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3966f,#3b6051> 고대 | 슬라브족 | 트라키아인 | 고대 튀르크족 |
오드뤼사이 | ||||
아케메네스 왕조 | ||||
아르게아스 왕조 | ||||
리시마코스 | ||||
셀레우코스 | ||||
오드뤼사이 | ||||
로마 제국 | ||||
중세 | 동로마 제국 | 불가르족 | ||
남슬라브족 | ||||
불가르 칸국 | ||||
불가리아 제1제국 | ||||
동로마 제국 | ||||
불가리아 제2제국 | ||||
오스만 제국 | ||||
근현대 | 불가리아 공국 | |||
불가리아 왕국 |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 ||||
불가리아 공화국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0.95em; letter-spacing: -0.6px; word-break: keep-all" | 로마 제국 BC 27~395 | 서로마 제국 395~476 | 신성 로마 제국 962~1806 | 프랑스 제1제국 1804~1814 | 프랑스 제2제국 1852~1870 | |
오스트리아 제국 1804~1867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867~1918 | |||||
독일 제국 1871~1918 | ||||||
동로마 제국 395~1453 | 루스 차르국 1547~1721 | 러시아 제국 1721~1917 | ||||
오스만 제국 1453~1922 | ||||||
불가리아 제1제국 919~1018 | 불가리아 제2제국 1185~1396/1422 | |||||
같이보기 제3의 로마, 근대 유럽의 황제 가문 | }}}}}}}}}}}}}}} |
불가리아 제국 ц︢рьство бл︢гарское ts'rstvo bl'garskoe | |||||
국기 | 국장 | ||||
이반 아센 2세 시기의 최대 판도. 빗금친 부분은 잠시 봉신국으로 두었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테살로니케 제국이다. | |||||
1185 ~ 1396/1422[1]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동로마 제국 | 오스만 제국 | ||||
위치 | 발칸반도[2], 우크라이나, 몰도바 | ||||
수도 | 터르노보(1185 ~ 1393) 비딘, 니코폴리스(1393~1396)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차르 | ||||
주요 차르 | 페터르 4세(1185~1197) 이반 아센 1세(1185~1196) 칼로얀(1196~1207) 이반 아센 2세(1218~1241) 토도르 스베토슬라프(1300~1322) 이반 알렉산더르(1331~1371) | ||||
언어 | 중세 불가리아어, 교회 슬라브어, 중세 그리스어 | ||||
민족 | 불가리아인, 블라흐인[3] | ||||
종교 | 정교회 | ||||
면적 | 340,000 km² (1230년) | ||||
주요 사건 | 1185년 건국 1190년 트랴브나 전투 1205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1208년 플로브디프 전투 1230년 클로코트니차 전투 1277년~1280년 이바일로의 난 1304년 스카피다 전투 1330년 벨버즈드 전투 1332년 루소카스트로 전투 1396년 수도 함락 및 멸망 |
1. 개요2. 역사: 1185 ~ 1422
2.1. 1185 ~ 1197 페터르 4세, 이반 아센 1세: 동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반란과 독립2.2. 1196 ~ 1207 로마녹토노스 칼로얀: 로마인 학살자2.3. 1207 ~ 1218 보릴: 내우외환2.4. 1218 ~ 1241 이반 아센 2세: 최전성기,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2.5. 1241 ~ 1256 칼리만 아센 1세, 미하일 아센 1세: 어린 차르의 잇따른 등극과 외적의 침략2.6. 1256 ~ 1277 칼리만 아센 2세, 미초 아센, 콘스탄틴 아센 1세: 세 차르의 내전과 가중되는 혼란2.7. 1277 ~ 1280, 이바일로의 난2.8. 1280 ~ 1300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 스밀레츠, 이반 2세, 차카: 지속되는 혼란2.9. 1300 ~ 1322 토도르 스베토슬라프: 중흥기2.10. 1322 ~ 1330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 미하일 아센 3세, 이반 스테판: 확장 정책의 추진과 좌절2.11. 1331 ~ 1371 이반 알렉산더르: 영광과 쇠락의 40년2.12. 1371 ~ 1396 이반 시슈만, 이반 스라치미르: 제국의 사실상 멸망2.13. 1397 ~ 1422 콘스탄틴 아센 2세: 제국의 마지막 재기 시도와 멸망
3. 사회4. 경제5. 둘러보기언어별 명칭 | ||
고대 교회 슬라브어 | ц︢рьство бл︢гарское / Блъгарїꙗ | |
불가리아어 | Втора българска държава | |
그리스어 | Δεύτερη Βουλγαρική Αυτοκρατορία | |
루마니아어 | Ţaratul Vlaho-Bulgar | |
세르비아어 | Друго бугарско царство | |
헝가리어 | Втора българска държава | |
튀르키예어 | İkinci Bulgar İmparatorluğu | |
영어 | Second Bulgarian Empire |
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은 1185년부터 1396년까지 존속한 국가다. '제2'라는 수식어는 동로마 제국에게 멸망당하기 전의 불가리아 제1제국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당시에는 그냥 불가리아 제국이었다.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동로마 제국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불가리아 제1제국의 영토 상당 부분을 회복하였으나, 이후 세르비아 제국에 밀려 세력이 약화되고 결국 14세기 말 오스만 술탄국에게 점령되어 멸망했다. 전성기에 해당하는 14세기에는 흑해부터 아드리아해까지 널리 영향을 미치며 동로마 문화와 슬라브 문화를 융화한 불가리아 문화의 중흥을 이루었다.2. 역사: 1185 ~ 1422
2.1. 1185 ~ 1197 페터르 4세, 이반 아센 1세: 동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반란과 독립
1018년 불가리아 제1제국이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멸망한 후, 불가리아인들은 기존 동로마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세금과 부역이 증가하고 외적의 침입이 잦아지자, 1185년 터르노보(Търново)[4]의 지방 귀족이던 페터르 4세(Петър ІV, 재위 1185 - 1197)와 이반 아센 1세(Иван Асен I, 재위 1187/1188 - 1196)가 반란을 일으켜 불가리아 제2제국을 건설하고, 차르로 즉위했다. 이 독립 과정은 역사 유튜브 'Kings and Generals'의 Rise of Bulgaria - Events leading to the Sack of Constantinople에도 나와 있고 영어 자막이 있으니 참고할 만 하다.2.2. 1196 ~ 1207 로마녹토노스 칼로얀: 로마인 학살자
칼로얀(Калоян, 재위 1196 - 1207)[5] 의 재위기에는 제4차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라틴 제국을 건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204년) 칼로얀은 자신의 불가리아 황제 지위를 공인받는 대가로 십자군에 군사적 지원을 제의하였으나 멸시 섞인 반응과 함께 거절당했고, 그다음에는 트라키아 영토의 평화로운 분할을 제의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무시당했다. 분노한 칼로얀은 난민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한편 그리스인들을 선동해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에서 대대적인 반라틴 폭동을 일으켰다.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1세는 황급히 진압을 시도했으나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차르의 친정군에 대패하고 포로로 잡힌다. (1205년) 불가리아군은 세레스 전투(1205)와 루시온 전투(1206) 등에서 라틴 제국 군대를 격파한 뒤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1207년에는 테살로니카 왕국군도 격파하고 국왕 보니파초 델 몬페라토를 참살했다. 십자군 측 사가인 조프루아 드 발라드루앵의 연대기를 읽어 보면 칼로얀과 불가리아군을 거의 신의 재앙이나 악의 화신급으로 묘사한다.
