 3월 1일 | |
장소 | |
남아메리카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일대 | |
교전국 | |
[[틀:깃발| | ]][[틀:깃발| ]][[파라과이| ]] [[틀:깃발| ]][[틀:깃발| ]][[아르헨티나| ]] |
지휘관 |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도밍고 프란시스코 산체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베르난디노 카바예로(POW)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페드로 이그나시오 메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안토니오 데라크루스 에스티가리비아(POW)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호세 에두기비스 디아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웬체슬라오 로블레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엘리사르도 아키노†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레스킨(POW)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텔모 로페스† | ]][[틀:깃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루이스 아우베스 지리마에시우바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가스통 드오를레앙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프란치스쿠 마누에우 바로수 다시우바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마누에우 마르키스 지수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마누에우 루이스 오소리우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후안 마누에우 메나 바레투†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바르톨로메 미트레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후안 안드레스 게이이오베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베난시오 플로레스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엔리케 카스트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레온 데파예하† | ]][[틀:깃발| ]][[페드루 2세(브라질)| ]]
결과 | |
브라질 제국-아르헨티나-우루과이 3국 동맹의 승리 | |
영향 | |
브라질 제국: 아파 강 이북의 영유권 분쟁 지역 획득 아르헨티나: 미시오네스 주와 필코마요 강 이남의 영유권 분쟁 지역 획득 우루과이: 삼국동맹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양국이 내정간섭 중단 파라과이: 전쟁 전 국토의 40%에 달하는 영유권 분쟁 지역 상실 및 인명피해로 인한 극심한 인구 부족 현상 초래 | |
전력 | |
[[틀:깃발| 정규군 80,000명 민병대 70,000명 군함 17척 | ]][[틀:깃발| ]][[파라과이군| ]][[틀:깃발| 정규군 198,000명 민병대 2,000명 군함 30척 [[틀:깃발| ]][[틀:깃발| ]][[아르헨티나군| ]] 정규군 30,000명 파라과이 군단 3,300명[2] 군함 7척 [[틀:깃발| ]][[틀:깃발| ]][[우루과이군| ]] 5,500명 총 238,800명 | ]][[틀:깃발| ]][[브라질군| ]]
피해규모 | |
[[틀:깃발| | ]][[틀:깃발| ]][[파라과이| ]] 군인, 민간인 총합 300,000명 이상 사망[[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아르헨티나| ]] 군인 18,000명 전사, 민간인 13,000명 사망 군인, 민간인 총합 10,000명 사망 총 140,000명 사망 | ]][[틀:깃발| ]][[브라질 제국| ]] 군인 50,000명 전사, 민간인 50,000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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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국 동맹 전쟁의 하루마다의 전황을 정리해 놓은 영상.[3] |
1864년부터 1870년까지 파라과이와 브라질 제국,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3국 동맹이 벌인 전쟁. 파라과이 전쟁(Paraguayan War)이라고도 한다. 남아메리카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이자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을 상징하는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으로 평가되는 전쟁으로 21세기에도 전쟁 당사국 네티즌들의 온갖 갈등의 향연이 끊이지 않는 전쟁이다.
2. 배경과 원인
1811년 파라과이가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 1814년 파라과이의 정권을 잡은 집정관[4]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프란시아(José Gaspar Rodríguez de Francia y Velasco)는 장기간 독재정치를 펼쳤는데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집단에 권력이 집중된 과두제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프란시아는 농지개혁을 시행하여 대지주의 재산을 몰수해 농민들에게 재분배했다. 이는 19세기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농지개혁이었으며 국내 생산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는 상품의 국제 유통을 감시하는 등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달리 엄격한 계획경제, 보호무역 정책을 수립했다.1840년 프란시아가 죽고 뒤이어 집권한 후계자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Carlos Antonio López Ynsfrán)와 그 아들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Francisco Solano López Carrillo)[5]도 그 정책을 그대로 따랐다. 20년쯤 뒤에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어서 많은 외국인 여행객들이 "파라과이는 부의 재분배 덕분에 극빈층이 없고 기근도 분쟁도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출처] 현대의 파라과이가 토지배분과 빈부격차로 골머리를 앓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며 당시 자국 기술로 증기선을 만들어 띄울 수 있었던 유일한 남미 국가이기도 했다. 영국 배를 한 척 사고 학생들을 유럽에 파견해 기술을 베껴왔다고 한다.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대통령 시절에 남미 최초로 철도까지 건설했다.
야심만만한 로페스 대통령 치하에서 국력이 상승세에 있던 파라과이는 자기네를 아니꼽게 보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그리고 막 독립했던 신생국가 우루과이 이상 주변 3국과 충돌했다. 거기에 당시 국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가진 로페스 대통령은 내륙국 파라과이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 우루과이와 브라질 쪽으로 해안선을 차지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짜고 있었다.[7] 이것이 이웃한 두 강대국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8]
파라과이와 이웃 나라들 간의 대립은 우루과이에서 결국 폭발했다. 당시 우루과이는 블랑코당(백색당)[9]과 콜로라도당(적색당) 간의 내전 상태에 있었다. 4년 간의 내전 끝에 브라질의 도움을 받은 야당인 콜로라도당이 승리하면서 집권에 성공하자,[10] 블랑코당은 파라과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도움을 요청받은 파라과이는 브라질에 우루과이 개입을 멈추고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나 브라질은 무시로 일관했다.
자신의 요청이 무시당하자 로페스 대통령은 브라질 군대를 우루과이에서 완전히 밀어내겠다며 아르헨티나 영토를 열어 달라고 요구했다.[11]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우루과이 내전에서 콜로라도당을 지원하고 있다고 의심하던 로페스는 아르헨티나에게도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이에 자연스럽게 친브라질인 콜로라도 당이 집권 중이던 우루과이에 브라질, 아르헨티나가 파라과이에 대항하는 삼국동맹을 결성하면서 삼국 동맹 전쟁이 발발했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원래 파라과이가 브라질과 사이가 안 좋음.
