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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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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 지리적으로는 국가의 일부 지역인 동트라키아만 남유럽에 속하나 유럽 평의회 회원국이며, 유럽연합 가입준비국으로 국가 전체를 남유럽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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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행정부3. 총리4. 시메온 2세5. 의회6. 선거 제도7. 불가리아 야당 대표 가스총 테러 미수 사건8. 2020년대의 정세

1. 개요

불가리아의 정치 정보
부패인식지수 45점 2023년, 세계 67위[1]
언론자유지수 65.32점 2024년, 세계 59위[2]
민주주의지수 6.41점 2023년, 세계 62위

불가리아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이스라엘, 싱가포르, 인도, 독일, 이라크, 이탈리아, 그리스 등 다른 의원내각제 공화국 국가와 마찬가지로 권한이 별로 없으며 정부수반총리가 국정의 권한을 쥐고 있다.

과거 공산권에 속해있던 나라답게 불가리아 사회당(Българска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 партия) 등 옛 집권 공산당의 후신 좌파 정당들도 활동하고 있으며,[3] 구 공산당 정권 시대를 추종하는 일부 원외/원내 정치인들이 민주화 이후에 폐지된 공산당 정권 수립일을 국경일로 다시 복원, 부활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다만 불가리아 정부에서는 공산당 정권 수립일을 국경일로 부활시켜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을 헛소리 취급하며 과거 공산당 집권 시기에 존재했던 공산당 정권 수립일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 내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으며, # 2021년 6월에 미국이 단일 역대 최대 규모로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2. 행정부

2.1. 대통령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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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다. 또한 유럽연합 국가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부통령 직위가 존재한다.

3.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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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시메온 2세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메온 2세(1937 ~)는 파란만장한 이력으로 유명하다. 그는 1946년 공산주의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스페인에서 망명생활을 했다가 불가리아가 민주화가 되고 나서야 귀국하였고, 2001년에는 정치를 시작하며 '시메온 2세 국민운동연합[4]' 이라는 정당을 조직,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후 4년 간 총리를 지내고 '시메온 2세 국민운동연합'의 당수를 맡고 있다가 물러났다. 2001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2005년 선거에서 지지율이 절반으로 떨어져서 여당 자리를 내주었고 2009년 선거에서는 참패하여 지금은 의석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이로써 왕위에서 쫓겨났다 선거에서 승리해 권좌에 복귀하고 다시 선거로 물러나는 진기록을 세웠다.[5]

5. 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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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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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브체프 내각
(2024 ~ 현재)
연립여당
'''GERB–SDS
69석
'''
'''유럽 발전을 위한 불가리아 시민
67석
'''
'''민주세력동맹
2석
'''
'''PP–DB
37석
'''
'''우리는 변화를 계속한다
22석
'''
'''민주불가리아
8석
'''
야당
'''BSP – 연합좌파
20석
'''
'''불가리아 사회당
20석
'''
'''에코글라스노스트
0석
'''
'''"트라키아" 정치 클럽
0석
'''
교섭단체 없음 '''부흥
37석
'''
'''권리자유운동
30석
'''
'''이런 국민도 있다
18석
'''
'''무소속
0석
'''
재적
240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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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국민의회는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다.

6. 선거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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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은 선거구 내 4 ~ 16석인 31개의 선거구에서 폐쇄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하였다. 봉쇄조항은 4%이다. 총선 이후 정당 득표순으로 3위까지 차례로 내각 구성권이 주어진다. 최다 득표 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데 실패하면 두 번째로 표를 많이 얻은 당에 기회가 주어지며, 세 번째로 표가 많은 당까지 조각에 성공하지 못하면 의회가 해산되고 총선이 다시 실시된다.

7. 불가리아 야당 대표 가스총 테러 미수 사건



2013년에는 불가리아 내 친튀르키예 세력의 지도자인 아흐메트 도안(Ahmed Doğan, 불가리아어로 아흐메트 도간·Ахмед Доган)의 테러 미수 사건이 터졌는데, 보면 알겠지만 TV 중계 중인 연설회장에 난입해서 호신용 가스총을 들이대다가 제압되었다. 최초 업로드는 코믹·유머 카테고리로 등록되어 있다가 짤렸다.

8. 2020년대의 정세

보이코 보리소프 내각의 부패 문제로 2020년 불가리아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보리소프에 대한 국민의회에 내각불신임결의가 올라가기도 했지만 내각불신임결의는 부결되었다. 그러나 보리소프와 루멘 라데프 불가리아 대통령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이 때문에 2020년 발생한 시위에 대해 라데프가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2021년 4월에 총선이 실시되었고 보리소프와 유럽 발전을 위한 불가리아 시민은 과반을 상실하였다. 총선을 치른 뒤 내각 구성을 위한 절차에 돌입했으나 정부 구성에 실패하여 의회가 해산되었고 7월에 조기총선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조기총선 이후에도 내각 구성에 실패하여 의회가 해산되고 11월에 다시 조기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11월에 실시된 조기총선에서는 우리는 변화를 계속한다가 67석을 얻었고 대표인 키릴 페트코프가 12월에 총리로 취임하여 정부를 구성했다. 페트코프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수군사작전으로 옹호했던 스테판 야네프를 해임했다. 또한 러시아산 가스를 루블로 결제하는 것을 거부하여 가즈프롬이 불가리아에 대한 가스 공급을 중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마케도니아유럽연합 가입을 놓고 불가리아 내부에서 논쟁이 일기 시작하면서 연정에 균열이 생겼고, 결국 내각불신임결의로 페트코프는 총리에서 퇴진했으며, 의회가 해산되고 10월에 조기총선이 실시되었으나 다시 정부구성에 실패하여 4월로 조기총선이 실시되었으나 정치 위기의 해결은 요원한 상황이었다. 이후 니콜라이 덴코프가 9개월 동안 총리로 재임하고 마리야 가브리엘이 부총리가 되고 9개월 뒤 총리로 취임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덴코프는 6월 6일 총리 인준을 받았다.

2024년 3월 5일, 기존의 정부 구성 협상에 따라 니콜라이 덴코프가 사임했으나 추후의 정부 구성 협상이 난항을 겪었고 결국 6월에 다시 조기총선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선거 이후 의장을 선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각 구성 협상이 지지부진해서 사상 초유의 6차 조기총선이 10월에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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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이는 세르비아, 헝가리, 알바니아, 체코, 폴란드 등 이전 공산당이 집권했던 다른 동유럽의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공산정권 몰락 이후 치러진 총선, 지선에서 구 공산당 계열 후신 정당들이 약진했을때 이거 공산당 독재정치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는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당시 동유럽권 나라들에서 돌아다녔을 정도였다.[4] 키릴 약자로 НДСВ, 영어식 표기로는 NMSII(National Movement Simeon II)을 창당했다. 이 당은 2007년 이름을 '안정과 진보를 위한 국민운동연합'(National Movement for Stability and Progress)으로 변경했다.[5] 사실 그가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유년기에 왕위에 있었던 것이 한몫 했다. 그가 부왕인 보리스 3세의 급사로 인해 왕이 된 것이 1943년, 6세 때의 일이다. 공산혁명으로 인해 강제 퇴위할 때의 나이도 1946년의 일이었다. 당연히 어린 나이에 잠깐 왕위에 앉아있기만 하다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니 동정론이 어느 정도 있을 수밖에는 없는 편이다.