그리스인들은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로 칼로얀과 불가리아군을 환영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위세가 빠른 속도로 강해지자 서서히 라틴 제국과의 제휴를 도모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분노한 칼로얀은 트라키아 지방의 동로마인 마을을 잇따라 습격하여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약탈하고 자기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칼로얀이 자칭한 별명이 바실리오스 2세의 별명, '불가록토노스(Boulgaroktonos, 불가르인 학살자)'에서 따온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로마인 학살자). 그러나 그의 이같은 정책은 구 동로마령 내의 반불가리아 감정을 폭증하게 만들었고, 칼로얀은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와 연합하여 십자군 세력과 지리한 공방전을 주고받던 중 의문스런 죽음을 맞는다.
2.3. 1207 ~ 1218 보릴: 내우외환
칼로얀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칼로얀 여동생의 아들 보릴이 즉위했다. 그는 이반 아센 1세의 작은 아들이며 제위 계승권자인 이반 아센 2세를 국외로 내쫓았으며, 칼로얀의 미망인 데시슬라바와 결혼하여 제위를 굳건히 하려 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로도프 산맥의 체피나 성에서 독립하였고, 보릴의 동생 스테츠는 세르비아로 망명했다. 그는 위신을 끌어올리기 위해 라틴 제국을 공격했지만, 1208년 7월 8일 플로브디프 전투에서 라틴 제국 황제 앙리에게 참패했다. 그 결과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라틴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세르비아는 불가리아가 약해진 틈을 타 마케도니아 일대로 쳐들어가서 스트루마와 바르다르 강 사이의 땅을 점령했다.이후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동맹을 맺었고, 헝가리 왕국과도 우호관계를 맺어놓아 라틴 제국에 전념할 환경을 조성했다. 1211년 4월 테살로니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던 앙리 황제를 잡기 위해 산악로에 병력을 매복시켰지만, 앙리가 이를 간파하고 인근 라틴 요새에서 군대를 모아 역습을 가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자신에게 귀순한 동생 스테츠가 테살로니키 왕국을 침략했다가 이피로스가 라틴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그의 영지에 쳐들어오는 바람에 위기에 처하자, 그는 동생을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1211년 초여름, 보릴과 스테즈 형제는 비톨라 근처에서 테살로니키-이피로스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그해 10월 테살로니키를 포위공격했으나, 알렉시오스 슬라브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철수했다. 알렉시오스 슬라브는 불가리아군을 추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뒤이어 멜니크를 공략했다.
거듭된 패전으로 위신은 추락하였고, 보야르들은 1211년과 1214년 사이에 비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보릴은 헝가리 왕국의 지원을 통해 반란을 간신히 진압했다. 이후 앙리 황제에게 칼로얀의 딸 마리아를 후처로 보내는 조건으로 종전 협약을 맺었다. 또한 1214년 초 자신의 딸을 헝가리 황태자 벨러와 약혼시켜, 동맹을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1216년 앙리가 사망하였고 1217년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헝가리를 떠나면서, 그는 어느 쪽으로도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키예프에 망명 중이던 이반 아센 2세는 이 틈을 타 1218년 불가리아로 돌아가서 반란을 일으켰다. 보릴은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참패하고 타르노보에서 몇 달간 항전했지만 끝내 붙잡혀 실명형에 처해졌다.
2.4. 1218 ~ 1241 이반 아센 2세: 최전성기,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
1218년 보릴을 물리치고 차르에 즉위한 이반 아센 2세는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하면서 헝가리와의 동맹을 갱신했다. 또한 1221년 새로 선출된 라틴 제국 황제 로베르가 불가리아 영토를 지날 때 극진한 대우를 해줘서 우호 관계를 맺었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해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의 동생 무나일 두카스와 자신의 딸 마리아를 결혼시켰다. 1228년 로베르가 죽고 11살의 보두앵 2세가 즉위하자, 라틴 제국의 섭정이 되기 위해 딸 엘레나를 보두앵 2세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라틴 제국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이피로스의 군주이자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는 이 소식을 듣고 불가리아를 경계했고, 자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릴 때 불가리아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곘다고 여겼다. 그는 불가리아를 먼저 손봐주기로 하고, 1230년 봄 8만 대군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는 척 했다가 갑작스럽게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에브로스 계곡을 따라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테오도로스는 승리를 확신하여 처자식까지 거느리고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천천히 진군했다. 그러나 이반은 당황하지 않고 수천 명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반격했다. 1230년 4월, 로코트니차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을 급습해 대승을 거두었고, 테오도로스를 붙잡아 실명시키고 타르노보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이피로스로 쳐들어가서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프릴리프, 세레스, 아드리아노폴리스, 데모티카, 플로브디프 등지를 공략하였고, 테살리아의 대 블라키아도 공략했으며, 과거 보릴에게 반기를 든 뒤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알렉시오스 슬라브의 체피나 성도 공략했다. 테살로니키 제국의 새 황제 마누일 콤니노스 두카스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불가리아의 봉신을 자처했다. 이반 아센 2세는 과거 칼로얀이 정복지 주민들을 학살하여 로마인들의 분노를 샀던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방 관료들이 계속 지위를 유지하도록 했고 백성들을 가급적 해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동로마 황제를 모방하여 황제의 휘장을 갖췄고, 성 순교자 교회를 타르노보에 세우고 교회의 기둥 중 하나에 자신을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및 다른 종족의 차르"라고 알리는 글귀를 새기게 하는 등 야망을 드러냈다.
그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3세에게 딸 엘레나를 시집보내면서 손을 잡은 뒤 마리차 강 서쪽 지역을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방향을 바꿔 라틴 제국과 동맹을 맺고 니케아 제국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엘레나를 불가리아로 불려들었다. 그러나 1237년 니케아 제국에 속한 카에노프루리온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중 타르노보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아내 안나 마리아와 아들 한 명,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사망하자, 신의 징벌로 생각해 철수하고 엘레나를 니케아로 돌려보냈다.
1237년 7년간 포로 생활을 하던 테오도로스의 딸 이리니와 재혼하였고,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테오도로스를 석방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가 이단자들을 보호한다고 비난하고 1238년 초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에게 불가리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라고 촉구했다. 벨러 4세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지만, 내심 강성한 불가리아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읽은 이반은 1239년 시몽 드 몽포르 등 귀족 십자군이 불가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행진하는 걸 허용했고, 1240년 5월 헝가리에 사절을 보내 키예프를 공략하고 쿠만족을 축출한 몽골의 예상되는 침략에 맞서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헝가리 측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동맹 체결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가운데, 1241년 5월 또는 6월 사망하였다.
이반 아센 2세는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을 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불가리아 차르로서는 최초로 동로마 제국의 것을 모방하지 않은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였으며, 라구사 공화국과의 교역을 늘리는 등 무역과 조세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립, 집행했다. 또한 각지에서 독자적인 통치를 하던 보야르들을 복종시켜서 왕권을 강화했다. 1235년에는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과 수좌대주교좌를 얻어내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안니스 아크로폴리티스는 그를 "야만인들 사이에서 자기 민족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한 자"라고 묘사했다. 그는 불가리아 차르의 모범으로 각인되었고, 후대 차르들은 대부분 '아센'이란 이름을 내걸어 이반 아센 2세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뜻을 표명하였다.