2.1. 영국 개입설
전쟁 원인에 대해 한국에는 전 세계 모든 나라를 자기네 경제권으로 편입시켜서 경제적으로 종속시키려는 제국주의 열강에게 문호를 닫아건 파라과이는 눈엣가시였으며 자기네 빚을 얻어쓰지 않는 괘씸한 파라과이에 열 받은 영국의 부추김을 받은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 내전에서 반파라과이파를 밀면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영국이 3국 동맹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론은 1990년대에 이미 폐기되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한창 좌파 운동의 바람이 불 때 이런 이론을 주창한 남미의 좌파 지식인들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이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 그냥 대충 심증을 가지고 한 혐성국 드립 같은 추측일 뿐이었다.당시 파라과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내륙국이었기 때문에 유럽 열강을 열받게 할 만한 영향력은 전혀 없었고 영국이 전쟁의 흑막이었다는 주장의 다른 근거, 즉 영국이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초토화된 미국 남부 대신 파라과이를 수탈해서 목화를 얻고자 했다는 것 역시 말이 안 된다. 이미 이집트를 장악하여 이집트에서 목화를 값싸게 조달하던 상황[12]에 전쟁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근거가 부실한 주장이 머나먼 한국까지 퍼지게 된 이유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영국에 누명을 뒤집어씌운 뒤 이를 교과서에까지 실어 가면서 대대적으로 밀어줬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중반 이후 주권 독립국들이 이미 들어서 있었던 중남미엔 제한적으로 개입했던 전성기 영국 제국주의와 달리 냉전 시대 미국의 라틴아메리카권 전반에 대한 간섭과 갑질은 더 심했다. 이에 따른 반동으로 라틴아메리카에는 이전에는 딱히 호응이 없었던 범히스파노주의(panhispanismo), 범라틴아메리카주의가 크게 발흥했다.
3국 동맹 전쟁 종전으로부터 한 100년 뒤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이나 파라과이나 멕시코나 니카라과나 콜롬비아나 전부 다 평등하게 그링고들[13]에게 내정간섭이나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그랑고들의 협력자들이 군사독재를 펼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다 보니 서로 유대감이 생겼고 반대로 아무리 전쟁 발발의 명분은 방어전으로 시작했다고 해도 라틴아메리카 대국 둘이서 '형제' 라틴아메리카 나라를 박살낸 이 역사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지식인들 본인들에게도 영 껄끄러운 사실이 되어 버렸다.[14] 이 영국 개입설을 가장 열심히 주장하던 사람들은 냉전 시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지식인이었는데[15] 3국 동맹 전쟁 당시의 문맥과는 동떨어진 범라틴아메리카주의적 관점에서 영국 개입설은 매우 매력적이었다.[16]
오히려 영국 개입설을 부정하는 파라과이인들은 자국의 어린이들을 학살한 아르헨티나를 포클랜드 전쟁에서 혼내준 영국을 매우 좋아한다.
3. 경과
문명6 갤러리에서 축약한 전쟁 경과 1, 23.1. 파죽지세의 파라과이
파라과이는 이 전쟁 초기에 3국 동맹군을 우주관광 보냈다. 징병제 국가였던 파라과이의 병력은 10만가량으로 추정되지만 이에 반해 3국은 기껏해야 2~3만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바로 얼마 전까지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관계라 3국 동맹군은 초기에 파라과이보다 아르헨티나-우루과이와 브라질간 갈등이 거셌다.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엄청 치고받고 사이가 나빴으며 500일 전쟁 당시 우루과이를 아르헨티나가 대놓고 도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남미쪽 인터넷이나 TV 방송의 역사 평론 등에서 파라과이를 피해자로 바라보는 관점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중남미에서 최대-최악의 라이벌 관계였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유일하게 같은 편으로 손을 잡도록 몰아넣은 전쟁이었는데 파라과이는 도대체 잘한 부분이 뭐가 있는가?" 라고 일침을 놓기도 한다.
반면 파라과이는 징병제도 징병제지만 당시 장교는 전부 유럽 유학파들로 채웠고, 사병들도 의무교육 과정을 거친 양질의 군사 교육과 훈련을 잘 받은 정예병 중의 정예병이었고 당시 남미 최강 경제, 군사대국답게 무기들의 질과 보급도 우수했다.
3.2. 3국 동맹의 물량 대공세
초반에 호되게 당하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정규군뿐 아니라 흑인 노예와 원주민들을 대규모로 징집[17]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이 두 국가가 군병력을 제대로 다시 파병하면서 전쟁이 길어지자 파라과이는 불리해졌다. 전쟁 직전에 유럽에다 주문해놓은 최신형 군함 6척만 들어올 때까지 참았어도 전세는 파라과이에게 너무 유리할 판이었지만 그걸 못참았다.체급으로 따지면 파라과이가 그때도 삼국동맹보다 열세였다. 파라과이는 당시 인구가 60만 명밖에 안 되었지만 아르헨티나만 해도 인구가 150만이 넘었고 브라질은 그보다 훨씬 많은 1천만 명에 육박했다. 그나마 인구가 20만도 채 안 되는 우루과이는 파라과이보다 인구가 더 적은 나라이긴 했지만 바로 옆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쟁 초반엔 갑툭튀한 파라과이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파라과이는 삼국동맹과의 근본적인 체급 차이에 따른 소모전에서 물량 차이를 극복하기 매우 어려웠다.
사실 개별 전투로만 보면 파라과이와 3국 동맹간의 대결은 승률은 박빙 수준이었다. 파라과이군의 수준이 높긴 했지만 초반 러시 승률빨도 있었다. 초반을 넘기자 3국 동맹은 혹여 부대가 작살나더라도 막대한 예비대 물량으로 로테이션 돌려 가면서 붙었기 때문에 파라과이는 3국 동맹의 물량공세에 점점 밀리기 시작하면서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당시 브라질 해군은 파라나강의 리아추엘로를 봉쇄하는 중이었다. 파라나강(Paraná江)은 라플라타 강의 상류로 이 강을 통해 대서양으로 연결되는 파라과이의 젖줄이었고 리아추엘로는 입구에 해당하는 요충지였다. 1865년 6월 11일 파라과이의 함대가 아침에 브라질 함대를 기습했지만 당시 파라과이 해군이 무리하게 작전을 진행한 탓에 파라과이 증기선 9척 중 4척, 바지선 7척이 침몰하고 해군 750명이 전사했으나 브라질은 전사자 104명에 증기선 1척을 잃었을 뿐이었다.
결국 파라과이에게 숨구멍과도 같았던 라플라타 강 유역이 완전히 점령당하면서 파라과이의 전세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이 리아추엘로 전투(Battle of the Riachuelo)가 실질적으로 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파라과이인들은 "만약에 리아추엘로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전쟁을 이기고 강국으로 성장하면서 파라과이의 현 국토가 2-3배는 더 넓어졌을 것이다." 라는 대체역사를 꿈꾸고 후세에 길이남을 천추의 한으로 여기면서 아쉬워한다.
3.3. 우마이타 포위전(Siege of Humaitá)
라플라타강 유역이 브라질에게 점령당하자 파라과이는 우마이타 요새(Fortaleza de Humaitá)를 중심으로 한 방어전을 준비했다. 강과 늪으로 접근조차 어려우며 강변에는 파라과이의 육군이 버티고 있는 천혜의 요새로 파라나강에서 파라과이 강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박힌 우마이타 요새는 함락당하면 바로 아순시온까지 뚫림을 의미하기 때문에 파라과이판 산해관이나 마찬가지였던 곳이었다. 따라서 파라과이는 우마이타 요새 안에 군수공장과 제철소를 건설해 무기 자체 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병력도 1만이 넘어 함락이 불가능한 곳으로 여겨졌다. 그 명성이 대단하여 붙은 별명이 '남아메리카의 지브롤터'.1년간의 공격에도 우마이타 요새를 중심으로 한 파라과이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3국 동맹군을 막아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장의 분위기는 3국 동맹군 편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4월 16일부터 23일까지 우루과이군은 우마이타 요새 인근에 위치한 늪지대인 에스테로-베야코(Estero Bellaco)를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로페스는 이곳을 재탈환 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투입시켰고 1866년 5월 2일 파라과이군 6천여 명과 3국 동맹군 8천 명이 맞붙은 에스테로-베야코 전투(Battle of Estero Bellaco)가 벌어졌다. 첫 교전에서 파라과이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3국 동맹군을 무리하게 추격하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해 역으로 몰려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은 채로 물러났다.
이렇듯 3국 동맹군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결국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끝내 모든 난관을 넘었다. 특히 브라질은 우마이타 요새 공성전에서 많은 피해를 입자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회하면서 아순시온과 우마이타간 연결고리를 끊으려 우마이타 근방 요충지를 하나하나 공격, 점령했으며 밤중을 틈타 요새 포위를 막기 위해 파라과이군이 파라과이강에 설치한 쇠사슬까지 돌파하여 마침내 우마이타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듣고 로페즈는 파라과이의 마지막 정규군을 총동원하여 이 포위망을 뚫어내려 했다.
3.4. 투유티 전투(Battle of Tuyutí)
Eles que venham. Por aqui não passarão
오게 두어라. 그들은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브라질 육군 중령 이밀리우 말레트(Emílio Mallet)의 전투 중 외침.
오게 두어라. 그들은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브라질 육군 중령 이밀리우 말레트(Emílio Mallet)의 전투 중 외침.
에스테로-베야코 전투는 결국 위치를 사수한 연합군의 승리였으나 파라과이의 분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 5월 20일까지는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못한채 투유티(Tuyutí)에 진지를 구축하고 진군을 멈추게 되었다. 이때 로페스는 24일까지 우마이야 요새를 포위하고 있는 동맹군 후방을 쳐서 전황을 바꿔보려 했고 파라과이의 정규군을 모두 긁어모아 병력 2만 6천 명을 꾸려 투유티 공격을 감행했다. 이것이 바로 남아메리카 대륙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전투인 투유티 전투이다.
라틴아메리카판 워털루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는 그야말로 치열했다. 전투 초반에 파라과이군은 포위망을 어떻게든 뚫으려고 돌격하고 3국 동맹군은 이를 저지하려는 포격을 가하면서 공방이 이어졌다. 당시 3국 동맹군의 에밀리오 말레트 중령은 몰려오던 파라과이군을 바라보며 "오게 두라! 여긴 절대 뚫리지 않는다!(Eles que venham. Por aqui não passarão!)"라고 말하며 전의를 불태웠고 자신이 맡은 참호와 진지를 끝내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일화가 있다.
파라과이군은 외곽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연합군 진지까지 들이닥치는 데 성공했으나 아르헨티나 기병사단의 기습 공격이 성공하고 숫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포위당하면서 전멸에 이르렀다.
3.5. 협상은 없다
투유티 전투는 파라과이 입장에서는 국가의 명운을 건 마지막 한 방이었다. 파라과이의 남은 병력을 모두 동원한 이 전투에서 참패한 후, 로페스는 패배를 직감하며 종전협정을 맺고자 온갖 외교적 수단을 써 봤지만 3국의 분노를 잠재우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어찌 3국의 분노는 잘 가라앉혀서 협상장에 이끌어냈고 로페스는 1866년 9월에 종전협상을 하고 파라과이의 패전을 인정하면서 종전 후 자신도 대통령직에서 사퇴하는 형식으로 종전평화협정에 사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협상직전 3국 동맹간의 비밀협상이 드러났다.* 1) 3국 동맹 구성원 중 혼자 파라과이와 단독 강화로 배신 금지.
브라질 제국, 정확히는 페드루 2세의 의중이 반영된 이 비밀협상 내용을 안 로페스는 격분하여 바로 협상을 깨 버리고 아예 "조국과 같이 죽으리" 하며 절대로 질 수 없다는 대통령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18] 항복을 권하거나 전쟁을 피하려는 사람이 눈에 띄면 사형에 처하는 식이었다. 이러다 보니 반발도 거세 내부에서 분열도 이뤄졌다. 아순시온 약탈 이후 세워진 임시정부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던 반 로페스 인사들이 돌아와서 세운 것이다. 이들도 전쟁 말기에 브라질 제국군 편에 가담했다.
이후 전염병이 돌아 양쪽 군대가 피해를 입어 소강 상태로 접어들고 약 2년간은 소규모 국지전으로 전쟁이 진행되었다.
거인 같은 두 나라와 이들의 지원을 받는 신생 독립국. 3개 나라를 상대하기엔 여전히 작은 파라과이인지라 장기전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19] 구도였다. 마지막에는 있는 거 없는 거 다 끌어 모아다가 혹독한 훈련을 시켜 무조건 전쟁터로 내모는 바람에 남성 인구의 90%가 사망하거나 노예로 끌려가는 대참사를 당한 바 있었다. 전후 남겨진 남성이 약 3만 명이었다고 한다. 전쟁 말기에는 10살 이하 소년병까지 훈련시켰다. 설상가상으로 보급도 제대로 못한 채 전투복 바지만 입고 총만 쏘거나, 그냥 칼만 가지고 우라돌격만 하던 게 파라과이군의 참혹한 현실이었다.
남미에서 유일하게 시행하던 국민 징병제와 전쟁 당시 남미 최고의 경제력으로 끌어올린 정예병사 수준과 양질의 무기, 보급으로 3국 동맹을 밀어붙이던 것도 어디까지나 전쟁 초반이었다. 중반부터 파라과이군은 상당수 병사들이 전투화를 못 신고 맨발로 다녔으며 무장도 머스킷 위주였다. 전투복도 다 해져서 이리 찢기고 기워서 누더기가 된 걸 입거나 막판에는 아예 바지만 입거나 다 찢긴 걸 허리에 두른 참담한 전투복장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나마 남은 군복들도 장교들에게 우선 지급됐고 하도 남자란 남자는 다 징병하는 통에 일손도 부족해져 식량 생산, 무기 생산에도 차질이 생겼다. 남은 여자들이 농사를 짓고 공장에서 탄 갈고 옷 만들면 되겠지만 후반에는 여자들도 죄다 징집하면서 보급이 엉망이 되었다.
물론 파라과이를 상대하던 3국도 어디까지나 파라과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았을 뿐,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래저래 처지가 열악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래의 로페즈 대통령의 최후를 다룬 영상에서 알 수 있듯 장교들을 제외한 브라질 육군 사병들이 허름한 흰색 작업복을 걸치고 전투를 치르는 거지 꼴이 일상이었다.