2.5. 1241 ~ 1256 칼리만 아센 1세, 미하일 아센 1세: 어린 차르의 잇따른 등극과 외적의 침략
1241년 5월 또는 6월 이반 아센 2세가 사망한 뒤, 칼리만 아센 1세가 7살의 어린 나이에 차르에 올랐다.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1237년 이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국가 중대사를 대신 맡았다. 그러나 1242년 바투 칸의 몽골군 별동대가 불가리아를 침략하여 타르노보, 프레슬라프, 이사체아 등 불가리아 북부 요새를 파괴한것으로 추정된다.1246년 8월 또는 9월, 칼리만은 12세의 나이로 급사하였고, 이복동생인 미하일 아센 1세가 8살의 나이로 차르가 되었다. 어머니 이리니와 불가리아 총대주교 페터르가 그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지만, 나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는 이때를 틈타 불가리아를 전격 침공하여 벨버즈드, 멜니크, 스코페, 세레스, 필리레프, 테살피나 등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여기에 헝가리도 베오그라드 등 여러 지역을 공략하였고,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 미하일 2세 콤니노스 두카스도 마케도니아 서부를 공략했다. 결국 불가리아는 1247년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을 상대할 때 군사 지원을 해줘야 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
1254년 11월 3일 요안니스 3세가 사망하자, 불가리아는 협약을 파기하고 공세를 개시해 스타니마카, 페루시티사, 크리힘, 체피나 페르페레크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새 황제 테오도로스 2세가 주력군을 소아시아에서 발칸 반도로 파견하여 불가리아군을 물리치고 로도프 산맥의 요새 대부분을 탈환했다. 미하일 아센 1세는 1255년 말 헝가리 왕 벨러 4세의 손녀 안나 아르파드와 헝가리의 봉신인 로슽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딸인 안나 로스티슬라브나와 결혼하였고, 이를 토대로 헝가리의 군사 지원을 받아냈다. 1256년 봄 헝가리와 연합하여 니케아 제국을 공격해 트라키아를 약탈했으나, 곧 테오도로스에게 격파되었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불가리아는 1256년 6월 차르의 장인인 로스티슬라프를 니케아로 파견해 평화 협약을 논의했다. 테오도로스 2세는 미하일이 불가리아가 일전에 잃었던 영토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때에야 평화 협약에 서명하겠다고 하였다. 로스티슬라프는 이에 동의하였고, 양국은 마리차 강의 상류를 국경으로 정했다. 귀족들은 이 결정에 격노하였고, 칼리만 아센 2세는 터르노보 근교에서 사냥하던 미하일 아센 1세를 습격해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미초 아센과 콘스탄틴 아센 1세가 이에 불복하여 각자의 지배지에서 차르를 칭하면서, 불가리아는 세 차르간의 내전 시대를 맞이한다.
2.6. 1256 ~ 1277 칼리만 아센 2세, 미초 아센, 콘스탄틴 아센 1세: 세 차르의 내전과 가중되는 혼란
칼리만 아센 2세는 미하일 아센 1세를 살해한 뒤 미하일의 미망인인 안나 로스티슬라브나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안나 로스티슬라브나의 장인이자 헝가리의 봉신인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는 딸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불가리아의 수도 타르노보로 쳐들어갔다. 칼리만은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한 달만에 축출되었고, 로스티슬라프는 타르노보를 점거한 뒤 딸을 데리고 헝가리로 돌아간 후 "불가리아의 왕"을 자칭했다. 그 후 차기 차르를 놓고 여러 후보가 경합했는데, 이반 아센 2세의 사위인 점을 내세운 미초 아센이 새 차르로 추대되었다. 칼리만 아센 2세는 자기 영지에서 한동안 대항했지만 1256년 또는 1257년 살해당했다.그러나 미초 아센은 니케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백성의 신망을 잃었고, 스코페의 명문 귀족이었던 콘스탄틴 아센 1세가 이 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켜 수도 타르노보를 공략했다. 그는 본래 이름이던 티흐(Tih)를 아센(Asen)으로 개명하여 이반 아센 2세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선언하였고, 1258년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테오도로스 2세 황제와 불가리아의 엘레나 아세니나의 딸인 이리니 두케나 라스카리나와 결혼하면서 니케아 제국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미초 아센은 프레슬라프와 메셈브리아 일대에서 할거하며 차르를 계속 칭했고, 이로 인해 불가리아는 콘스탄틴 아센 1세를 지지하는 서부와 미초 아센을 지지하는 동부로 분열되었다. 여기에 로스티슬라프 미하일로비치는 헝가리를 등에 업고 불가리아를 계속 공격했다.
설상가상으로,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포한 미하일 8세가 라스카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요안니스 4세를 실명시키고 불가리아와의 결혼동맹을 끊어버렸다. 1263년 콘스탄틴 아센 1세의 거듭된 공세를 버티지 못한 미초 아센이 메셈브리아 일대를 동로마 제국에 넘기며 망명하자, 미하일 8세는 이 기회를 틈타 트라키아를 전격 침공해 타니마카와 필리포폴리스를 공략하였으며, 해군을 파견해 비치나를 비롯한 도나우 강 하류의 삼각주를 점령하였다. 한편 또다른 부대는 흑해 주변의 아가트호폴리스, 소조폴리스, 안키알루스를 공략했다. 헝가리와 동로마 제국의 협공으로 곤경에 처하자, 콘스탄틴 아센 1세는 상국으로 모시던 킵차크 칸국에 도움을 청했고, 노가이 칸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와주면서 남은 영토라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1264년 헝가리 내부에서 벨러 4세와 이슈트반 5세 부자가 내전을 벌이자, 콘스탄틴 아센 1세는 1265년 비딘의 통치자 야코프 스베토슬라프와 손을 잡고 다뉴브 강을 건너 헝가리를 침공해 트란실바니아를 약탈했다. 그러나 내전이 종식된 뒤 트란실바니아의 주인이 된 이슈트반 5세가 역공에 나섰고, 1266년 6월 비딘이 함락되었고 뒤이어 불가리아 수도 타르노보까지 헝가리군이 진격해 주변 일대를 파괴하고 플레벤을 함락했다. 이에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버리고 헝가리의 봉신이 되었다.