3.6. 우마이타 요새가 무너지다
항복이란 선택지가 없어진 파라과이는 어떻게든 우마이타 요새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1867년 11월 7일에 길고 긴 포위전으로 3국 동맹군도 지쳐 있던 상황에서 파라과이 병력 1만 명이 약 1만 5천 명이 주둔한 브라질 군 진지를 기습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물자를 노획한 전투인 제2차 투유티 전투가 파라과이가 성공한 몇 안 되는 작전이었다.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전황은 바뀌지 않았고 1868년 7월 25일에는 그동안 3국 동맹군을 가장 괴롭혀 왔던 우마이타 요새(Fortaleza de Humaitá)가 함락되었다. 그 명성답게 3국 동맹군이 파라과이 영토에 들어간 후 3년 가까이 개고생을 하던 곳이었다.
파라과이의 항복 이후, 우마이타 요새는 철거되어 일부 유적만 남아있다. |
결국 1869년 1월 1일 수도 아순시온이 점령되었다.[21] 당시 아순시온 시가지 전체가 방화로 불타오르고 대통령궁과 파라과이 국립 문서기록보관소도 털렸다. 파라과이 역사 자료들과 유물들을 전부 브라질 제국군이 가져가 버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국립 도서관 지하에 150년 넘게 박혀 있다. 전쟁 100년 후 몇몇 유물들은 파라과이에 반환됐지만 중요 문서들은 반환되지 않았다. 파라과이 역사학계에는 이 약탈 때문에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대는커녕 스페인 식민지 시절, 예수회, 파라과이 건국사, 전쟁 이전 파라과이 대통령들과 파라과이 최대 전성기, 그리고 파라과이 전쟁 관련 연구에 엄청난 차질을 겪는다. 그나마 남은 자료들도 화재사고로 전부 소실되어 이제 영영 연구할 수 없게 되었다.[22] 로페스는 임시수도인 피리베부이로 달아나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지만, 병력도 없고 무기나 지원도 물자도 없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한편 아순시온 점령 이후 3국 동맹의 주축인 브라질 제국군 내에서는 '어차피 로페스도 이제 별 볼 일 없어졌고 파라과이에는 우리 말 잘듣는 임시정부도 세워졌으니 이쯤에서 끝내자. 전쟁의 처리는 파라과이 임시정부에게 맡기고 이들이 로페스를 막아내거나 몰아낼 수 있게 지원만 잘 해 주면 된다.'는 의견을 비쳤지만 전쟁 초부터 로페스를 끝장내기로 결심했던 황제 페드루 2세는 오직 로페스의 파멸을 계속 내세우면서 총사령관을 갈아치웠고[23] 황제의 사위인 외 백작이 총사령관 자리에 오르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24]
이 기간을 파라과이 역사학계에서는 언덕의 전투라고 부른다. 이 언덕의 전투 기간 중에 벌어진 1869년 8월 12일 피리베부이 전투와 4일 뒤인 8월 16일 아코스타 뉴 전투는 3국 동맹과 파라과이군 서로 정신상태가 맛이 갈 대로 간 전투의 극치를 보여준다. 피리베부이 전투는 브라질 제국군의 엄청난 학살과 강간이 벌어졌다.[25] 아코스타 뉴 평원에서 파라과이군은 여기서 부상병과 노약자까지 동원하는 것도 모자라서 9~15세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가짜 수염을 붙여 가면서 6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가 항복했지만, 브라질 제국군은 자비 없이 전부 죽여 버렸다.[26] 이때 어린이 전사자만 2천 명이 넘었다. 파라과이의 어린이날은 8월 16일인데, 이날 전투로 죽은 어린이 2천 명을 기리자는 의미로 제정되었다.
3.7. 종전
1870년 3월 1일 로페즈 대통령은 파라과이 북부 세로 코라(Cerro Corá) 밀림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겨우 포위망을 탈출한 후 같이 포위망을 탈출한 병사들이 지원병을 구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브라질 제국군 총사령관 주제 안토니우 코헤이아 다 카마라(José Antônio Correia da Câmara) 공작[27]이 호위 병력 몇 명만 데리고 로페스 앞에 나타나 "신변을 보장해 줄 테니 항복하라."고 마지막 제안을 했지만 로페스 대통령은 이전에 했던 대통령령과 똑같이 "조국과 같이 죽으리라!(¡Muero con mi patria!)"라 외치면서 카마라 장군에게 덤벼들었고 장군을 보호하려던 브라질 육군 병력이 발포하여 바로 사살당했다. 전사할 당시 로페스의 나이는 42세였다.[28]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세로 코라에서 로페스에게 남은 부하는 400여명 정도밖에 없었고 그를 잡기 위해 온 브라질 육군은 4,000명에 달했으니 사실상 죽기 직전 마지막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최후까지 로페스 대통령과 함께 총을 쏴 가며 항전하던 영부인 엘리사 린치[29]는 죽지는 않았지만 브라질 제국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이후 파라과이 임시정부와 브라질 제국이 열었던 전범재판에서 국외 추방 판결을 받고 프랑스 파리에서 쓸쓸히 죽었다.[30] 파라과이 육군 장교로 복무중인 로페스의 장남 후안 프란시스코 "판치토" 로페스도 이 마지막 전투에서 싸우다가 몰려 항복 권유를 받았는데 "파라과이군 장교에게 항복이란 없다"며 저항하다 죽었다. 아들이 총에 맞아 죽는 걸 바로 앞에서 본 린치는 아들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하며 제국군에게 "이것이 당신들이 말한 문명인가?"라고 항의했다. 3국 동맹은 전쟁의 명분으로 "폭군의 압제로부터 파라과이를 해방시키고, 자유와 문명을 이곳에 전파한다"고 선전했다. 전쟁이 끝나고 로페스와 맏아들의 시신은 영부인과 작은아들들이 직접 땅을 파서 묻었다.