1268년 아내 이리니 두케나 라스카리나가 사망하자, 콘스탄틴 아센 1세는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고자 미하일 8세의 조카인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니와 결혼했다. 미하일 8세는 두 사람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면 메셈브리아와 안키알루스를 지참금으로 넘기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아들 미하일 아센 2세가 태어났는데도 미하일 8세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콘스탄틴은 분노하여 1271년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칠리아 왕국의 카롤로 1세와 동맹을 맺고 트라키아로 침공했다. 하지만 미하일 8세가 자신의 사생아인 에우프로시나 팔레올로기나를 킵차크 칸국 서부 일대의 지배자 노가이 칸에게 넘기고 불가리아를 침공하게 했기 때문에, 콘스탄틴은 곧 돌아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272년 콘스탄틴이 낙마 사고를 당한 뒤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이에 아들인 미하일 아센 2세가 공동 차르로 즉위하였고, 아내 마리아 팔레올로기나 칸타쿠지니가 국정을 장악했다. 마리아는 이슈트반 5세 사망 후 다시 불가리아에 귀순한 야코프 스베토슬라프가 자기 부인이 이반 아센 2세의 손녀임을 내세워 차르가 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1276년 독살하고 스베토슬라프의 지지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렇듯 국정 혼란이 갈수록 가중되고 민중의 삶이 비참해지자, 1277년 농민 출신의 이바일로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2.7. 1277 ~ 1280, 이바일로의 난
1277년 갈수록 심화되는 정국 불안정과 계속된 킵차크 칸국의 공격에 민중은 도브루자 농민 출신의 이바일로를 지도자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먼저 북동부 불가리아를 약탈하던 몽골군을 모조리 축출하였고, 자신을 진압하려는 콘스탄틴 아센 1세를 죽이고 토벌군을 자신의 휘하에 편입했다. 이후 타르노보를 제외한 불가리아 전역을 삽시간에 공략했다.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는 이바일로가 지나치게 강성해지자 동로마 제국에도 큰 위협이 될 거라 판단하고, 지난날 동로마 제국에 망명했던 미초 아센의 아들 이반 아센 3세를 자기 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와 결혼시킨 뒤 새 차르로 옹립 후 트라키아 대부분을 공략했다. 이리하여 이바일로의 반란군과 이반 아센 3세의 동로마군에게 동시에 압박받게 되자, 교회 통합 정책을 추진한 것에 반감이 있던 데다 도와주진 못할 망정 새 차르를 세운 삼촌에게 분노한 마리아 황후는 자기 남편을 죽인 이바일로와 연합하는 길을 택하고, 협상 끝에 그와 결혼하되 자신의 아들인 미하일 아센 2세를 공동 차르로 삼게 하였다.
미하일 8세는 미하일 글라바스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타르노보를 공략하게 했지만, 이바일로는 모조리 격파했다. 이에 킵차크 칸국에 도움을 청했지만, 이바일로는 칸국의 군대까지 다뉴브 강 이북으로 축출했다. 그 사이에 동로마군이 시프카 가도와 흑해 반도에서 불가리아를 협공했지만 격파당했다. 하지만 킵차크 칸국의 주력 부대가 재차 침입하자, 이바일로는 이번엔 쉽게 막아내지 못하고 드러스터르 요새에서 3개월간 포위되었다. 귀족들은 이 때를 틈타 타르노보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리아 황후와 미하일 아센 2세를 폐위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추방하고, 미하일 아센 3세를 새 차르로 옹립했다.
하지만 이바일로는 포위망을 돌파하고 킵차크 칸국 군대를 본국으로 돌아가게 한 뒤, 타르노보를 포위했다. 1279년 미하일 8세가 급파한 동로마군 10,000명이 타르노보로 접근했지만, 이바일로는 데비나에서 이들을 괴멸시켰다. 다시 5,000명의 동로마군이 추가로 파견되었지만, 발칸 산맥을 지나가던 중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이반 아센 3세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고 판단하고, 타르노보에서 도망치면서 왕실의 보물을 모조리 가지고 갔다. 그는 메셈브리아로 간 뒤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를 새 차르로 추대하고 이바일로에 계속 맞섰고, 거듭된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지지 세력이 등을 돌리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된 이바일로는 1280년 킵차크 칸국으로 망명하였다. 얼마 후, 이반 아센 3세는 미하일 8세의 지시에 따라 킵차크 칸국으로 갔고, 이바일로가 거기에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도움을 요청했다.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은 두 차르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미하일 8세에게서 막대한 뇌물을 건네받고 이바일로를 처형했다.
2.8. 1280 ~ 1300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 스밀레츠, 이반 2세, 차카: 지속되는 혼란
이바일로의 몰락으로 불가리아의 단독 차르가 되었지만,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오랜 세월 지속된 내전으로 국력은 쇠진해졌고, 많은 보야르들이 중앙 정부에서 이탈했다. 그중 비딘의 데스포티스 시슈만 1세, 스밀레츠, 라도슬라프, 보이실 등이 각 영지에서 자기 영지에서 군림하며 중앙의 명령을 잘 듣지 않았다. 타르노보의 차르는 불가리아의 유일한 통치자에서 '동등한 보야르 중 첫번째'로 변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국의 군주 카롤로 1세의 반 동로마 연합에 참여하여 장차 동로마 제국을 정벌하여 위신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8세가 사생아인 에우프로시나를 킵차크 칸국 노가이 칸의 후처로 보내 원군을 호소했고, 노가이 칸은 1282년 4만에 달하는 기병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설상가상으로, 시칠리아 왕국의 카롤로 1세가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인해 시칠리아 섬을 아라곤 왕국에게 빼앗기면서 불가리아를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결국 게오르기는 반 동로마 정책을 중단하고, 아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를 인질로 보냈다. 그는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1284년 자신의 딸인 안나를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슈 2세 밀루틴과 결혼시켰다. 1284년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와 협상하여 키라 마리아를 동로마 제국으로 돌려보내는 대신에 아들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와 첫번째 아내 마리아를 돌려받았다. 1285년 킵차크 칸국이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하자, 게오르기는 노가이 칸의 봉신을 자처하고 토도르를 다시 킵차크 칸국의 인질로 보내야 했다. 또한 딸 엘레나를 노가이 칸의 아들인 차카와 결혼시켰다. 이렇듯 동로마 제국과 세르비아, 킵차크 칸국에게 잇따라 머리를 숙여가며 어떻게든 입지를 다지고자 노력했고, 그 덕분에 12년간 옥좌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1292년 노가이 칸이 돌연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게오르기를 퇴위시키고 스밀레츠를 새 차르로 세웠다. 게오르기는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하였지만, 노가이 칸이 두려운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박대당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 주변에서 죽은듯이 숨어지내야 했다.
스밀레츠는 1296년 딸 테오도라를 세르비아의 왕위 계승권자인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와 결혼시켜 입지를 다지고자 했지만, 제위를 오래 누리지 못하고 1298년 사망했다. 뒤이어 아들 이반 2세가 차르로 즉위했지만, 아직 어렸기 때문에 어머니 스밀체나(Smiltsena)가 섭정을 맡았다.[6] 그녀는 전 차르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형제인 알다미르를 크란의 데스포티스로 세우고, 그의 협력을 받아 황권을 다지려 했으며,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슈 2세 밀루틴에게 자신과 결혼하여 세르비아-불가리아 연맹체를 결성하고, 아들을 공동 차르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왕은 장래에 불가리아의 손에 세르비아를 맡기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1299년 노가이 칸이 토크타 칸과의 전쟁 도중 전사했다. 이후 노가이 칸의 아들인 차카가 부친의 잔존 세력을 이끌고 킵차크 칸국에 볼모로 와 있던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와 함께 불가리아로 향했다. 스밀체나와 이반 2세는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수도 타르노보를 내준 뒤 알다미르의 영역으로 도주했다. 차카는 차르를 칭했지만, 1300년 토크타 칸이 노가이 칸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불가리아까지 쫓아와서 타르노보를 포위했다. 그러자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신속하게 음모를 꾸며 차카를 감옥에 가두었고, 곧 목을 졸라 죽였다. 차카의 수급은 토크타 칸에게 보내졌고, 토크타 칸은 만족하여 돌아갔다. 그 후 토도르 스베토슬라프가 보야르들의 추대로 새 차르로 즉위했다.