4. 결과
4.1. 파라과이
4.1.1. 국가 파탄과 사회적 변화
이렇게 전쟁은 끝을 맺을 수 있었다. 결과는 브라질 제국과 아르헨티나에게 영토를 왕창 빼앗기고 약 6년간 이 두 국가의 군정 통치 아래 임시정부 체제로 있었다. 인구는 53만 명에서 22만 명으로 절반 이상 감소했으며 이 여파로 경제도 붕괴되고 그와중에 일부 극소수가 경제를 휘어잡아 중남미에서 넘치는 빈부격차 문제가 여기에서도 생겨나 내부 분열 및 갈등이 커졌다. 파라과이의 인구는 해외 이민 유입과 고출산으로 회복은 되었지만 파라과이가 얻은 상처는 21세기에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특히 인구 피해가 극심했다. 전후 파라과이의 성인 남성 인구는 앞에서 나온대로 3만 명이었고 거의 모두 오랜 전쟁으로 앙상한 뼈와 총상, 자상만 남은 해골이나 마찬가지라 야생 재규어, 악어의 좋은 먹잇감으로 비전투 손실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남녀 성비 1:9라는 극악의 비율이 완성되어[31] 그나마도 남은 남자는 생식력이 없는 아주 어린 아이나 아주 늙은 노인들이 대다수였고 성인이나 청소년 남자는 찾아보기 어려운 전설상의 아마존 여인국이나 마찬가지인 전세계사 최악의 여초 성비 불균형으로 기록되었다. 한마디로 나라 안에 남자의 씨가 거의 마르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이 전쟁의 후유증으로 강간 등 성범죄나 사생아 문제가 컸지만 도저히 해결방법이 없고 어떻게든 인구를 늘려야 해서 정부는 아예 손을 놓아 버렸다.
이 극악 여초 사회화로 비극적인 관습들이 탄생하고 말았다. 전쟁 이후 주둔한 브라질 제국군, 아르헨티나군에게 강간을 당한 뒤 임신한 여자들은 피부가 검은 아이가 태어나면[32] 바로 죽여 버리는 관습을 만들었고[33] 성문화의 타락과 성폭행, 성적 학대에 관대해졌다. 거기에 젊은 여자나 혼기 지난 여자들이 워낙 남자를 보기 힘드니 성욕 해소 및 강간 피해 보복차 어린 소년을 납치하고 강간을 벌였다.
전쟁 이전에 체스를 두고 바이올린, 플룻 연주와 시 낭송, 문학 토론이 활발할 정도로[34] 우아한 문화의 도시였던 아순시온 거리는 전쟁 이후 끔찍한 강간이 벌어지는 지옥으로 변했고 대낮 광장과 길거리에서 남자가 여자를 대놓고 강간해도 성범죄냐, 매춘이냐, 그냥 서로 즐긴 화간이냐 따질 수도 없었고 남자들은 이를 파라과이 남자의 특권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소수의 남성들은 PTSD와 보상 심리 등으로 더더욱 여자들을 강간했다. 여자들도 어쩔 수 없이 체념한 채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성인 여성들이 미성년자 남성들을 강간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났다.
일부다처제는 전쟁 이후 무려 80년이 넘어가면서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가 폐지되었지만 현재도 이런 남성 우월주의적인 관념들은 전쟁 이후 파라과이에 뿌리 깊게 남아 있다. 특히 전쟁 이후 성인 여성들한테 강간당한 미성년자 남성들이 성인이 된 후에는 성비가 회복된 데다 미성년자 시절에 성인 여성들한테 강간당한 남성들의 보상심리도 더해짐과 동시에 보복해야겠다는 마음이 적용되어 남성 우월주의 사회로 바뀌어 여성들은 권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파라과이로서는 남자가 너무 없어서 다급해져 차별받던 인디오들까지도[35] 다시 파라과이 국민으로 우대하고 끌어들여 혼혈이라도 이루게 했고 스페인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후 이들에게 행하던 차별 탄압 정책도 폐지했다. 심지어 파라과이 전후 복구작업에 돈 벌러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까지도[36] 본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국적을 받고 남아서 제발 파라과이 국민으로 살아 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전쟁으로 줄어든 인구의 회복이 다급했고 결과적으로 상당수의 유럽과 아랍인들이 파라과이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파라과이는 중남미에서 원주민, 흑인들에게 꽤 관대하게 대하고 혼혈도 잘 이뤄졌다.
그나마 파라과이는 이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나 볼리비아의 선공으로 시작된 차코 전쟁에서 승전하여 3국 동맹 전쟁에서 잃은 땅만큼은 아니라도 북동쪽 일대로 새 영토를 넓히는 데 성공했다.
4.1.2. 로페스의 영웅화/미화
로페스 대통령은 파라과이 민족주의, 침략자의 압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저항정신, 애국심의 상징으로 현재도 파라과이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파라과이 과라니 지폐에 아버지 로페스의 초상과 로페스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아순시온 전쟁 박물관 입구에는 "국가와 함께 죽으리라"라는 말이 크게 새겨져 있다. 박물관 안에는 로페스 대통령과 린치 의 시신이 안치된 관이 박물관 한복판에 있다. 또 로페스가 전사한 3월 1일은 파라과이 독립기념일 다음으로 중요한 국경일로 "국가 영웅절" 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37] 영부인 엘리사 린치도 파라과이에서는 파라과이의 여왕, 여걸, 국모로 추앙받는다.사실 파라과이 전쟁이 종식된 후에는 로페스는 그야말로 국민을 전쟁에 몰아넣고 위대한 파라과이를 한순간에 3류 국가로 전락 시킨 미치광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이는 내정간섭을 당한 탓도 있었지만 패배의식이 국가 전체에 팽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의 헌법을 도입하고 친아르헨티나 인사들로 파라과이 정부 인사들이 꾸려지면서 교과서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삽입되었다.
그러나 이런 인식은 볼리비아와 3년간 치렀던 차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38] 급변했는데 당시 차코 전쟁에 참가했던 전쟁 영웅인 라파엘 프랑코(Rafael Franco)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로페스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 파라과이의 자주성을 드높인 위대한 지도자다."라는 주장을 펼치면서였다. 이런 기조는 역시 차코 전쟁에 참가했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대통령이 되면서 이어나갔고 그의 재임 35년 간(1954~1989) 파라과이는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분위기로 흘러나갔다. 여기서 로페스는 파라과이의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선전되었고 그 결과 현재 파라과이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등극한 것이다.
반대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는 자신의 욕심으로 나라를 파멸까지 끌고간 미치광이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제3자가 해당 전쟁의 시작과 끝을 보았다면 이쪽 의견에 동의할 확률이 높다. 앞서 보았듯 3국 동맹 전쟁에서 파라과이를 쥐어팬 국가들은 결코 파라과이에게 먼저 선제공격을 걸지 않았다.[39] 국가를 강하게 만들겠다는 야심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애초에 체급차이는 생각도 않고 무턱대고 브라질에게 선전포고한 것도 모자라 영토 열어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에게도 전쟁을 거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사이는 안 좋다는 것이다. 3국 동맹 전쟁에서 3국의 일원인 우루과이의 독립과정을 보면 두 나라의 사이가 나쁠 만한 이유는 충분한데[40] 브라질과 적이 된 것까지는 이해가 되어도 아르헨티나까지 파라과이가 아니라 브라질과 손잡게 된 것을 보면 파라과이가, 그리고 그 파라과이를 이끈 로페스가 얼마나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항복 요구도 거절했는데 물론 항복해 봐야 파라과이는 어차피 철저히 난도질당할 운명이었지만 저 항복 한 번에 파라과이 국민들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차라리 항복하랄 때 했다면 아무리 브라질이라 해도 일단 파라과이를 족치는 데는 성공하니까 파라과이 국민 수십만 명을 굳이 갈아죽일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즉 아무리 로페스를 띄워줘도 일단 안해도 될 전쟁을 해버린 데다 그 전쟁에서 자국 역량은 생각도 않고 주변국 거의 전원에게 선빵을 갈겨대서 패배한 데다 마지막에는 패한 국가를 위해 국민의 목숨을 대량으로 희생시켰기 때문에[41] 영웅이라고 평가하기에는 결격사유가 너무 많다. 차라리 침략당해서 저런다면야 이해할 수 있지만 침략전쟁을 먼저 일으켰으니 할 말이 없다.
4.2. 브라질 제국
승자인 3국 동맹도 인적 피해는 적지 않았다.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브라질은 2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파병해 그 중 5만 명이 사망했다.아르헨티나도 2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고 3국 동맹에서 가장 덩치가 작은 우루과이도 전사자 5583명을 냈는데 당시 우루과이 인구가 40만 명 미만이니 피해가 작지 않았다. 그래도 이들은 승자로서 파라과이로부터 땅을 얻어내고 보상금 명목으로 파라과이로부터 이거저거 개발권이나 여러 모로 뜯어갔다. 승리의 주역이었던 브라질 제국 황실은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종전선언을 했고 궁전에서는 피아노 18대와 악기연주자 650명을 동원한 초호화 승전 기념 파티를 열었다.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브라질도 이 전쟁으로 한 가지 문제를 안게 되었으니 바로 군부의 부상이다. 전쟁 직전 1500명에 불과하던 브라질 제국군 장교가 전쟁이 끝날 때 1만명을 넘겼고, 전쟁 기간 숱한 전투 무용담과 전쟁 영웅들이 탄생했으며 이들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어 하나의 정치 세력이 되고 말았다.[42] 이후 군부는 "파라과이와 로페스 대통령을 지나치게 몰아붙였다"는 식의 비판을 페드루 2세 황제에게[43] 대놓고 해낼 정도가 되었고.
때마침 전쟁에 참여하고 출세한 참전용사 출신 흑인들이 주도한 1888년 노예 해방[44]을 계기로 제정에 반감을 가진 대지주들 및 공화주의자들과 손잡은 군부는 1889년 쿠데타로 페드루 2세를 축출하고 정치체를 브라질 연방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브라질 군부는 쿠데타와 막후 정치 조정 등으로 브라질 정치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거기다가 나름대로 안정적이었던 브라질 제국이 공화정으로 탈바꿈한 후 나라가 엉망이 된 터라 오죽하면 제정이 더 나았다는 말도 나왔다.
4.3. 아르헨티나
원래 아르헨티나는 파라과이를 자국의 반란자들이 들어가서 세운 미수복된 영토라는 생각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이 기회에 파라과이를 아예 멸망시켜서 땅을 브라질과 나눠 가지려고 했다가 실패했다.[45] 브라질이 파라과이를 아예 멸망시킬 바에는 차라리 영토만 강제 할양하고 완충국으로 남기는 선에서 처벌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쟁 이전 파라과이 영토를 일부 뜯어내서 갖는데는 성공. 그 이후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에 이어 남미 제2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설 기반을 마련했다.또 아르헨티나가 백인 국가라고 자처할 근거도 마련되었는데 이는 3국 동맹 전쟁 이전까지 아르헨티나에서도 흑인 인구가 상당한 비율을 차지했지만 흑인 남성들이 3국 동맹 전쟁 과정에서 병사로 많이 끌려나가 죽었기 때문에 흑인 집단에서 엄청난 여초 현상을 초래했고 동 시기에 많은 백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쏟아져오면서 결국 흑인 여성들은 백인 남자와 결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 세대를 거듭하면서 백인과의 혼혈로 흑백혼혈인들의 외형이 더더욱 백인에 가까워지면서 20세기 들어서는 아르헨티나에서 흑인들을 보기 쉽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2007년 아르헨티나 대통령 영부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가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를 칭송하고 3국 동맹을 남미 제국주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배신이라고 폄하하며 삼국 동맹이 아닌 삼국 배신이라 불러야 한다는 연설을 했고 아르헨티나 육군의 한 포병부대 이름을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부대"로 바꿔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아르헨티나 언론 라 나시온의 사주가 격분해서 아예 자기가 사설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를 비판하고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를 남미의 히틀러라고 맹비난했다.[46] 반면 파라과이 역사학계, 지식인들과 삼국 동맹국의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용기 있는 발언으로 칭송받기도 했다.[47]
참고로 현재 유명한 관광지인 이과수 폭포는 원래 파라과이 영토 내에 있었다. 하지만 3국 동맹 전쟁 끝에 파라과이가 패배하면서 아르헨티나에게 영토를 넘겨주게 되었다.