2.9. 1300 ~ 1322 토도르 스베토슬라프: 중흥기
토도르 스베토슬라프는 어린 시절에 동로마 제국에 인질로 보내져 6년간 인질 생활을 하였고, 1285년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이 불가리아로 쳐들어오자 부친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에 의해 다시 킵차크 칸국에 인질로 보내져 15년간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1292년 부친이 노가이 칸에 의해 폐위된 뒤 본국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다 1299년 차카와 함께 불가리아로 귀환하였고, 1300년 토크타 칸이 차카를 잡으러 오자 신속하게 음모를 꾸며 차카를 죽여서 수급을 바쳐서 돌려보낸 뒤, 보야르들의 추대로 새 차르로 즉위했다.토도르는 외세가 불가리아를 수시로 침략하고, 보야르들이 불가리아 각지에서 할거하며 차르를 좌지우지하고, 외세의 침략에 힘을 합쳐 대항하기보다는 기득권을 챙기는 데 급급한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동로마 제국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고, 킵차크 칸국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노가이 칸의 원정에 항상 따라가며 기본적인 전투 기술을 비롯하여 전략 전술을 습득하였다. 이리하여 문무 양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췄고, 이를 바탕삼아 강력한 황권을 갖춰서 이반 아센 2세 사망 후 60년간 이어진 혼란으로 파탄 국가로 전락한 불가리아를 재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즉위 직후 황권에 위협이 되는 이들을 타타르와 밀접하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숙청했다. 심지어 불가리아 대주교인 요아킴 3세마저 타타르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타르노보에서 추방했다. 보야르들은 이에 반발해 130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한 미하일 아센 2세를 복위시키려 했지만, 토도르가 사전에 이를 간파하고 음모를 꾸민 보야르들을 모조리 처형하면서 실패했다. 1304년, 토도르는 본격적으로 공세를 개시해, 트라키아 북부의 메셈브리아, 안키알루스, 소조폴, 아흐토폴 등지를 탈환했다.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장남 미하일 9세는 이에 맞서 군대를 일으켜 스카피다 강 인근에서 불가리아군과 마주쳤다. 초기의 전투 후 불가리아군이 후퇴하자, 동로마군은 추격에 나섰지만 강 위의 다리가 돌연 허물어졌다. 그 순간 불가리아군은 반격하였고, 동로마군은 속절 없이 붕괴되었다. 미하일 9세는 가까스로 빠져나왔고, 토도르는 흑해 연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1304년 8월, 미하일 9세는 전 재산을 털어서 군대를 재조직한 뒤 슬리벤 주변의 일대를 공격하여 황폐화시켰다. 이리하여 흑해 연안을 재확보했지만, 그해 가을에 토도르가 다시 반격하여 흑해 연안을 공략하고, 소조폴을 확실히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2세 코스마스를 체포했다. 또한 크란의 데스포티스 알디미르는 토도르의 지시에 따라 트라키아 일대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토도르가 이대로 강성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전 차르 스밀레츠의 형제이며 스레드나 고라 산맥 일대에서 독립된 세력을 꾸리고 있던 라도슬라프, 보이실을 후원해 내전을 일으키려 했다.
라도슬라프는 동로마군의 지원을 받고 크란의 데스포티스이자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형제인 알다미르와 공모하여 토도르를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토도르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1305년 알다미르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라도슬라프의 군대를 격파해 라도슬라프 및 13명의 동로마 장성을 붙잡았다. 라도슬라프는 실명형에 처해진 뒤 감옥에 갇혔고, 13명의 동로마 장성은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토도르의 부친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와 교환되었다. 토도르는 돌아온 부친이 정해진 도시에서 호화롭게 지내도록 배려하면서, 그 대가로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도록 하였다.
1306년, 알란 병사 16,000명은 동로마 제국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토도르에게 불가리아 망명을 허가해 달라고 호소했다. 토도르는 즉시 1,000명의 분견대를 보내 그들의 탈출을 도왔다. 그러나 알란족은 불가리아 영토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카탈루냐 용병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카탈루냐 용병의 전투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은 토도르는 그들이 동로마 제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는 걸 고려하여 용병대 지도자인 베렝가르 데 로카포르트에게 불가리아로 건너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협상은 실패했고, 카탈루냐 용병대는 아테네 공국을 정복하여 그곳에 정착하였다.
1306년 말, 토도르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흑해 연안 도시의 상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결정을 연기했다. 이에 토도르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곡물을 가득 실은 갤리선 2척을 보냈다. 이에 시민들은 황제에게 불가리아와 평화 협약을 맺으라고 압박했다. 결국 1307년 양국의 평화 협약이 맺어졌고, 미하일 9세의 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토도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이리하여 토도르는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얻어낸 영역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그 후 토도르는 남은 통치 기간 동안 이웃 국가들과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하였고, 1320년 동로마 제국에서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와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간의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벌어지자 안드로니코스 3세를 지원하여 1320년과 1321년 두 차례에 걸쳐 트라키아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했다. 1322년경 평안하게 사망하였고, 아들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가 새 차르에 옹립되었다.
2.10. 1322 ~ 1330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 미하일 아센 3세, 이반 스테판: 확장 정책의 추진과 좌절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는 1322년 즉위 직후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한창인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가기로 마음먹고, 그해 7월 플로브디프 요새를 공략한 뒤 2,000명의 경무장 보병과 1,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불가리아 수비대를 두었다. 그해 8월, 에디르네 요새를 공략하였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의 반격으로 패배하여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1322년 9월, 안드로니코스 3세는 트라키아 북부의 불가리아 영역에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한 후 귀환하였다. 게오르기 테르테르 2세는 1323년 봄 돌연 사망했는데, 남성 후계자가 없었기에 몇달간 타르노보에서 왕좌를 놓고 경쟁이 벌어진 끝에 비딘의 데스포티스 미하일 시슈만이 미하일 아센 3세로 개명하고 새 차르가 되었다.미하일 아센 3세는 비딘에서 데스포티스로 집권하고 있을 때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의 누이인 안나 네다와 결혼했으며, 세르비아에서 내전이 벌어졌을 때 한 쪽을 지원하기도 했다. 1323년 차르가 된 후 자신에게 반기를 든 스레드나 고라 산맥의 데스포티스 보이실과 이를 지원하는 동로마 제국과 대적했다. 보이실은 크란을 공략하여 코프시스와 4개의 다른 요새를 정복했다. 또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얌볼, 라르데아, 크테니아, 루소카스토르, 안키알루스, 소조폴, 아가토폴 등지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안드로니코스 3세가 공략하지 못한 플로브디프를 제외한 트라키아의 모든 영토를 빼앗겼다. 미하일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플로브디프가 동로마군의 공세를 견디는 사이 상실한 불가리아 북동부를 탈환했다. 이후 불가리아군이 플로브디프로 접근하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포위를 풀고 철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플로브디프 수비대 사령관 이반 루시나가 전투가 끝났다고 여기고 주군에게 달려간 사이, 동로마군 별동대가 재차 쳐들어가서 별다른 전투 없이 플로브디프를 점령했다.
미하일은 뒤이어 보이실과 1년간 전쟁을 벌였고, 1324년 크란에서 축출했다. 같은 해 트라키아를 약탈하고 있던 킵차크 칸국의 통치자 우즈베크 칸의 도움을 받아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가 비라와 트라노폴에 당도했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와 갈등을 벌이고 있던 안드로니코스 2세와 손을 잡기로 하고, 안나 네다를 수도원에 추방한 뒤 안드로니코스 3세의 누이이자 전 차르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의 미망인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했다. 또한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문장인 날개를 펼친 쌍두 독수리를 채택하였으며, 베나르를 비딘의 데스포티스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지만, 세르비아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 역시 평화 협약을 받아들였고, 양국의 국경선은 플로브디프-체르노멘-소조폴로 정해졌다.
1326년경 안드로니코스 2세와 안드로니코스 3세간의 불화가 깊어졌다. 안드로니코스 2세가 세르비아 왕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의 도움을 받자, 그는 안드로니코스 3세와 연합하기로 하였다. 1327년 5월 13일, 체르노멘 요새 근처에서 미하일과 안드로니코스 3세가 만나 안드로니코스 2세와 세르비아에 대한 공동 군사 행동을 규정하는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이리하여 재개된 내전에서, 안드로니코스 2세의 위세는 크게 꺾였고, 1328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주변 일대만 통치했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에게 버림받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미하일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하일은 동로마 제국의 내전이 지속되길 바랬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는 이반 루시나가 이끄는 기병 3천 명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하여 안드로니코스 2세를 돕게 하였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즉각 선발대를 이끌고 불가리아 기병대에게 다가갔다. 그는 불가리아 기병대 지휘관에게 철군 명령을 내리라면서, 불과 1년 전에 차르와 맺은 동맹을 정면으로 위반할 셈이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저 불가리아 기병대를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로 들인다면 불가리아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할 거라고 경고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두려움에 떨며 기병대의 입성을 거부하였고, 결국 이반 루시나는 기병대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얼마 후 안드로니코스 2세는 수도에 입성한 손자에게 폐위되었고, 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종결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전에 맺었던 협의대로 동부 트라키아를 불가리아에 넘기기를 거부하였고, 미하일은 안드로니코스 3세와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킵차크 칸국의 타타르 용병대를 고용한 미하일은 에디르네와 디모티카를 약탈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의 디암볼 요새를 공략하고 파괴했다. 1328년 11월, 미하일은 다시 침략을 개시해 불케론을 정복하였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디모티카 인근에 진을 쳤다. 이후 양군은 한달간 서로 공격하지 않고 서로를 지켜봤다. 두 군주는 체르노멘 협약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주고받다가, 미하일이 불케론을 돌려주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는 데 합의한 뒤 양측 모두 철군하였다. 1329년 5월 평화 협약이 공식적으로 체결된 뒤, 미하일은 세르비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세르비아 왕국은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불가리아 영역 일부를 점령했다.
미하일은 갈수록 강성해지는 세르비아를 지금 손봐주지 않으면 언젠가 불가리아에 화가 되리라 여기고, 안드로니코스 3세와 손을 잡기로 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세르비아가 빼앗아간 마케도니아 북부를 탈환하길 원했고, 미하일은 불가리아의 북서부와 남서부를 탈환하길 원했다. 이리하여 1330년 초여름, 동로마 제국군이 마케도니아 북부를 침공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3세는 세르비아의 영토 깊숙이 진군하지 않았고, 국경 지대의 몇몇 요새를 장악하는 데 만족했다. 그는 불가리아가 행동에 나서기 전에는 위험을 무릅쓸 생각이 없었다. 한편 미하일은 1330년 7월 19일 수도 터르노보에서 출진하여 비딘으로 진격해 타타르와 왈라키아 용병들과 합세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여 세르비아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젬린 마을에 이르렀다.
그러나 1330년 7월 28일에 벌어진 벨버즈드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은 참패했고, 미하일 아센 3세는 살해당했다. 세르비아군은 여세를 몰아 불가리아 잔여 병력이 모인 코냐브스카 산을 향해 진격했지만, 미하일 아센 3세의 동생인 베나르가 병사들을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진입로를 차단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불가리아 보야르들이 라도미르 마을 근처에서 스테판 우로슈 3세와 만나 평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스테판 우로슈 3세의 조카인 이반 스테판이 차기 불가리아 차르로 즉위하게 하겠다고 밝혔고, 니시를 세르비아에 할양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불가리아군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걸 막지 않았다. 이후 보야르들은 약속대로 이반 스테판을 새 차르로 옹립했다.
이반 스테판은 어머니 안나 네다와 공동으로 통치하였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수도원으로 내쫓게 만든 장본인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를 동로마 제국으로 쫓아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를 빌미삼아 불가리아와의 동맹을 끊고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안키알루스, 메셈브리아, 아에토스, 크테니아, 루소카스트로, 디암폴리스 등을 공략했다. 이에 가뜩이나 새 차르를 세르비아의 꼭두각시로 여겼던 보야르들은 분노하였고, 1331년 3월 로베치의 데스포티스 이반 알렉산더르가 정변을 일으켜 이반 스테판과 안나 네다를 추방하였다. 두 사람은 세르비아의 원조를 받길 갈망했지만, 마침 세르비아에서도 정변이 일어나 스테판 우로슈 3세가 죽고 스테판 두샨이 즉위한 터라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자 두브로브니크를 거쳐 나폴리로 피신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2.11. 1331 ~ 1371 이반 알렉산더르: 영광과 쇠락의 40년
이반 알렉산더르는 1331년 3월 이반 스테판을 축출한 뒤 스테판 옹립에 관여했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와 갈등을 벌였다. 하지만 얼마 후 스테판 두샨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스테판 우로시 3세를 몰아내고 새 군주가 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호전되었다. 그는 세르비아와 손을 잡은 뒤 타타르 용병대의 지원을 받으며 이전에 빼앗겼던 트라키아 북동부를 되찾았고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 또한 1332년 부활절에 여동생 엘레나와 스테판 두샨의 결혼을 성사시키면서, 세르비아와 결혼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장남 미하일 아센 4세를 공동 차르로 세워서 후계 계승을 공고히 하였다.하지만 얼마 후 미하일 아센 3세의 형제이며 비딘의 데스포티스인 베나르가 이반 스테판의 복위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더르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모집했지만, 1332년 여름 동로마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가 트라키아로 쳐들어오자, 우선 동로마군부터 막기로 했다. 그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남하하여 루소카스트로에서 동로마군과 마주쳤다. 그는 강화 협상을 하려는 인상을 내비쳐 동로마군을 방심케 한 뒤, 타타르 기병을 앞세워 기습을 가해 적을 루소카스트로 요새로 내몰고 이 지역의 여러 도시를 복종시켰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그의 우위를 인정하고, 딸 마리아와 알렉산더르의 장남 미하일 아센 4세를 약혼시키기로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1339년에 성사되었다. 알렉산더르는 이제 베나르 토벌에 나섰지만, 1336년 또는 1337년이 되어서야 진압할 수 있었다. 1337년 비딘을 공략한 그는 차남 이반 스라치미르를 그곳의 데스포티스로 임명하였고, 프레슬라프를 역시 데스포티스로 선임한 셋째 아들 이반 아센 4세에게 맡겼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가문이 불가리아 전지역을 확고하게 통제하길 바랬다. 그러던 1341년 동로마 제국에서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을 일으킨 요안니스 6세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자,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는 알렉산더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341년 알렉산더르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 영내에 들어갔다. 그의 군대는 마리차 강을 따라 행군하며 약탈하며 요안니스 6세를 압박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6세가 끌어들인 우무르의 투르크군 분견대의 급습을 받고 대패하였고, 알렉산더르는 타르노보로 철수한 뒤 1342년 요안니스 6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요안니스 6세는 테살로니키 포위에 들어갔지만 쉽사리 함락하지 못하자 스테판 두샨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는 사이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의 지지자인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는 디모티카 요새를 포위했다.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는 알렉산더르에게 디모티카 요새 포위전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알렉산더르는 이 요청에 응해 디모티카 요새 성문 앞에 도착했지만, 요새를 자기 것으로 하는 걸 인정하기 전에는 공성전에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던 1343년 요안니스 6세의 구원 요청에 응한 우무르 베의의 투르크군 29,000명이 380척의 배와 함께 접근해오자, 알렉산더르는 타르노보로 철수했다.