4.4. 우루과이
전쟁이전에는 양쪽 국가의 속국 취급을 받아[48]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내부에서도 친아르헨티나파와 친브라질파 세력의 싸움으로 시끄러웠는데 전쟁 이후 3국 동맹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아르헨티나, 브라질의 내정간섭이 사라졌다.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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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아 작전 1990 ~ 1991 | FARC | }}}}}}}}} |
[1] 전쟁의 당사국인 파라과이에서는 '대전쟁(Guerra Grande)'이라고도 한다.[2] 로페스 정부의 전복과 신정부 수립을 위해 로페스에 반대하여 외국으로 망명한 파라과이인들을 모아 편성한 부대로 아르헨티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전쟁 후반에는 생포한 파라과이군 포로들을 강제로 부대에 집어넣기도 했다.[3] 영상에는 투유티 전투를 3국동맹의 승리가 아니라 파라과이의 승리로 기술해 놓은 오류가 있다.[4] 건국 당시 파라과이는 집정관제였다가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시절부터 대통령제로 바뀌었다.[5] 대통령 취임 당시 파라과이 독립선언서에 적힌 세습금지 위반 논란이 있었다. 그는 임기를 10년만 한다는 것으로 반대를 무마했다.[출처] MANUEL D'HISTOIRE CRITIQUE, Le Monde diplomatique[7] 조선 기술을 얻으려고 한 것도 항구를 차지한 다음에 쓰기 위함이 컸다고 볼 수 있다.[8]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초대 대통령은 죽기 직전 아들에게 "파라과이 공화국은 아직도 해결 못한 문제가 많으니 칼보다는 펜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라. 특히 브라질에 대해서는..." 이란 유언을 남겼다.[9] 현 우루과이 국민당[10] 이후 콜로라도당은 장장 93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우루과이의 정권을 독식했다.[11] 브라질이 넘사벽 강대국이기에 정면승부는 무리였지만, 아르헨티나가 파라과이군에게 길을 열어주면 굳이 브라질과 부딪힐 일 없이 건국된지 얼마 안되는 신생국 우루과이를 직접 공략할 수 있었다.[12] 이집트산 목화는 고대부터 당시까지 최상등품으로 평가받았고 21세기에도 서구 브랜드 업계에서는 이집트산 면(Egyptian Cotton)을 최고로 친다.[13] gringo. 중남미에서 미국인들을 부르는 멸칭이다.[14] 특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양국 체급이랑 상호 관계를 보고 다시 이 전쟁을 돌아보자. 지금까지도 양국 국민들도 서로 인정하는 극렬 라이벌 관계의 양대 남미 패권 강대국이 자세한 문맥은 어쨌든간에 딱 봐도 비교도 안 되게 조그만한 나라 하나 서로 힘을 합쳐 제노사이드 수준으로 조져 버린 이 전쟁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그림이 좋게 나올 수 없었다.[15] 아르헨티나의 대국으로써의 국가적 자존심과 유럽발 사상, 문화적 조류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현지 환경 덕분에 세계대전기-냉전기 아르헨티나는 공산주의 지식인 리보리오 후스토, 체 게바라 같은 범라틴아메리카주의, 특히 '양키 제국주의자에 대항한 중남미 국가들의 연대'를 부르짖은 좌파 범라틴아메리카주의가 강하게 발달했다.[16] 위 내용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 소재 역사학자 Esteban Chiaradía의 논문 "El debate historiográfico sobre la Guerra de la Triple Alianza (1864-1870), la implicancia británica y la cuestión algodonera en el marco de la gestación del Estado nacional argentino (2018)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17]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이들에게 제대하면 노예 신분 해방과 차별금지, 출세 보장을 약속했으나 이들은 대부분 위험하고 험난한 전투지역에 파견되어 대부분 죽고 일부 살아남은 자들에게만 그 혜택이 누려졌다.[18] 이후 바로 벌어진 쿠루파이티 전투에서 파라과이군은 3국 동맹군의 멱을 따고 족쳐놨다. 평화협상 당시 파라과이군이 재빨리 재정비를 해 놔서 가능했던 승리였다.[19] 원래 약소국들이 전쟁을 벌일 경우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하는 경향이 크다. 북한의 전쟁교리도 마찬가지로, 무조건 초반에 끝내야 함을 전제로 한다. 자체적인 국력이 약해 장기전으로 갔다간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20] 1868년 말 반역 스캔들에 휘말려 사형당했다. 당시의 3년 개고생 트라우마로 인해 3국 동맹군은 전후 평화 조약에 우마이타 요새 완전 철거와 그 자리에 요새 등 군사시설 재건립 영구금지 조항을 넣어 파라과이 정부에게 서명하라고 요구했고, 파라과이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했다. 우마이타 요새 자리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고 그 마을 곳곳에는 우마이타 요새 시절 지어진 교회 잔해와 무기고, 제철소 잔해나 건물이 남아 있어 관광지로 쓰이고 있다. 파라과이 국민들에게 우마이타 요새는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곳이다.[21] 이걸 스페인어로는 Saqueo de Asunción, 영어로는 Sacking of Asuncion(아순시온 약탈)이라고 부른다.[22] 일부 기록물들은 빼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마저도 피리베부이 전투에서 불타 없어졌다.[23] 엄밀히 말하자면 경질은 아니고 황제와의 의견충돌과 계속되는 전쟁에 지친 총사령관 카시아스 후작이 스스로 사임했다. 황제는 카시아스 후작의 사임에 실망했지만, 어찌 됐든 전쟁 수행에 있어서 카시아스 후작의 역할이 지대했으니 그 공로를 치하하여 공작 작위를 내렸다.[24] 프랑스 출신 외 백작은 모로코, 알제리 원정 참전 경험을 갖고 있었다. 단 그 경험과는 상관없이 브라질 제국군 내에서는 낙하산, 황제빽으로 폄하받았고 위에서는 장인인 황제의 압박, 아래서는 제국군 병사와 휘하 장교의 저평가와 디스를 당하면서 항상 스트레스에 쌓이다가 공적에 대한 욕심으로 온갖 무리수를 저질렀다.[25] 여기에 질린 아르헨티나 군 총사령관은 이후 전투 참여를 포기했다.[26] 전투가 끝나고 파라과이군 소년병들의 어머니들이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거나 생존자들을 찾고 있을 때 브라질 제국군이 평원에 불을 질러 그 어머니들까지 죽고 말았다. 이때 방화 명령을 내린 자는 브라질 페드루 2세의 사위 오를레앙 공 가스통 백작. 4일 전 피리베부이 전투에서 마누에우 메나 바레토 장군이 전사하자 이에 대한 복수로 피리베부이 병원과 마을의 방화, 아코스타 뉴 전투의 일방적 학살과 방화를 명령한 것이었다. 이후 이때의 야만적 학살 명령들은 브라질에서도 죽을 때까지 비난받았다. 