1344년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는 플로브디프와 로도피 산맥의 주요 요새 8개를 불가리아로 넘길 테니 요안니스 6세를 공격해달라고 호소했다. 알렉산더르는 이에 응했지만, 우무르가 철수하기 전에는 군대를 파견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로도피 산맥의 산악인 지원 부대의 지도자 보비드 맘칠(Voivode Momchil)은 알렉산더르의 의뢰에 응해 페르페리콘 요새(오늘날 카르즈할리 인근)를 공략하고 불가리아 이콘을 이곳에 설치했다. 이렇듯 불가리아의 확장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요안니스 6세는 1345년 초 오스만 베이국의 아미르 오르한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1345년 7월 7일, 투르크군과 요안니스 6세의 동로마군은 부루그라드 요새 인근에서 맘칠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에 알렉산더르는 확장 정책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1346년, 스테판 두샨은 알바니아,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북서부 등 발칸 반도 서부 일대를 확고히 장악한 뒤 스스로 차르로 즉위하였고, 세르비아 교회를 총대주교구로 격상하였다. 알렉산더르는 불가리아 총대주교 시메온을 대관식에 참석시켜서 지지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 시기, 알렉산더르는 베네치아, 제노바 및 라구사 등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들과 무역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를 통해 경제를 진흥하였다. 그 덕분에 불가리아는 번영을 구가하였고, 문화 역시 '황금기'라 칭할 정도로 융성하였다. 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건축되거나 개조되었고, 콘스탄틴 므나스의 연대기가 중세 불가리아어로 번역되는 등 문학도 번창하였다. 그는 이러한 번영에 힘입어 수도 타르노보를 "제2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자칭했다.
그러나 요안니스 6세가 끌여들인 오스만 투르크군이 1346년과 1347년에 두 차례 트라키아로 쳐들어가서 약탈을 자행했다. 1349년 투르크군이 또다시 쳐들어오자, 알렉산더르의 셋째 아들이자 프레슬라프의 데스포티스인 이반 아센 4세가 막으려 했으나 전사하고 말았다. 투르크군은 1352년과 1354년에 또 다시 트라키아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설상가상으로, 불가리아 각지에 흑사병이 창궐하였고, 1355년경에 알렉산더르의 장남이자 공동 차르였던 미하일 아센 4세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1351년, 요안니스 6세는 자기가 끌여들인 오스만 베이국이 발칸 반도 전역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걸 깨닫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연합 전선을 조직하여 투르크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알렉산더르는 요안니스 6세가 함대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돈을 빌려줬지만, 요안니스 6세를 의심하여 병력을 직접 보내지는 않았다. 1355년 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으로 요안니스 6세가 실각하고 요안니스 5세가 복위하자, 알렉산더르는 딸 케라차를 요안니스 5세의 장남 안드로니코스 4세와 결혼하게 해, 오스만 베이국에 대항한 동맹을 공고히하려 하였다.
그러나 불가리아는 이 시점에서 내부분열의 징조를 보였다. 알렉산더르는 1349년 첫번째 황후인 왈라키아의 테오도라와 이혼하고, 유대인이었다가 정교회로 개종한 뒤 '테오도라'라는 세례명을 받은 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는 이 결혼에서 새롭게 태어난 두 아들인 이반 시슈만과 이반 아센 5세를 1356년과 1359년에 차례로 공동 차르로 임명했다. 그러자 첫번째 황후의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인 이반 스라치미르는 아버지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비딘에서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벌이는 등 노골적으로 반항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더르는 이에 대해 어떠한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통제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365년, 헝가리 왕 러요시 1세가 이반 스라치미르에게 비딘의 종주권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불가리아의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반 스라치미르가 거절하자, 그는 비딘으로 쳐들어가 단숨에 함락하고 이반 스라치미르 일가를 포로로 잡았다. 이후 비딘은 헝가리 왕이 임명한 '반(Ban)'에 의해 통치되었고, 주민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1366년 요안니스 5세가 헝가리로 가서 오스만 베이국의 압박에 대항하고 싶으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퇴짜를 맞고 귀국 길에 올랐다. 그러나 불가리아를 지나가던 중 알렉산더르가 그를 붙잡아 억류했다. 요안니스 5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대신 통치하던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에게 구원을 호소했지만, 안드로니코스 4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사보이 백작 아메오도 6세가 사촌을 구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출진해 불가리아 흑해 연안의 소조폴과 메셈브리아를 점령하고 바르나까지 공격하였다. 압박감을 느낀 알렉산더르는 평화 협상에 응했고, 요안니스 5세는 18만 플로린을 몸값으로 지불하는 대가로 풀려났다. 사보이 백작은 메셈브리아와 소조폴을 동로마 제국에 넘기게 하였다. 알렉산더르는 받아낸 돈을 봉신인 도브루자의 도브로티차와 왈라키아의 블라디슬라브 1세에게 줘서 비딘 탈환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1369년 헝가리아군을 격파하고 비딘을 탈환하였으며, 이반 스라치미르를 비딘의 데스포티스로 재선임했다.
그러나 오스만 베이국의 공세는 갈수록 심화되었다. 1363년 또는 1369년, 베이 무라트 1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정복하고 발칸 반도내 오스만 영토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뒤이어 불가리아의 도시인 플로브디프와 스타라 자고라를 공략하였다. 그는 오스만 베이국의 압박에 대항해 세르비아와 연합하고자 하였으나, 1371년 2월 13일 사망했다. 사후 두번째 황후 테오도라에게서 낳은 첫째 아들 이반 시슈만이 불가리아 수도 타르노보에서 차르로 즉위했지만, 비딘의 데스포티스 이반 스라치미르가 이에 반발하여 역시 차르를 칭했다. 여기에 오랫동안 세력을 확장했던 도브루자의 데스포티스 도브로티차 역시 이반 시슈만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독립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3개로 분열되었고, 이로 인해 오스만 베이국의 공세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2.12. 1371 ~ 1396 이반 시슈만, 이반 스라치미르: 제국의 사실상 멸망
1349년 이반 알렉산더르가 첫번째 부인이던 왈라키아의 테오도라 황후를 수도원으로 보내고, 유대인이었다가 정교회로 개종한 테오도라라는 여인을 두번째 황후로 맞이했다. 그 후 두번째 아내 테오도라가 낳은 아들 이반 시슈만을 후계자로 삼자, 전 황후의 아들이었던 이반 스라치미르(ИванСрацимир, 재위 : 1356~1396)[7]가 반발하여 비딘(Видин)에서 독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게다가 이반 알렉산더르의 뒤를 이어 정통 황제로 즉위한 이반 시슈만((Иван Шишман 재위 1371 - 1395)은 즉위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데다 유능한 인물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강력한 지방 귀족 도브로티차가 '도브루자 공국'이라는 독립국을 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오스만 술탄국의 침공을 제대로 방어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를 자칭하고 있는[8] 형 이반 스라치미르는 이반 시슈만을 돕기는커녕 그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다반사였고, 결국 삼분된 불가리아 제국은 하나씩 하나씩 오스만 술탄국에게 정복당했다.
불가리아 제국의 수도 터르노보는 1393년에 함락되었고, 이반 시슈만이 오스만군도 피할 겸 헝가리의 지원도 요청할 겸 머물고 있던 니코폴리스는 1395년에 함락되었다.
2.13. 1397 ~ 1422 콘스탄틴 아센 2세: 제국의 마지막 재기 시도와 멸망
1396년,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불가리아 제국의 영토인 비딘 전제군주국 마저도 수도가 함락 되어 콘스탄틴 아센 2세와 이반 시슈만의 아들 프루친은 헝가리로 망명했지만, 비딘 전제군주국은 콘스탄틴 2세가 죽기전까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콘스탄틴 아센 2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02년 오스만 술탄국이 앙카라 전투 패전 후 내란에 휩싸이자, 두 사람은 1408년 헝가리, 왈라키아 등의 도움에 힘입어 불가리아 북부에서 반란을 유도했고, 프루친은 군대 지휘권을 맡았다. 반란은 1413년까지 이어지며 한때 불가리아의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무사 술탄의 투르크군에게 진압당했다. 콘스탄틴 아센 2세는 1422년 헝가리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하였고, 이후 비딘 전제군주국까지 완전히 오스만에 복속되며 제국은 완전히 와해된다. 프루친은 오스만과 전쟁을 벌이는 서방 군대에 지속적으로 가담하여 불가리아의 회복을 꾀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1460년에 사망했다.3. 사회
13세기와 14세기 사이에 번영한 불가리아 제2제국에선 수많은 신도시들이 생겨났다. 도시들은 대부분 침략하기 어려운 위치에 지어졌었으며, 귀족들은 주로 도시 내부에, 그외 시민들은 대부분 도시 외곽에서 살았다.또한 13세기부터 작센족들이 광산과 광석이 풍부한 불가리아 제국으로 이주하는 일이 많아졌다.
4. 경제
불가리아 제2제국의 경제는 제1제국 시절처럼 농업에 기반을 두었으나 동로마 제국의 지배의 영향 및 제2제국 성립 과정에서 약화된 동로마 영토 상당수를 병합한 영향으로, 제1제국 시기보다 상공업 또한 훨씬 발달한 상태였다. 모이시아와 도브루자, 자고레 지역은 곡식들이 풍부하고 고품질의 밀이 생산되는 유명한 곡창지대였으며 제국 각지에서 고품질 와인이 생산되었다. 또한 제국에 숲과 초원이 많아 가축을 주로 사육하고 임업을 행했으며, 특히 꿀의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던 자고레 지역에서는 집약적으로 양봉을 하여 꿀과 왁스를 생산한 후 높은 가격으로 이웃 국가로 수출하였다.당시 불가리아의 도시들은 빵, 치즈, 버터 및 와인 같은 식품들 외에도 비단 생산과 목공품, 금속 제품 생산으로도 유명했다. 도시 지역에서는 은화, 동전 등 화폐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불가리아 제2제국 황제들이 자체적인 화폐 주조권을 인정받고 콘스탄틴 아센 1세를 비롯한 불가리아 제2제국 황제들이 통화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하지만 13세기 후반기 들어서는 이바일로의 난이나 몽골 제국의 지속적인 침략에 의한 영토의 혼란으로 인해 불가리아에서 주조되는 화폐들의 품질과 신용도가 크게 떨어졌다. 이후 1300년제국이 안정화 되면서 다시 품질이 올라갔으나, 1330년대부터 다시 급격히 하락해 대신 다른 국가 화폐들이 불가리아 제국에서 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해외 화폐 중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통화 가치가 안정적인 베네치아 공화국 및 제노바 공화국 화폐였다 한다.
5.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color=#fff><colbgcolor=#D01C1F> 상징 | 국가 |
역사 | 역사 전반 · 슬라브족의 이동 · 불가리아 제국(불가리아 제1제국 · 불가리아 제2제국) · 불가리아 공국 · 불가리아 왕국 ·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 |
문화 | 불가리아 요리 · 불가리아어 · 불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키릴 문자 · 불가리아 정교회 | |
정치 | 정치 전반 · 대통령 · 부통령 · 총리 · 국민의회(선거) · 내각 · 행정구역(틀) | |
경제 | 경제 전반 · 불가리아 레프 | |
외교 | 외교 전반 · 유럽연합 | |
군사 | 모병제 · 불가리아군 · 불가리아 육군 · 불가리아 해군 · 불가리아 공군 · 바르샤바 조약기구 · 북대서양 조약 기구 | |
사회 | 불가리아 마피아 | |
민족 | 슬라브 · 불가리아인(불가리아계 우크라이나인 · 불가리아계 러시아인 · 불가리아계 미국인) |
[1] 불가리아 제국의 마지막 영토인 비딘 전제군주국의 수도가 점령당한 후에도 비딘 전제군주국 자체는 살아남아 콘스탄틴 아센 2세의 통치를 받은걸로 추정되고, 불가리아 제국의 재기를 위해 여러번 시도했기에 콘스탄틴 2세가 죽은 1422년을 멸망으로 보기도 한다.[2] 불가리아, 알바니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그리스, 북마케도니아, 터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3] 현대 루마니아인의 원류[4] 현재의 벨리코 터르노보(Велико Търново).[5] 로마인 학살자라는 별명과는 달리, 그의 이름인 칼로얀은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의 별명인 칼로얀니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6] '스밀레츠의 부인'이란 뜻이다.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7] 그는 왈라키아 공국의 창시자, 바사라브 1세의 손자이기도 하다. 즉, 이반 알렉산더르는 장인의 힘을 빌려 국가를 통일했으면서 자신의 아내를 배신한 것.[8] 아버지인 이반 알렉산더르가 죽을 때까지는 왕을 칭하며 얌전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이복동생이 즉위하자 황제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