현재 브라질에서는 이를 '파라과이군이 연기를 피우면서 불이 일어났다고 위장시켜 생존자를 구출하려다 불이 번져서 피해가 커졌으니, 가스통 백작은 잘못이 없고 파라과이군의 자업자득'이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27] 1869년까지 카시아스 공작이었다가 카시아스 공작이 지쳤다는 이유로 그만뒀고, 바로 그 자리를 외 백작이 이어받았다가 피리베부이, 아코스타 뉴 전투에서의 학살 명령으로 인한 제국군 내부, 본국에서의 여론 악화에 따른 비난에 병까지 겹쳐 1년도 못 채우고 1870년 초 총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28] 로페스야 3국 동맹 조약의 내용을 알고 있던 데다 이미 파라과이에는 3국 동맹 말을 듣는 괴뢰정부도 만들어져서 자기를 죽이려는데 당연히 제국군 총사령관 말을 믿을 리가 없으니 그냥 죽으려고 달려드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총사령관 카마라 공작은 로페스를 죽일 생각은 없고 그냥 생포할 생각으로 부하 몇 명만 데리고 간건데 로페스가 항복을 거부하자 무장해제 명령을 내렸는데 로페스가 칼을 들고 달려드니까 부하들이 자기 장군을 지키려고 총을 쏴서 로페스가 죽은 것이었다. 근데 저때 총사령관이 살리긴 했어도 로페스 반대파가 세운 임시정부 혹은 로페스를 끝장내고 싶어했던 페드루 2세가 사형을 선고할 확률은 100%였다. 어찌 카마라 공작의 말처럼 살아남은 후 기적적으로 대통령직, 행정부 유지는 가능하다 쳐도 대전쟁에서 패하고 권력도 잃어버린 독재자의 신세는 어차피 파멸뿐이었으니 로페스 입장에서는 그저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사실상의 자살이었다.[29] 엘리사 린치(Eliza Lynch, 1835~1886). 아일랜드인으로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프랑스로 이민해서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가 프랑스 군의관과 결혼하고 한 번 이혼한 뒤 당시 프랑스 주재 파라과이 대사로 부임한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와 만나 재혼하고 파라과이로 들어왔으며, 이후 파라과이에 프랑스식 요리, 패션, 놀이, 문학, 음악, 미술 등을 들여와서 수도 아순시온의 문화를 크게 활성화시키고 여학교도 세워 파라과이 여성의 교육에도 큰 공헌을 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었다. 3국 동맹 전쟁 당시에는 여자들로 이뤄진 "Las Residentas" 라는 집단을 만들어 후방에서 군대를 지원했으며 때때로 아예 최전방에서 파라과이군을 직접 지휘하고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현대 파라과이 역사에서는 엘리사를 파라과이의 여걸, 국모로 기리고 있지만 다른 남미 역사에서는 좋게 봐야 파라과이의 에바 페론 정도고 나쁘게 보는 경우는 파라과이의 대마녀, 탐욕의 창녀라는 평가를 내린다. 남미 역사토론에서 파라과이 전쟁을 주제로 할 경우 100% 키배와 병림픽의 헬게이트가 열리는 인물이다.[30] 페드루 2세, 브라질 제국군, 파라과이 임시정부는 영부인 린치도 사형에 처하려고 했지만 린치는 영국 시민권자임을 내세웠기 때문에 국외 추방으로 그쳤다. 이후에 린치는 국외 추방명령 항소, 재산 반환청구 소송, 회고록 출판 때문에 잠깐동안 파라과이에 들른 적은 있다.[31] 이때 어느 지역에서는 1:25라는 비상식적 성비가 나왔다.[32] 브라질 제국군은 전쟁에서 이겨먹으려고 흑인 노예들을 전쟁이 끝나면 노예 해방에 출세도 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대거 입대시켰다. 완전한 해방은 약 20년 뒤에야 이루어졌지만 적어도 당시 참여한 흑인 병사들은 해방되었고 아주 약간이지만 출세도 했으니 어쨌든 약속은 지켰다. 아르헨티나도 흑인 병사가 있었지만 여기는 아르헨티나 문서를 보듯이 전쟁에서 가장 생존률이 희박한 곳으로만 보내서 살아나오기 너무 힘들었다.[33] 물론 인구 증가에 혈안이었던 파라과이 정부가 허용할 리가 없었고 걸리면 처벌을 받았다.[34]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은 아순시온을 남미의 문화중심, 남미의 파리를 목표로 발전시켰고 전쟁 전에는 그 직전까지 갔다.[35] 차별을 증오했던 집정관 프란시아 박사가 통곡할 내용인데 로페스 대통령 시절에는 차별정책이 꽤 있었다. 전쟁 초반에도 원주민들은 거의 징집을 안 했으며 3국은 원주민들을 회유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전쟁 중반부터 파라과이 정부는 인디오 권리 향상과 입대, 애국심 고취 등의 정책들을 펼쳐서 인디오들이 3국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도록 애를 썼다.[36] 주로 유럽인, 아랍인, 인도인.[37] 이 전쟁 박물관에는 아코스타 뉴 전투에서 전사한 "무명소년영웅의 묘"도 있다.[38] 그런데 사실 이 전쟁도 그리 시원찮은 전쟁이었다. 확실히 파라과이가 목표했던 바를 상당수 이룬 전쟁이라 파라과이가 승리한 건 맞는데 쌍방간 전사자가 10만 명에 달해 전인구의 3~4%가 날아갔고 경제도 아작나서 어떤 면에서는 피로스의 승리와도 같았다.(그래도 파라과이 입장에서는 선전한 편이기는 한데 전쟁이 터질 당시 삼국 동맹 전쟁의 상흔을 다 회복하지 못한 파라과이가 이기리라 본 나라가 없었다.) 요컨대 뒤에 나올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같은 얘기는 전혀 들어맞지도 않을 일이다. 당장에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약체 수준의 나라인데 그런 나라와도 엇비슷한 타격을 주며 이겼는데 우루과이는 그렇다고 쳐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동시에 상대한 전쟁이 운 나빠서 질 리가 없다. 물론 현실에서도 6일 전쟁처럼 3국을 상대로 선빵을 갈겨 이긴 전쟁이 있긴 하지만 이름 그대로 6일만에 끝난 전쟁이며 이스라엘은 전쟁 전부터 이길 수 있기 위해 온갖 묘안을 다 짜내고 지른 전쟁이며 아랍쪽은 살짝 방심했다가 얻어맞았다. 결국 이 전쟁 이후의 파라과이가 내놓은 주장은 그저 정신승리에 불과하다.[39] 전쟁의 배경이 된 것에는 브라질의 우루과이에 대한 내정간섭이 있긴 했지만 브라질이 특별히 파라과이 엿먹으라고 지원한 게 아닌 이상 브라질은 전쟁이 일어난 것에 대한 책임은 없다.[40] 당시 기준 30년 전부터 두 나라 사이는 좋지 않았던 것으로 하필 두 나라가 남미에서 제일 강한 나라들이라 사이가 좋아질 기미도 없다.[41] 물론 굳이 말하자면 이는 결과론이다. 허나 적어도 그가 보인 모습에서 국민의 목숨을 생각하는 모습이 전혀 없는 건 사실이다. 언행을 보면 알겠지만 국민이야 얼마나 죽든 말든 국가가 망할 때까지 싸우라는 게 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42] 1872년 이들을 중심으로 한 공화당이 창당했다.[43] 로페스가 빡친 3국 동맹의 비밀 협상 내용 상당수가 황제의 의도가 들어가 있었다. 황제는 로페스가 자기 명예를 건드렸다고 생각해서 심기가 너무 불편해 로페스를 죽여 버리고 싶어했다.[44] 노예 폐지론자였던 황위 계승자 이사베우 공주가 주도했지만 황제 본인 역시 노예제 폐지에 관심이 많았다.[45] 3국 동맹 협정 조약에는 파라과이의 독립을 보증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일단 전쟁에서 이기고 보자는 식으로 당시에만 동의하듯이 서명한 거고 전쟁 이후에 태도를 바꿔 파라과이를 흡수할 생각이었다.[46] 라 나시온의 사주는 3국 동맹 전쟁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인 바톨로메 미트레의 후손이고 바톨로메 미트레는 라 나시온의 창립자이기도 하다.[47] 그런데 사실 위의 '로페스의 영웅화' 파트에서 나왔듯 애초에 이 전쟁 시기의 로페스는 칭찬받을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48] 애초에 독립 과정부터가 브라질령이었던 신세에서 아르헨티나의 도움으로 독립한 나라다. 우루과이의 국기가 아르헨티나의 국기와 유사한 이유도 이러한 독립 과정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립을 주도한 수뇌부조차 아르헨티나에 합병되는 걸 목표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